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p10-7eoFnts?t=2088
2021년 1월 10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40 ✦
“마침내 이루어진 화해”
(창세기 33장 1~17절)
[들어가는 말]
작년 11월에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코로나 사태 때문에 사람들이 우편으로 사전투표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결과를 집계하면서 발표하는 선거 개표 방송을 마음 졸이며 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지자들도 그랬을 것이지만, 특히 후보자 본인들은 정말 마음을 졸였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이번에 상원의원, 하원의원 선고도 많은 주들에서 있었는데, 처음부터 큰 표 차이로 이기고 있으면 크게 긴장감이 없지만, 박빙의 승부를 펼치며 이쪽 후보가 이기다가 차이가 줄어들며 저쪽이 다시 앞서다가 또 뒤집어지고 하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 특히 당사자들은 얼마나 마음이 떨렸겠습니까?
운동을 좋아하는 분들도 비슷합니다. 특히 자기가 좋아하는 팀이 게임을 할 때 그렇습니다. 이곳 Ohio State football 같은 경우 올해 대학풋볼 챔피언십에 올라가서 내일 밤 앨라배마 대학교와 결승전을 합니다. 경기에서 아주 치열한 접전을 펼치면서, 축구, 야구, 풋볼, 농구 등에서 비슷하게 하며 아슬아슬하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 얼마나 손에 땀을 쥐며 긴장감이 있습니까?
관중들이나 TV로 시청하는 팬들을 물론이고, 직접 경기를 하는 선수들은 아주 긴장감 속에서 경기를 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 점으로 승부가 갈리는 순간에 점수를 내는 선수들이 수퍼스타입니다.
그렇게 전혀 예측할 수 없이 손에 땀을 쥐고 보게 되는 마음, 아주 애가 타는 마음,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마음이었습니다.
1. 드디어 에서와 만나는 야곱
지금까지 인생에서 가장 길고도 긴장된 밤을 보낸 야곱은 몇 시간 전에 천사와 싸우느라 탈진할 정도로 지쳤습니다. 게다가 골반 뼈를 맞아서 탈골되었기 때문에, 다리가 너무 아프고 저는 상태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완전히 새롭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드디어 에서를 만나게 됩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1-2절)
여기 보면, 야곱은 에서를 만날 때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어 공격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피할 수 있도록 가족들을 배치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그런데 여종과 그들의 자식들은 가장 앞에 두고, 두 번째로 레아와 그 자식들은 그 뒤에 두고, 가장 사랑하는 라헬과 요셉은 맨 뒤에 둡니다(2).
야곱은 왜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라헬을 가장 사랑하니까 라헬과 요셉은 살리고 나머지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전쟁터에서의 총알받이처럼 여종들과 그들의 아들들은 에서가 공격할 때 먼저 죽어도 좋다는 생각에서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안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가족 중에 일부라도 건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솔직히는 이런 순서로 살리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배치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400명이 공격을 한다면 앞에서만 공격하겠습니까? 옆에서도 공격하고 돌아서 뒤에서도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라헬과 요셉을 가장 보호하겠다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세 떼로 나눔으로써 공격이 올 때 누구라도 피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라헬과 요셉이 가장 안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에 가장 뒤에 배치를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그가 하나님을 만나 야곱(비열한 자)에서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로 변화되었지만, 아직 그의 마음속에는 극복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불신앙의 흔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람 자체가 단번에 완전히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옛 모습이 계속 남아 있습니다.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이후에도 그러한 그의 모습이 계속 나타납니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3절)
이제 자신이 있는 곳에 에서가 400명을 데리고 온 것을 본 야곱은, 에서와 그가 데리고 온 사람들 앞에 혼자 나가서 무려 일곱 번이나 몸을 땅에 굽히며 절을 합니다. 혼자 먼저 맨 앞으로 나아간 사실을 보면, 꼭 가족들 특히 라헬과 요셉만 보호하려고 뒤에 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가장 용감하게 앞으로 나갑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자기가 가장 마지막에 나갔을 텐데, 이것을 보면 변화된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일곱 번이나 절을 했다는 것, 이런 것은 에서가 아무리 형이라도 형제 사이에 취할 자세가 아닙니다. 이것은 신하가 왕에게 하는 자세이지 형제 사이에 할 일이 아닙니다. 최대한의 예의와 존경을 표한 것입니다. 뒤에 보면 에서를 향해 ‘내 주’라고 부르는데, 굉장히 존경의 마음을 표현하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이 에서 앞에서 일곱 번이나 절한 것은 아부하는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부하거나 비열하거나 모면하려는 행동이 아니라 사실은 아주 굉장한 행동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형제 사이입니다. 