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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6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9 ✦
“또 한 번의 기회, 또 한 번의 자비”
(사무엘상 26장 1~12절)
[들어가는 말]
신약성경은 헬라어(그리스어)로 쓰였는데, 문학과 철학에 쓰인 Classical Greek이 아니라 Koine Greek, 그러니까 보통 그리스어로 쓰였습니다. 왜냐하면 고전/정통 헬라어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고전 그리스어로 쓰인 고대 그리스 문학 작품들 중에 호머(Homer)의 <오디세이(Odyssey)>가 있습니다. 주인공 오디세이가 바다를 항해하는데 그 바다에는 세이렌 여신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탄 배가 그들이 사는 섬에 가까이 다가오면 그들은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선원들을 유혹하여 바다에 뛰어들게 해서 죽게 하거나 배가 파선하여 죽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세이렌의 노래는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어서 수많은 남성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오디세이는 그러한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하여 부하들에게 자신의 몸을 돛대에 결박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결박을 풀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하들은 모두 귀마개를 하도록 합니다. 곧 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오는데, 오디세이는 귀마개를 안 했기 때문에 결박을 풀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귀마개를 쓴 부하들은 그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를 더욱 단단히 결박합니다. 결국 그가 탄 배의 항해는 계속되고 세이렌의 노랫소리는 점점 약해져서 마침내 세이렌의 유혹으로부터 무사히 벗어나 섬을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명해서 다들 몇 번은 들어본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와 비슷하게 이 세상에는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유혹이 참 많습니다. ‘그까짓 것은 내가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라고 했는데 넘어가서 무너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유혹으로부터 나는 안전하다고, 나는 괜찮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중에 보면 다윗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까?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아무리 지금 은혜를 많이 받고 성령 충만해도, 조금만 방심하면 우리는 유혹에 걸려들 가능성이 아주 높은, 아니 틀림없이 유혹에 넘어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나는 괜찮다. 나는 할 수 있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오디세이처럼 나보다 더 강한 것이 나를 꽉 붙들도록 해야 합니다. 나보다 강한 능력을 가진 게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잡아매고, 또 나 혼자 있으면 지니까 믿음의 공동체가 나를 꽉 붙들어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삶> 때도 누누이 강조하지만,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성경 전체를 요약한 것, 십계명의 요약이기도 하고 구약성경의 요약이기도 하고 전체 성경의 요약이기도 한 가장 중요한 계명, 가장 큰 계명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그것은 명령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살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단순히 부담스러운 명령이 아니라, 그렇게 살 때 우리가 유혹을 이길 수 있고 능력 있게 살 수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12절까지만 읽었는데, 26장 전체를 모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또 다시 다윗을 추격하는 사울 (1~5절)
지난번 24장에서 다윗이 죽이지 않고 목숨을 살려줌으로 뉘우치며 떠났던 사울은 또 다시 다윗을 잡으려고 길을 나섭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붙잡아매지 않고 그저 자기 생각대로만,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도 자기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그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고, 또한 자기는 다윗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또 다시 다윗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번에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십(Ziph) 사람들이 기브아에 있던 사울에게 다윗이 어디 숨어 있는지 정보를 알려줍니다.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 (1-2절)
