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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l9gPavKUrcw?t=1975

 

 

202226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5

치유와 회복의 공동체

(사무엘상 221~5)

 

[들어가는 말]

 

요즘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합니다. 실제로 2년 정도 지속되고 있는 이 코로나 상황 때문에 다 어렵습니다. 미국도 어렵고 한국도 어렵고 전 세계가 다 어렵습니다. 지금 동계올림픽이 베이징에서 시작되었는데 확진자가 선수들과 임원들 가운데 나오고 있는데, 선수들은 확진이 되면 뛸 수 없기 때문에 4년 동안 준비해온 것이 물거품이 되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따지고 보면 코로나 때문에만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렵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 삶은 항상 어려웠습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생각해보시면 몇 십 년 전에도 어려웠고, 그 조금 후에도 어려웠고, 지금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기가 특별히 어렵다기보다는 가장 어려운 때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을 때라고 생각됩니다.

 

악한 자들이 권력을 쥐고 흔들 때,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그래서 억울하고 원통한 사람들이 많이 나올 때, 그 사회는 악한 사회입니다. 그런데 고대사회는 정말 악한 사회였습니다. 힘 있는 자들이 힘 없는 자들을 마음껏 유린하던 악한 사회였습니다.

 

한국도 1980년대까지 독재정권 아래서 국민들이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1990년대 이후 민주화가 되어, 이전에 비하면 엄청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얼마나 자유가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독재정권 시절보다 지금이 더 불평불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불평불만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그런 것을 표현하면 잡혀갔는데, 이제는 표현해도 괜찮으니까 더 많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리고, 원통해 하고, 억울해 하고 있습니다. 재판을 받아도 억울하다고 합니다. 대법원 판결이 나도 억울하다고 합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다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시위를 벌이기도 하고, 폭력을 사용하기도 하고, SNS를 통한 불만을 폭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생길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또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가 어떻게 대할 것인가? 오늘 본문에서 그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제시해줍니다.

 

 

1.   아둘람 굴에서 훈련받는 다윗

 

지난주 본문인 21장에서 다윗은 사울에게서 피하여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갔는데, 그가 제사장이고 영적 리더였지만 다윗에게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또 다시 불안한 마음으로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적국인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갑니다.

 

그러나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의 정체를 알아보는 바람에 다윗은 그곳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왕의 말 한마디면 죽임을 당할 수 있는 때에 다윗은 아기스 앞에서 미친 사람 행세를 하여 위기를 넘기고 다시 그곳을 떠나 도망을 합니다. 그 후 이야기가 오늘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1)

 

이제 다윗은 블레셋 가드를 떠나 아무도 없는 유대 광야의 아둘람 굴로 피신합니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교회들이 공동체 이름을 아둘람 공동체라고 짓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부터 다윗의 도망자 생활은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생활이 됩니다. 성경은 모든 정보를 주지 않는데, 여기서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안이 다윗 소식을 듣고 그리로 간 것을 보면 그 동안도 서로 소식을 주고받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의 형들과 온 집안이 아둘람 굴에서 다윗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다윗은 막내아들로서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중 하나에게 기름 부으러 왔을 때 부르지도 않았고 철저히 무시당하며 소외당했던 천덕꾸러기 막내아들이었습니다. 그랬던 그에게 온 가족이 함께 왔다는 것은, 무시하던 아들이 의지의 대상이 된 것을 보여줍니다.

 

이미 왕으로 세움을 받았고 이스라엘의 엄청난 장군으로 존경받으며 성장했기에 이제는 온 가족이 그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몰려듭니다. 다윗이 여기 있다는 소식이 어떻게어떻게 전해졌다는 겁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2)

 

다윗이 이들의 우두머리(commander)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이제 정치적인 지도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윗에게 몰려든 사람의 수가 400명가량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남자만 400명이고 사실은 군인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이상 되는 무리가 다윗에게 모여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까지 하면 천 명은 넘는 수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성경을 계속 읽어보면 이 아둘람 굴에 모여든 사람들이 나중에 소위 다윗의 사람들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이들이 훗날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다윗의 생애 내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충성스러운 부하가 됩니다.

