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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5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16 ✦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된 다윗”
(사무엘하 2장 1~17절)
[들어가는 말]
가끔 보면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중에서 오랜 무명 시절을 지내다 어느 날 갑자기 깜짝 스타로 떠오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실제로 상당한 실력자였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발탁되지 못하다가 어떤 경로를 통하여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발굴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이 꽤 많이 나왔습니다. 오래전에 하다 중단된 가수 발굴 프로그램 ‘슈퍼스타 K’, 요즘 하고 있는 ‘싱어게인 – 무명가수전’ 등을 통해서 묻혀 있던 보석들이 발굴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깜짝 스타들 중 갑자기 나타나서 인기를 끌다가 갑자기 사라진 경우도 많습니다. 실력이 있기는 있는데 준비가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나오다 보니까 얼마 못 간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비슷한 말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잘하는데 사람들이 나를 못 알아본다. 회사들이 나를 못 알아본다.’ 하며 불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빨리 성공하게 하지 않으시는지, 기회를 한 번 주시기만 하면 아주 멋지게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을 텐데 그 기회를 안 주신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자기는 준비가 잘되어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유명해지고 보니까 가진 밑천이 금방 드러나서 더 이상 반짝거리는 게 없어지고 그에 따라 사라지는 일들이 많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가 그랬습니다. 제가 벌써 여기 온지 17년이 넘었는데, 부교역자로 10년 정도 사역하고 특히 이전 교회에서 부목사로 4년 사역한 후 ‘야, 내가 드디어 담임목사로 콜럼버스에 가게 되었구나. 가서 내가 뭔가를 보여주겠다.’ 하고 왔는데, 그 ‘뭔가’가 몇 달 지나니까 다 밑천이 떨어졌습니다.
사실 아무리 준비가 잘된 사람이라도 실제로 일이 맡겨질 때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무명 시절에 정말 철저히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준비한 사람을 하나님이 쓰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되었을 때 이제 하나님께서 도망자 생활을 그치게 하실 때가 되었다고 느꼈지만, 계속해서 사울에게 쫓겨 도망자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삶을 통해 다윗을 대충이 아닌 아주 철저히 준비시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제는 준비가 끝나고 왕이 되는 순간이 왔지만, 다윗 자신을 따르는 세력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추종하는 세력이 나뉘어서 전쟁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우리 생각에는 믿음의 사람이 열정을 가지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일이 금방 이루어지고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그럴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리 쉽게 부흥이 이뤄지지 않고 오랜 시간이 걸릴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일단 우리 자신이 준비되는 데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겸손하게 설득하며 하나 됨을 이루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믿음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동시에, 오래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과 반대 세력까지 포용하고 품으며 하나가 되려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다윗이 바로 그러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1.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되다 (1~7절)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1절)
‘그 후에’, 즉 이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진정되기 시작한 후에 다윗은 중대한 일이 다가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를 쫓아서 죽이려는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이 순간 다윗은 사무엘을 통해 자기가 십대소년이었을 때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왕위에 오르면 되었습니다. 이미 오래전 십대소년 시절 사무엘이 와서 자기에게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웠는데, 그렇다면 ‘나는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다. 이제 나와서 나를 섬겨라.’라고 하면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한 상황일수록 더욱 신중함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렇게 차분한 것이 다윗의 원래 성품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그는 차분한 시인이면서 음악가이면서 또 용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차분했지만 또 다른 때는 불같은 기질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남편이었던 갈멜 사람 나발이 자기에게 도발했을 때 격분하여 죽이려 했었습니다(삼상 25장). 그는 자기 판단에 따라 유다 성읍을 떠났습니다(삼상 27:1).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따라 적국인 블레셋으로 내려갔습니다. 또한 자신의 감정을 따라 아말렉을 침공하고 사람들을 모두 죽였습니다(삼상 27:8).