그것도 10년, 20년 차이가 나는 형제가 아니라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형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 앞에서 야곱이 이토록 자신을 낮추었다는 것은 그가 진짜로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는 표시가 됩니다. 이것은 정말로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원래 야곱이 이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일곱 번이나 절할 사람이 아닙니다. 이럴 정도로 낮출 필요까지는 없는데, 에서 앞에서 이토록 자신을 낮추었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지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 밑에 굴복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자기가 높아지려는 교만한 본성이 있습니다. 웬만해서는 남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습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정치 지도자들이 실수하고 자기 잘못이 드러날 때 진심을 다해 잘못을 시인하며 용서를 구하고 사과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거의 없습니다. 아니, 아예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과를 하기는 하더라도 뭐라고 합니까? ‘제가 이렇게 잘못해서 죄송합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조금 더 완곡한 표현인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유감으로 생각합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니면 자기는 쏙 빠지고 마치 남들이 한 일처럼 표현하는 요즘의 소위 ‘유체이탈 화법’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재산이 너무 많은 게 문제가 되었다면, ‘사실 내 배우자가 한 건데 내가 몰랐습니다.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정책을 자기가 제대로 못해서 문제가 생기니까 ‘이런 상황이 되어서 유감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냥 ‘제가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가 맞는 건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유감입니다.’라고 굉장히 돌려서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존심 때문입니다.
사실 사과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존심 구기는 일입니까? 사과를 하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러나 잘못했을 때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지는 몰라도 자존감이 아주 낮은 사람입니다. 상처가 해결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 안에 뭔가 상처가 있는데 해결을 못한 겁니다. 상처를 해결하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그렇게 자존심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때 어떻게 이럴 정도로 에서 앞에서 자기를 낮출 수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치유해주신 것입니다. 천사와의 싸움 후 자신 안에 있던 굶주림의 상처,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생겼던 상처, 장자가 아니었던 것에서 온 상처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실제적으로 아버지 집을 주관하고 있던 사람이 에서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자기가 그러한 에서 앞에서 낮추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에서에게 일곱 번을 절한 것은, 단순히 에서라는 인간에게 무릎을 꿇은 굴욕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리에 순종하며 나아간 것뿐입니다.
우리도 교만한 본성 때문에 곤란을 당하는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할 때 마음속에서부터 뭔가 욱하고 올라오면서 확 쏘아 붙이는 적이 많지 않습니까? 그것은 자존심이 상해서 그렇습니다. 사실 그런 것을 잘 보면 별 것 아닌 걸 갖고 그렇게 됩니다. 별 것이 아닌데 자존심이 상해서 훅 하고 올라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현상이 자주 벌어진다면, 그것은 단순히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 안에 뭔가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존감이 낮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현상이 자꾸 벌어집니다. 상처가 해결되고 자존감이 높으면 별 것 아닌 것을 갖고는 발끈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별 것 아닌 걸 갖고 자꾸 다른 사람과 문제가 생긴다면, 그때는 그 사람을 쏘아 볼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속을 하나님 앞에서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보다 높은 사람이나 연세가 많은 분 앞에서 나를 낮추며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보다 별로 잘나지도 않은 사람, 나보다 어린 사람, 내가 고개를 숙일 이유가 없는 지위의 사람 앞에서 나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도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이리 와서 이것 좀 빨리 해!” 그러면 “어디 이래라 저래라 명령이야?” 하며 불끈합니다. 또 어디 갈 때 빨리 가야 되는데 안 나오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빨리 좀 나오라니까 뭐해!”라고 그러면 아내도 “내가 지금 놀고 있는 줄 알아?” 하면서 별 것도 아닌데 화를 냅니다.