 

그 당시는 사울이 왕이기는 했어도 사사시대 말기였고 사무엘이 마지막 사사였는데, 사사시대 말기와 왕국시대 초기의 어지러운 과도기였습니다. 그런 시기에 강한 자들에게 억눌리고 착취당하는 억울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시대가 바뀌는 사이의 시대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권력이 바뀔 때 더욱 그렇습니다.

 

이들은 그 당시 나타난 빈부의 격차와 지방 세력들의 권력 남용으로 자신의 기업으로 받은 땅에서 내쫓긴 난민들이었습니다. 여호수아 정복전쟁 후 땅을 나누어주었는데, 받았던 땅을 강한 자들에게 빼앗겨서 떠돌아다니게 된 사람들이 여기 모인 겁니다.

 

다윗은 당시 그렇게 낡고 부패한 사회의 희생자들이 모여들었을 때, 그들의 그러한 원통함을 오히려 역사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바꾸는 놀라운 리더십을 발휘합니다. 다윗을 가만히 보면 그는 정말 놀라운 리더입니다. 이제 그는 단지 박해를 받고 추격당하는 도망자가 아니라, 새 시대를 기다리는 가운데 그때가 오기 전에 사람들을 미리 준비시키고 이끌어가는 위대한 영도자가 됩니다.

 

그런데 압제를 받는 사람들,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함께 모였으면 어떤 모습이었겠습니까? 상상을 해보십시오. 아주 아름다운 모습,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였겠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이런 일을 당했다.’ ‘그래? 그건 별 것 아니다. 나는 이런 걸 당했다.’ ‘그건 진짜 별 것 아니다. 나는 더 힘들었다.’라고 서로 자기가 더 힘들었다고 하며 얼마나 서로 싸웠겠습니까?

 

아둘람 굴은 온갖 부정적인 시각과 감정들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절망과 원한과 증오와 분노와 자포자기와 무기력함 등이 가득하고, 사람들은 아무 희망을 갖지 못하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겠다고, 다윗이 거기 있다니까 모인 겁니다. 특히 떠돌아다니던 군사들이 거기로 모인 겁니다.

 

사실 다윗은 음침한 동굴에 살면서 자기 자신도 간신히 돌볼까 말까 하는 상태였을 텐데, 그런 사람들이 모여들어 탄식하고 아우성치며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볼 때 어땠겠습니까? 그는 그런 모습을 보며 두 가지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첫째는,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사람들 때문에 무거운 부담감과 막막함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지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둘째로, 그들의 원망과 아우성과 한탄을 보면서 그들에 대한 깊은 공감을 가지며 왜 저들은 이렇게밖에 될 수 없는가? 왜 이 나라는 저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고 그런 마음이 그를 강하게 단련했을 것입니다.

 

첫 번째 마음인 부담감과 막막함과 지친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 시편 142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믿음의 결단을 하며 나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57편입니다.

 

먼저, 142편을 보면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교훈) 곧 기도라는 표제가 붙었습니다. 그러한 시편 142편은 당시 그의 곤고한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142, 새번역>

1 나는 소리를 높여서 주님께 부르짖는다. 나는 소리를 높여서 주님께 애원한다.

2 내 억울함을 주님께 호소하고, 내 고통을 주님께 아뢴다.

3 내 영혼이 연약할 때에 주님은 내 갈 길을 아십니다. 사람들은 나를 잡으려고 내가 가는 길에 덫을 놓았습니다.

4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를 도울 사람이 없고, 내가 피할 곳이 없고, 나를 지켜 줄 사람이 없습니다.

5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 사람 사는 세상에서 내가 받은 분깃은 주님뿐"이라고 하였습니다.

6 나는 너무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부르짖으니, 내게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져주십시오. 그들이 나보다 강합니다.

7 내 영혼을 감옥에서 끌어내주셔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게 해주십시오. 주님께서 내게 넘치는 은혜를 베푸시니, 의인들이 나를 감싸줄 것입니다.

 

다윗은 무엇보다 자신의 억울한 사정으로 인해 굴속에서 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한탄만 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 소리 내어 기도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원통함과 억울함과 힘든 상태를 호소했습니다.

