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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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1): https://youtu.be/9RfSrj4B1Xs?t=1951
설교 동영상 (2): https://youtu.be/DChed_PVKOs
2022년 3월 13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10 ✦
“블레셋 망명생활 중에도 돌보시는 주님”
(사무엘상 27장 1~12절)
[들어가는 말]
얼마 전 <오징어게임>이라는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래서 이 동네 사는 아이들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며 노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한국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는데, 실제로는 1990년대부터 그러한 한류 열풍이 시작되어 2000년대에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십여 년 전 한국 단기 선교팀이 이란을 방문했을 때 그들이 볼 때는 동아시아 사람들이 다 비슷해 보이니까 한국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중국 사람인지 궁금했던 이란 사람들은 근처에 와서 어슬렁거리다가 한국 사람인지를 알아보는 방법으로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 “오나라, 오나라!”
그 당시 이란에서 2007년 <대장금> 드라마가 방영되었을 때 시청률이 90%를 넘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한국 사람들을 보니까 반가운데 한국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겁니다. 제가 2010년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을 때 시장을 지나가는데 거기서 장사하던 상인들 중 하나가 저를 보더니 “주몽, 주몽!” 하고 외쳤던 기억도 납니다.
<대장금>이나 <주몽>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드라마나 영화들에는 주인공이 나오고, 또 주인공 곁에서 주인공을 위해주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또 주인공과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나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주인공은 착하고 좋은 일만 합니다. 굉장히 올바른 사람입니다. 주인공은 항상 잘 생기고 예쁘고 좋은 사람입니다. 가끔 실수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주인공이 악하게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악당이 주인공인 경우는 없습니다. 실제 역사의 인물들을 다루는 사극들도 많지만, 주인공은 대부분 선하게 나옵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이고 영화입니다. 실제 인간은 100% 항상 착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악하지도 않고 항상 착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실만 보아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주인공이라고 해서 그 삶을 미화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 보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할 정도의 일들이 주인공을 통해서도 벌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2월 26일 세상을 떠나신 한국의 대표적 지성이라 불렸던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88세로 돌아가셨는데, 74세에 예수님을 믿으셨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성경의 이야기 구성이 엉성해서 믿습니다. 만약 저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쓰라고 하면 사람들이 믿을 수 있게 잘 쓸 수 있어요. 만약 사람들을 속일 목적으로 가짜로 쓴다면 저는 더 잘 쓸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럴듯하지가 않습니다. 정말 성한 정신으로 보면 도저히 납득이 안 돼요. 내용이 온통 의심 가는 것들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형사가 용의자를 잡아놓고 심문할 때 알리바이를 완벽하게 대는 사람은 진짜 범인입니다. 보통 사람은 알리바이를 대라고 하면 잘 못 댑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부활 알리바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그것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반 신화 같으면 그럴듯하고 폼 나는 알리바이를 꾸몄겠죠.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저는 성경을 믿습니다.”
굉장히 맞는 말씀이 아닙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고 있는 다윗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보면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입니다. 사울을 두 번씩이나 살려준 다윗은 아주 훌륭하고 선한 성자이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신앙인입니다. 하지만 25장에 나오는 나발에 대한 그의 태도나 또 오늘 27장에서 블레셋으로 망명하는 모습을 보면, 믿음의 사람이라기보다는 현실주의자인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가 성경을 쓴다면 다윗을 신앙적, 도덕적, 윤리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으로 그릴 것 같습니다. 정말 영웅으로 그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이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밧세바라는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하는 사건까지 그대로 보여줍니다. 미화하려면 그런 것을 왜 씁니까?
성경에는 순백색의 영웅이 없습니다. 어느 정도 다 흠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다윗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는 아름다운 신앙인이고, 심지어 그의 후손을 통해 메시야(그리스도)가 나오다는 약속까지 받은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욕망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조심스럽게 묻는 사람이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기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27장에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었으면서도, 생존을 위해 자기 나라의 최대 적국인 블레셋으로 망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도망간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그저 생존을 추구하는 사람, 어떻게 보면 비열한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한 그의 삶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붙들어주시고 여전히 돌보아주시는 것을 또한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1. 다윗의 블레셋 망명 사건 (1-4절)
다윗은 젊은 나이에 20대의 10년 동안 사울 때문에 늘 도망 다녀야 하는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때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러한 체험은 다윗에게 정말 중요한 믿음의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시로 노래했고 그 시들이 아직 우리에게 시편으로 많이 남아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을 보호해주신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런 죽음의 위기가 닥쳤을 때는 믿음으로 승리했지만, 위기를 벗어난 다음에는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만 것이 문제입니다.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1-2절)
지난 23장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쳤다는 것을 들었을 때, 다윗은 자기도 살아가기 힘든 도피생활 중이었지만 마음에 영적 부담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쳐야 하는지 하나님께 여쭤보았습니다(23:2).
