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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3일 신년주일예배
✦ 신년 메시지 ✦
“새해에는 더욱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누가복음 11장 9~13절)
[들어가는 말]
아주 어려운 2020년을 보내고 2021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 새해에는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주님 안에서 회복되고 새로워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주님을 만나고 그분이 주신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명을 주셨는데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가장 불행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 믿는다는 분들에게 ‘교회에서 조금 더 열심히 합시다. 신앙생활을 좀 더 열심히 합시다.’라고 하면 이런 말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뭐, 그렇게 열심히 할 것 있습니까? 저는 그냥 적당히 중간으로 하겠습니다. 중용을 지키라고 했으니까 중간에서 하겠습니다.” 어떤 분은 “사실 교회에는 제 아내 때문에 나오는 건데, 그냥 조용하게 다니겠습니다.” 또 남들에게도 말합니다. “적당히 믿어라. 너무 열심히 하려고 들지 마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는 어떤 중간지대,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적당히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에게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적당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하든지 아니면 안 하든지 해야지, 중간에서 적당히 하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요한계시록에서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네가 미지근하니 토하여 내치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계 3:15-16).
신앙을 떠나서라도 인간은 확신을 가진 사람에게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물건을 하나 팔더라도 ‘이 물건 사세요. 사실 신통치는 않은데, 사려면 사시고 말려면 마세요.’라고 하면 누가 사겠습니까? 그런데 건강식품 파는 분들에게 설득을 당한 적이 있으실 겁니다. 확신을 가지고 이것만 먹으면 모든 병이 다 나을 것처럼 이야기해줍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혹 하고 넘어가는 겁니다.
물건을 하나 팔아도 확신을 가지고 파는 사람과 대충 파는 사람에게는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혼동된 상황 가운데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 절망적인 환경 가운데 소망으로 사는 사람, 부정적인 사람들 틈에서 긍정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그래서 더욱 아름다워 보입니다.
성경을 볼 때 또 교회 역사를 볼 때, 다양한 종류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신앙의 인물들은 여러 다양한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를 섬긴 일꾼들이었습니다. 각자 개성대로 다양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획일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에게도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말씀과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자였다는 것입니다.
말씀 부분에 대해서는 새해맞이감사예배 때 살펴보았으므로, 오늘은 기도 부분에 대해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올바른 기도의 태도
먼저, 우리는 어떻게 해야 진정한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기도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 간절함입니다. 기도의 완성은 간절함에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느냐, 대충 기도하느냐가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간절히 기도하더라도 또 중요한 것이 내용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는데 내용이 엉터리이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주 간절하게 생명을 걸고 기도를 하지만 ‘하나님, 아무도 모르게 사기를 치는 능력을 주세요.’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주시겠습니까? 그래서 간절함도 중요하지만 내용 또한 중요합니다.
그런데 간절함과 내용이 있기 전에 반드시 먼저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간절히 기도할 수 있고 바르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에게 기도의 간절함이 없거나 아니면 내용이 올바르지 못합니까? 그것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한다고 믿지도 않는 대상에게 단지 자기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중얼거리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명상이나 심리요법일 뿐입니다.
막연하게 하는 것도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시며, 막연한 분이 아니라 구체적인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어 있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올바로 갖고 있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잘 알고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하면 산타 할아버지 같이 저 구름 위에서 흰 수염을 휘날리며 ‘호호호’라고 하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거절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아무 관련이 없이 저 하늘의 구름에나 떠다니는 분, 무관심한 분, 나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거나 관심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기도가 어떻게 응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먼저는 육신의 부모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다 실수를 합니다. 특히 부모로서 실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들은 대개 아이들이 좋은 게 아니라 얼토당토않은 것을 원하면 안 줄 조건부터 찾습니다. ‘엄마, 아빠, 저거 사줘.’ 하면 ‘그래, 사줄게’ 아니면 ‘이건 지금은 필요 없으니까 다음에 사줄게’ 또는 ‘이건 너에게 필요 없으니까 안 가져도 돼.’라고 하면 되는데, ‘엄마, 아빠 저거 사줘’ 하면 뭐라고 합니까? 갑자기 ‘근데 너 숙제는 했냐? 너 공부는 했어?’라고 이상한 걸 찾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하든지 안 사줄 ‘건수’만 찾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부모를 통해 자기가 원하는 것에 대해 거절당하는 경험이 한 번, 두 번 쌓이면서, 자신의 요청을 거절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도 쌓여가는 겁니다.