그러나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러 가지 실패를 경험하게 되었고, 그런 일들로 인하여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이제 다윗은 그렇게 오랜 역경을 지내면서 자신의 지식이나 감정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는 것만이 거룩함과 진리를 향한 길이라는 것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지식은 그냥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체험적 지식입니다. 다윗이 왜 그런 걸 몰랐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지, 내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때로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독단적으로 결정하여 행동한 많은 일들을 통해 좋지 않은 경험을 했고, 그것을 통해 체험적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만이 옳다.’라는 것을 정말 깨닫게 되었습니다. 위기나 기회에 처할수록 감정에 따라 또는 상식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는 것만이 진짜 올바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그가 체험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중요한 일 앞에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어떻게 하십니까? 정말 기도하고 결정하십니까?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A와 B가 있는데 어느 것으로 결정을 해야겠습니까?’ 자기 마음속으로는 A가 좋지만 기도는 해봅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상황이 자꾸 B쪽으로 가니까 자꾸 기도할 때 계속 A가 맞지 않느냐고 강조합니다. 그래도 그건 나은 편입니다. 기도도 안 하고 ‘이게 더 좋아 보인다. 이리로 가는 게 당연하다.’라고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잘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또 일이 잘 풀리려 할 때 ‘야, 정말 내가 제대로 결정을 했구나. 아주 잘했다. 정말 좋다.’라고 하지만, 그럴 때 무엇을 물어보라고 했습니까? ‘과연 그럴까?’ 이것이 정말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좋은 일일지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세상적으로 잘 풀리는 것 같고 일이 잘되는 것 같고 행복한 길이고 성공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실패의 길일 수 있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봐도 이건 실패한 것 같은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것이 성공이라고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감정대로, 지혜대로, 상식대로 일을 급히 처리하면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적 생각으로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급할수록 주님의 뜻을 물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지난 2년 동안 코로나 사태로 교회가 조용하고 사역이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역을 맡아 감당할 때는 이것을 꼭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것을 해야겠습니까?’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확신이 들면 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다가 힘들어서 이제 그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 때 하나님이 이것을 그만두라고 하시는지 꼭 여쭈어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게 되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일일수록 주님께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그 뜻을 묻고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유다의 한 성 헤브론으로 올라갈 것을 지시하십니다.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또 자기와 함께 한 추종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다윗이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읍에 살게 하니라.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 (2-4a절)
다윗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자신의 두 아내와 모든 부하 가족들을 다 이끌고 헤브론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유다 지파로부터 왕으로 추대됩니다. 블레셋 땅에 있다가 이제 유다 땅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헤브론은 유다의 남쪽에 있는 도시인데, 이전에 아브라함도 거기 살았고 남쪽의 중심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던 유다 지파에 의해 왕으로 추대받는데, 다윗의 부하들을 참으로 다윗과 더불어 인내하면서 각고의 세월을 보내왔습니다. 이제 그들은 다윗이 왕으로 추대되는 것을 보면서 어땠겠습니까? 깊은 감회에 젖었을 것이다. ‘이제는 드디어 내 삶에 빛이 들어오는구나.’ 하고 다들 느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이전에 오랫동안 민주화 투쟁을 하던 분들이 나중에 자기들의 지도자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전에 함께 고생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잘 보면, 유다 지파 사람들은 다른 지파들과 상의하지 않고 단독으로 헤브론에서 다윗에게 기름 부어 그를 왕으로 세웁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된 것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겨우 1/12의 왕이 된 것입니다. 물론 땅으로 따지면 유다가 크고 인구도 많은 큰 지파이지만, 지파로 따지면 1/12입니다.
왜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은 다윗의 능력과 성품을 알면서도 그를 왕으로 함께 추대하지 않습니까?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사울에게 충성했던 지파들이기 때문에 다윗의 보복이 두려웠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일단 자기에게 손해가 되면 반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본심을 알 수 없었고, 또한 사울의 통치를 경험하면서 사울 스타일이 자기들에게 더 맞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울의 통치 스타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인간적인 방법으로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이고, 그러면서 자기와 주변 사람들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나간 겁니다.