그때 하나님은 가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자기 부하들이 말도 안 된다고 반대하니까,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나아가 여쭈어보았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이 가서 치라 하시며 승리를 주겠다고 하시니까 가서 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렇게 신실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여쭈어보던 다윗의 자세가 지금은 어디로 갔습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1절을 다시 잘 보시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바로 이것이 문제의 출발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 생각으로 했다는 겁니다.
다윗은 그 동안 아슬아슬한 위기, 절체절명의 위협 속에서 사울에게 벗어난 것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 약간 편안해지니까 그것을 잊어버린 채 자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사울을 두 번 살려주고 사울이 물러나 쫓기지 않아도 되니까,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해가 잘 안 갑니다. 다윗은 그토록 사울에게 쫓길 때도 믿음으로 잘 이겨냈는데, 어떻게 해서 어려움을 벗어난 후에는 오히려 믿음으로 나아가지를 않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인간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다윗이 잘했다는 게 아니라, 다윗 같이 훌륭한 믿음의 사람도 조금 편안해지면 이렇게 인간적인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성경은 그대로 보여줍니다. 다윗이 결코 영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인간적인 생각이 파고든 것을 말합니다.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동안 다윗은 자신을 돌아보며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사울이 잡으려고 쫓아오니까, 그것도 특수부대가 막 쫓아오니까 얼마나 급박합니까? ‘주여, 살려주세요.’라고 하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그저 살아남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때마다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의지했으며,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셨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군대에게 잡혀서 죽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렸을 때 갑자기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가지고 온 전령이 하필 그때 도착하여 사울의 군대가 떠날 수밖에 없는 기적이 일어나서 살아났고, 또 두 번씩이나 사울을 죽일 수도 있는 상황도 벌어졌습니다.
그런 일들을 보면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를 정말 보호해주시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오직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라고 하며 나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한 다음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며 나아간 것이 아니라, 조금 괜찮아지고 추격이 잠시 멈추니까 ‘내가 언젠가 사울의 손에 붙잡혀 죽임을 당할지 모르겠다.’ 하고 두려워하면서 블레셋으로 도망치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현실적 어려움인 겁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다윗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황이 정말 어렵고 다급해지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이겨냅니다. 또 기도를 부탁하고, 중보기도실에 기도카드도 써내서 기도해달라고 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새벽에도 기도하고 집에서도 기도하고 밤에도 기도하며 ‘하나님, 도와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금 일이 풀리면서 여유가 생기면 어떻게 됩니까? 새벽에도 기도하고 집에서도 기도하고 밤에도 기도하던 것이 사라지고, ‘뭐, 괜찮은가 보다.’라고 하면서 인간적인 생각이 파고 들어와 그 순간 침체되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급해서 하나님만 의지할 때는 하나님의 눈으로 어려운 상황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고 말씀을 붙들게 되면 이 상황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시는지 생각하며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었는데, 마음에 약간의 여유가 생기면 하나님의 눈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언젠가는 망하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결국 우리 삶의 관건은 끊임없이 나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결정에도 그렇지만, 평소에 작은 일이라도, 별 것 아닌 일에도 하나님이 이렇게 하기를 원하시는가, 저렇게 하기를 원하시는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좋은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뭘 좋아하실까 자꾸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갑자기 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훈련을 하는 곳이 바로 목장입니다. 우리가 목장에서 감사제목을 나누는 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내 삶을 보는 것을 자꾸 내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려는 시도가 바로 나눔의 시간입니다.
