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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3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13 ✦
“아름다운 리더십”
(사무엘상 30장 21~31절)
[들어가는 말]
대개 어느 나라나 정당들을 보면 이념과 사상에 따라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한쪽은 보수적인 정당이고 다른 한쪽은 진보적인 정당입니다. 크게 이 두 가지가 있고 그 주변에 조금 더 보수적인 정당들이나 더 진보적인 정당들이 있습니다. 또 그 중간에 위치한 중도적인 정당들도 있습니다.
미국은 오랫동안 공화당(Republican Party)과 민주당(Democratic Party)을 중심으로 한 양당정치 체제가 지속되어 오고 있는데, 한국도 대체로 그렇지만 시기마다 당이 새로 생기고 없어지기를 반복해왔습니다. 미국은 공화당과 민주당이 계속 있어 왔는데, 한국은 진보든 보수든 이름을 계속 바꿔서 조금만 안 보고 있으면 무슨 당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한국 정치계를 보면 종종 두 개의 당이 하나로 통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통합이 되는 과정에서 굉장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봅니다. 각 당에 자기 입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절충하기가 쉽지 않은 겁니다. 그 과정에서 불만을 품고 반발하는 사람이 있고, 탈당하는 사람도 나오고, 나가서 또 다른 당을 세우기도 합니다.
가끔 보면 두 교회가 하나로 합치는 경우가 있는데, 각각 교인이 50명인 두 교회가 하나로 합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둘이 합치면 교인이 100명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교인 수는 그대로 50~60명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디론가 가든지 따로 새 교회를 다시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하나로 합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 18장에서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시다 기도를 이야기하시며 ‘두 사람이 합심하여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8:19). 단 두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도 그렇게 힘들다는 것을 예수님은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서민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 지식층이나 부유층의 지지를 동시에 받기가 어렵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늘 사람들 사이에는 계파가 있고 분열이 생깁니다. 각기 다른 두 계층을 하나로 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리더십이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리더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바로 다윗이 그러한 리더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설교는 은혜받기 위해 듣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든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붙들고 결단하여 나가서 행동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의지적 결단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도 많은 내용이 있지만, 그 가운데 오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 한 가지를 붙들고 ‘내가 이번 주에 정말 이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하고 결단하며 나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배려와 화합의 분배 원칙 (21~25절)
지난주 본문에서 아말렉 사람들이 다윗의 마을인 시글락을 공격해서 거기 있던 가족들을 다 잡아가는 위기를 당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심지어 그때 사람들은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고까지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힘을 얻은 후에 아말렉 사람들을 쫓아가 큰 승리를 거두고 모든 사람과 짐승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을 아말렉 사람들에게 빼앗아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냥 보면 큰 승리가 이야기의 핵심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절정은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그것은 브솔 시내에서 일어납니다. 큰 승리를 거두고 기쁨이 충만하여 시글락으로 돌아가던 다윗과 400명은 그 전에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고 싸우지 못한 200명의 동료들이 남아 있는 곳에 돌아옵니다.
“다윗이 전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명에게 오매 그들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오는지라 다윗이 그 백성에게 이르러 문안하매” (21절)
너무 탈진한 나머지 중간에 낙오된 200명은, 승리를 거둔 400명의 동료들이 모든 가족과 짐승을 이끌고 돌아오자 기쁨으로 그들을 영접합니다. 자기 아내와 아이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볼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상상해보십시오. 정말 기뻐하고 서로 얼싸안으며 울고 웃으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비록 자기들이 힘을 보태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함께 기뻐합니다.
