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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3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6 ✦
“끔찍한 비극도 하나님의 뜻인가”
(사무엘상 22장 6~23절)
[들어가는 말]
약 2년 전부터 코로나 사태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는 동안에도 이 세상에는 사건과 사고가 계속해서 일어났고, 최근에도 비극적인 일들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지난 12월 10일 미국 중부 6개주에 불어 닥친 토네이도로 인하여 100명 가까이 사망했고, 100여 년 만에 가장 긴 지역에 걸쳐 발생한 최악의 토네이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저번에 재난지원헌금도 함께 했습니다. 또 새해 들어 1월 15일 남태평양 통가 해저 화산 폭발로 최소 7명 사망했고, 600명이 실종되었다고 하니까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국에서도 작년 6월 광주에서 철거 중이던 건물이 무너졌는데, 그 건물 바로 앞에 있던 버스 하나가 출발해서 가자마자 바로 건물이 무너져서 그 뒤에 머물러 있던 버스를 덮쳐 거기 타 있던 사람들 중 여러 명이 죽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지난 1월 11일 또 다시 같은 광주에서 아파트 붕괴로 6명의 인부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비참한 일들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날 때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2004년 인도양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와 2011년 일본 쓰나미 발생 때도 사람들이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두시는가?’
그런데 사실 역사를 보면 그러한 자연재해로 인한 어려움보다도, 사람으로 인해 일어난 끔찍한 사건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유태인 학살 사건을 비롯해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도 있고, 2001년 9.11 테러 공격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잔인한 테러 공격이나 살인사건 같이 끔찍한 일들이 발생하면 많은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이런 비참한 사건이 벌어질 때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을 막지 못하시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왜 이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주지 못하십니까? 이런 끔찍한 비극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선한 신이 될 수가 없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도 그와 같은 끔찍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제사장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모두 학살당하는 아주 참혹한 비극이 발생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그런 끔찍한 죽임을 당할 때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셨다는 말입니까? 왜 막아주지 않으신 것입니까?
1. 사울의 피해망상과 간교한 도엑 (6~10절)
지난주 본문인 22장 앞부분에서 아둘람 동굴에 있는 다윗에게 사람들이 몰려든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 후 다윗은 유다 땅으로 들어가고, 이 소식은 사울에게 즉시 보고됩니다.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그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 나무 아래에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의 곁에 섰더니,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를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6-7절)
이 모습을 보면 사울이 겉으로 뭔가 센 모습으로 보이려고 단창을 들고 앉아 있습니다. 굳이 들 필요가 없는 것을 들고 앉아 있습니다. 이때 사울은 곁에 있는 베냐민 지파 출신 신하들에게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말을 합니다. 사울도 열두 지파 중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측근들에게 지역감정을 일으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그들을 다그치면서 ‘이새의 아들’ 즉 다윗과 그들이 내통한다고 보았거나, 앞으로 내통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경고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울의 피해망상일 뿐입니다. 누가 이들 중 다윗과 내통한다는 말입니까? 그런데도 사울은 더욱 확신에 찬 말투로 그들이 공모해서 자신을 대적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하니” (8절)
이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다들 나만 미워해’입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 요나단도 매복했다가 자기를 공격하려고 하는데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이것은 정말 심한 피해망상증입니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 그것도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의심하고 아들까지도 의심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자기와 같은 베냐민 출신 신하들을 의심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들인 요나단이 자기를 치려 한다고 의심합니다. 아주 심각한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결국 이런 극단적인 피해망상 때문에 제사장 학살 만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사울이 피해망상적인 불평을 쏟아놓던 바로 그 자리에 누가 있습니까? 에돔 사람 도엑입니다. 그는 성소가 있는 놉에 갔다가 자기가 본 것을 사울에게 보고합니다.
