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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2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19 ✦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무엘하 3장 22~39절)
[들어가는 말]
지난 2003년 12월 남극에 있는 한국 과학자들이 바다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가다가 배가 뒤집혀서 8명이 실종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실종된 대원 중 아주 위기상황에 대한 경험이 많은 부대장이 있어서 사람들은 실종된 과학자들이 생존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과연 사람들의 기대대로 그 부대장이 사람들을 얼음 동굴 속으로 피하게 하여 한 명 외에는 모두 구조되어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 삶에는 예상치 못한 문제가 갑자기 발생하는 적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는 문제가 계속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발생해도 그것을 헤쳐 나가며 해결할 수 있도록 미리 대비하고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삶에 문제가 닥쳐올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문제, 저런 문제, 큰 문제, 작은 문제 등 얼마나 많습니까? 개인적으로도 있고, 가정에 오는 문제도 있고, 교회에도 있고, 사회적으로도 있고, 또 전 세계적으로도 있습니다. 이런 코로나 같은 상황이 일어날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문제가 닥쳐올 때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지혜롭게 또 신속하게 행동하여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온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나 할 게 아니라, 미리 어느 정도 예상하고 대비하며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번에 인류 역사상 백신이 이렇게 빨리 개발된 적이 없습니다. 몇 달 만에 개발되지 않았습니까? 그 전부터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때가 되어서 하려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왕이 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이제 대세가 다윗 쪽으로 기울게 되었습니다. 이스보셋과 아브넬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원래 사울의 군대 장관이던 이브넬은 다윗에 대항하여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웠는데, 그와의 관계가 틀어지니까 이스라엘이 분열되게 한 장본인인 아브넬이 이제는 오히려 나라를 다윗에게 넘겨주고 자기는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하나 차지하려고 시도합니다.
이처럼 일이 잘 진행되어 가고 있을 때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터집니다. 다윗의 군대 장관인 요압이 동생에 대한 원한과 개인적인 야심 때문에 아브넬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 사건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을 의심하게 만들어서 이스라엘이 다윗에게로 돌아와 통일 왕국을 이루는 것을 무산시킬 수도 있는 위기였습니다. 이렇게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다윗이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오늘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아브넬의 죽음 (22~30절)
1) 요압의 분노와 살인 (22-27)
아브넬에 의해 자신의 동생을 잃은 요압은 아브넬이 다윗을 찾아왔을 때 부하들과 함께 원정을 나가서 적과 싸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치고 크게 노략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니 아브넬은 이미 보냄을 받아 평안히 갔고 다윗과 함께 헤브론에 있지 아니한 때라. 요압 및 요압과 함께 한 모든 군사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말하여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이 왕에게 왔더니 왕이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갔나이다 하니” (22-23절)
요압이 모든 군인과 함께 싸움에 이기고 헤브론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아브넬이 그곳에 왔다가 아무 일도 없이 평안히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며 다윗에게 항의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다윗이 아브넬에 대한 요압의 원한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 미리 요압이 그곳에 없도록 싸우러 보냈다고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아브넬은 요압이 없을 때 왔다 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여기서 ‘어떤 사람’(23)이 그렇게 된 것을 알려주었다고 되어 있는데 그의 이름도 안 나옵니다. 그런데 이 ‘어떤 사람’이 왜 그것을 요압에게 알려주었겠습니까? 자기도 분하다는 겁니다. 요압과 같은 마음을 품은 요압의 부하들 또는 측근들이 그 안에 많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사람의 본성은 똑같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비슷합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문화가 달라서 그렇지, 돌아가는 것을 보면 굉장히 비슷합니다. 요압은 분명히 다윗의 부하 아닙니까? 그는 다윗의 군대 장관이고, 요압도 자기 부하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압의 부하들도 다 다윗의 부하들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도 파벌이 갈라져 있고 측근들이 나뉘어 있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다 같이 하나 된 것 같아도 그 안에서 마음들이 조금씩 나뉘어 있는 겁니다. 각자 따르는 리더가 다른 겁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이르되 어찌 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늘 어찌하여 그를 보내 잘 가게 하셨나이까. 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그가 왕이 출입하는 것을 알고 왕이 하시는 모든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 하고” (24-25절)
아브넬이 다윗과 언약을 맺은 뒤에 평안히 갔다는 사실을 들은 요압이 불평한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아브넬은 요압의 군사령관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보면 계속 아사헬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나오는데, 자기 동생을 죽인 그 원한도 크지만 사실은 다른 게 있는 겁니다. 아브넬이 오면 어떻게 됩니까? 아브넬은 자기보다 훨씬 경험이 많고 나이도 더 많은,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대장군입니다. 사울 때 군대 장관이었으니까 얼마나 엄청난 장군입니까? 요압은 아브넬에 비하면 한참 후배입니다.