 

그는 아무 도움도 발견하지 못한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 외에 의지할 분이 없는 비천한 자신에게 몰려든 이 무리들을 보면서, 상하고 깨진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로 인하여 하나님께 더욱 부르짖으며 나아갔습니다. 다윗은 그 상황에 화를 내고 사람들을 쫓아낸 게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 부르짖음 속에서 자신이 무력하고 비천하다고 생각한 그 생각의 감옥으로부터 자신을 이끌어내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다윗은 몰려든 이 무리들을 보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고민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까?’ 하는 것만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자기 주변에 모이니까 자기만을 생각할 수가 없는 겁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에게 몰려든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끄시는 흐름을 느끼게 되고, 그 흐름을 따라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뭔가 뜻이 있어서 이 사람들을 보내주시는구나하는 것을 분명히 느꼈습니다.

 

다윗이 동굴 안에서 자기연민에 빠져 원통함과 억울함을 호소하기만 했겠습니까? 사람들이 자기가 힘들다고 해도 아무리 해야 나보다 힘들까?’ 하며 면박을 주었겠습니까? 동굴 밖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그는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찾아 몰려든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을 가리켜 자신을 감싼 의인들’(142:7)이라고 표현합니다. , 자신과 함께 새 역사를 함께 개척해나갈 동역자들로 그들을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정말 형편없는 무리인데, 그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붙여주셨고 이들과 함께 뭔가를 이루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나아간 것입니다.

 

또 시편 57편은 자신의 비천한 아둘람 동굴에 몰려든 400명 이상의 사람들을 품고 하나님께 드렸던 다윗의 기도를 보여줍니다. 57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를 배경으로 지어진 다윗의 시인데, 다윗이 동굴에서 나와 동굴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미리 내다보면서 노래한 예언자적 시편입니다.

 

<시편 57>

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2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3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4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5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6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9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0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11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조금 전에 부른 <내가 만민 중에>의 가사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에서 지난번 불렀던 <모든 상황 속에서> 가사가 따온 겁니다. 그리고 <오 주여 나의 마음이> 찬양곡도 여기서 나온 겁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시편이면 사람들이 여기서 가사를 따서 곡을 지었겠습니까?

 

다윗은 굴 속에서 어려운 상황인데 이런 노래를 했다는 겁니다. 성경의 모든 부분이 그렇지만 시편도 그냥 읽을 때 마음에 와 닿고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이 시가 나왔다는 것을 알면 더 은혜가 됩니다. 그냥 읽는 것보다 그 배경을 알고 읽으면 , 이런 상황에서 이런 노래를 할 수 있었나!’ 감탄하게 되고 도전을 받고 배우게 되며 믿음의 결단을 하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닥친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하나님께 피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자신에게 닥친 곤경을 언급합니다. 그는 창과 칼과 화살과 사나운 사자들을 보내어 자신을 추격하는 사울 왕의 악한 계획을 무력하게 만들 군대를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보내주실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자와 진리를 보내주실 것을 신뢰합니다.

 

그는 곤경에 처한 자신이 거기서 나올 때 하나님의 이름이 만민 중에 높아지기를 원한다고 노래합니다. 그는 새벽이 올 것을 믿고 새벽을 깨우기로 작정합니다. 새벽기도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여기 이 말씀을 보며 새벽에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사실 새벽에 기도하는 게 좋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항상 일찍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뒤덮고 있는 어둠을 몰아내고 새벽을 깨우기로 결심하고, 동터 오는 새벽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분명히 오게 될 새벽의 시간에 높아지고 존귀하게 되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때 다윗은 20대였다는 겁니다. 나이가 많아서 새벽잠이 없으니까 새벽에 잘 일어나서 기도한 게 아니라, 한창때인 20대 청년 때 도망자 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다윗이 그토록 고단한 도망자 생활을 견디면서도 치졸한 복수심이나 적개심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하나님과 늘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믿었고, 또 사울의 광기를 진정시키고 어둠을 몰아내고 새벽을 열어주실 하나님에 대해 굳건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때문에 400명의 억울하고 원통한 사람들을 쓰다듬고 보듬어주고 이끌어주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제 400명의 남자들로 인해 다윗은 사울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군사력의 토대를 어느 정도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 혼자나 몇 명의 부하로는 엄두도 못내는데, 400명이나 되는 군사가 오니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그는 어떻게 합니까?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3-4)

 

성경퀴즈에 많이 나오는데, 다윗의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이새입니다. 이새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오벳입니다. 오벳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보아스입니다. 보아스가 다윗의 증조할아버지입니다. 그런데 보아스의 아내가 누구입니까? 바로 룻입니다. 구약 룻기에 나오는 그 룻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룻입니다. 룻이 어디 출신입니까? 모압 출신입니다.