사울은 지난번 엔게디 굴속에서 다윗의 손에 죽을 수도 있었는데 다윗이 살려준 것을 기억하고, 비록 하나님이 자기를 폐위했다고 하셨지만 여전히 자비를 베풀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붙들어 매는 태도를 보였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십 사람들이 또 정보를 주니까 또 마음을 바뀌어 다윗을 잡겠다고 나갑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갑니다. 또 다시 이스라엘의 최정예부대, 가장 강력한 특수부대를 다윗과 부하 몇 명을 잡겠다고 데리고 갑니다. 블레셋을 대비해야 하는 부대가 다윗을 잡는 데 동원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리더십이 얼마나 엉망인가 하는 것을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약합니다. 바로 얼마 전에 큰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결단을 했는데 또 잡아 죽이겠다고 쫓아가지 않습니까? 우리도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하면서, 부흥회나 수련회나 세미나나 컨퍼런스에 참석하며 은혜를 받았다고 하고, 결단을 하며 ‘이제 나도 제대로 섬기며 살아야겠다.’라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상황이 조금만 바뀌면 다시 옛날 모습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내가 성경을 열심히 읽어보아야겠다. 한 번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데 올해는 꼭 성경을 한 번은 읽어보아야겠다.’라고 하며 1월에 시작을 했는데, 바빠지고 여러 일들이 생기니까 ‘올해만 있나? 내년도 있지. 내년에 해야지.’ 하고 넘어가 버립니다. 기도도 ‘올해는 새벽기도를 좀 해봐야 되겠다. 일주일에 최소 한 번은 나가야겠다.’라고 했는데, 조금 피곤하니까 ‘이번 주만 있나? 다음 주도 있지.’라며 자꾸 미룹니다. 뭔가 감동을 받고 결단을 했는데 막상 하려니까 잘 안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큰 결심을 하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겁니다. 진정한 믿음생활을 해야 합니다. 한두 번 은혜를 경험하고 기쁨을 누린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야 합니다. 한두 번 은혜 받는 게 아니라, 계속 은혜를 받아야 하고 계속 결단을 하며 계속 실천을 해야 합니다.
오래 전 어떤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학창시절까지는 교회를 굉장히 열심히 다녔다. 그런데 내가 그때 교회를 너무 열심히 다녀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교회도 졸업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는 졸업이 없습니다. 끝까지 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의 삶> 때 배우는 내용이지만, 구원에서 세 가지 시제(차원)가 있습니다. 그 중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지금이 ‘받는 구원’의 과정, ‘혼(인격)의 구원’의 과정, ‘성화’의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끊임없이 해나가야 합니다.
입맛이 너무 좋다고 하루 종일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고 ‘야, 정말 배부르다. 이제 평생 안 먹어도 되겠다.’라고 하며 그 다음부터 안 먹는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고, 금방 죽게 됩니다. 또 아주 경치가 좋은 산에 휴가를 가서 하루 종일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는 ‘와, 좋다! 신선한 공기를 실컷 마셨으니까 이제부터는 숨을 안 쉬고 살아도 되겠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말씀은 영적 양식이고 기도는 영적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양식을 한 번에 엄청나게 먹고 나서 그 다음부터 안 먹는 게 아니라 꾸준히 매일 먹습니다. 영적 양식도 꾸준히 매일 먹어야 하는 겁니다. 호흡도 한꺼번에 다 하고 안 하는 게 아니라 계속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호흡을 안 하면 죽으니까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묵상과 기도와 예배의 자리를 찾아 나아가는 겁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주일예배로 함께 모여서 이 귀한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겁니까? 왜 수요예배나 새벽기도회가 있습니까? 왜 목장 모임으로 모입니까? 또 왜 삶 공부가 있습니까? 바쁜 삶 중에 사람을 더 힘들게 하고 괴롭히고, 또 어떻게든 교회 모임 숫자를 늘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나가는 것은 세상을 제대로 살 수 있는 힘을 공급받기 위함입니다.
공 예배는 가장 기본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집에서 혼자 예배할 수 있지만,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 겁니다. 우리는 스스로 힘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나아가고,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주님 안에서 우리가 사랑을 나누면서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는 자리로 자꾸 나 자신을 이끌어가는 겁니다. 그런 노력을 해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과 기도와 예배와 사랑의 교제가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는 사람답게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형제자매와 사랑을 나누는 삶이 없으면, 유혹이 올 때 아주 크게 무너지게 되고 비참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꼭 붙어 있어야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 자신을 붙들어 매놓아야 유혹이 올 때 이길 수 있습니다.