“그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이르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는데,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음식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 (9-10절)
도엑은 이스라엘 남동쪽에 위치한 에돔 사람입니다. 그는 이새의 아들(다윗)이 놉에 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도움을 구하자, 아히멜랙이 다윗이 해야 할 일을 주님께 여쭈어보고 나서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었다고 증언합니다.
제사장만 먹는 진설병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을 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라는 말은 도엑이 지어낸 말입니다. 물론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해 기도해주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도엑이 더 극적으로 만들려고 붙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엑은 여기서 아무런 정치적 의도 없이 일어났던 다윗과 아히멜렉의 만남을 의도적인 반역으로 슬쩍 몰아가고 있습니다.
요즘 정치공작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요즘만 있는 게 아니라 옛날은 더 심했습니다. 요즘은 그래도 법에 호소하며 고소를 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증거도 필요 없고 그냥 죽이라고 하면 죽는 겁니다. 지금 도엑은 정치공작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21장 7절을 보면, 도엑을 가리켜 ‘사울의 신하’이자 ‘사울의 목자장’이라고 묘사합니다. 요즘 우리 식으로 하면 사울의 비서실장내지 비밀정보대장 쯤 되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사울의 신하였고, 목자장으로 사울의 가축들을 돌보던 측근이었습니다. 도엑은 사울의 왕궁에서 일하던 신하로서, 다윗이 와서 노래하며 연주하던 것, 또한 사울이 다윗을 좋아하다가도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그를 죽이려 창을 던진 것도 다 본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하필 다윗이 놉 제사장 아히멜렉에게로 왔던 그날 바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우연치고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경은 그가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라고 기록합니다(21:7). 그러니까 뭔가 어떤 종교의식을 하려고 놉에 있는 하나님의 성소에 와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그는 속죄 의식이나 정결 의식 같은 것을 행하려고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날 그 시간 도엑은 놉의 성소에 있다가 갑자기 등장한 다윗을 보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심하게 관찰했습니다. 왜나하면 자신의 주군인 사울이 죽이려고 찾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떡을 얻어먹는 것도, 골리앗의 칼을 받아 들고 나가는 것도 다 보았습니다. 다윗도 그가 거기 있는 것을 보았지만, 도엑이 일대일로 감히 다윗에게 맞설 수 있는 실력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굴하고 음흉하게 뒤에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왕에게 그것을 보고합니다.
곧 밝혀지게 되지만, 도엑은 사실 하나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완벽하게 정치적인 사람이었고, 자신의 유익만을 따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날 성소에서 종교 활동에 참여하고 있기는 했지만, 도엑은 그때 어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그 종교적인 장소에 왔던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면 도엑 같은 사람에게는 성소에 간 것이 자신의 변화나 성화나 영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치장하는 장식품 정도였습니다. 뭔가 죄만 계속 짓다가 양심에 찔려서 성소 제사 의식을 통해 자기 죄 용서를 받고 또 가서 죄를 짓겠다는 생각으로 온 게 확실합니다. 도엑 같은 사람에게는 성소가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찾는 장소가 아니라, 자기가 거룩하게 되었다고 위장하는 가면을 얻는 장소였을 뿐입니다.
그때 도엑과 다윗 둘 다 성소에 있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을 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도엑의 동기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도엑이 정말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었다면 수백 명의 사람들을 죽이는 그런 끔찍한 살인을 저지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도엑은 이름뿐인 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문조사에서 ‘당신의 종교는 무엇입니까?’ 하면 ‘기독교’라고 쓰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천주교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고, ‘천주교’ 또는 ‘불교’라고 써놓고는 성당에 안 가고 절에 안 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도엑도 ‘기독교’라고 써놓았지만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에게 종교라는 것은 그저 직업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이득을 얻기 위한 것뿐입니다. 도엑은 원래 성소에 올 사람도 아니고 거기서 하나님을 묵상하며 예배할 사람도 아닙니다. 사실 예배하는 때보다 예배를 안 하는 때가 훨씬 많은 사람입니다. 어쩌다 한 번 오는 건데, 그 한 번이 그날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뭔가 자신을 위한 일이 있어서 성소에 갔다가 거기서 다윗을 마침 보게 되었고, 또 다윗이 하는 일을 다 보았습니다. 그때 도엑이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야, 내가 정말 운이 좋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구나.’