성경은 사울을 가리켜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람이라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면 사울은 시원시원한 사람이었고, 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 자기편 사람들에게는 아주 잘해주는 정치를 한 사람입니다. 즉, 요즘 문제가 되는 편 가르기에 능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자기편만을 위한 정치를 한 사람이 사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윗이 이스라엘을 하나로 만드는 통합의 정치를 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나중에는 잘했는데, 그러니까 사울의 출신 지파인 베냐민이 나중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릴 때 유다에게 붙었습니다. 다윗이 잘했기 때문이고 통합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사울을 악한 사람, 불순종한 사람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아주 좋고, 호탕하고, 잘해주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또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악한 왕이 누구입니까?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입니다. 그 아내가 바알 숭배자인 이세벨이었습니다. 그 시대는 가장 악한 시대였는데, 놀랍게도 엘리야 같이 훌륭한 예언자가 활동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 아합이 성경에서는 최고로 악하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갔을 때 보니까, 적들의 침입에 대비해서 므깃도에 지하 수로를 만들어 물을 저장해놓고 물이 통하도록 만들어놓았습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런 걸 보면 아주 뛰어난 왕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여로보암이었는데, 나중에 그와 이름이 같은 여로보암 2세가 나옵니다. 여로보암 2세는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이었습니다. 영토를 가장 크게 넓혔고, 부귀영화를 누렸고, 나라가 굉장히 부강했고, 강력했고, 돈이 엄청나게 많은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단 몇 절로 ‘악하다’라고 하고 끝냅니다. 그렇게 훌륭한 왕인데도 ‘악하다. 별것 없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다. 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까? ‘저 사람은 참 훌륭하다. 뛰어나다.’라고 할 때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렇게 보는 것인가? 아니면 ‘저 사람은 안 좋다. 나쁘다.’라고 할 때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렇게 보는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면 몰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는 그런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이유는, 블레셋에 망명했던 다윗의 마음을 의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공격으로 어려웠을 때에는 블레셋과 함께하며 숨어 있다가, 왕이 죽고 나라가 망한 후에 나타나서 왕위를 쉽게 차지하려 한다고 의심한 것입니다.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지 않았습니다.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런 불신과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내가 저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뭔가? 그래서 전체 이스라엘이 하나 되게 하는 일이 뭔가?’
왜 다윗이 그렇게 했습니까? 사실 자신의 안위만 위해서라면 그냥 유다에서 조용히 왕으로 지내면 자기도 편합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도망자 생활과 망명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자기 친족들과 유다 지파와 같이 ‘이제 편안하게 조용히 우리끼리 행복하게 잘 살자.’라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왜 자꾸 전체 이스라엘의 통합을 이루려고 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유다의 왕으로 기름 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전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끊임없이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전체를 끌어 안고자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죽은 사울에게 충성했던 사람들이 떠오른 겁니다. 그들은 바로 벳산 성벽에 박혀 있던 사울의 시체를 끌어내려 장사를 지내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축복하고 격려하며 자기는 사울파 사람들에게 복수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직접 보여줍니다. 요즘 말로 하면 정치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보여준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절대 쉬운 게 아닙니다. 지금은 가서 사람을 막 죽이고 살인하고 전쟁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용서하지 못하고 ‘두고 보자. 내가 되면 이제 너희들을 다 쓸어버리겠다.’라고 하는데, 이것을 안 하는 게 쉽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것을 실행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4b절)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를 블레셋에서 옮겨 장사를 치러주었다는 사실을 보고 받습니다. 이 사건은 왕위에 오른 다윗이 권력에 물들었는지 아닌지의 여부를 가려줄 수 있는 테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다녔던 사울 편에 서서 그의 시체를 수습해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다윗이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모두 주목해서 보고 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자기들이 다윗의 원수인 사울을 장사지내주었기 때문에 혹시나 다윗에게 보복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경계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사람들 또한 이 문제에 대한 다윗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 너희 주 사울이 죽었고 또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그들의 왕으로 삼았음이니라 하니라” (5-7절)
다윗이 한 번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어 크게 칭찬하면서,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며 자신이 그들에게 선한 보상을 하겠다고 말하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이전에 한 일이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겁니다.