다윗 입장에서 보면, 얼마 전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살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용서해주고 자비를 베풀어주었더니 그때는 뉘우치는 것 같더니 이제 또 자기를 죽이겠다고 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내가 누군가를 용서해주었는데, 감사하다고 가서는 또 배은망덕한 일을 한다면 얼마나 기가 막히고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나는 일입니ᄁᆞ?
그런데 그렇게 또 다시 자기를 죽이겠다고 오는 사울이 밉지만, 꼬박꼬박 ‘다윗이 여기 있습니다. 다윗이 저기 있습니다.’라고 자기가 어디 숨어 있다고 사울에게 알려주는 십 사람들은 정말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전혀 모르는 자들입니다. 오직 권력자인 사울 편에 붙어서 이득을 보고자 하는 악한 기회주의자들일 뿐입니다. 그러한 십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지은 시편이 지난번 읽었던 54편입니다.
“무법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며, 폭력배들이 내 목숨을 노립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자들입니다.” (시 54:3, 새번역)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자들, 생각도 안 하는 자들, 오직 어떻게 하면 이득을 얻을까 하는 자들입니다. 폭력배들입니다. 그래서 시편 54편을 읽어보면, 다윗은 항상 기도하던 사람이었고 특히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던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편에서 다윗은 자신이 숨어 있는 곳을 사울에게 계속해서 알려주는 십 사람들의 적대적인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구출해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지금 자기 생명을 취하려고 오는 자들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을 들으면서, 그 순간 자신의 목숨을 지켜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고 외칩니다.
다윗은 악인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며 다른 데로 피합니다. 이때 십 사람들의 정보를 받고 출동한 사울의 특수부대가 다윗이 숨어 있는 곳 근처까지 접근해옵니다.
“사울이 광야 앞 하길라 산 길 가에 진 치니라 다윗이 광야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광야로 들어옴을 알고” (3절)
애초에 다윗은 사울이 진짜 마음을 바꾸어서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는데, 사울이 다시 추격해왔다는 소시를 듣습니다. 그래서 먼저 정탐을 보내어 사울이 직접 왔는지 확인합니다.
“이에 다윗이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 알고,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4-5절)
이제 다윗은 가만히 있지 않고 자기가 직접 사울의 진으로 들어갑니다. 과연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군사들이 그를 둘러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이 장면을 영화에서도 긴박하게 그린 것이 기억납니다. 사울은 자기가 이렇게 가까이 와서 살펴보는 것을 전혀 모른 채 누워서 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또 다시 주어진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사울에게 자비를 베푼 다윗 (6~12절)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6-7절)
사울의 진영을 직접 확인한 다윗은 아히멜렉과 아비새와 함께 그 근처까지 온 겁니다. 다 같이 가면 발각되기 쉬우니까 한 명만 내려가 보자고 말합니다. 아마 둘 다 자원했을 텐데 아비새가 더욱 강력하게 자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같이 사울의 진영으로 몰래 들어갑니다.
다윗과 아비새는 한밤중에 사울 진영으로 잠입하여 그를 죽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접근합니다. 이때 사울의 창은 머리 근처 땅에 꽂혀 있고,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과 다른 군사들은 사울을 둘러 잠을 자고 있습니다. 사울이 왕이니까 보호한다고 그를 둘러서 자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하나님이 또 다시 주신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8절)
아비새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원수를 다윗의 손에 붙이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냥 보면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이것이 얼마나 합리적인 말입니까?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다는 겁니다. 지난번에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죽이면 안 된다고 꺼려했기 때문에, 다윗이 사울을 죽이기가 꺼려지면 자기가 죽이겠다고 제안합니다. 나중에 혹시라도 다윗이 사울을 죽인 것 때문에 문제가 되고 곤란을 당하게 되면, 다윗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부하 아비새가 억지로 나서서 죽였다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아주 오래 전인 1968년 1월 21일 일어났던 1.21 사태를 혹시 기억하십니까?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무장공비들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서 청와대를 공격하러 왔다가 모두 사살당하고 김신조만 생포되었던 사건입니다. 그가 나중에 전향하고 목사까지 되었습니다.