예를 들어, 계절이 바뀌면서 새싹이 돋아나는데, 보통 시각으로 보면 꽃이 하나 나올 때 ‘에이 씨, 잡초가 또 나왔네.’라고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야, 이 지구가 생명력이 있구나. 다 죽은 것 같았는데 또 나오는구나.’ 하며 다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감사합니다.’가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감사제목을 자꾸 나누는 게 참 중요합니다. 감사를 생활화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꾸 모여서 그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을 반복합니다. 아주 기복이 심합니다.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폭이 좁은 것을 말하지, 그런 게 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게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약하다는 사람들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폭이 너무 크고, 믿음이 성숙하다는 사람들은 그 폭이 작은 그 차이지, 누구나 다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의 기복을 최대로 줄일 수 있는 길이 바로 하나님의 시각을 갖고 사는 것,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나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기도에, 예배에 붙들어 매놓고, 또 형제자매 사랑에 붙들어 매놓으며 자꾸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도 함께 나와 예배하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필요하고 QT와 말씀묵상이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삶 공부도 하고 목장도 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말씀묵상과 기도와 말씀 공부는 결코 나를 옭아매는 족쇄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면서 ‘이제 좋은 시절은 다 끝났네. 이제는 놀 수가 없겠네.’라고 하는데 완전한 착각입니다. 그것은 나를 옭아매는 족쇄이거나 이제는 따분한 삶이 되는 게 아니라,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여러분, 재미있는 길, 세상의 좋아 보이는 길은 사실 죽음의 길, 멸망의 길입니다. 그리로 계속 가면 떨어져 죽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나를 옭아매는 길이 아니라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 것을 잡아주고 살려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이렇게 모여서 드리는 주일예배, 또 주중에 드리는 수요예배나 새벽기도는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붙들어 매려는 노력입니다. 특히 혼자서 하기는 힘이 드니까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모여서 함께 해나가며 힘을 얻으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고 귀찮아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자기 생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생각대로 살게 되면 반드시 오는 것이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상황을 보게 되니까 삶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 노후에 대한 염려, 자녀교육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등, 자기 생각대로 사니까 계속 불안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 다윗은 자기를 잡으러 쫓아오는 사울을 두 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도 살려주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은 앞으로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얼마든지 사울을 물리치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몇 번을 쫓아오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자기를 보호해주시고 인도해주시겠다는 표시가 됩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이상하게 블레셋으로 도망갑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자기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하나님의 말씀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따른다면 앞으로도 이스라엘 안에서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불안한 생활을 계속해서 해야 하는데, 더 이상 그것을 버틸 자신이 없었던 겁니다.
사실 우리 삶이 그런 식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은 다 압니다.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은 다 압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어야 하고 예배해야 한다는 것도 다 압니다.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이 힘들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더 쉬운 길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을 택한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미 선지자 갓을 통하여 유다 땅으로 가라고 말씀을 받았지만(22:5), 그럼에도 이스라엘을 떠나 블레셋으로 망명하는 길을 선택합니다(2). 그 당시에는 전쟁이 많았기 때문에 나라마다 용병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고대 왕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 명의 용사라도 더 데리고 있으려 했기 때문에 이전에는 적이었던 사람이라도 받아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드 왕 아기스도 부하 600명을 데리고 망명을 요청하는 다윗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저마다 가족을 거느리고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 하였더니” (3절)
도피생활 초기에 다윗은 바로 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 온 적이 있었습니다(21장). 그때도 망명을 하려고 했지만, 그때는 골리앗과 싸워 이긴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들의 용사 골리앗을 죽인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미친 척하면서 아기스 앞을 간신히 빠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 왕 사울이 다윗을 원수로 생각하고 죽이려 한다는 사실이 다 알려져 있습니다. 또 600명의 부하들까지 데리고 와서 자기 신하가 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기스는 이 상황이 자기에게 이득이 될 것을 계산하고 기꺼이 다윗을 받아준 것입니다.
아기스는 결코 바보가 아닙니다. 그가 아무 생각 없이 다윗을 그냥 받아준 것이 아닙니다. 아무 이득도 없는데 그런 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계산이 다 깔려 있습니다. 어떤 것이 자기에게 유리한지 머리를 굴려서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하는 것입니다.
요즘도 정치를 보면 그런 식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대로 결정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생각하며 계산을 합니다. 그런 것을 소위 ‘정치공학’이라고 부르는데,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그게 ‘정치공작’이 됩니다. 그런 것들을 지금도 많이 보지 않습니까?
옛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서로 원수인데, 이스라엘 왕 사울의 강력한 라이벌인 다윗을 받아주고 도와줌으로써 이스라엘이 분열되도록 조장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여 그들을 용병으로 이용함으로써, 자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이스라엘 국경 마을들을 공격하려는 계산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건너가자 비로소 다윗은 그 지긋지긋한 사울의 추격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4절)
이제 다윗은 도피생활을 마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에서의 삶은 몸은 편했어도 영적으로는 전혀 유익이 없는 기간이었습니다. 다윗이 그 동안 많은 시를 썼지만, 블레셋에 있는 동안에는 시를 쓴 것이 없습니다. 육체적으로는 편했을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깊이 잠든 상태였다는 겁니다.