교회에서도 별 것 아닌 것 같은 사람이 나에게 와서 “이것 좀 하세요!”라고 하면, 그럴 때 속에서 ‘지가 뭔데 나한테 뭘 시켜? 무슨 명령이야, 건방지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런 순간이 중요합니다.
그런 순간에 ‘그래, 별 것 아닌데 그냥 해주지, 뭐.’라고 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순종입니다. 그 순종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순종입니다. 별 것도 아닌 우리를 위해서 가장 낮은 데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이럴 때의 ‘순종’은 obedience라기보다는 submission인데, 이 단어는 sub + mission, 즉 상대방의 밑으로 내려가 자발적으로 섬기는 미션을 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보다 못해서 내려가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닮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바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십니다. 뭐 하러 우리를 위해 오십니까? 그런데 천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참혹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셨다’고 빌립보서에서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내가 별로 낮아질 필요가 없는 사람 앞에서 일곱 번을 절하는 심정으로 나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한 단계 도약하고 더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속에서 욱 하거나 불끈하고 올라오는 그 순간 ‘아, 이것은 내가 예수님을 닮을 수 있는 기회다.’라고 빨리 깨닫고 겸손한 자세로 나아갈 때, 거기서도 성공할 뿐 아니라 그렇게 살면 사회에서도 성공하게 됩니다.
2. 에서의 변화된 태도
이제 드디어 에서와 야곱이 만나게 되는데, 이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 맞추고 서로 우니라” (4절)
마음을 졸이며 자기 쪽을 두 떼로 나누고, 엄청난 예물들도 미리 보내고, 이제 에서가 오는 것에 대비하여 아내와 자식들을 세 떼로 나누며 대비한 야곱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야곱은 에서가 자기에게 오자마자 화를 내면서 ‘야, 네가 나를 속이고 도망갈 때는 언제이고 이제 다시 뻔뻔하게 나타난 이유가 뭐냐?’ 하며 야단을 칠 줄로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에서가 야곱을 얼싸안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4절을 잘 보면, 이게 다 누가 하는 겁니까? 야곱이 아니라 에서가 달려왔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맞이했습니다. 에서가 안았습니다. 에서가 목을 어긋맞추고 입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울었습니다. 에서가 주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에서는 안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안 믿는 사람 속에서도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역사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감동을 받게 하시고 눈물도 흘리게 하시며 악한 생각을 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에서가 야곱의 목을 끌어안으며 울었다고 해서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악한 마음을 일시적으로 억제해주셔서 에서가 야곱을 해치지 못하게 막아주시고, 이 순간 잠시 선한 마음을 갖도록 이끌어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기 전에 기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특히 상대방이 안 믿는 사람이라도 기도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을 때, 중요한 모임이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악한 상태에서 만나지 않도록, 마음이 부드럽고 풀린 상태에서 만날 수 있도록, 나에 대해 호의적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부드럽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만나야겠습니다.
어린 자녀가 있는 분들은 예배에 참석하거나 목장 모임에 가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모임에 갈 때, 만약 그것이 예배를 드리는 자리라면 ‘내 아이가 어려서 울고 짜증을 낼 수 있는데, 아이의 마음을 다스려주셔서 오늘 예배 시간에 울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고 갈 수 있습니다.
또 믿지 않는 사람과 사업상 이야기를 할 때 정직하게 대화가 잘 이뤄지도록, 학교를 가거나 직장을 잡아서 면접을 할 때 상대방이 나의 가치를 알아봐줄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요청하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내가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그 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5-7절)
에서가 지금 이렇게 보니까 여인들과 아이들이 있는데, 이들이 누구인지 전혀 몰라서 질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딱 봐도 이들은 야곱의 아내들이고 자식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금 이들의 존재가 에서의 눈에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에서가 눈을 들어 이들을 봤다는 것은 주목해서 봤다는 겁니다. 그냥 보이니까 본 게 아니라 주목해서 보았습니다.