나중에 남북대화를 하면서 김일성이 그 일에 대해 사과하면서,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의 과잉충성이 빚어낸 일이라고 하며 박 대통령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그때 성공해서 실제로 암살했다면 ‘내가 한 건 아닌데, 미안하게 되었다.’라고 하면 문제가 해결됩니까? 전혀 해결되지 않습니다. 엄청난 문제가 됩니다.
다윗도 그런 식으로 ‘사울을 죽인 것은 내 뜻이 아니었다. 나는 사울을 살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내 부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울을 죽였다. 미안하게 되었다.’라고 하면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런데 솔직히 살다 보면 그런 식으로 될 때가 많은 것을 봅니다. 자기도 다 알면서 모르는 척, 자기가 직접 하지 않고 다른 사람 손으로 일을 저지르고 나서 ‘나는 몰랐다.’라고 발을 빼거나, ‘몰랐는데 그 사람들이 그냥 한 거다.’ 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특히 정치인들이나 대기업 경영자들이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9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라고 말합니다. 왜 다윗은 그런 식으로 생각합니까? 다윗이 겁쟁이입니까? 이건 누가 보아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분명한데 왜 다윗은 그렇게 주저합니까?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러나 잘 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이 점에 대해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10-11절)
다윗은 하나님을 정말로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사실 ‘에이, 그냥 해야지.’ 하며 자기 마음대로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있고, 정말 하나님의 손에 이것을 맡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사울을 병들어 죽게 하시든지 아니면 전쟁터에서 죽게 하실 것이므로, 자신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사울을 죽이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은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을 사람이 처리하면 안 된다.’라는 믿음이 다윗에게 있습니다.
사실 자기 자신도 이미 사무엘이 와서 기름 부어 세운 차기 왕입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름 부음 받은 자가 할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순종한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임을 다윗은 분명하게 믿고 있습니다.
다윗의 부하 아비새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원수를 제거하라고 주신 기회라고 해석했습니다. 누가 봐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이라고 자기에게 두 번째로 주신 기회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을 이토록 사랑하시며 지켜주고 계시다는 증거로 해석합니다.
이처럼 똑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모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두 번씩이나 주신 기회를 모두 날려버린 어리석은 사람, 유약한 사람으로 비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 사울을 죽이라고 하시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를 눈동자와 같이 사랑하셔서 동행하고 계시며 보호하고 계시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두 번씩이나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지금 분명히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저 사울의 손에서 나를 보호하실 것이며, 틀림없이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더욱 갖게 만드는 증거라고 본 것입니다.
같은 상황을 놓고도 사람마다 의견이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거기에 대한 평가가 다 다릅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맞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여러 가지 일들을 보면서 살아가는데 어떤 것이 옳은 길입니까? 어떤 것이 옳은 선택입니까? 어느 것이 맞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실까?’라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좋은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위치에 올라가며 인정을 받는 일이라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면 담대히 거절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알고 구분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자는 것이 말은 좋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요즘 SNS 같은 데를 보아도, 크리스천이고 목회자라도 의견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 겁니까? 다 하나님을 열심히 잘 믿고 섬기는 크리스천이고 목사인데 의견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럼 누가 맞는 겁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시각입니까?
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만 우리가 잘 기억하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기회라도 다른 사람에게, 설사 그것이 악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해를 끼치는 일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아니라고 보면 됩니다. 아무리 남들이 괜찮다고 해도, ‘저 사람은 당해도 싸다.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니까 당해도 된다.’라고 말한다 해도, 그것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고 해치는 일이라면, 사람과의 관계를 깨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지고 이웃과의 관계가 세워지는 방향으로 갑니다. 관계를 세우는 방향이라면, 이것이 너무나 힘들어 보이고 실제로 어려워도 옳은 길이기 때문에 그 길로 나아가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관계를 깨는 방향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좋아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길이 아니기 때문에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직장이나 사업의 기회가 있을 때 이것을 잘 체크해보십시오. 학생들은 학교나 앞으로 직장을 잡을 때, 또 인턴십을 할 때 잘 살펴보십시오.
