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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0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7 ✦
“배신의 고통과 죽음의 위기 앞에서”
(사무엘상 23장 1~14절)
[들어가는 말]
우리가 살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살아가면 그냥 숨 쉬는 것뿐이지, 진짜 살아가는 게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모른 채, 아니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냥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요즘 얼마나 바쁩니까? 할 일도 많고 볼 것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별 여유도 없고 생각도 없이 그냥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여기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십니까?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고 또 예배자입니다. 신앙인, 신자, 믿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는 사람을 가리켜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특징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삶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여러 개가 있습니다. 사랑이 있고 그 외에도 많이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단어는 바로 ‘역설’(paradox)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특징은 매우 ‘역설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역설’(逆說, paradox)이라는 것은 일반상식이나 세상 논리에서 보면 어리석고 이해가 안 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드러낼 때 쓰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 5:20)라는 것이 역설입니다. 또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역설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고백한 “오직 십자가에 달린 그분만이 나의 구주, 세상의 메시야이시다”라는 말도 역설입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십자가에서 정치범이자 신성모독자의 죄명으로 처형당한 33세 청년을 가리켜서 구주이고 그리스도(메시야)라며 따른다는 것 자체가 역설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천의 삶은 그 자체가 벌써 역설입니다. 이러한 역설이 없는 인생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인생입니다. 역설이 없는 인생을 가리켜 ‘뻔한 인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정말 역설을 보여주셨는데, 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그 삶도 역시 역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끔찍하게 죽었는데 어떻게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는 사건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 자체가 역설을 보여주십니다.
세상이 가는 대로 따라가고, 남들이 하는 대로 하고, 그런 세상의 흐름에 따라 그저 묻어가는 인생, 뻔한 인생이 어떻게 정말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일 수 있겠습니까? 역설이 있는 인생, 그런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이런 역설이 있으십니까?
1. 그일라를 구원하고도 배신당한 다윗 (1-14절)
1)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은 당신을 따르는 우리에게 역설적인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이 가는 대로 그저 묻어가고 따라가는 뻔한 인생이 아니라 역설이 있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역설을 참 좋아하십니다. 그러한 삶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지금 도망자입니다. 도망자도 보통 도망자가 아니라, 자기 나라의 왕 그것도 자신의 장인이 자기를 죽이겠다고 군대를 동원해서 추격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냥 군대가 아니라 요즘 특수부대와 같이 최정예부대를 보내서 추격하는 상황입니다. 다윗이 워낙 강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도망에 도망을 거듭하다 아굴람 굴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거기 있는 자신에게로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더니 400여 명이 모여서 아둘람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금방 소문이 났고 그래서 다윗은 또 다시 안심할 수 없어서 사람들과 함께 요새로 피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역설이 나타납니다. 다윗이 요새에 숨어서 좀 편안하게 지내볼까 했는데, 그때 선지자 갓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여기 편안하게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22:5). 안전한 곳에 있지 말고 또다시 쫓기는 자리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역설입니다. 안전하게 머물지 못하게 하고 위험한 곳으로 다시 밀어내는, 어떻게 보면 참 이상하신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말에 순종해서 유다 광야의 헤렛 수풀로 들어갑니다. 그러던 다윗에게 한 가지 소식이 들려옵니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 (1절)
유다 남쪽에 있는 그일라를 블레셋이 공격해서 취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이럴 때 보통 사람 같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어쩌라고?’ ‘뭐 그래서?’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쩌라는 말이냐? 지금 내 코가 석 자인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나는 지금 이스라엘의 장군도 아니고 쫓기는 도망자일 뿐이다. 수배령이 내린 도망자일 뿐이다.’ 보통 사람이면 그랬을 텐데, 놀랍게도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에 부담을 느낍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자세히 안 나오지만, 그는 늘 하나님께 묻는 자세를 갖고 살았습니다. 시편들을 보면 다윗이 항상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현실적으로 보면 그일라 사건은 자기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자꾸 부담이 되고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마음에 뭔가 부담을 주실 때, 내가 굳이 안 해도 되고 나와 큰 상관이 없는데 그래도 뭔가 해야 되지 않는가 하는 부담을 주실 때, 그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통해 분명히 내게 뭔가 말씀을 하고 싶어 하시는구나.’라고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은 매일 우리 삶 속에 벌어지는 일들을 그냥 넘기지 않고 되새겨보는 겁니다. 뉴스를 하나 보더라도, 심지어 코미디, 예능, 드라마를 보더라도 거기서 뭔가 느껴지는 게 있습니다. 특히 뉴스를 볼 때 이렇게 생각해보셨습니까? ‘왜 하필 지금 이 시간에 저 뉴스가 내 눈 앞에 보이는가?’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겁니다. 그냥 심심해서 하다 보니까 그러는 게 아닙니다.