만약 다윗이 어려운 중에도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으면서 고생을 했더라면 어땠겠습니까? 굉장히 힘들었겠지만 매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감격 속에서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 땅에 갔을 때 몸은 편했지만 영적으로는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도 그런 상태가 되면 스스로 질문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몸이 힘들어도 마음에 은혜와 감격이 있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영적 침체에 빠져도 그냥 몸이 편한 것이 나은지를 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몸이 편한 쪽으로 선택을 합니다. 저를 비롯해서 우리와 사람들 대부분은 몸이 편한 쪽으로 선택합니다.
새벽기도도 조금만 더 자자고 하다가 못 나갑니다. 주일예배는 의무감에 나가지만, 수요예배 같은 경우는 일하고 몸도 피곤한데 괜히 나가면 더 피곤해질 것 같으니까 안 나갑니다. 요즘은 온라인예배도 있으니까 온라인으로 하자고 합니다. 집중해서 하면 좋지만 사실 집중해서 하지도 못합니다. 목장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면 어떤 결과가 오겠습니까? 편안하긴 편안하지만, 너무 편안해서 영적으로 깊이 잠들게 되는 겁니다. 가끔은 코도(?) 곱니다.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겁니다. 잠이 들어 있으니까 편안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 편안하면 그게 이상한 겁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인생은 그 자체로 영적 전쟁입니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렇습니다. 전쟁터에서 편안하게 누워 자면 비정상입니다.
또 신앙생활은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가끔 보면, 연어가 바다로 나갔다가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데, 물살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것과도 같은데, 물속에서 편안하게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떠내려 가거나 물에 빠져 죽습니다.
가끔 드는 예 중에 ‘주전자 속의 개구리’(Frog in the cattle) 이야기를 합니다. 개구리를 물에 넣고 천천히 데우면 편안하게 자다가 삶아진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실제로 누군가가 실험을 해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개구리가 물이 따뜻하게 데워지면서 노곤하게 잠이 드는 게 아니라 뜨거워서 튀어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물을 데워서 뜨거워지는데도 개구리가 가만히 있다면, 물이 따뜻해서 기분이 좋고 편안하여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이미 깊은 잠에 들어 있는 것이거나 죽어버린 개구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게 갈등이 없고 너무 편안하다면, 그것은 이미 영적으로 깊이 잠든 상태라 그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편안한 삶을 원하지만, 삶이 너무 편안하고 안정적이면 오히려 스스로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건가?’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이 왔을 때 목장에서의 감사 나눔처럼 ‘하나님,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며 나아간다면 그것은 아주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편안하다고 마냥 좋아하면서 계속 편안하게만 지낸다면, ‘내가 정말 제대로 살고 있는 건가?’ 하고 물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편안한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삶이 편안해지면 기도도 하지 않게 되고 말씀에 대한 간절함도 사라지며 예배도 소홀해집니다. 그러니까 편안한 것이 곧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가 너무나 편안하게 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일부러 불편하게 자꾸 자기를 움직여야 합니다.
자기 몸을 자꾸 사용해서 편안할수록 예배에 더 나오고, 기도도 더 하고, 말씀도 더 읽고, 더 묵상하고, 삶 공부도 하고, 목장도 더 열심히 나가고, 또 뭔가 봉사할 게 없나 찾아보며 자꾸만 자기를 움직이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편안하게 가만히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오래 전 중국 지하 가정교회 지도자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 한국교회는 중국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핍박이 없어지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중국 지하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서 핍박이 사라지기를 기도하지 말아주십시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근심은 중국 내에서 점차 핍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핍박이 없어지면 나태해지고 게을러진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점점 크리스천들에 대한 공격이 많아지고 있는데, 우리가 잘못해서 공격을 받으면 안 되지만, 잘하고 있는데도 비판을 듣고 공격을 받으면 그것은 오히려 좋은 일이라는 겁니다.
2. 다윗의 시글락 생활 (5-12절)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도와주십니다. 먼저 아기스로 하여금 다윗에게 독립된 성을 하나 차지하게 해주십니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바라건대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면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내게 주어 내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살리이까 하니,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산 날 수는 일 년 사 개월이었더라” (5-7절)
다윗은 아기스에게 왕도 가드가 아니라 지방 성읍 중 한 곳에서 살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왕도인 가드에 살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래도 다윗 자신의 생활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훤히 보여서 활동하는 데 제약이 따르게 됩니다. 그것을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아기스가 내준 시글락은 유다와 블레셋 사이에 있는 변방 마을로서, 사막 가운데 있는 일종의 오아시스입니다. 이곳은 가드 왕 아기스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변방입니다.