지금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잘 풀리는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울도 나중에 똑같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구나.’ 다윗을 잡게 되니까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라고 생각합니다.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이 도와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도엑은 사울이 죽이려고 하는 다윗을 없애고 사울 밑에서 출세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아주 가치 있는 정보를 거기서 입수한 겁니다.
사울의 궁전으로 돌아간 도엑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기회가 곧 찾아옵니다. 사울이 신하들에게 다윗이 광야에 있다는 사실을 왜 아무도 보고하지 않았느고 분통을 터뜨리며 분노하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신하들을 향해 자신에게 대항하여 다윗과 내통하는 자들이라고 몰아붙입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 요나단까지도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막 나가고 있습니다.
기회주의자였던 도엑은 이 기회를 탁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실제로 본 것에다 약간 말을 덧붙여서, 다윗이 그곳에 도움을 구하러 왔었고 아히멜렉이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사울에게 보고합니다.
이렇게 되면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사울 앞에서 아히멜렉과 제사장들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도엑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제사장들이 죽든 말든 내가 잘되면 된다. 내가 출세하면 된다.’라고 거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합니다. 더 나아가 제사장들을 다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는 냉혹함을 보여줍니다.
이게 지금 옛날이야기입니까? 다윗이 BC 1000년경 활동하던 사람이니까 3천 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다는 것을 봅니다. 요즘도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내가 나를 가리켜서 ‘야. 내가 도엑 같은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나는 도엑 같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여기 계십니까?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엑과 같은 면이 과연 없는가 돌아봐야겠습니다.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슬쩍 고발한 적이 없느냐는 겁니다.
도엑처럼 이렇게 예배당에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도엑도 예배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 나 자신을 예배자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몸만 와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몸이 여기 와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시간을 내서 주일 아침의 황금 같은 시간에 하나님을 예배하겠다고 온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정말 잘 오셨습니다. 온라인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을 내서 그렇게 하는 게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먼저는 이렇게 몸을 움직이고 드려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몸만 와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몸은 와 있는데 생각은 다른 데 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 끝난 다음에 OOO을 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몸이 일단 와야 하지만 마음을 드려 경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 그저 내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유익이 있으면 오고 유익이 없으면 안 온다면 그것이 도엑과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찢으며 나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 결단하며 나아가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그 마음을 따라 살겠다고 결단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예배의 핵심은 와서 눈물로 찬양하고 기도하고 은혜를 받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예배이지만 예배의 핵심은 아닙니다.
예배의 핵심은 은혜를 받고, ‘이렇게 은혜와 사랑을 받았으니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하고 결단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결단이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배의 핵심은 결단이고 핵심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고 나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많은 비난을 받으며 쇠퇴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게 된 원인들이 많겠지만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합니다. 정말 예배를 많이 드립니다. 한국교회처럼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교회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예배를 많이 드리고, 성경도 많이 읽고, 프로그램도 얼마나 좋은 것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성경공부, 제자훈련 등 좋은 프로그램들이 너무 많고, 선교도 아주 열심히 합니다.
그런 게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아주 좋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하고 많이 하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삶이 어떤가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렇게 은혜롭게 했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삶이 일상생활에서 나와야 하는데, 교회에 모였을 때는 거룩하고 경건하고 영적이고 뜨겁고 좋지만, 끝나고 나가서 자기 삶으로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삽니다. 안 믿는 사람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윤리적으로 더 못합니다. 그러니까 쇠락하며 비난을 받고 있는 겁니다.