이때 다윗도 그들에게 가까이 나아가 따뜻하게 문안합니다. 그러나 그 400명 중에는 악하고 마음이 굳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낙오한 200명과 전리품을 나누어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22절)
다윗과 함께 아말렉과 싸워 승리한 400명 가운데 악한 자들과 불량배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가지 않은 200명에게는 전리품을 나눠줄 수 없다고 선동하며 나선 것입니다. 낙오자 200명은 자기들의 아내와 자식들을 다시 찾게 된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말렉에게 빼앗아 온 짐승이나 물건들 뿐 아니라, 원래 그들의 것이었던 짐승들도 이미 빼앗겼던 것이니까 돌려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다윗과 함께 가지 못했던 200명은 실제로 아무것도 차지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지쳐서 자기 가족들을 찾는 것조차 포기해야 될 정도로 굉장히 무기력했고 부상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가서 자기 가족들을 되찾아준 것만 해도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들 자신도 그 이상 바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나누어달라고 요구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싸우러 갔던 400명 중에서 악한 자들은 혹시라도 달라고 할까 봐 미리 선수를 치면서 아무것도 나누어줄 수 없으니 가족이나 데리고 가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 400명 전체가 그런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 중 ‘악한 자와 불량배들’ 즉 그들 중 일부가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상황은 리더인 다윗에게 굉장히 곤란한 상황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아무것도 주지 말라는 말을 듣자니 저 200명이 걸리고, 그렇다고 해서 싸우러 가지 않은 200명에게 다 똑같이 나누어주자니 목숨을 걸고 가서 싸운 저 400명에게 미안한 상황입니다. 리더가 되면 이런 딜레마가 많습니다. 이때 다윗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그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23-25절)
다윗은 일단 못되게 구는 불량배들을 향해 ‘야, 이 악한 것들아’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합니까? “나의 형제들아.” 일단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져줍니다. 그들이 그런 마음을 충분히 품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는데, 다윗의 이 말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지금 가족들과 재산을 모두 되찾았을 뿐 아니라 이렇게 많은 것들을 더 얻어서 오게 된 것이 결코 우리 힘으로 된 게 아니다.’라는 겁니다.
23절에 나오는 이 표현들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들이 잘해서 된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해주신 일이라고 선포합니다. 잃어버렸던 가족들에게 어떻게 이토록 아무 일이 없었을 수가 있습니까? 그중 몇 명이라도 못 따라갔으면 아말렉 사람들이 분노하며 쳐 죽이고 갈 수도 있었는데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게 우연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입니다.
그리고 아말렉 사람들은 간신히 도망한 사람들이 400명이었으니까 그보다 훨씬 많은 군대가 있었던 것인데, 도망간 사람들과 같은 숫자인 400명만 가지고 이 엄청난 대군을 물리치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결코 자신들의 힘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자기들에게 공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다윗과 함께 한 이 사람들이 원래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22장에 보면 아둘람 굴에 있던 다윗에게 찾아온 이들은 원래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저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였습니다. 그들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고 다 인생의 패배자이며 사회의 낙오자였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다윗을 통해 임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비참한 삶에서 건짐을 받아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의 손길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과는 전혀 관련도 없던 사람들이 다윗의 믿음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도 점점 믿음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말렉 추격 사건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이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마을로 돌아오자 가족들이 다 끌려간 것을 보고 “다윗을 돌로 치자”(6)라고 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가족들을 모두 되찾았을 뿐 아니라 더 많은 재산을 얻게 되니까 또 뭐라고 했습니까?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20). 그러니까 다 다윗 덕분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이미 고백하며 인정했습니다.
실제로 다윗이 아비아달과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고 힘을 회복하여 자기들을 이끌고 나아갔기 때문에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지, 자기들끼리 가서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다윗을 돌로 쳐 죽인 다음에 자기들끼리 갔으면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제 낙오자 200명에게는 아무것도 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모두가 다윗의 전리품이라고 말해놓고서는 사실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처음에 “다윗을 돌로 치자”라고 주동한 사람들이 큰 승리를 거둔 다음에는 앞장서서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 하고 외쳤을 것입니다. 또 똑같은 사람들이 200명에게 물건을 주지 말자고 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윗을 돌로 치자는 사람들도 소수였고, 200명에게 주지 말자고 한 악한 자들과 불량배들도 소수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항상 똑같은 소수의 사람들이 매번 주동하며 문제를 일으킵니다. 어느 조직이나 그렇습니다. 교회도 그렇고 사회의 일반 단체도 그렇고, 항상 소수의 똑같은 사람들이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합니다. 어떤 때는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라고 하고, 어떤 때는 ‘저 사람들에게 절대로 줄 수 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다윗의 전리품이다.’라고 외치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들의 감정과 자기들의 기준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게 자기중심입니다. 자기들이 기분이 나쁘면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라고 하고, 자기들이 기분이 좋으면 ‘이 모든 게 다윗 덕분이다.’라고 하며 왔다 갔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마음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기분에 따라 바뀌기 때문입니다.