인터넷에서 뉴스를 볼 때 여러 뉴스들 중에도 마음에 확 와 닿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왜 하나님이 지금 이 시간에 하필 저 뉴스가 내 눈에 띄게 하시는가?’ 물어야 합니다.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못 느끼고 그냥 넘깁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여기에 하나님이 내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다윗은 생각만 하지 않고 하나님께 여쭈어봅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2절)
사실 이때 다윗이 결코 편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얼마든지 하나님께 대해 서운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 지금 저의 처지를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 제 생명을 부지하기에도 힘들고 벅찬 도망자에 불과합니다. 여기 많은 사람들이 왔는데 이 사람들을 지키는 것도 힘들고 바쁩니다. 그런데 제가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과 싸우라는 말씀입니까? 이건 정말 말도 안 됩니다.’
당연히 이런 상황입니다. 그리고 여쭤볼 때도 마음에 부담을 주시니까 ‘설마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아니죠?’라고 물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 맞아.’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하기 힘든 일인데 하나님이 자꾸 마음에 부담을 주시면서 하는 쪽으로 상황을 몰아가십니다. 그럴 때 우리도 역시 그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으로 질문을 합니다.
<생명의 삶> 첫 시간에 자기소개를 하면서 ‘이번에 듣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많은 분들이 ‘떠밀려 왔다’, ‘남들이 하라고 해서 왔다’, ‘교인이 되려면 해야 된다니까 어쩔 수 없이 한다’라고 대답을 하십니다. 대부분 그렇게 왔어도 열심히 해보겠다고 이야기들을 하십니다.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13주 동안이나 하지, 숙제도 있다고 하지, 심지어 시험도 본다고 하지, 나는 시험이라면 치가 떨리는데 아무래도 나는 안 되겠다. 하지 말아야지.’라고 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삶 공부 모집을 할 때 저와 눈을 안 마주치며 피해 다니는 분들이 계십니다. 자꾸 안 하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하는 쪽으로 됩니다. 그래서 지금 들으시는 분들도 그렇게 와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놀라운 은혜가 있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 것은 사실 아주 가벼운(?) 케이스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 부담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런 상황에서 저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까?’ ‘아니, 저보고 저 사람을 용서하고 먼저 전화를 걸라고요?’ ‘하나님, 피해자는 접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당했어요. 오히려 사과를 제가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저보고 먼저 사과를 하십니까?’ 그런 식으로 자꾸 부담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안 하고 싶은데 자꾸 생각이 나고 부담이 됩니다.
또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데 자꾸 헌금을 하라는 말을 합니다. 지난번처럼 재난지원헌금을 하라고 합니다. 요즘 우리 집에 돈이 별로 없는데 자꾸 그런 것을 말합니다. 또 너무 바쁜데 봉사를 하라고 권하고, 심지어 단기선교를 가자고 제안합니다.
‘제가 이런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할 때 기대하는 대답이 뭡니까? 하나님이 ‘그래그래, 너 바쁘지? 형편이 어렵지? 안 해도 돼. 나중에 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도 바로 그런 심정으로 ‘하나님, 블레셋을 칠까요?’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아니겠지. 지금 내가 치기는 뭘 쳐?’ 하며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대답은 ‘그래, 가서 해.’였습니다.
2) 하나님의 역설의 비밀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3절)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역설의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불가능한 일이라도 무조건 하라고 억지를 부리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 역설의 비밀을 깨닫는 사람만이 상황을 초월해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역설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4절)
우리 같이 이 미국에 와서 사는 이민자나 유학생이나 단기 방문자의 삶을 사는 사람은 더 쫓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온 목적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쫓기는 삶, 늘 급한 것만 따라가는 삶을 살게 되면 결국 무너지게 됩니다.