 

다윗은 증조할머니 룻의 고향인 모압의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자신이 자리 잡을 때까지 자기 부모를 모압에 머물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부모는 다윗이 아둘람 요새에 거할 동안 모압 왕의 후원 아래 살게 됩니다.

 

다윗은 사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무시를 당했던 아들인데, 놀랍게도 부모를 이렇게 돌보는 것을 봅니다. 다윗은 효자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군사적인 생각도 있는 겁니다. 자기 가족이 인질로 잡히면 굉장히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겁니다. 그리고 이때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오는데 뭐라고 합니까?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5)

 

지금 놀랍게도 이곳을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이때부터 유대 광야 일대를 전전하게 되는 다윗의 본격적인 피난 생활이 시작됩니다. 이때는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같이 움직이는 겁니다. 아둘람 요새는 훤히 드러난 곳이라서 사울 군대의 공격을 받기 쉬운 곳이었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통해 다윗이 유다 땅으로 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2.   치유와 회복이 있는 아둘람 공동체

 

우리가 오늘 조금 더 살펴볼 것은 바로 아둘람 굴에 모여든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다윗은 뭔가 더 준비된 곳,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아둘람이라는 동굴로 가게 하시고 거기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아둘람 굴로 가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셨는지 알지 못한 채로 갔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지시하시니까 거기 가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고 갔을 것입니다. 다윗이 무슨 사울을 대항하여 원대한 쿠데타 계획을 가지고 아둘람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여 들면 거기서 군사작전을 펼치겠다고 한 게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심에 있어,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앞길을 그대로 촥 보여주시면 얼마나 좋겠는가 합니다. 그러면 불안해하지 않고 그 길로 죽 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생각이고 하나님은 항상 바로 앞에만 보여주십니다. 거기까지 가면 또 그 다음 앞을 보여주십니다.

 

캄캄한 밤에 손전등을 들고 갈 때 멀리 비추면 잘 안 보입니다. 바로 발 앞을 비추면 보이고 거기까지 가면 또 그 앞이 보이는 것처럼, 좍 다 보여주시면 좋겠는데, 하나님도 우리 바로 앞을 보여주시고, 거기까지 가면 또 보여주시고 거기까지 가면 또 보여주시면서 인도해십니다. 마지막 결론까지 다 알고 따라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냥 가라고 하시니까 우리는 순종해서 갈 뿐입니다. 그냥 따라갑니다. 그게 믿음생활입니다. 가라고 하시니까 따라가는 겁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이르자 어떻게 알았는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그의 부모 형제들과 친지들이 모이고, 이어서 4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실 다윗이 괴로웠던 것은 환경 탓이 아니라 자신을 괴롭히는 대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400여 명의 사람들을 붙여 주시고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해주신 것입니다.

다윗이 사람들에게, 특히 사울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는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입니다.

 

오래 전 읽었던 <공동체 101>(Community 101)이라는 책이 있는데, 저자는 길버트 빌레지키안(Gilbert Bilezikian)이라는 분입니다. 그분은 시카고 인근에 있는 휘튼대학(Wheaton College)의 교수였던 분입니다. 그분이 원래는 프랑스 출신입니다. 요즘에는 문제가 생기기는 했지만 19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미국 교회 트렌드를 이끌었던 윌로우크릭교회의 장로이고 창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멘토였습니다. 그분이 쓴 책인데, 공동체에 대한 아주 탁월한 책입니다. 그 책 서문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꿈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대답해야 한다면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그것은 공동체이다.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꿈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는 시편의 아름다운 말씀을 이해하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다.”