전체를 못 봅니다. 자기의 감정과 자기 생각이 최고입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감정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것, 모든 게 자기의 감정에 따라 나오는 것은 자기감정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우상숭배가 됩니다.
그런데 다윗 일행에게는 전쟁을 위해 가지고 온 물건들이 많았고, 지쳐서 시내를 건너갈 수 없었던 200명이 남아서 그것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들을 가리켜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24)라고 표현합니다. 그 물건들을 다 가지고 추격을 벌였다면 그만큼 아말렉을 쫓아가는 데 늦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하러 가면서 군수물자가 없이 갈 수는 없습니다. 먹을 것과 무기들이 무거워도 들고 가야 하는데, 이제 빨리 추격하면서 다 들고 가면 느리니까 그것들을 두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마침 200명이 더 이상 못 가겠다고 하니까 다윗은 재빨리 결단을 내리고 그들에게 남아서 그 물건들을 지키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리로 돌아온 것이지, 아무것도 없었으면 버리고 가자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지난주 2022년 월드컵 축구대회 예선전이 있어서 마지막으로 본선에 올라가는 32팀이 거의 결정됐습니다. 추첨식도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중동인 카타르에서 열리고 그것도 여름이 아니라 겨울(11-12월)에 열립니다. 그곳이 더운 중동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대표 팀은 이번에도 아시아 예선을 통과하여 10회 연속 월드컵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도 네 나라밖에 하지 못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지난주 한국 팀이 11년 동안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아시아 최강팀 이란을 상대로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2대0으로 이겼는데, 마지막 경기였던 상대적 약체 UAE를 상대로는 오히려 1대0으로 졌습니다. 그들이 수비를 너무 잘했기 때문입니다.
축구에서는 공격이 강한 팀이 아니라 수비가 강한 팀이 이깁니다. 그래서 한국이 그런 아시아의 상대적 약팀들과 경기를 할 때 그들이 수비전략으로 나오기 때문에 굉장히 고전을 합니다. 유럽이나 남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적 약팀이 수비전략으로 나와서 강팀들이 고전할 때가 많고 심지어 질 때도 있습니다. 4년 전 러시아 월드컵에서 한국이 당시 세계 1위였던 독일을 이긴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다른 스포츠 종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비가 강한 팀이 공격이 강한 팀을 물리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 중에 ‘공격이 강한 팀은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지만, 수비가 강한 팀은 우승을 할 수 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다윗이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가서 공격하여 싸워 이긴 사람들도 잘했지만, 남아서 수비한 사람들, 즉 짐을 지킨 사람들도 정말 잘했다는 겁니다. 이 사람들 없이는 자기들이 이렇게 될 수 없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공이 있으니까 모두 똑같이 나누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경험했던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없었다.’라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 물건들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자기들이 외친 대로(20) 다윗이지, 자기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전리품들을 가리키며 다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윗도 그러지 않는데 누가 이것을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다윗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지금까지 놀라운 은혜로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로서 그들도 역시 관대한 은혜로 서로를 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다윗의 믿음이었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베풀 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특히 교회에서 사역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 나서서 섬기는 분들이 수고도 많이 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뒤에서 묵묵히 따르며 역할을 감당하는 분들의 공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때로는 우리가 같이 섬기다 보면 지쳐서 뒤로 물러가는 사람들이 나올 수도 있고, 그럴 때 앞에서 열심히 하는 사람과 뒤로 물러간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우리가 서로에게 가져야 할 마음은 자기주장이 아니라 용납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지금 탈진해서 함께 가지 못한 200명은 일부러 악한 마음을 품고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너무 지쳐서 가지 못했습니다. 피곤해서 못 갔다고 되어 있지만, 그들 중 상처를 입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러한 그들을 내치지 않고 품었습니다. 일부러 분열을 일으키는 경우라면 하나 되려고 힘쓰더라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함께 나누고 하나님의 은혜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다윗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실천이 참 약합니다. 저처럼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은 말씀을 많이 듣는 데 비해서 실천이 아주 적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속 강조하신 말씀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듣고 행해야 복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구약도 그렇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시고 신약의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듣기만 하면 안 되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단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면 안 된다는 겁니다. 행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옵션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래, 하나님을 예배해야지’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네 자신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것은 옵션 같이 생각합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별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너무나 잘 깨달은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모든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들어 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사도 요한도 그것을 너무나 잘 깨닫고 요한일서에서 ‘우리가 보이는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예수님도 ‘열매를 보고 그 사람을 안다.’라고 하셨습니다. 삶 속에서 나오는 열매를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이지, 말하는 것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진정한 자비와 사랑이 아니라 감상(sentiment)이 중심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감상은 실제 삶으로는 연결되지 않는 감정입니다. 겉으로만 자비심으로 보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현충일인 Memorial Day가 5월 말에 있습니다. 그럴 때 애국심이 충만해지는 분이 얼마나 되십니까? 저부터가 잘 안 됩니다. Memorial Day는 우리에게 ‘노는 날’이지 애국심을 고취하는 날이 되지 못합니다.