예배에서 결단은 안 하고 은혜 받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니까, 나가면 끝입니다. 사실 받은 은혜대로 살겠다고 하고 나가도 쉽지가 않은데, 헌신이 없이 그냥 끝나고 나가니까 나가는 순간 잊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예배를 제대로 드렸는지 안 드렸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께 제대로 예배를 드렸으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를 보면 됩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오자마자 ‘그 인간 말이지...’ 하면서 남을 험담하고 미워하고 그런다면 도엑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없는 이야기를 슬쩍 갖다 붙이고 중요한 것은 살짝 빼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도엑입니다. 우리가 도엑이 아닙니까? 도엑이 아니라 다윗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사울과 도엑의 제사장 학살 만행 (11~19절)
이제 도엑의 보고를 들은 사울은 즉시 아히멜렉과 모든 제사장들을 소환하여 아히멜렉을 다그칩니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아히둡의 아들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 곧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부르매 그들이 다 왕께 이른지라. 사울이 이르되 너 아히둡의 아들아 들으라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에게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냐 하니” (11-13절)
사울은 아히멜렉에게 왜 자신의 대적 다윗과 공모하여 그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먹을 것도 주고 칼도 주었느냐고 추궁합니다. 사울은 제사장을 다윗과 함께 음모를 꾸민 자라고 몰아붙입니다. 아히멜렉이 그에 대해 뭐라고 대답합니까?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호위대장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하건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크고 작은 일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 (14-15절)
아히멜렉은 다윗이 사울 왕의 사위이자 충성된 신하라는 것을 언급합니다. 굉장히 바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면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올바른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향한 사울의 적개심과 살의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다윗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기도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그것은 잘못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밝힙니다.
도엑이 강조한 것은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해서 하나님께 물었다는 것, 즉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안 했는데 했다고 한 게 아니라, 기도하면서 그를 위해 정치적으로 어떻게 하면 사울을 물리치고 왕이 될 수 있겠느냐고 했다는 식으로 몰아간 겁니다.
그런데 아히멜렉은 자기가 다윗을 위해서 평소에도 기도했고 항상 주님이 보호해주시기를 기도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장군인데, 그가 잘못되면 나라도 위험해집니다. 그러니까 다윗을 위해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과 자신의 제사장 가문에 죄를 전가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합니다.
다시 말해, 아히멜렉 자신은 다윗에게 일상적인 영적 자문을 제공하며 기도해준 적은 있지만,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즉 사울을 죽이는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다윗과 같이 음모를 꾸민 적이 없으며, 그런 계획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고 다윗에게 그런 것을 전혀 들은 적도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아히멜렉의 진실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듣기 싫은 것은 안 듣는 확증편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이 이르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너와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 하고, 왕이 좌우의 호위병에게 이르되 돌아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이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16-17절)
사울은 분노하면서 아히멜렉을 비롯하여 모든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것도 막 나가는 겁니다. 아히멜렉 한 사람이 다윗을 만난 것인데 모든 제사장을 다 죽이라고 하니 말이 안 됩니다. 그래도 신하들은 영적 지도자이며 하나님의 종들인 제사장들을 죽이기를 꺼려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사울은 도엑에게 명령하고 도엑은 그 명령을 철저히 이행합니다.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18-19절)
도엑은 사울의 명령을 받아 제사장 85명을 쳐 죽입니다. 더 나아가 놉 주민 전체 즉 거기 있던 다른 모든 남자들과 여자들과 아이들, 심지어 젖 먹는 아기들까지 또 가축들까지 전부 다 죽여 버립니다. 사울의 잔인함과 기회주의자 도엑의 잘못된 충성으로 끔찍한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던 다윗을 도와준 아히멜렉과 제사장들은 반역자이며, 그들을 처단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이 더 안전해졌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을 보면 그와 완전히 반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히멜렉과 제사장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다윗을 위해 하나님께 묻는 자들이었습니다. 즉 다윗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이 나라의 장군인 다윗을 위해서도 그렇게 기도했다면, 이 나라의 왕인 사울을 위해서는 얼마나 더 많이 기도했겠습니까? 다윗을 위해서만 기도하고 사울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사울을 위해서는 더 기도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들이었는데, 사울이 그들을 다 죽여 버린 겁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제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이제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승리의 삶을 살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자기가 조금 악하게 해도 제사장들이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니까 이 정도로 버텨온 겁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던 사람들을 싹 죽여 버리니까, 기도의 능력 없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제대로 이끌 수 있고 또 어떻게 블레셋과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사울은 자신의 시기심과 질투심 때문에 제사장들을 다 죽여 버림으로 결국 자기가 망하는 길을 더 재촉하게 된 것입니다.