사업을 위해, 직장을 위해, 자녀교육을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이리저리 헐떡거리면서 10년, 20년을 열심히 뛰었는데 결과는 똑같습니다. 뭡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물론 나름대로 뭔가를 이루기는 했는데 속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마음속에 상처도 있고 분노도 있지만 그것을 꾹 누르고 살아갑니다. 그런 식으로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런 답답한 상황을 인간의 힘으로 뒤집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그냥 꾹 누르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의 비극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자기 성공에 목을 걸고, 아니면 자기 자녀의 성공에 목을 걸고, 세상에서 성공해보려고 아등바등 거립니다. 하지만 그래도 뭐 하나 시원하게 다가오는 것이 없습니다. 뻥 뚫리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완전히 상황이 바뀝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전혀 말이 안 된다고 느낄 수 있지만,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처음에는 조금 황당할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상황에 어떻게 저런 일을 하라고 보여주시나?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이런 일을 하라고 하시나?’ 그러나 그 황당하고 말이 안 되는 말씀에 순종하고 결단하며 나아가기만 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역설의 비밀입니다.
바빠서 정신이 없는데 봉사하라는 기회가 자꾸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하긴 뭘 해?’라는 식으로 합니다. 내가 잘 안 되고 있을 때 재난지원헌금을 하라고 하거나, 하필 그럴 때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이나 부활절이 와서 특별헌금을 하라고 합니다. 또 구제헌금이나 어려운 선교사님을 위해 선교헌금을 하자고 합니다.
제가 오래 전 신학교 다니며 교육전도사를 할 때 섬기던 교회에 저녁예배가 있었습니다. 여름 방학 때 저녁예배 때도 와서 찬양 인도를 하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안식년을 맞아 근처에 계시던 선교사님 한 분이 오셔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원래 광고가 없었는데 갑자기 오시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끝내고 내려가시니까 담임목사님이 감동을 받으셨는지 올라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방금 선교사님 말씀을 다 들었는데 얼마나 감사하면서도 안타깝습니까? 함께 지금 특별헌금을 합시다.”라고 하셔서 즉석에서 선교헌금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저녁예배 때는 헌금 순서가 없는데 그날은 그렇게 선교사님 때문에 하자고 하셨습니다.
제가 가난한 신학생 전도사 시절이라 평소에는 돈이 없었는데, 그 다음날인 월요일에 뭔가에 쓸 일이 있어서 낮 예배와 저녁 예배 사이에 시간이 있을 때 나가서 $50을 찾아왔습니다. 평소에는 $5, $10도 없는데 그날따라 $50을 찾아왔는데 “헌금 합시다.”라고 하신 겁니다.
그때 제가 $1짜리 한두 개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제가 $1을 할 것이냐, $50을 할 것이냐, 굉장히 갈등이 되었습니다. 원래는 $1을 하려고 하다가 마음이 자꾸 불편해서 ‘주님의 뜻이 있겠지’ 하고 $50을 냈습니다. 지금도 꽤 쓸 만한 액수이지만 30여 년 전이니까 꽤 큰돈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냥 탁 냈더니 자유와 평안이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꼭 가난한 신학생 전도사가 모처럼 찾은 $50을 빼앗아서 선교사에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까? 꼭 그렇게 사람을 곤란하게 하시고 괴롭히셔야만 되는 분이십니까? 그래야 헌신입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를 괴롭히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50이라는 것이 저에게는 얼마 있으면 또 생길 수 있는 액수였습니다. 그러나 그 선교사님에게는 상당히 요긴한 돈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다 보지 못해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못 보는 뒤에서도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조차 놀랍게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늘 삶의 분주함에 쫓겨서 살아가다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냥 그렇게 살다가 가는 겁니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냥 나 혼자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살고 그러다 가는, 아무 의미 없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때는 별 의미 없는 인생이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쫓기는 삶을 살면서 별 의미 없이 살다가 갈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인생인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시려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끝나는 인생을 저 영원한 하늘나라의 가치를 가진 일을 해서 상급을 쌓도록 하나님의 일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원래는 안 시키셔도 되고 시키시면 안 되는데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잘되라고 그러십니다. 이 세상의 삶이 끝나면 다 끝나버리는 일에만 몰두하며 사는 별 의미 없는 인생이 아니라, 이 세상이 끝나도 영원히 계속되는 가치를 지닌 일을 하도록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때로는 마음에 부담도 주시고 헌신의 결단을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게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유한한 일들에만 몰두하며 급급하다가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로 천국에 상급을 쌓아놓는 일은 하나도 못하고 그냥 갈까 봐 우리를 도와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주시며 하라고 하실 때, 자꾸 마음에 부담을 주실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머리로 생각하며 ‘저건 아니지’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결단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맹목적 믿음으로 무조건 하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느끼고 깨달으라는 겁니다. 그렇게 순종할 때 엄청난 일들이 일어납니다.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나를 통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3) 결단과 순종을 방해하는 것들
그러나 믿음의 결단과 순종은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극복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자기 자신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게 부담을 주시면 스스로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뭘 하나?’ ‘나처럼 못 배운 사람이 어떻게 하나?’ ‘나처럼 금방 믿은 사람이 어떻게 해?’ ‘나처럼 문제가 많은 사람이 하긴 뭘 해?’