그런데 아브넬이 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자기 자리가 위협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게 더 중요했습니다. 당연히 자기 동생을 죽인 것에 대한 원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리를 빼앗기는 것이 더 큰 겁니다.
여러분, 내가 걸린 감기가 다른 사람이 걸린 암보다 더 아픈 겁니다. 딱 그 마음입니다. 요압은 동생이 죽어서 원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난 일입니다. 지금 아브넬이 와서 자기 자리를 빼앗는 것이 굉장한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이게 가장 중요한 겁니다.
무엇보다 이 말이 뭐냐 하면, 요압을 일부러 내보냈든 마침 그때 나가 있는데 왔든 상관없이, 다윗과 아브넬이 둘이서만 조약을 맺었다는 것은 나라의 굉장히 중요한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요압을 배제시켰다는 겁니다. 요즘도 정치인들이 회의를 할 때 누가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자기가 빠졌다고 계속 비난하거나, 자기를 넣어주면 굉장히 칭찬하고 높여줍니다.
그런데 요압이 거기서 빠졌다는 것은 자기가 중요 인물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요압은 아브넬을 모함하고 다윗을 비난하면서, 아브넬이 온 것이 다윗을 속이고 그의 진영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고, 정탐하러 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한 다윗의 반응이 본문에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다윗이 39절에서 말하는 내용으로 미뤄볼 때, 다윗은 요압을 제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 왕권을 완전히 확립하지 못한 다윗은 비록 왕이었지만 아직 유다 지파만의 왕입니다. 그리고 자기 군대의 실질적인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요압입니다. 조금 전 ‘어떤 사람’이 이것에 대해 가서 다 보고할 정도로 요압의 측근들이 다 포진되어 있습니다. 다윗 주변에도 요압의 측근들이 있습니다.
원래는 다 같은 편이었고 고생도 같이 했는데, 이제 권력을 잡고 보니 나뉘는 겁니다. 보십시오. 고생할 때는 하나가 되어서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공하고 권력을 잡으면 계파가 나뉩니다. 그런 현상이 많이 벌어집니다. 이때도 그런 게 다 있었습니다. 이때 요압에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는데, 요압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이에 요압이 다윗에게서 나와 전령들을 보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 가에서 그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그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 (26-27절)
요압은 즉시 다윗 몰래 전령들을 보내서 마치 다윗이 아브넬을 도로 부르는 것처럼 거짓말을 해서 아브넬을 헤브론으로 돌아오게 만듭니다. 요압의 전령들이 아브넬을 만난 곳은 시라 우물가라고 되어 있는데, 이곳은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약 4킬로미터(2.5마일)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먼 곳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브넬이 다윗을 만나고 떠난 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나쁜 일이 일어날 때 보면 뭔가가 다 맞아떨어집니다. 좋은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대하지 못하고 예상을 뛰어넘으며 상상조차 못했던 좋은 일이 일어날 때 보면, 시기와 사람 등이 척척 맞아떨어지면서 이루어집니다. 나쁜 일도 비슷합니다. 다리가 무너지거나 빌딩이 무너지는 일도 원래 그런 상태였는데 하필 그날 그 시간이 모든 게 맞아떨어지면서 그렇게 된 겁니다.
이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넬이 하필 그 시간에 여기 있고 요압이 쫓아갈 수 있는 거리였던 점 등이 척척 맞아떨어집니다. 그리고 아브넬이 참 이상한 게, 그렇게 닳고 닳은 정치적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왜 요압이 보낸 전령들을 의심하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참 이상합니다.