 

나중에 다윗이 성전에 올라가며 쓴 시편 133편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이것이 바로 이 아둘람 공동체의 경험을 기초로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공동체 생활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집에서도 무시당하는 막내였고, 별로 사랑과 가족의 따뜻함을 모르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랬던 사람이 어떻게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하는 노래를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뭔가 공동체 경험이 있는 것인데, 그게 바로 아둘람 공동체의 경험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면서 가지셨던 공동체에 대한 꿈, 이스라엘을 택하시면서 가지셨던 공동체의 꿈, 예수님이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불러 모아 그들과 교회 공동체의 기초를 놓으셨던 것, 그리고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시작된 초대교회 공동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원하신 것입니다.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꿈은 한 번도 포기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공동체에 대한 꿈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토록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공동체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비극의 출발입니다. 공동체가 없는 신앙생활은 참으로 불행한 삶입니다. 한국교회가 많은 비난을 받게 된 것도 공동체가 많이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전 중심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둘람 공동체에서 그러한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꿈이 나타났습니다. 그렇다고 아둘람 공동체가 완벽한 공동체인 것은 아닙니다. 형편없는 모습도 많고 온갖 문제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꿈이 거기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윗 때문입니다. 아둘람은 아주 특별한 상황이었고 주로 억울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지만, 아둘람 공동체가 보여주는 모습은 바로 우리가 배워야 할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실 때 그냥 위에서 군림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신앙 공동체의 리더로 세우셨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둘람 공동체를 통해서 다윗을 훈련시키셨습니다. 도망자 생활을 통해서도 훈련시키셨지만, 특히 도망자 생활 동안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다윗을 키우셨습니다.

 

사울은 그런 공동체 경험이 없습니다. 그는 공동체의 리더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참 목자가 될 수 없었고, 왕이 되자마자 바로 타락해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미 양들을 치는 목자로서 양들을 잘 돌보는 것을 어린 나이 때부터 배웠고, 또 아둘람 공동체를 이끄는 목자이자 리더로서 굉장히 힘든 사람들을 데리고 이끄는 공동체의 리더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어떤 사람보다 더 힘들게 하는 사람들만 모인 곳이 이 아둘람 공동체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러한 공동체의 경험과 훈련을 충분히 하도록 이끄신 다음에 그를 왕위에 오르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에는 실수가 없습니다. 정확합니다. 괜히 도망자 생활을 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참된 크리스천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공동체를 섬기는 리더로 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둘람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였습니까? 거기 모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면 대략 알 수가 있습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2절 상)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모인 공동체가 아둘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동체는 이런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교회가 환난 당한 사람들(압제를 받는 사람들),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모임이어야 한다면, 교회가 무슨 낙오자나 패배자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성공한 사람들은 올 수 없는 곳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세상에 살면서 환난을 당하지 않거나 빚진 것이 없거나 원통함이나 억울함이 전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들 겉으로 멋지게 보이고 다 웃고 있지만, 실제로 속은 썩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숨기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싫어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위장하거나, 몸과 정신이 힘들어 약을 먹고 견디는 것이지, 속으로는 정말 힘든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냥 속이고 숨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도 자신의 실제 모습은 다 감추고 그저 밝고 편안한 모습만 보이면서 진짜 모습을 숨기고 있다면 어떻게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고 어떻게 그것이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가지고 있는 아픈 상처는 다 감춘 채 겉으로 화려하고 멋진 모습만 보이며 실제 모습을 감춘다면, 자신도 치유될 수 없고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문제를 무조건 다 내놓으라는 게 아니라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는 양면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도 있지만, 속마음이 따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와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합니까? 그저 화려하고 멋지고 성공한 모습입니까, 아니면 속에 있는 아픔과 고통입니까?

 

물론 무조건 힘든 것만 말하고 일부러 괴로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픔이 있을 때는 그것을 숨기지 말고 내어놓자는 것이고, 그럴 때 서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기도해주며 세워주는 것입니다. 솔직한 나눔을 했을 때 그것을 판단하고 조언하는 게 아니라, 같이 아파하고 기도해줄 때 진정한 치유와 회복이 공동체를 통해 일어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위장하고 숨겨서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안은 썩고 곪아 있는데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면 어떻게 치유될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바로 그렇게 서로를 세워주고 격려해주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으로 모여서 자신의 기쁨도 나누고 아픔도 나누고, 그런 중에 우리를 신실하게 인도해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을 나누고, 자신의 삶을 나누며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공동체가 될 때 그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아둘람 공동체에 모인 사람들이 환난을 당하고 빚진 자가 되고 마음이 원통하고 억울하게 된 것은, 사실 자신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강한 자의 횡포와 폭력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빚진 자는 좀 아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빚진 자라는 것은 요즘처럼 급해서 돈을 빌려서 빚쟁이들에게 쫓겨서 아둘람에 도망 온 게 아니라, 힘 있는 자에게 자신의 기업을 강탈당한 경우를 말합니다. 돈을 빌려서 빚진 게 아닙니다.