그 전에 어떻게 했습니까?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을 때 그 소식을 알려준 아말렉 청년을 오히려 처단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울을 죽였다고 했으니까 ‘어떻게 감히 네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을 죽일 수 있느냐?’라고 하며 처단했습니다. 그리고 애가를 지어 슬퍼하며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아, 다윗이 한 게 아니구나.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는구나.’라고 마음이 열린 상태였습니다. 거기에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축복해주고 보상하겠다고 하니, 더더욱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겁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양식과 무기를 제공했던 놉 제사장 아히멜렉과 모든 제사장들을 다 학살하는 끔찍한 죄를 범한 것을 생각해보면, 다윗의 이러한 반응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자기의 원수에게 잘해준 사람들을 잘해준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을 원수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왕위에 조금의 사심도 없고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 됨을 이루는 것은 거저 되지 않습니다. 넓은 마음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특히 상대방의 마음에 맞추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인 대화를 비롯해서 큰일을 할 때도 상대방의 입장에 맞추어 일을 진행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음에 불편함이 있거나 미안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 오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괜찮다고 해주는 자상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놀라운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교회는 하나 되어 놀라운 교회가 될 것이고, 그런 정치를 펼치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는 위대한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2. 갈라진 나라, 두 개의 정권 (8-11절)
1) 이스보셋 정권 (8-11)
“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 (8-9절)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 성경에는 안 나와 있지만, 8절은 ‘그러나’ 또는 ‘한편’으로 시작합니다. 이 단어는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되는 것이 순탄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걸림돌은 사울 집의 군대 장관 아브넬이었습니다. 넬의 아들인데, ‘아브’가 히브리어로 ‘아들’이니까 그가 아브넬입니다.
아브넬은 사울 집의 남은 한 아들 이스보셋을 내세워서 요단강 저편에 위치한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유다 지파를 제외한 열 한 지파의 새로운 정부를 세웁니다. 그래서 두 정권이 된 겁니다. 이것은 사울 집안의 몰락으로 권력을 잃게 된 그가 권력에 대한 애착을 여전히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사십 세이며 두 해 동안 왕위에 있으니라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르니,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칠 년 육 개월이더라” (10-11절)
아브넬을 중심으로 한 이스보셋의 행동에 대해 다윗은 침착하게 지켜보는 입장을 취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그러한 상태로 무려 7년 6개월을 지냈다고 알려줍니다. 이것은 다윗의 마음이 인간적인 권력에 있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다윗은 조금도 권력과 함께 주어지는 부귀영화에 조급함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자기가 전체의 왕이 되어야 한다는 조급함을 보이지 않습니다. 순리를 따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브넬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사역임을 알면서도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지위와 권세를 탐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오늘 ‘목회편지’에도 썼지만, 제가 한국 상황을 솔직히 잘 모르는데 잘 아는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부유층이 자기 자녀를 외국의 유명 대학, 특히 미국 명문대에 합격시키기 위해 엄청난 돈을 쓴다는 겁니다. 국제학교뿐 아니라 학원과 과외도 관련되고, 거기에 들어가는 돈이 엄청납니다.
그래도 그 안에서는 공정한 경쟁이면 되겠지만, 거기에 불법도 들어가고 편법은 많으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런 일을 한다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왜 그렇게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자기들만 계속 기득권을 가지고 자녀들도 그렇게 되게 하며, 자기들은 귀족이고 일반 국민은 낮은 천민이라는 의식을 가진 게 진짜 문제입니다. 양반제가 없어진 지 오래인데,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고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있으니 걱정이 됩니다. 우리가 한국을 위해서 계속 기도해야겠습니다.