이 직장이나 사업이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다른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고 막는 것이라면, 또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시간인 QT와 기도의 시간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도 물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장 나에게 좋은 것 같아도 결국 나에게 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형제자매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을 막는 일이 된다면,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물리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장은 좋아 보여도 결국은 내 인생을 무너뜨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힘들게 되는 일이고 괴로움을 당하는 일이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도와주는 일이라면, 그것이 하나님을 더욱 찾게 해주는 일이라면, 그 방향으로 힘들어도 나아가는 겁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덕을 끼치며 관계를 세우는 일이라면 아무리 어려워도 그냥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기준은 항상 관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깨는지 세우는지를 보면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12절)
다윗은 사울을 죽이는 대신 그의 창과 물병만 증거물로 가지고 그곳을 떠납니다. 그래도 다윗이 지혜롭습니다. 자기가 왔다 간 증거를 보여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가져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울의 진영 사람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보거나 눈치 챈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윗과 아비새가 특수요원과 같이 날쌔고 소리도 없이 움직여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행한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이 아니었다면 들켰을 겁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아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사울처럼 악한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배은망덕하고 은혜도 모르고, 자기의 사위이자 나라의 최고 장군을 죽이려 하는 악한 왕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다. 내 손을 대지 않겠다.’라고 하는 다윗의 태도를 하나님이 너무나 기뻐하시고 인정해주신 겁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은 존귀하게 여겨주십니다. 아무리 형편없는 사람이라도, 누가 봐도 악하다고 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사람을 위해 생명까지 내어주신 사람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존중해주는 사람을 하나님도 존중해주시고 높여주십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주십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확고한 신뢰 (13~25절)
다윗은 사울의 진영을 떠나 건너편으로 가서 멀리 산꼭대기에 서서 사울 진영의 군대장관인 아브넬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13-14). 그리고 뭐라고 합니까?
“다윗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가운데에 너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 네가 행한 이 일이 옳지 못하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이니라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 하니” (15-16절)
다윗은 백성 중 한 사람이 진영으로 들어가서 왕을 죽이려 했는데, 군대장관으로서 아브넬은 그것도 몰랐다고 하며 그의 근무 태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름 부음 받은 왕을 보호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죽을죄를 지은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16). 그리고 다윗은 아브넬에게 사울 왕의 머리 곁에 있던 창과 물병이 어디 있는지 점검해보라고 들어 보입니다(16).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 듣고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내 음성이니이다 하고” (17절)
이런 소란의 와중에 사울이 가만히 보니까 저 멀리서 자기편을 향해 소리치는 사람이 다윗이라는 것을 알고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으며 다윗을 향해 외칩니다.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정말로 너의 목소리냐?”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아들을 왜 죽이려고 쫓아다닙니까? 이때 다윗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이 내용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또 이르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그런즉 청하건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 곳에서 이제 나의 피가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18-20절)
얼마나 간절하게 다윗이 말을 합니까? 그런데 여기서 다윗이 중요한 두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첫째로, 다윗을 죽이라고 사울을 그렇게 충동질하는 것이 어디서 나왔는지 점검해보라고 합니다. 사울이 자신을 찾아 죽이려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인지를 분별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죽이라고 하셨다면 자기는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들이 충동질하는 것이라면 그들이 저주를 받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것도 굉장히 애매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사람의 뜻인가?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과 충동을 다 믿으면 안 됩니다. 그 충동의 근원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도 있지만, 그냥 마음속에 일어나는 충동도 있고 옳지 않은 생각들도 있습니다.