이렇게 스스로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먼저 극복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길을 열어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못하는데 ‘네가 가서 길을 개척해라’ 하시지 않습니다. 다 열어놓으시고 가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로 더 어려운 것은 주변 사람들의 반대입니다. 간신히 스스로 잘못된 생각을 이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결단했는데, 주변 사람들, 그것도 가족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반대를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겁니다.
조금 전 3절에 보면 다윗 역시 주변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칩니다. 이들은 다윗의 대적들이 아닙니다. 다윗과 공동체를 이루고 생명을 나누는 ‘다윗의 사람들’입니다. 누구보다도 다윗을 위하며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 가만히 보면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지금 이곳 유다에서도 가슴 졸이며 살고 있는데, 그일라에 가서 거기를 점령하고 있는 블레셋 군대와 맞서 싸운다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겁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입니다. 맞는 말 아닙니까?
이처럼 너무나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과 역사하심에 감동이 되어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아가려고 할 때 주변 사람들이 반대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설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러한 장애도 뛰어넘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가장 어려운 관문이 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무리 그렇게 순종해도 좋지 않은 결과가 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극복하고 순종한 결과가 아름다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극복하고, 주변 사람들의 반대까지도 물리치고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갔는데, 막상 그 결과는 아주 좋지가 않은 겁니다. 아주 나쁜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점에서 크게 실망하고 무너집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 헌신하며 나아갔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안 해주시나?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이것까지도 뛰어넘을 때 그제야 하나님의 역설의 비밀이 드러납니다. 다윗은 스스로의 잘못된 생각을 깨고 부하들의 반대도 물리친 후 블레셋으로부터 그일라를 구원합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5절)
다윗이 젊은 사람이었는데도 너무나 훌륭합니다. 먼저 그일라 소식을 듣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그러자 하나님은 “가라. 싸워라. 그들을 구원해라.”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 ‘안 되기는 뭘 안 돼?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 내가 응답을 받았어. 나를 따르라!’ 하고 무리하게 나간 게 아니라, 그들을 존중하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여쭤봅니다. “하나님, 정말 맞습니까?”
물론 자기도 조금 주저하는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가라. 내가 너를 통해 그들을 구원할 것이다. 적들을 네 손에 넘겨주겠다.”라고 하시니까 사람들까지 설득이 되어서 같이 갑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에는 예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상황이 벌어집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이르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7-8절)
다윗이 그일라를 구했다는 소식을 누군가가 전해주니까 사울은 기뻐서 외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다윗을 성에 가두셨다. 그 동안 광야에 숨어 다녀서 어디 있는지 몰라 잡을 수가 없었는데 드디어 잡았다. 이제는 독 안에 든 쥐다. 네 이 놈 두고 보자.” 이렇게 기뻐합니다.