이렇게 나쁜 일이 일어나려면 이런 것들이 다 맞아떨어집니다. 평소 같으면 극히 경계하며 쉽게 넘어갈 사람이 아닌데 이날은 너무도 쉽게 헤브론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아브넬이 그날 다윗과 만나고 돌아가면서 술에 취해 있었던지, 뭔가 경계를 풀 만한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맞아떨어지면서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고, 요압이 몰래 안으로 데려다 배를 찔러 죽이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지난번에도 보았지만, 아브넬이 요압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것은 고의적인 살인이 아니라 전쟁 중에 자꾸 쫓아오니까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창을 죽 뻗어서 그것도 창 뒤 끝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아사헬이 워낙 빨리 쫓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압은 은밀한 이야기를 하는 척하면서 끌고 들어가 아브넬을 죽이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악한 일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살인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에게 충성하던 신하 요압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시편들을 보십시오. 그런데 그의 최측근인 요압은 전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믿고 잘해도, 자녀가 자동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요압이 이토록 신앙이 없는 사람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요압은 다윗에게 충성하는 신하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왕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봅니다.
이전 시대에 모세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나와서 가나안 땅으로 정복 전쟁을 하여 들어간 것은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 이후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그 후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사들이 이끄는 사사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 사사시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25)
이것이 사사기의 핵심 메시지이고 결론입니다. 이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사사기 가장 마지막 장의 가장 마지막 구절이 이것입니다.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왜? “왕이 없으므로.” 왕이 없어서 각자 마음대로 살았던 것이 사사시대의 특징입니다.
물론 그때 인간 왕은 없고 사사들이 다스렸지만, 사실 이스라엘의 왕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의 왕이신데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각자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도 있었지만,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즉 자기가 왕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어떻습니까? 실질적으로 인간 왕이 있습니다. 자기의 왕은 다윗입니다. 그런데도 왕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습니다. 계속해서 사무엘하를 읽어보면 요압은 다윗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어떤 때는 시키는 것보다 더 열심히 할 때도 있습니다. 또 다윗이 조금 잘못 갈 때는 다윗을 야단 치기도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모르고 보면 대단한 믿음의 사람인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복종은 자기가 섬기는 왕의 뜻을 충성스럽게 받드느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 왕이 시킨 것이 자기 마음에 맞으니까 그렇게 잘 복종한 것뿐입니다. 왕의 명령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듣지 않을 뿐 아니라 무시해버리고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막 나갑니다. 나중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도 다윗이 그가 비록 반역자이지만 압살롬에게 잘 대해달라고 했는데, 즉 생포해오라는 말이었는데, 그냥 죽여 버렸습니다. 전혀 듣지 않고 무시해 버립니다.
요압은 철저히 자기가 자기 삶의 왕인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충성하는 것 같고, 심지어 믿음의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요압은 성경을 읽으면서 볼 때 성경에서 가장 독특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이해할 수가 없고,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아주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은데 정말 악한 사람이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 요압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나 자신이 요압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기는 믿는 것 같은데 사실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 평소에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 같은데 결국은 자기 뜻이 더 중요한 사람, 그런 사람이 요압입니다. 그러니까 요압의 가장 큰 특징은 요즘 잘 쓰는 표현대로 ‘선택적 순종’입니다. 선택적 순종이 요압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코로나 상황에도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평소에는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나름대로 말씀을 읽거나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중요한 다른 일이 없을 때 그렇게 하는 겁니다. 뭔가 자기에게 중요한 일이 생기거나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럴 때는 하지 않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말씀에 따라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에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지 아닌지가 결정의 기준이 됩니다. 철저히 ‘선택적 순종’을 하며 살아가는 요압 같은 모습이 나에게는 없는지, 아니 있기 때문에 자신을 매일매일 돌아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교회 내에서 열심히 활동한다고 모두가 다 주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의 동기에서 하지 않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혹시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또 이렇게 예배한다고 하면서, 참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가 원할 때는 하고 원하지 않을 때는 안 하는 게 아닌지, 실제로 하나님이 왕과 주인이 아니라 내가 왕과 주인이 아닌지, 이것을 늘 점검하며 살 필요가 있습니다.
한 번 잘됐다고 계속 잘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 순간 노력하며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겉으로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혼자 하는 생각들과 삶의 순간들을 주님의 뜻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연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있을 때 내 마음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늘 자신을 정결하게 하며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삶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크리스천은 결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조금 전 부른 찬양곡에서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시네, 연약함 그대로 사랑하시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잘할 때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잘하든 못하든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너무나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주님은 ‘그 모습 그대로 와라.’ 그러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냥 가지는 말라.’라고 하십니다. 바뀌어서 가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냥 왔다 그냥 똑같이 가면 안 되고, 주님 앞에 나왔으면 변화되어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주 말씀 한 가지를 붙들고 ‘제가 이렇게 살겠습니다.’라고 결단하고 가자는 것입니다.