망하는 사람의 특징이 바로 이런 겁니다. 자기가 망하는 길을 선택해서 나가는데 그걸 모릅니다. 자기는 잘하는 줄 압니다. 가끔 망하는 회사들을 보십시오. 어떤 결정들 때문에 회사가 무너집니다. 잘못된 결정들이 쌓이면서 무너지는데, 자기들은 잘하는 결정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잘못된 결정이었던 겁니다. 보는 눈이 없었던 겁니다.
여러분, 오늘로 치면 제사장이 누구입니까? 많은 분들이 요즘 제사장은 목사라고 합니다. 또 많은 목회자들이 ‘목사가 제사장이다.’라는 식으로 은근히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놓고 이런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보십시오. 목사를 공격하면 안 됩니다. 목사는 공격하면 안 되고 공경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잘못 가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목사도 제사장 맞습니다. 제사장에 목사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베드로전서 2:9에서 뭐라고 합니까?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목사만 제사장이 아니라 ‘너희’ 즉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다 제사장입니다. 바로 우리 각자가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저도 제사장이고, 여러분도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 세상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제사장이 뭐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필요를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중간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 제사장의 대표 대제사장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과 필요를 하나님께 기도로 올려드리며 ‘하나님,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는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품고, 이 세상을 품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장이 바로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나 자신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즉,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겁니다. 사울이나 도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분 나쁘다고 이렇게 학살을 자행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제사장이 내 마음에 안 드는 말과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사장을 죽이겠습니까? 그럼 나를 위해 기도해줄 사람이 없어지는 겁니다.
‘아니, 내가 무슨 누구를 죽였다고 그러나?’라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형제자매를 향하여 뒤에서 욕을 하거나 험담을 하는 것이 그런 겁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안 보는 데서 해야 할 것은 험담이나 욕이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한 칭찬과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없으면 불행합니다. 있어야 합니다. 특히 믿음의 집안에서 자라 ‘모태신앙’인 것이 요즘은 그리 자랑스럽지 않은 게 되었는데, 그래도 정말 자랑스럽고 감사한 게 한 가지는 있습니다. 나를 위해 부모님이 기도해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우리 중에 늦게 믿은 분들이 계십니다.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안 믿으셨기 때문에 나를 위해 기도를 못해주셨다.’ 하고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나는 그랬지만 내 자녀는 어떻습니까? 내 기도를 받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감사한 일입니다.
기도를 믿고 나아가야 기도로 어려움이 해결되는데, 기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사탄의 역사를 물리치며 나아갈 텐데, 예배의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예배를 드리기가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온라인으로 하고 이제는 마스크 쓰고 꽤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전혀 예배를 안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 손해입니까? 교회 손해입니까? 완벽한 자기 손해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면 괜찮은데, 믿는 사람이라면 자기 손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길로 가게 되고,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선택해서 가면 잘못된 길로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것이 사탄의 속임수인데, 거기에 넘어가서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경계하며, 나 자신이 제사장임을 깨닫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동시에, 다른 성도들도 제사장임을 기억하며 그들을 존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3. 악한 상황에 대한 다윗의 대답 (20~23절)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인 일을 다윗에게 알리매” (20-21절)
제사장들에 대한 대학살이 벌어지던 와중에 아히멜렉의 아들 중 아비아달 한 사람이 간신히 도망하여 다윗 진영으로 와서 이것을 보고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자신이 아히멜렉 가문 제사장 학살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아비아달을 보호해주겠다고 그를 안심시킵니다.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말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하니라” (22-23절)
다윗은 ‘내 탓이다. 내가 책임이 있다.’라고 인정합니다. 놉 제사장 대량 학살을 총지휘한 에돔 사람 도엑은 다윗의 생애에 걸쳐서 가장 강한 분노를 일으킨 최고의 악인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였던 존 캘빈(장 칼뱅, John Calvin)도 도엑을 ‘최고의 악한’이라고 불렀습니다.