사실 아기스는 정치적인 계산을 하고 다윗에게 이곳을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접경한 곳에 있는 시글락을 내어줌으로써, 다윗이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과 싸우도록 유도한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히 자기 부하로 남게 되든지, 최소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아니면 전사할 수 있다는 것을 계산하여 준 겁니다. 그 시글락에서 1년 4개월을 사는 동안 다윗은 어떤 삶을 삽니까?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주민이라.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 아기스에게 이르매” (8-9절)
사실 이것을 그냥 보면 다윗이 아기스에게 완전히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다음도 보십시오.
“아기스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하니 다윗이 이르되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이니이다 하였더라” (10절)
다윗이 시글락에 있으면서 전쟁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용병으로 받아주고 한 도시인 시글락을 맡겨준 것이고, 블레셋의 지방 도시를 맡은 장군은 반드시 주변 민족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전쟁을 해야 했는데, 시글락에서 전쟁을 하게 되면 그것은 이스라엘 남부와의 전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지역 유목민들과 싸웁니다. 유목민들은 선량한 사람들이 아니라 아주 악한 자들입니다. 다윗은 그들을 가드로 절대 데려가지 않고 전리품만 보냅니다.
“다윗이 그 남녀를 살려서 가드로 데려가지 아니한 것은 그의 생각에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다윗이 행한 일이 이러하니라 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거주하는 동안에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11절)
다윗은 아기스 앞에서 조국을 저버린 배신자 행세를 하면서 이스라엘 마을들을 노략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의 오랜 적인 남방의 악한 부족들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빼앗은 물건들을 아기스 왕과 나누었는데, 왕은 그것이 이스라엘에서 빼앗아 온 약탈품인 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확실한 자기 부하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고 생각하니라” (12절)
여기에 ‘생각하니라’라고 되어 있지만 의미로 따지면 ‘착각하니라’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뭐라고 합니까? ‘왕착각’(?)입니다. 왕이 한 착각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윗이 아기스를 속였는데, 이 일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저 위대한 믿음의 사람 다윗도 슬쩍슬쩍 거짓말을 했으니까 우리도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겁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다윗이 아무리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해도, 성경은 결코 다윗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세도, 그 어떤 훌륭한 성경의 인물도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 주인공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블레셋으로 가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묻고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결국 이루어지고야 맙니다. 지금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는 물결이 잔잔히 흐르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눈으로 볼 때는 전쟁도 벌어지고 있고 얼마나 끔찍합니까? 또 한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다 자기 의견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 너무나 악한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어디에 있어도, 심지어 잘못 판단해서 블레셋 가드에 들어가 있어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고 계시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다윗이 실수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은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이 주는 메시지는 다윗이 도덕적으로 실패한 이야기도 아니고, 영리하게 머리를 굴리며 남을 속여도 된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하나님의 돌보심입니다. 다윗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다윗이 그렇게 한 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는 그저 그렇게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무슨 드라마 주인공처럼 언제나 도덕적으로 옳게 살았다는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보호해주시고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신다는 것, 하나님은 블레셋의 악한 환경 속에서도 다윗을 지켜주신다는 것, 그리고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오늘 다윗의 이야기는 우리가 세상 문화에 푹 젖어서 편안하게 살아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슬쩍슬쩍 속이더라도 하나님이 눈감아 주시고 무조건 돌봐주신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는 구별된 백성, 거룩한 백성으로 살라는 명령이 여러 번 반복되며, 성경은 여러 구절들에서 우리에게 세상 문화의 흐름에 맞서서 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거대한 세상의 힘에 압도되어서 나름대로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며 살아갈 때, 그래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일하시며, 우리가 어쩔 줄 모르며 스스로 하지 못하는 일을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서 완벽한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뭔가를 하려고 움직이면 그것이 도리어 아기스를 돕는 것이 되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당장의 현실을 보면 다윗이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에게 속해 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도 세상 가운데 있고 세상의 죄악 가운데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윗이 훌륭한 것은 잘못을 하나도 안 한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수없이 잘못을 저지르고 엄청난 죄도 지었습니다. 다윗이 훌륭한 것은 자기가 잘못했을 때 바로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회개하고 계속 하나님을 붙들며 나아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도 얼마나 실수가 많은 사람들입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만한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바로 깨닫고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며 다시 하나님을 붙들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신실하게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삶을 매일 보호하시며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그러한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