2) 요압을 향한 저주 (28-30)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28절)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은 다윗은 그 사건이 하나님 앞에서 지니는 의미가 뭔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라고 합니다. 다윗은 평소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 사건이 발생하자 하나님과의 관계에 먼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건 내가 한 게 아니야. 나는 무죄야. 결백해.’라고 사람들 앞에서 주장할 텐데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죄하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요즘 끔찍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좋은 일도 있지만 나쁜 소식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 것도 그렇고 특별히 내 삶 주변에서 어떤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럴 때 ‘야, 이거 어떡하지?’라거나 ‘내가 한 게 아니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이 문제가, 이 사건이 하나님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29-30절)
아브넬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어땠겠습니까? 굉장히 놀랐을 것이 분명합니다. 평화 조약을 맺으러 온 아브넬 장군의 죽음으로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데에 갑작스러운 문제가 발생한 겁니다.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무죄하다고 선포했습니다. 동시에 요압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개인적으로 아브넬을 살인한 것이기 때문에 요압과 그의 집에 모든 율법의 저주들이 임할 것임을 선포합니다.
이런 저주들이 율법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보십시오. 아주 끔찍합니다. 이것은 그 사건이 다윗 자신과는 아무 관련 없이 전적으로 요압의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것과, 그와 그의 집이 아브넬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전쟁하다 아브넬이 죽었다면 전쟁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이것은 분명히 몰래 불러다 죽였으니 명백한 살인입니다.
이 저주 속의 ‘백탁병’이라는 것은 잘 모르는 병인데, 피부에서 피와 고름이 계속 나오는 병을 말합니다. 그래서 나병과 연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병은 굉장히 심한 병이고 백탁병도 피와 고름이 계속 나오는 유출병입니다. 아브넬의 피를 흘린 사람이기 때문에 피가 계속 나오는 병에 걸리라는 것입니다. 또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는 다리가 불구가 되어 못 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처럼 요압을 심하게 저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처단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정치적인 상황으로 보아 요압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또 요압의 사람들이 죽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이용했습니다. 자기가 잘못했지만, 너무 당당하게 다윗에게 자기 사람들을 통해 압력을 가하는 겁니다. ‘나를 없애봐, 어떻게 되나.’라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다윗도 요압이 없으면 군사력이 약해진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요압의 사람들이 돌아설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더더욱 힘들어합니다. 나중에 다윗이 요압을 때려죽일 힘이 없어서 괴롭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요압을 처단하고 싶어도 처단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다윗이 비겁한 것 같고 ‘믿음의 사람이 왜 이런가?’ 하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그의 상황을 살펴보면 꼭 그럴 일이 아닙니다. 다윗은 지금 사명이 뭡니까? 어떻게 해서는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사무엘을 통해 기름 부어 세우셨습니다. 이미 십대 소년 때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사명입니다. 지금은 유다 지파만의 왕이지만, 모든 이스라엘 열두 지파 전체의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요압 같은 사람을 처리해버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그 사명을 이루는 데 큰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 곤란한 입장입니다. 이럴 때가 많습니다. 특히 리더에게는 이런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한 요압은 결국 다윗이 죽을 때까지 곁에 머물면서 돕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왕인 다윗을 적절히 이용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다가, 마침내 반역에 가담함으로 다윗을 이어 왕이 된 솔로몬에게 처형당하게 됩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일은 이제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요압이 아브넬을 죽임으로 평화 조약이 물거품이 될 상황에 처했습니다. 요압의 개인적인 복수와 야망 때문에 다윗의 왕권이 세워지는 데 큰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큰 잘못을 저지른 요압에게 개인적인 분풀이를 하거나 그와 싸우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를 처리해주시기를 기도하고 선포했습니다. 그것은 요압의 행위가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볼 때 저주받을 죄악이었기 때문이고, 다윗은 낙심하지 않으며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해야 할 적절한 행동을 차분히 해나간 것입니다. 너무나 괴로운 상황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이 상황을 해결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도 잘 나가다가 갑자기 일이 터질 수 있는데, 큰일일 수도 있고 작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뭔가 위협과 걱정이 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면 반드시 성취할 길도 열어주신다는 것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가서 그 사람과 맞붙어 해결하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사실 너무 미울 수 있습니다. ‘잘되고 있는데 저 사람이 왜 저러나?’ 하며 원망의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해결해주시기를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봉쇄된 곳들이 많았는데, 저번 선교사님 말씀처럼 기도를 봉쇄할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2. 다윗의 애도 (31~39절)
1) 아브넬을 위해 애곡하는 다윗 (31-37)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31-32절)
이제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적인 명령을 내려 요압을 비롯한 온 백성에게 아브넬을 위하여 애통하라고 명령합니다. 다윗은 아브넬의 장례를 모든 백성이 참여하는 국가적인 행사로 만들려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윗이 아브넬을 죽였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의심을 잠재우려 한 것입니다. 또 억울하게 죽은 아브넬을 명예롭게 장사지냄으로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그를 따르던 모든 이스라엘 지파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원했던 것입니다.