 

아둘람은 그런 사람들이 모여 서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세워주는 공동체가 되었다는 겁니다. 다윗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자기들끼리 모였으면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교회가 바로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하다 어려움을 만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다른 성도 때문에, 또는 직장이나 주변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을 형제자매들과 솔직히 나누고 기도하는 순간, 사실은 그것을 말한 것만으로도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꾸 이런 자신의 아픔을 고백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자꾸 남을 고발하는 쪽으로 나가게 됩니다. 고백하지 않으면 고발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꾸 고백할수록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가는 말]

 

정확히 4년 전 이맘때 가정교회 집회를 했는데 강사로 오신 최영기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그분이 사실은 오래 전 이곳 OSU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입니다. 집회 때문에 오셨을 때 오래 전 살았던 곳을 방문하고 싶다고 하셔서 함께 캠퍼스에 가서 사셨던 기숙사와 집에 가보았습니다.

 

그때가 2월이었는데 오시기 바로 그 전 주쯤에 이번에 온 것보다 눈이 엄청나게 많이 왔습니다. 그래서 차들이 눈을 치웠는데 제 키보다 더 높게 쌓인 곳들이 많았습니다. 그때가 2월이었는데도 이상하게 방문하셨던 그날은 온도가 화씨 70도까지 올라갔습니다. 2월에 70도이면 이상기온인데, 걸어가면서 보니까 길이나 잔디밭에 있던 눈들은 날씨가 더워서 다 녹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산처럼 쌓여 있는 눈덩이들은 전혀 녹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것을 딱 보고서 , 이게 공동체다!’라고 느꼈습니다. 그게 공동체의 파워입니다. 함께 모여 하나 된 파워입니다. 불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원에 가서 숯불로 고기 구워먹을 때 활활 타는 불도 흩어놓으면 꺼집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함께 뭉치고 하나가 되어 서로 아픔을 나누고 위로해주고 세워주고 기도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거기에 파워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함께 이루어 가야 할 것이 바로 이러한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생활이 없이는 제대로 된 신앙생활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처음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시던 분들이 한국으로 돌아가서 적응을 잘하지 못하여 교회에 안 나가는 케이스들이 생겨서 안타깝습니다. ‘교회를 꼭 나가야만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까?’라고 할 때 이론적으로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또 성경적으로 보아도, 교회를 나가야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안 나가고도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일입니다. 해보면 다 압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시는 분들은 꼭 교회를 잘 정해서 나가시기 바랍니다.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이 시대에 교회가 사람들의 상한 것과 깨진 것과 아픈 것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아둘람과 같은 공동체를 이룰 때 우리에게도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아픔을 나누며 위로해주고, 기쁨을 나누며 함께 기뻐하는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기 원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체험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재미있는 모임들이 많은데, 순간적으로 재미는 있지만 끝나고 나면 허무함 밖에 안 남습니다. 남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유치해 보일 수도 있고 나이브(naive)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하나 되어서 서로 들어주고 이야기하고 나누고 기도고 그럴 때 거기에 따뜻함이 있고 치유가 있고 회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으로 나가는 겁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특히 이런 치유와 회복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함께 나가서 그들도 주님의 이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서 주님의 치유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돕기를 원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문제는 정말 많은데 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 모든 답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려주는 겁니다.

 

서로 사랑하고 세워주며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가운데 밖으로 나아가서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알려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살 때 그것이 나 자신을 살리고 내 가정을 살리고 주변을 살리고 더 나아가 사회를 살리고 이 땅의 역사까지 바꾸는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둘람 공동체를 통해 성숙해졌던 것처럼, 그러한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져갔던 것처럼, 그가 준비되었던 것처럼, 우리를 통해서도 그러한 풍성한 역사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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