또 다른 경우, 부모를 통해 들어주실 능력이 없으신 하나님의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경우, 내가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경우, 뭘 부탁했는데 들어준 적이 없는 경우, 그럴 경우에는 기도할 때마다 내 기도에 응답해줄 능력이 없으신 하나님의 잘못된 이미지를 갖게 될 수 있습니다. 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또 부모님이 나에게 관심이 없을 때, 특히 자녀가 많은 집에서 자랄 경우 부모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 똑같이 관심을 기울여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부모님이 다 사랑해서 노력을 하지만, 자녀의 입장에서는 자기 형, 누나, 동생보다, 언니, 오빠보다 소홀하다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사실이 아니지만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느낄 때 ‘하나님도 나에게 별 관심이 없으시다.’라는 잘못된 이미지가 쌓이면서, ‘나 같은 하찮은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이 왜 들어주시겠나?’라는 의심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 식이 되면 일단 기도를 하기도 쉽지 않고, 기도를 해도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됩니다.
너무나 많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고 기도합니다. 그러니 그런 기도가 어떻게 제대로 되겠습니까?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바른 지식의 핵심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면 다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의 핵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나서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처음 아담과 하와에게 시도한 게 바로 그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너희에게 정말 그렇게 이야기하셨느냐?’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슬쩍 틀면서 엇나가게 하고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드는 유혹이었습니다.
여러분,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정말로 믿으십니까? 그런데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 들어주신다는 말입니다. 안 들으시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확실히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2.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자녀에게는 권리가 있습니다. 어린 자녀가 부모님과 같이 살 때, 실제로 자녀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부모가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당히 자기 것이라고 외칩니다. ‘이건 내 방이고, 이건 내 장난감이고, 내 가방이고, 내 우유이고, 내 밥이고...’ 자기 권리를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할 수 있으시면 주시거나 마시거나...’라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 주세요.’라고 당연히 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아닙니까? 대화의 권리가 있습니다. 그냥 ‘내 것도 아닌데 주시겠나?’가 아니라, 바로 내 것이 맞습니다. 내게 주어진 권리가 기도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신앙생활의 파워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잘 기도생활을 못합니다. 기도를 해보시라고 하면 ‘어려워서 못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신이 있고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라면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어린아이가 아빠 엄마에게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모든 것에 대한 전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든 우리 기도를 안 들어주려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거 좀 해주세요.’라고 요청을 드리면 ‘너 숙제는 했냐? 말씀은 읽었냐? 예배는 했냐?’라고 따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10절)
여기를 잘 보십시오. 무엇이 중요합니까? ‘구하는 이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고, 찾는 이마다 찾아낼 것이고, 두드리는 이마다 열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구하면 받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말은 뭡니까? 안 구하면 못 받는다는 겁니다. 물론 야고보서에서는 구해도 잘못 구하면 못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가 구하기만 하면, 찾기만 하면, 문을 두드리기만 하면 ‘내가 들어주겠다.’라고 하시는 분입니다. 이분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을 더 나가십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11-13절)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에이, 나는 주기 싫은데 얘가 달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주어야겠네.’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좋은 것 중에서도 최고의 것, 가장 베스트를 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가장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에게 주시되,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보면, 구하라고 하셨는데 구하는 것보다 좀 더 적극적인 것이 찾는 겁니다. 구하는 것(ask)은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요청하는 것이고, 찾는 것(seek)은 더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또 찾는 것보다 문을 두드리는 것(knock)이 더욱 적극적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구하면 안 주시고, 찾으면 좀 더 찾아보라고 하시고, 문을 두드리면 그제야 간신히 열어주시는 그런 하나님이시라는 뜻이 아닙니다. 구해도 주시고, 찾아도 주시고, 문을 두드려도 주시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도 기도만 하면 주시는 그런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으십니까? 예, 저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사실 우리는 기도해놓고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도 그랬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순교하고 베드로도 붙잡혔을 때 그들은 같이 모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베드로를 풀어주셨을 때, 베드로가 그들이 기도하는 집에 나타나자 여종이 나가서 보고 깜짝 놀라서 집에 들어와 베드로가 왔다고 외치니까, 사람들은 ‘베드로를 구해주시옵소서.’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구해주셔서 이곳에 왔다고 하는데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 베드로를 구해주세요.’ 기도했더니 구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왔습니다.’라고 하니까 농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진짜라고 하니까 ‘그의 천사이겠지.’라고 했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여 주님의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사실 기도를 우리가 업신여기지, 하나님은 결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입술이 아주 둔한 사람의 기도도 들으십니다. 어떤 분은 ‘나는 말재주가 없어서 기도를 못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녀가 있으신 분들은 자녀의 아기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아기가 두 살 정도 되면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 한 살 때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그건 말도 아닙니다. 말이 아닌데 부모는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이렇게 말도 잘하네!’ 하고 좋아하며 박수를 칩니다. 말도 아닌데 말이라고 하며 좋아합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 옆에서 본다면 정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이십니다. 우리가 입술이 둔해서 제대로 기도도 못하고 그냥 ‘어버버’ 해도 하나님께는 달변으로 들립니다. 하나님은 다 알아들으십니다.