한국의 광복절 같은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기의 행렬을 보면서 나라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조금 생길 수는 있습니다. 국립묘지 같은 데를 티브이에서 보여줄 때 그런 마음이 생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이 생긴다고 해서 나라에 결코 세금을 더 내거나 기부금을 내는 것으로 연결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냥 감정만 조금 일어나다가 말뿐입니다. 그런 것이 감상입니다.
또 고난주간 같은 때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과 같은 영화를 보면 정말 끔찍합니다. 그 우락부락한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무지막지한 채찍으로 막 때려서 등이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줄줄 흐르며 고통스러워하는 예수님의 그 장면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흐릅니다. 그러나 슬퍼하는 그 마음과 눈물이 매일 하나님께로 나아가 깊이 그분과 교제하는 기도나 QT나 예배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감동적인 다큐멘터리들이 많은데, 요즘은 사회가 각박해서 그런지 자기를 웃겨주고 재미있게 해주는 예능 프로그램을 많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감동을 주는 것들을 보면 여운이 많이 남습니다. 오래 전에 <울지마 톤즈>를 보고 큰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라는 분이 남수단에 가서 그곳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 그들을 섬기시던 모습, 그리고 나중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분의 고귀한 헌신과 섬김을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실은 그때 수요예배에서 같이 보았습니다. 얼마나 감동이 됩니까?
그런데 눈물을 흘린 그것이 내 주변의 힘든 이웃을 찾아가 섬기는 것으로 잘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감동은 받았는데, 그것이 섬김으로 연결은 잘되지 않습니다. 물론 마음으로는 동정을 느끼며 세상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자선단체나 교회에 기부금이나 헌금을 하면서 $10, $20, $50, $100을 보내며 속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삭막한 세상에 그래도 나는 온정이 꽤 많은 사람이구나.’ 하지만 평소 생활로 돌아가면 어려운 사람들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외칩니다. ‘당신들은 우리와 함께 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줄 수 없다.’ ‘이것은 모두 다 내 것이다. 내가 열심히 수고해서 얻은 것들이다. 당신들에게 줄 수 없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왜 게으른 사람에게 내 소중한 것을 나누어주어야 하는가?’ 이러면서 행동을 막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회가 문제이고 저 사람들의 게으름이 문제라고 하며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 탓을 하기 전에 먼저 내가 사랑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 자신을 생각해보아도 이민 올 때 별로 가진 게 없었는데 지금은 가진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중 진짜 나의 것이 뭐가 있습니까? 모두 하나님의 것 아닙니까? 모두 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입니다.
만약에 진짜 내 것이라면 죽어서도 가지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게 진짜 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어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내가 가진 것 중에 얼마나 됩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것도 아닌데 나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시간도, 재능도, 물질도, 가족도, 모두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와 어떻게 나누어야 할까? 그것을 찾고 실행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과제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성도님들이 잘하고 계십니다. 2년 전 코로나 사태가 터진 후에 어려운 분들을 함께 돕자고 했을 때 이웃사랑 기금에 많이 동참해주셨습니다. 또 지난번 토네이도 피해자 구호헌금을 하자고 했을 때도 많은 분들이 거기에 동참해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이번에 우크라이나도 그렇고, 앞으로 이런 일들은 계속 벌어질 텐데, 우리가 각자 형편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을 계속 나누며 나아가는 겁니다.