지금 사울이 하나님께서 자기 손에 다윗을 넘겨주셨다고 좋아하는데,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습니까?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이 도와주신다고 하며 하나님을 갖다 붙이니까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사극 같은 데 보면, 뒤에서 음모를 꾸미며 악을 행하는 사람이 ‘일이 잘되고 있습니다.’라고 누가 알려주며 일이 자기 생각대로 잘 풀리면 뭐라고 합니까? “하늘이 우리를 도우셨구나.” 악을 행하면서 하늘이 도우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건 그것보다 더 나쁜 겁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이 도와주셨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나중에 십 광야에 다윗이 숨었다고 십 사람들이 자기에게 알려줄 때도 그들이 악한 일에 동조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그들이 하나님께 복 받기를 원한다고 축복해줍니다(21). 그것도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사울이 군대를 동원해서 자기를 잡으라고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사실 그 전에 다윗의 마음에는 약간의 기대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왕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했던 그일라 사람들입니다. 왕으로서 자기가 지켜야 하는 도시인데 다윗은 대신해서 목숨을 걸고 싸워 지켜주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사울이 ‘내가 해야 하는데 다윗이 해주었구나.’ 하면서 그의 마음이 좀 누그러지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을 분명히 갖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사울이 마음을 바꾸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이 도우셨다.’라고 하면서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온다는 겁니다. 그일라 백성들이 공격을 당할 때는 전혀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저 성은 그냥 버려라.’ 하는 식으로 오지 않더니, 이제는 그들을 구원해준 자기를 잡아 죽이겠다고 군대를 동원해서 옵니다. 이것은 정말 기가 막히고 화가 날 일입니다. 그때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10-11절)
다윗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결단을 하고 순종하여 나아갔는데, 사울이 분명히 치러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응답은 순종한 그가 기대했던 결과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순종했으면 좋은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 순종했으면 좀 평탄한 길로 인도해주셔야 되는 게 아닙니까? 그야말로 인간적인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게다가 사울이야 원래 그러니까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지만,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일라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12절)
사울이 와서 잡으려고 공격하는 게 아니라, 뒤에서 배신해서 자기를 넘겨주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다윗이 생각하게 된 겁니다. 계산에 약삭빠른 인간들의 모습을 여기서 봅니다. 이들은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도움을 받아 놓고는 어떻게 이런 식으로 배신을 할 수 있습니까? 다윗은 그일라 사람들이 자기에게 잘해줄 것을 당연히 기대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구출해주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고 자기들을 구원해주었으니 나를 도와주겠지.’라고 할 수 있는데, 런 기대가 다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뛰어넘어야 할 마지막 장애물이라는 겁니다. 우리도 이런 상황이 오면 ‘어떻게 이럴 수가! 하나님, 왜 이렇습니까?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사람들이 이렇습니까?’라고 하는 것을 뛰어넘는 게 진짜 믿음의 사람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믿음으로 결단하고 순종했을 때의 마지막 관문은, 이렇게 결과가 나빠도 극복할 수 있는가, 상황이 더 악화되어도 계속 하나님을 붙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상한 것, 기대한 것과 다른 것이 나와도 시험에 들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라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도전을 주는 책이 욥기입니다. <말씀의 삶> 때 처음으로 욥기를 읽는데,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기대한 것과 전혀 반대이고 오히려 더 나쁜 상황이 벌어져도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 수 있겠는가를 묻습니다.
이럴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일단 그일라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배신해?’ 하면서 손을 좀 봐준 다음에 떠나도 되는데, 놀랍게도 다윗은 이 상황에서 한마디 불평도 없이 그냥 떠납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말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13절)
처음에 말도 안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는 분명히 다윗에게 기대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순종하면 하나님이 분명히 상황을 바꾸어주시겠지.’ 그런데 여전히 쫓기는 신세입니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빠졌습니다. 배신까지 당하고, 정처 없는 도망자의 삶이 계속됩니다.
우리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형편 중에 시간 중에 봉사하고, 온전하게 헌금을 하고 십일조까지 하는데, 그럼 경제적인 사정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럴 때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따라갈 수가 있겠는가? 그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또 ‘내가 이렇게 속상하고 억울한 가운데서 하나님이 먼저 용서하라는 마음을 주시니까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하고 잘해주면 그 사람도 받아주겠지.’라고 기대하며 그 사람에게 나아갑니다. 진짜로 잘 받아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와 반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받아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못되게 굴고 더 쌀쌀맞게 대할 수도 있습니다. 과연 그럴 때도 실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며 계속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입니다. 상황이 나의 기대와 반대로 흘러갈 때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한 가지만 기억할 수 있으면 계속해서 순종의 삶을 살며 하나님의 역설의 비밀을 누리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 한 가지가 뭡니까? 바로, 사람들은 몰라줘도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 사람들이 비밀스럽게 한 것도 하나님은 다 아시고, 내가 지금 당하는 것도 다 아신다.’ 하는 사실, 하나님은 다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내린 어려운 결단과 헌신을 사람들은 몰라줘도 하나님은 알아주십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나아가면 견딜 수 있게 되고 인내할 수 있게 되며, 정말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자유를 느끼고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혹시 ‘에이, 진짜 그럴까?’라고 한다면 안 해보셔서 그런 겁니다. 해보십시오. 진짜 그렇습니다.
사실 순종하며 나아가도 겉으로 보면 달라진 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전히 가난하고, 여전히 감정 때문에 힘들고, 여전히 죄의 유혹에 쫓기고, 여전히 답답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게 아닙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그 순간 모든 것은 이미 달라졌습니다.