아브넬의 죽음은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치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잘 보십시오. 성경은 다윗을 ‘왕’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31절에서 “다윗 왕이”라고 하고, 또 32절에서도 “왕이”라고 합니다. 그냥 ‘다윗’이 아니라 ‘다윗 왕’ 또는 ‘왕’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단어들을 선택하는 것은 성경을 쓰신 분들이 아무렇게나 쓴 께 아닙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쓴 것이고,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특히 구약성경이 그렇습니다. 히브리어 원어에는 31-39절에서 다윗을 일곱 번이나 ‘왕’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이 너무나 위기 상황이지만, 이것이 오히려 다윗이 진짜 왕으로 인정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끔찍한 일,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을 통해 오히려 다윗이 왕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다윗은 아브넬의 상여를 뒤따라가 그의 무덤 앞에서 소리를 높여 울기까지 합니다. 다윗의 울음은 악인인 아브넬을 인정하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아브넬이 악인인데 악인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안타까운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한 슬픔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악인이라도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세상을 떠났을 때 ‘아유, 잘 죽었다.’라는 말은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절대 하면 안 되는 말입니다. 잘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 사람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며, 예수님이 그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잘 죽었다’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이르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33-34절)
다윗이 예상치 못하게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한 첫 번째 방법은 아브넬의 장례를 직접 주관하고 큰 슬픔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다윗은 아브넬을 추모하는 애가(슬픈 노래)를 지어서 자기가 아브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의 특기가 뭡니까? 그는 뮤지션이었습니다. 아주 영적인 뮤지션으로 사울도 치유하지 않았습니까? 이때 수금을 가져오라고 해서 가사를 짓고 노래도 지어 부른 겁니다. 그리고 눈물도 흘립니다. 당시 노래는 여론이기도 하고, 음악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아브넬은 사울 때부터 오랫동안 이스라엘 군대의 사령관이었기 때문에 많은 백성이 그의 죽음을 지금 안타까워하는 상황입니다. 그럴 때 다윗이 이런 노래를 지어 부르니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녹습니다. 특히 다윗에 반대해서 저쪽에 가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다 녹아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 아브넬의 죽음이 ‘미련한 자의 죽음’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불의한 자의 죽음 같다는 것입니다. 아브넬은 이스라엘을 다윗에게로 인도하여 넘기려고 한 사람인데,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죽임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한편, 다윗은 이 애가를 통해 아브넬을 죽인 요압을 ‘불의한 자’라고 규정합니다. 34절을 보면, 다윗이 아브넬을 반역자로 생각해서 그의 손을 결박하거나 발에 차꼬를 채우지 않았고, 도리어 즐거운 마음으로 영접한 후에 평안히 돌려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자식’ 즉 악한들의 습격을 받아서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고 노래합니다. 그러니까 요압과 그의 일당을 가리켜 ‘불의한 자식’(악한들)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애가를 다윗이 부르니까 그것을 듣는 온 백성이 다시 아브넬을 슬퍼하며 웁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러한 애가를 지어 불렀을 뿐 아니라 해가 지도록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석양에 뭇 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이르되 만일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모든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 (35절)
다윗은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했던 세 번째 해결책을 사용하는데, 그게 바로 금식입니다. 음식을 먹지 않았다는 겁니다. 다윗은 해가 지기 전까지 금식함으로써 자기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해 깊이 슬퍼하고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당시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며 금식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습이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을 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행동이 가식에서 나온 것으로 보일 수도 있고 고도의 정치적 제스처라고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참된 안타까움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식이었거나 정치적 제스처였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몰랐겠습니까? 석양, 즉 이제 해가 잘 때가 다 되었을 때 사람들은 다윗에게 음식을 권했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요즘도 장례식을 한 후에 같이 식사를 합니다.