오래 전에 어떤 글에서 이런 말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신의 기도는 천국에서 정크메일(junk mail)이다.”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만약 ‘내 기도는 정말 정크메일 같아.’라고 생각한다면 속고 있는 겁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떠한 기도도 정크로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자녀의 입에서 나온 말을 어떻게 아버지가 정크로 취급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아이가 말을 못해서 중얼중얼 거리며 전혀 말 같지 않은 소리를 내도 ‘에이, 형편없네. 저거 쓰레기 같다.’라고 하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청산유수로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세 살짜리 어린아이의 기도도 응답하십니다. 금방 예수 믿은 초신자의 기도를 정말 기뻐 들으십니다. 심지어 유명한 연예인 중에 그런 분도 있지 않았습니까? 처음 예수 믿고 갑자기 기도를 해보라고 하니까 오래 있다가 “하나님, 안녕하세요?”라고 하고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다가 또 “하나님, 안녕히 계세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들으십니다. 얼마나 순수합니까? 하나님은 응답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응답하시되, 하나님의 방법대로 완벽하게, 가장 선하게 응답해주십니다.
그리스 신화에 오로라(Aurora)라는 여신이 있습니다. 이 여신이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티토노스(Tithonos)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신이고 티토노스는 사람이니까, 제우스(Zeus) 신에게 가서 이 티토노스를 영원히 살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우스 신이 그 요청을 오케이 해서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원히 살게는 되었는데 점점 늙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부탁할 때 ‘지금 이 젊은 상태로 영원히 살게 해달라.’ 하고 부탁을 했어야 되었는데 그냥 영원히 살게 해달라고만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티토노스가 아주 보기 흉하게 늙어가지만 죽지를 못하고 점점 비참한 모습이 되어 갑니다.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말합니까? 제우스는 그런 신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게 해달라고 했으니까 그냥 영원히만 살게 해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부탁을 했으니까, 부탁한 대로만 들어주는 겁니다. 전혀 인격적인 신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 하나님이 그런 요청을 받으셨다면 어떻게 해주셨겠습니까? 그런 제우스 같은 신이 아니십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마음에 있는 것을 아시고 들어주십니다. 기도한 것 이상으로 들어주십니다.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했다고 문자 그대로 딱 그것만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너무 기도에 대해 걱정해서 못하겠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 아주 좋은 예가 창세기 18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때 그 직전에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의인이 50명이 있어도 멸하시겠습니까?’ ‘안 하겠다.’ ‘그럼 45명? 40명? 30명? 20명?’ 결국 10명까지 내려갔습니다. 열 명만 있어도 멸망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결국 멸망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왜 아브라함이 왜 그렇게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까? 말을 못해서 그렇지, ‘열 명만 있으면 멸망시키지 말아주십시오.’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의 마음속에 뭐가 있는 겁니까? 거기 지금 누가 살고 있습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조카 롯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제 조카가 있는데, 제 조카를 좀 살려주십시오.’ 이 말을 못하는 겁니다. 롯만 살려달라고 하기가 죄송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에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시키셨다는 것은, ‘야, 네가 열 명이면 된다고 기도했잖아? 그런데 열 명이 안 되잖아? 그러니까 나는 그대로 한 것뿐이야.’ 이런 분이 아니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했지만 하나님의 진짜 마음은 이겁니다.