그것을 구분하는 방법도 똑같습니다. 뭡니까? 관계입니다. 늘 우리는 관계를 가지고 판단해야 합니다. 관계를 깨는 것은 하나님의 뜻일 수가 없습니다. 관계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평화를 이 땅에 이루는 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울이 하려는 짓은 불의한 일입니다. 살인은 관계를 깨는 악한 일입니다.
둘째로, 다윗은 자신을 박해하고 이스라엘 국경 밖으로 추방하는 대적들의 행동은 다윗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는 위협이며, 결국 다윗이 하나님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악한 행위라고 말합니다(19).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다윗의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악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죽이라고 하셨다면 자기가 기꺼이 죽겠지만,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라고 하면서 자기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막고 방해한다면,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깨려고 한다면, 그것은 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것도 역시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어떤 충동이 일어날 때 가만히 보면 대개 인간의 욕심일 경우가 많습니다. 앞길이 막막할 때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며 시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때 일단 마음이 복잡하면 인간적인 생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배를 드려보면 그것을 더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각이라면 예배를 통해 기쁨과 감사와 감격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사람의 충동이나 욕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자꾸 마음에 조급함이 생깁니다. 예배를 드려도 별 기쁨이나 감격이 없이 냉랭하고 무미건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내가 예배를 어떻게 드리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대로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 분명히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예배를 드려도 거기에 별 감격이나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다면,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라면 주님은 일단 환경으로 막아주기도 하십니다. 또 예배 가운데 기쁨이 느껴지지 않게 하십니다.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하는지라” (21절)
다윗의 간절한 호소와 간청으로 사울은 일시적으로 마음이 감동됩니다. 이것은 거짓말을 한 것 같지 않습니다. 잠시나마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다윗에게 돌아오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윗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은 창을 보소서 한 소년을 보내어 가져가게 하소서.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 (22-24절)
다시금 다윗은 자신과 사울 사이에 하나님이 직접 판단해주시도록 하나님께 의뢰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실 것을 확신하면서 자기가 사울 왕을 친히 해치지 않은 이유를 여기서 말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이라는 이 믿음이야말로 다윗이 사울에게 직접 보복하는 것을 막아준 방패였습니다. 다윗의 말에 감동을 받은 사울은 다시 한 번 다윗을 축복해줍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25절)
사실 사울이 다윗을 축복하는 이 말은 자기모순입니다. 다윗이 행할 큰일을 믿고 있고 더 나아가 다윗이 결국 승리할 것을 믿는다면, 왜 다윗과 즉시 화해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왜 다윗의 대적이 됩니까? 자기가 다윗의 대적인데 다윗이 승리하면 누가 지는 겁니까? 자기가 지는 것이니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의 말과 행동이 전혀 맞지 않습니다.
사울과 다윗은 화해 없이 헤어집니다. 사울에게 진정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 다윗에게 왕위를 넘겨주거나 아니면 다윗을 다시는 추격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사울은 그냥 자신의 길을 갑니다. 그 후에도 사울은 여전히 다윗에게 왕위를 넘겨주지 않고 그를 죽일 기회만 노립니다. 나중에 27장에 보면 또 다윗을 추격하려 했지만 블레셋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포기합니다.
사울은 블레셋을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위대한 장군 다윗을 국경 밖으로 나가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를 죽이려고 집요하게 추격함으로 국력을 분열시키는 중대한 죄를 범한 겁니다. 둘이 힘을 합쳐도 어려운 것이 블레셋과의 싸움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사울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만 눈이 먼 나머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내팽개치고 망하는 길로 달려가게 된 것입니다.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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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기회들이 주어져 있습니다. 모든 기회가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관계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우는 것입니까? 내가 하려는 일이 이웃과의 관계를 세우는 것입니까?
지금 나에게 주어져 있는 상황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 진정으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려보기 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를 세우는 일이라면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하고야 말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또 관계를 깨는 것이라면 아무리 좋아 보이고 이익이 되는 것 같아도 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내리기 원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