사람이 화가 나거나 욕심에 사로잡혀 있으면 다른 사람의 처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힘든데 다른 사람이 힘든 게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그런데 에서는 야곱이 가족들을 소개하기도 전에 먼저 이들이 누구냐고 물어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 에서가 야곱 가족들의 존재를 느끼게 되었고 야곱에 대해 마음이 풀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혹시라도 에서가 자기 가족들을 해칠지 모르기 때문에 아예 몇 그룹으로 나누어 피할 궁리를 미리 하고 왔는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까 그런 것이 전혀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괜히 머리만 굴린 겁니다.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8-9절)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기 보면, 에서는 중간에서 만난 가축 떼가 다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것도 에서가 그 모든 것이 자기에게 보낸 야곱의 선물이라는 것을 몰라서 물은 겁니까? 이미 야곱이 종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라고 시켜서 그들에게 들어 다 알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안 했어도 다 압니다. 그런데 왜 이게 뭐냐고 물어봅니까? 좋으면서 안 좋은 척하는 것도 아닙니다. 괜히 사양해보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상대방이 뭔가를 해주려고 하면 ‘괜찮습니다.’ 하고 일단 사양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그렇게 하다가는 낭패를 보게 됩니다.
제가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되어서 미국 문화를 잘 몰랐던 대학생 때(21세쯤), 캠퍼스 사역을 하는 미국 크리스천 리더 가정에 초대를 받아서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다른 학생들도 많이 와 있었는데 다과를 차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저녁은 먹었냐? 배가 고프지 않냐?” 하고 물으며 뭘 줄까 물었습니다. 그때 저는 당연히 한국식으로 괜찮다고 “I’m okay.”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알았다고 하며 진짜 아무것도 안 주는 겁니다. 모임이 끝나고 오면서 배의 꼬르륵 소리가 나며 엄청 후회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에서는 지금 그런 식으로 ‘형님, 이것을 받으십시오.’라고 하니까 좋은데 안 좋은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네가 내게 그런 선물을 할 필요가 없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선물들로 자기에게 선심을 사려 한다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에서는 바보가 아닙니다.
사실 야곱을 향한 에서의 미움과 분노는 쉽게 가라앉을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지금 이상하게 야곱을 향한 마음이 좋아집니다. 야곱을 만난 것이 너무 반갑고 기쁘다는 마음이 막 일어나고 있습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이건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분명히 만나기 전에는 20년 동안 이를 갈면서 ‘야곱 자식, 만나기만 해봐라. 그냥 두지 않겠다.’ 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다가 ‘드디어 때가 왔구나!’ 하면서 400명의 장정들을 데려온 것입니다. 뭐 하러 400명의 장정들을 데려옵니까? 정말 인사하고 싶으면 자기도 자기 자식들을 데려와야지, 왜 군인들을 데려오겠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선물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9절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서가 뭐라고 합니까? ‘야, 이놈아!’라고 하지 않고, “내 동생아(My brother)”라고 합니다. 얼마나 정감 있습니까? 동생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내게 있는 게 족하다. 네 소유는 너에게 두어라.’ 야곱은 ‘이게 하나님의 역사구나’ 하고 깨닫고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10-11절)
야곱은 지금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고 말합니다. 이것도 역시 아첨이나 아부의 말이 아닙니다. 야곱은 에서의 변화된 놀라운 모습을 보면서 ‘야, 정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구나.’ 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무엇이 에서로 하여금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야곱과 화해하게 했습니까? 자기 가족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그가 어떻게 남의 가족까지 챙기게 되었습니까? 세상 재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인데 어떻게 선물을 다 마다하게 되었습니까? 그토록 짐승 같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바뀌었습니까?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변한 모습에서 정말로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에서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말이 아니라, 에서에게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중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여기서 뵈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에서의 난폭한 본성을 누르시고 야곱에게 부드럽게 대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야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성경 말씀을 다 아는데, 평소에는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 내가 심한 병에 걸리거나 코로나 사태로 곤란을 당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가 있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내가 만나기 두려워하고 부담스러워했던 사람이 있는데,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순한 모습으로 나에게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할 때,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나 주변 이웃이나 성도를 정죄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계선을 넘어서 그분을 대적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불편한 관계, 부담스러운 사람을 내 주변에 두십니까? 좋은 사람들만 주시면 좋은데 왜 내 주변에는 꼭 이상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은 아직 교만한 우리를 훈련하시고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그들을 마치 육체의 가시처럼 우리를 단련시키시고 성장시키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영원한 원수로 남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도구로 쓰시고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우리와 하나가 되고 사랑을 나누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나만 하나님을 잘 믿으면 된다.’ 하는 생각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무시하기 쉬운데,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잘 되어 있으면 수평적인 관계도 잘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이 가장 큰 계명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정할 자를 인정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기를 원하십니다. 더 나아가 별 것 아닌 사람에게도 순종하며 협조하며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관계가 있다면 그게 언제 없어집니까? 우리가 참으로 성령 충만해질 때, 그래서 진정한 겸손을 보일 때입니다. 똑같이 교만하게 막 나가보십시오. 그 관계가 어떻게 해소되겠습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정말 머리 숙이기 싫은 사람에게, 특히 믿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며 겸손한 모습으로 나아갈 때, 담이 허물어지고 그들의 마음이 열리고 그들도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아지는 것입니다. 전도라는 것은 결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겸손과 사랑을 통하여 됩니다.