이때 다윗은 안 먹겠다고 합니다. 사실은 이것도 ‘좀 드세요.’ 하면서 ‘먹나 안 먹나 보자.’라고 하며 보고 있는 겁니다. 이때 다윗이 ‘그래, 먹어야지’ 하고 먹었다면 ‘야, 이거 정치적인 쇼를 한 거구나.’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오래 전 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지도자가 단식투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단식투쟁을 한 건지 안 한 건지를 사람들이 다 압니다. 뒤로 음식을 가져다 먹었다는 겁니다. 앞에서는 단식투쟁한다고 누워 있는데 뒤로는 음식을 공급하거나 V8 같은 주스를 마셨다는 겁니다. 그게 왜 새어 나옵니까? 공급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먹었다면 전 이스라엘에 안 퍼지겠습니까? 정치적인 목적으로 연기를 하면 당장 그 순간에는 통할 수 있을지 몰라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금방 알게 됩니다.
다윗이 자신의 적이었던 아브넬의 죽음 앞에서 이런 애가를 지어 불렀을 때 사람들은 ‘이거, 쇼 아니야?’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베냐민 지파가 그랬을 것입니다. 누가 봐도 다윗이 자신의 가장 큰 대적인 아브넬을 제거한 것으로 알지 않겠습니까?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36-37절)
그래서 백성은 이때까지 다윗을 아브넬 죽음의 주동자라고 생각하면서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는데, 다윗의 이러한 진정성 있는 행동을 통해 ‘아,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것이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죽였다면 이렇게 할 수가 없고 또 이렇게 할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겠습니까?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마음이 다윗에게로 즐겁고 온전하게 돌아서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신뢰를 얻는 것은 쇼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금방 다 압니다. 진실한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을 통해 가능합니다. 만일 어떤 행동이 가식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금방 압니다. 그러나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는 행동 역시 사람들이 알게 됩니다.
물론 가식으로 하거나 슬슬 거짓말을 할 때 당장은 통할 수 있고, 진심으로 할 때 오히려 당장은 안 알아주거나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반드시 드러납니다. 시간문제입니다. 혹시 당장은 내 진실이 가려지더라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인정과 신뢰를 받고 싶다면 먼저 진정성 있게 자기 마음을 순수하고 깨끗하게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언행의 일치가 중요합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거나 여기서 하는 말과 저기서 하는 말이 다르면, 당장은 통할지 몰라도 얼마 안 가서 다 들통나고 신뢰를 잃게 됩니다.
2) 심판을 의탁함 (38-39)
“왕이 그의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큰 인물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38-39절)
다윗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이 사건을 통해 요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내비칩니다. 그는 아브넬을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큰 인물’, 즉 ‘이스라엘에서 훌륭한 장군’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러한 그를 죽인 요압을 자기가 처벌할 수 없는 것은 아직 자신의 힘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합니까? 그 모든 심판을 강하신 주님께 맡깁니다. 자기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시니까 하나님이 해달라고 맡깁니다.
사실 요압은 다윗의 친척이었습니다. 역대상 2:16에 보면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는 다윗의 누이였고, 스루야의 아들이 아비새와 요압과 아사헬 삼형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요압의 외삼촌이고, 요압은 다윗의 조카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혈육의 정에 이끌리지 않고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요청합니다. 특히 어쩔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맡깁니다.
[나가는 말]
우리는 정말 힘이 약해서, 이 험한 세상을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가기에는 우리의 힘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왜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까지도 평안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까? 그것은 세상이 너무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세상의 어려움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어 있습니다. 평안 없이 염려와 불안 속에 살아가는 주된 원인은, 세상의 어려움보다 더 크신 주님의 은혜를 제대로 맛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되면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더해지기를 먼저 구하면서 하나님을 떠나 자기가 원하는 방향대로 살다 보니까, 인생이 꼬이고 염려와 불안 속에 살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 없이 세상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도 있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거두는 성공에는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염려와 불안입니다. 이 모든 게 무너질까 봐 항상 불안하고 항상 걱정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은 내가 원하는 뜻대로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내 뜻을 먼저 구하면 염려와 불안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먼저 구할 때, 평안과 기쁨 속에서 살 수 있게 되고 인생이 행복해집니다.
그러므로 혹시 삶 속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그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주님을 간절히 찾으며 나아갈 때 그분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어서 우리는 언제나 평안과 기쁨 속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문제가 없어진 것도 아니고 환경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나 자신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외부 환경이 어떻든 상관없이 상황을 뛰어넘는 기쁨과 평안 속에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며 나아감으로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