순종하기 전에는 쫓기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쫓기는 상황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똑같아 보일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엄청난 존재로 변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삶 속에서 문제와 갈등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와 갈등에 쫓기는 사람이나 무너지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해결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가난에 쫓기는 사람이 아니라 가난을 해결하는 사람, 죄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엄청난 차이가 바로 하나님의 역설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2. 순종하는 사람이 누리는 은혜 (15~29절)
이렇게 믿음으로 결단하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15-16절)
사울은 다윗을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못 찾았는데, 그의 아들 요나단은 수풀로 가서 다윗과 금방 만났습니다. 그것을 보면,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어떤 비밀 연락망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을 만난 요나단은 아주 힘든 상태인 다윗이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도록 위로해줍니다. 믿음으로 결단하고 순종하며 나아간 다윗에게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요나단을 붙여주셔서 그를 통해 위로해주신 것입니다.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머물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17-18절)
이처럼 믿음의 결단과 순종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믿음의 동역자를 붙여주시고 힘을 주시며 위로해주십니다. 우리가 정말 힘들어도 끝까지 믿음으로 나아가면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사람을 통해 위로를 주십니다. 사람을 통해 씁쓸함도 맛보지만, 이런 믿음의 동역자를 통해 위로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마음을 뒤집는 일들이 계속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넘길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하니” (19-20절)
지금 십 사람들이 다윗의 위치를 사울에게 밀고합니다. 20절을 보면 그들은 사울로부터 상을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아첨을 떨고 있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의 배신의 고통을 당한 데 이어서, 십 사람들의 이런 기회주의적인 행동으로 다윗은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또 쓴 시가 있습니다. 바로 시편 54편입니다. 거기 보면 여기도 표제가 달려 있습니다.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이 시점에 다윗이 시편 54편을 썼다는 겁니다.
<시편 54편> (새번역)
1 하나님, 주님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님의 권세로 나의 정당함을 변호하여 주십시오.
2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입으로 아뢰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3 무법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며, 폭력배들이 내 목숨을 노립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자들입니다.
4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며, 주님은 내게 힘을 북돋우어 주는 분이시다.
5 원수가 나에게 악한 짓을 하였으니, 주님이 내 원수를 갚아 주실 것이다. 주님의 진실하심을 다하여 그들을 전멸시켜 주시기를 빈다.
6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께 제물을 드립니다. 주님, 내가 주님의 선하신 이름에 감사를 드립니다.
7 주님이 나를 모든 재난에서 건져 주셨으며, 나의 이 눈으로, 원수들의 멸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위기 상황에서 다윗의 심정이 잘 느껴집니다. 그일라 사람들의 배신에 이어서 십 사람들의 이런 밀고가 이어지며, 그 가운데 느낀 다윗의 심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십 사람들의 밀고로 인하여 다윗은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거의 잡혀 죽게 된 것입니다.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25-26절)
이 사람들은 특공대입니다. 특수부대, 특전사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훈련이 잘되어 있는 군인들입니다. 지금 사울의 군대가 다윗을 잡으러 왔는데, 이제는 정말 잡혀서 죽게 된 상황입니다. 산 하나를 중심으로 이쪽으로는 사울의 군대가 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는데, 거의 잡혀서 죽임을 당하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이제는 정말 도망갈 틈이 없습니다. 꼼짝없이 잡혀 죽게 되었습니다.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 (27-29절)
너무나 놀랍게도 다윗이 꼼짝없이 잡혀서 죽게 된 바로 그 순간 사울에게 전령이 와서 “블레셋의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빨리 오십시오!” 하는 소식을 전해줍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사울 입장에서는 다윗을 다 잡게 된 상황인데 하필 이때 블레셋이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 하면 잡는데 조금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겁니다. 할 수 없이 다윗을 그냥 둔 채 블레셋과 싸우러 떠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특히 가장 잘 싸우는 이 특수부대를 그냥 놓고 갈 수가 없습니다. 블레셋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는 데리고 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셀라하마느곳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셀라하마느곳은 ‘분리하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블레셋이 쳐들어온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전령이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나는데, 어떻게 하필 그 시간에 딱 도착했습니까?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정확한 시간이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은 극한의 위기 속에 다윗을 던지신 후에 극적인 도움을 받게 하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굳센 믿음을 더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함께 하는 사람들도 어땠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구나.’ 그들도 정말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함께 한 600명이 결코 착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억울하고 원통하고 한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다윗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하면서 그들도 믿음에 대해서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바로 그렇게 믿음의 결단과 순종을 하며 하나님을 따라갈 때,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역설의 비밀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상황을 뛰어넘는 은혜를 체험하며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