3. 에서의 호의와 야곱의 거절
지금 이 순간 에서는 야곱이 이상하게도 참 좋게 느껴집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무조건 야곱이 좋고 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마구 듭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12절)
오랜만에 야곱과 만나 화해한 에서가 아주 기분이 좋아져서 야곱을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의 다른 부족들이 공격해올지도 모르니까 자기가 호위해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도저히 보조를 맞출 수가 없기 때문에 같이 갈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13-14절)
에서는 자기 쪽 전부가 남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몇 명만 남기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에서의 제안을 야곱은 다시 부드럽게 거절하며 그가 돌아가게 합니다.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15절)
에서가 이렇게 제안한 것은 분명히 나쁜 마음이 아니라 좋은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왜 그 호의를 한사코 거절합니까? 야곱은 에서의 이러한 태도가 일시적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불같은 사람이고 수시로 바뀌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간섭 때문에 악한 본성을 누르고 자기에게 너무나 잘해주고 있지만, 그렇다고 에서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 사람이 변화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야곱이 이런 것을 어떻게 배웠습니까? 바로 라반의 집에서 배웠습니다. 그 고통스러웠던 라반의 집에서의 생활을 통해 이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결코 쓰레기 같은 것을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 인생에 필요 없는 것을 주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이 주님 안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도 사울이 자기를 안 죽였다고 고마워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나의 아들 다윗아!’라고 했을 때에도 그를 신뢰해서 금방 가까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가 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얼마든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야곱에게 잘 대하는 것이 에서가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형편없던 그에게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야곱은 기뻐하며 감사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실망하고 분노하는 주요 원인은 우리의 기대치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되어주기를 기대하는데 그것이 안 되니까 화가 나고 실망합니다. 어쩌다 좋은 행동을 하고 내게 잘해주면 좋아하고, 그러다 또 이상한 행동을 하면 실망하고 화가 납니다. 기대가 높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대를 낮추면 됩니다.
이전에 보면 VIP 분들에게 열심히 연락하고 평소에 만나며 드디어 목장에 오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러면 막 준비하고 음식도 만들며 더 정성을 들입니다. 그런데 모임 10분 전에 연락이 와서 ‘무슨 일이 생겨서 못 가게 되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실망도 되고 화도 나지 않습니까? ‘내가 이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바꾸면 됩니다. 초대했는데 안 오면 당연하고, 오면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렇게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16-17절)
[나가는 말]
우리가 주님을 만나 믿게 된 것은 정말로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우리의 사명이 끝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으며 신뢰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좋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안 믿는 가족이나 신앙이 없는 직장 상사나 동료, 또 친척들과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겸손히 머리를 숙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 알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숙여줄 줄 아는 것이야말로 사실은 성령의 능력이며 지혜입니다. 그렇게 할 때 쓸 데 없는 싸움을 안 할 수 있고, 정말 싸워야 할 싸움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에서가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이웃입니다. 에서와 싸우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금은 갈등과 불편한 점들이 있어서 혹시라도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근본적으로는 그 사람이 나의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진짜 적인 줄 알고 ‘저 인간을 왜 내 눈 앞에서 안 치워주십니까?’ 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 안에 있는 자존심과 교만을 누르고 머리를 겸손히 숙이며 나아갈 때, 세상에서 내 삶에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삶을 통해 주님 안에서의 엄청난 풍성함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