그런 일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승리를 주셨다고 믿는 사람,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신다는 것을 정말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해주셨다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지 않습니다. 내놓아도 아주 조금 내놓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점검해봐야겠습니다. 나는 지금 내 삶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정말로 알고 있는가? 나는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있는가? 이것을 점검해봐야겠습니다.
2. 감사의 선물을 보내는 다윗 (26~30절)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다고 믿은 다윗은 모든 전리품을 서로 나누었을 뿐 아니라 주변의 유다 마을들에도 보냅니다.
“다윗이 시글락에 이르러 전리품을 그의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이르되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26절)
다윗은 환난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였던 자기 부하들만 감동시킨 게 아니라, 지방 유지들과 지도자들도 감동시킵니다. 그는 자기들이 얻은 전리품을 유다 지방의 유력한 지역 지도자들에게 보낸 겁니다.
다윗이 무슨 의도로 전리품을 유다 마을들에 보낸 겁니까? 그냥 보면, 다윗이 자기도 유다 지파이니까 자기 동족인 유다 지파 사람들에게 정치적 로비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블레셋 군대와 싸우고 있는 사울 왕은 곧 패하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자기가 왕이 될 테니까, 미리 자신의 정치 기반을 마련해놓으려는 의도가 있다는 의심을 살 수 있는 행동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실제로 이러한 다윗의 행동을 그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다윗이 엄청난 현실 정치가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동족 유다 사람들에게 미리 보내놓았다는 겁니다. 실제로 유다 지역의 사람들이 나중에 다윗을 헤브론에서 왕으로 추대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해석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사실 다윗에게는 탈취물이 너무 많았습니다. 자기들이 처리하기에는 너무 많았던 겁니다. 그래서 평소에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던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겁니다.
“헤브론에 있는 자에게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왕래하던 모든 곳에 보내었더라” (31절)
여기 보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의 왕래하던 모든 곳에 보내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빠진 다윗을 평소에 돕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들은 대부분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닌 사람들도 있었지만, 유다 지파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떻게든 그들의 은혜를 갚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다윗에게 정말로 정치적인 야망과 의도가 있었다면, 그는 유다 지파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에 사람들을 보내서 다 나누어주었을 겁니다. 그래서 자기 사람들을 미리 심어 놓았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환심을 살 만큼의 양은 안 되었겠지만, 일부 사람들에게 환심을 얻어서 지파별, 지역별로 자기 사람들을 심어놓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순수하게 감사를 표현한 것뿐입니다.
3. 다윗의 리더십
오늘 본문을 통해 다윗의 아름다운 리더십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리더의 자리라는 것은 남들이 보기엔 매정한 결정을 내릴 것을 요구하는 자리입니다. 제3자나 옆에서 보는 입장에서는 리더의 모질고 냉정한 면이 못마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책임을 맡게 되면 자기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가 그 자리에 가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어느 교회에서 직분자를 세우고 나면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 사람은 집사 때는 참 좋았는데, 장로가 되더니 사람이 변했어.” 정말 사람이 변질된 경우라면 문제이지만, 사실 교회의 장로가 되면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전에 못 보던 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전에는 그저 자기가 맡은 사역만 열심히 하면 되었는데, 막상 장로가 되면 교회 전체를 다 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전에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대통령도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쪽을 지지하는 사람, 저쪽을 지지하는 사람, 둘 다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다 있습니다.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누가 대통령이 되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고, 대통령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내가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얼마나 비난을 합니까? 그 시간의 1/10이라도 기도해주십시오. 지금도 그렇고, 차기 대통령도 그렇습니다. 내가 지지를 하든 안 하든, 그것이 우리 크리스천이 할 일입니다.