놀랍게도 다윗이 도엑 때문에 지은 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52편입니다. 시편 52편은 최고의 악인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다윗의 신앙적 대답입니다. 엄청난 비극이나 끔찍한 사건이 터질 때 사람들이 하는 질문, ‘도대체 그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왜 막지 못하셨는가?’에 대한 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시편 52편에는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에게로 가서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와 있다고 알렸을 무렵에 다윗이 지은 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시편 52편을 보십시오. 다윗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편 52편>
1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2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3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4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5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6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7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8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9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이 시편은 다윗이 아히멜렉을 방문한 것을 정치적인 반역 음모라고 중상 모략하여 놉의 제사장들을 다 죽여 버린 도엑의 만행에 대한 다윗의 분노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도엑을 가리켜 여기서 ‘포악한 자’(1), ‘날카로운 삭도’(2), ‘간사한 혀’(4)라고 묘사하면서, ‘하나님을 자기의 피난처로 삼지 않고, 제가 가진 많은 재산만을 의지하며, 자기의 폭력으로 힘을 쓰던 자’(7)라고 정의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런 악인을 멸하시고 땅에서 뿌리 뽑아 버리실 것을 확신하며 노래합니다(5). 그에 반해 자신은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8) 같다고 묘사합니다. 푸른 감람나무는 싱싱한 올리브기름을 만드는 나무로서, 하나님을 언제나 신뢰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함으로 어떠한 악도 행하지 않는 의인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자신이 겪은 사건들이나 의인 또는 악인들의 행동을 보고, 신앙적인 원칙과 지혜를 깨달으며 터득해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점점 더 잘 배우며 나아갔습니다. 다윗은 권력과 재물을 의지하는 도엑의 길은 반드시 망할 것을 믿으면서, 자신 때문에 학살당한 놉 제사장들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는 이처럼 애매하고 죄 없는 희생이 꽤 많이 벌어집니다. 놉 제사장들은 악한 자들에 의하여 안타깝게 희생된 사람들입니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 암매장당한 아담과 하와의 아들 아벨 계통의 희생자들인 것입니다. 아벨은 사람들에게는 죽은 자이지만 하나님께는 죽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살해당한 아벨의 피 소리가 하나님께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창 4:10).
이처럼 끔찍한 비극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악한 자들이 일으키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악이 많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악도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는 데 변화시켜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피 소리는 정의로운 역사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며, 하나님이 반드시 기억하시고 갚아주십니다. 선지자 이사야와 다니엘은 신앙을 지키다가 죽은 의인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 칠 것입니다. 주님의 이슬은 생기를 불어넣는 이슬이므로, 이슬을 머금은 땅이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땅이 죽은 자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이사야 26:19, 새번역)
“그리고 땅 속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깨어날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수치와 함께 영원히 모욕을 받을 것이다.” (다니엘 12:2, 새번역)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의 스타였던 요기 베라(Yogi Berra)가 한 말이 아주 유명합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이 땅에서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닙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끝났다고 하실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의인을 분명히 빛으로 인도해주십니다.
왜 이렇게 악이 많은지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의인을 분명히 인도해주시고 그 억울함과 아픔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늘도 사울이나 도엑의 악한 길이 아니라, 비록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간절히 주님을 찾고 신뢰하며 나아간 다윗의 길을 걷기로 결단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