바로 그런 것의 중심에 있는 게 뭡니까? 욕심입니다. 우리도 ‘나는 상관없다.’라고 할 게 아닙니다. 그런 쪽은 아니더라도 다른 방향에서 우리가 그런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보다 나의 뜻을 내세울 때가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2) 요압과 아브넬의 헛된 싸움 (12-17)
이스보셋을 중심으로 정부를 세운 열한 지파 사람들은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혈기와 유익을 따라 다윗을 대적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 중심에는 사울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브넬이 있습니다. 그는 순순히 다윗에게 권력을 넘겨주지 않고, 이스라엘의 열한 지파 사람들에게 다윗과의 싸움에 나서도록 부추기고 조종합니다. 이것은 그가 이스보셋을 앞에 내세워서 권력의 중심에 있는 자신의 위치를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모두 권력 주변에서 혈투를 벌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앞에 누군가를 내세우고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심지어 더 안 좋은 것이 있습니다. 요즘 미국이든 한국이든 여당과 야당이 치열하게 다투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기들 안에서 안 보이게 서로를 견제하면서 남이 자기보다 올라가는 것 같으면 슬쩍 뭔가를 제보해서 떨어뜨리는 일이 자기들끼리 그 안에서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입니까? 이런 것이 세상입니다.
“넬의 아들 아브넬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신복들은 마하나임에서 나와 기브온에 이르고,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다윗의 신복들도 나와 기브온 못 가에서 그들을 만나 함께 앉으니 이는 못 이쪽이요 그는 못 저쪽이라. 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청년들에게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겨루게 하자 요압이 이르되 일어나게 하자 하매” (12-14절)
아브넬과 요압을 중심으로 두 군사 진영 간에 작은 싸움이 벌어집니다. 기브온 못을 중심으로 양측이 서로 대치하는 중에 아브넬이 먼저 요압에게 군사들의 힘겨루기 시합을 제안합니다. “겨루게 하자”라는 말은 전쟁놀이인데, 양쪽의 장수들이 맞붙어서 싸움을 벌여 양 진영의 힘을 겨뤄보자는 겁니다. 그래서 그 제안에 따라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들이 일어나 그 수대로 나아가니 베냐민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편에 열두 명이요 다윗의 신복 중에 열두 명이라. 각기 상대방의 머리를 잡고 칼로 상대방의 옆구리를 찌르매 일제히 쓰러진지라 그러므로 그곳을 헬갓 핫수림이라 일컬었으며 기브온에 있더라” (15-16절)
양측 지도자들의 합의에 따라 각각 장수 열두 명씩 맞붙어 싸우는데, 처음에는 분명히 손으로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결국 칼을 사용하게 됩니다. 서로 붙들고 상대방의 옆구리를 찌르니까 그 결과 양측의 모든 장수가 한꺼번에 목숨을 잃게 되고, 그곳 이름을 ‘헬갓 핫수림’ 즉 ‘날카로운 칼의 벌판’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지금 자기편 장수들이 피 흘리며 죽어 가는 모습을 본 양측의 군사들은 이제 흥분하면서 맹렬한 싸움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절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거룩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넬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싸움을 걸어온 것이고, 장수들의 목숨을 내걸고 요압 진영의 장수들과 싸우게 함으로써 피 흘리기를 즐기는 악한 본성을 드러냅니다.
요압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진지한 자세로 싸움에 임한 것이 아니라, 아브넬의 헛된 제안에 응하여서 무모하게 피를 흘리게 만든 겁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너무나 헛되고 무모하게 피를 흘리고 말았습니다.
“그 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 (17절)
이 전쟁에서 아브넬 측이 다윗의 부하들에게 참패를 당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편에 서셔서 아브넬의 악한 계획을 대적하심을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열한 지파 사람들은 이 전쟁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번 헤아릴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결국 이런 일들을 죽 보십시오. 이런 사건들에서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맨 앞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여쭈어보신 것 외에는 이런 사건 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안 계십니까? 모든 것을 다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사람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또 사람들이 높여주는 평판은 다 사라지고 하나님의 평가만 남게 됩니다. 특히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사람들은 나와 함께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함께해주십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 지금 살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도대체 뭘 위해 사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을 이루기 원합니까? 그리고 그것이 올바른 것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것입니까? 혹시 그 길을 가는 데 있어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데 있어서, 불법이나 편법은 없습니까?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는 데 7년 6개월이 걸렸습니다. 기다림과 인내와 설득과 포용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결국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빨리 하는 것이 늘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기다림과 인내와 준비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코로나 기간 동안 잘 견디셨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나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다는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서 늘 정직하게 행함으로 하나님께 크게 칭찬받는 주님의 종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