특히 내가 지지하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서 뭔가가 삐거덕거리며 잘 안 될 때 어떻게든 방어를 해주려고 하고, 반면 내가 반대하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잘하지 못하면 엄청나게 공격을 퍼부어댑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상관없이 미국의 경우는 주지사나 국회의원이었을 때 또 한국의 경우는 야당 지도자였을 때 대통령이 하는 일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비판을 하던 사람이, 막상 자기가 대통령이 되고 나면 또는 어떤 권력의 자리에 올라가면 이전에 자기가 말했던 것과 반대로 하는 경우들이 종종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누구나 그렇습니다. 일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누구나 그런 것을 봅니다. 왜입니까? 대통령이 되고 보니까 이전에 자기가 비판했던 것이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라에는 극비사항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어서 그것을 알고 보니까 이전에 자기가 말한 대로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 경우가 꽤 많습니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막상 자기가 그 자리에 가보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에, 사회에서 엄청난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어서 국회로 들어가더니 바보가 되었다고 느끼실 경우가 많을 겁니다. 특히 한국 국회의원들이 그렇습니다. ‘저 사람은 그렇게 똑똑하던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더니 왜 이렇게 바보가 되었나?’라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 들어가 나라의 극비사항을 알게 되면 이전에 자기가 했던 것과 다르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는 겁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라도 많은 경우 그렇습니다.
우리가 비난하기는 쉽지만, 대안을 제시하고 실행하는 것은 그보다 몇 배는 더 어렵다는 것을 매일 실감하는 것이 리더의 자리입니다. 교회는 극비사항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도 모든 분들이 리더의 위치에 있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만약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는데 ‘교회는 왜 저런 식으로 일을 하나?’ 하고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뒤에서만 ‘저건 왜 저러나?’ 하지 마시고, 제직이 되고 리더의 자리에 가서 같이 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왜 그러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게 정말 잘못된 것이라면 바꾸는 겁니다. ‘이것이 더 좋습니다. 이렇게 합시다.’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좋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리더십을 행사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리더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결과가 좋더라도, 당한 사람 입장에서는 그 대가가 가혹하기 때문입니다.
<손자병법>을 쓴 손무도 이론가였을 때는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고다.”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라고 했는데, 막상 전쟁에 뛰어 들어가서 보니까 단 한 번의 승리를 위해, 또 단 한 명의 장수를 만들기 위해 치르는 군인들과 가족들의 희생이 너무나 참혹한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의 승리를 위해 수만, 수십만, 수백만이 죽어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백전백승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은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것이다.”라는 또 다른 명언을 남겼습니다.
몽골의 황제 칭기즈칸은 서양 사람들이 무자비한 정복자라고 알고 있는데, 자기 아내로 하여금 전쟁터에서 버려진 고아들을 모아서 키우게 했습니다. 그의 부하들은 그것을 보면서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책임자로서 돌격 명령을 내렸지만, 그것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치른 희생과 또 거기에서 수많은 고아들이 발생하게 된 것에 대한 인간적인 슬픔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엄청난 사람들을 죽인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가 거기서 나오는 희생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처럼 리더의 길은 너무나 외로운 길입니다.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엄청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자리입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20세의 젊은 나이에 10년을 도망자로 쫓겨 다녔는데, 그 젊은 나이에 수없이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그런 과정 속에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결국 사랑이 핵심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매일 하나님 앞에 무릎 끓고 나아갔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기도할 때만이 여러 결정들에 대한 옳고 그름을 깨닫고 그 결정의 결과에서 오는 여파를 견디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십여 년의 세월 동안 기도하는 다윗과 동행하시며 그를 빚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왕이 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리더십의 핵심은 기도하기 위해서 꿇는 무릎인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밖으로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은 힘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손입니다. 무릎과 손이 리더십의 핵심입니다.
우리도 매일의 삶에서 수많은 결정의 순간들을 만납니다. 혹시 여기에 ‘나는 리더가 아닌데?’라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면 리더입니다. 특히 부모이신 분들은 모두가 리더입니다.
리더로서 수많은 결단의 순간들 앞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입니다. 어떤 일이든 하나님 앞에 들고 나아가 무릎 꿇고 기도하며 주님을 신뢰하고, 거기서 받은 힘으로 나아가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놀라운 믿음의 사람, 아름다운 리더로 우뚝 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