“하나님은, 들에 있는 성들을 멸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롯이 살던 그 성들을 재앙으로 뒤엎으실 때에, 롯을 그 재앙에서 건져 주신 것이다.” (창 19:29, 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 마음을 보셨습니다. 이런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제우스 같으면 그렇게 안 했겠지만, 하나님은 수동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응답해주십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으시거나, 아주 오래 기다리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정말 사랑하시나? 하나님이 정말 능력이 있으신가?’ 하고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기도해도 하나님이 침묵하시거나 기도한 내용과 반대쪽으로 상황이 전개될 때, 하나님의 사랑뿐만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계신 건가?’ 하고 하나님의 존재까지 의심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그래도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결단입니다. 내가 못 보는 것뿐이지 하나님은 지금 일하고 계십니다. 내가 모르는 게 있음을 인정하면서, 분명히 하나님은 뭔가를 일으키실 것을 믿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사랑도 사실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바울이 로마서에서 썼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말씀 또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때 그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롬 8:32, 새)
가장 좋은 것을 주셨는데 그보다 덜 좋은 것을 안 주시겠느냐는 겁니다. 많은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믿음의 기초를 하나님께 두지 않고 기도 응답이 되나 안 되나 하는 현상에 두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 응답을 받으면 믿음이 자라는 것 같고, 응답을 받지 못하면 믿음이 흔들립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응답하여 심지어 기적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자녀를 사랑하신다고 해서 원하는 것을 다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를 진짜 사랑하는 부모라면 자녀가 원하는 것을 다 주지 않습니다. 원하는 대로 다 주는 부모는 사실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란 자녀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우리는 잘 알지 않습니까? 인간의 부모도 그러한데, 하나님은 더욱 우리를 잘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기도를 다 들어주지 않으시고, 기도할 때마다 기적을 베풀어주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의 근거를 기도 응답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두어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입니다. 그냥 원하는 대로 다 주는 게 최선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 각자가 원하는 게 다 이루어졌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 세상은 아마 지옥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각자 원하는 게 다 다르니까 다 자기 원하는 대로만 하면 지옥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기다리게 하십니다. 기다리게 하시는 데에는 뭔가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기다리라고 하실 때는 대개 내 안에 뭔가 제거해야 할 어떤 것이 있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나를 기다리게 하실 때, 거기에는 분명히 뜻이 있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이해가 되지만, 어떨 때는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분이 틀리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 주님의 눈의 베스트를 위해서 지금 잠시 기다리게 하시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드리는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최선의 것을 최선의 때에 주십니다. 그러나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 최선의 때가 언제인지, 그것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에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최선의 것과 최선의 때를 이해하려면 <생명의 삶>에서 다루는 것처럼 인생은 1생이 아니라 3생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삼생 전체를 보시며 거기에 비추어서 최선의 것을 최선의 때에 주십니다.
우리는 보통 ‘내 일생에...’라고 말하는데, 이 세상에서의 삶만이 일생이 아닙니다. 태어나기 전 어머니 뱃속에서 생명으로 자가는 것이 1생입니다. 1생이 잘 되어야 2생에서 건강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지금이 2생입니다. 그리고 2생이 끝나면 3생, 천국이든지 지옥이든지 그것이 3생입니다. 3생에서 잘 되려면 지금 2생에서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3생 전체를 보시면서 거기에 비추어서 ‘내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누구에게나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분명히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최선의 것을 주신다는 말씀을 믿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너무나 다른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교통사고도 있고, 사업이 실패하기도 하고, 직장도 어렵고, 질병도 있고, 가족 문제나 자녀 문제도 있고, 결국 죽음이 오고... 이런 것들만 보면 ‘하나님이 정말 최선의 것을 주시나?’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삼생이라는 점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그런 일들을 보는 시각이 바뀝니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것 같고, 상황이 나의 기대나 기도와 다르게 전개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왜 그 일이 있었나?’ 이해를 못한 채 눈을 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면 분명히 다 설명이 될 것입니다. 혹시 이해가 안 가는 일이 있으면 잘 기억해놓으십시오. 그랬다가 천국에 가서 여쭤보십시오. 그런데 사실 여쭤볼 필요도 없게 될 겁니다. 다 해결이 되어 있을 겁니다.
‘아, 그래서 하나님이 그때 그런 고난을 허락하셨구나.’ ‘아, 그런 이유 때문에 그때 그 사고가 났었구나.’ 하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최선의 것을 최선의 때에 주셨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전을 돌아보며 그렇게 느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최선의 것을 최선의 때에 주시도록 기다려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기다리면서 동시에 주님께 매달리고, 매달리고, 또 매달리고,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나아가야 합니다.
조금 해보다가 안 된다고 그냥 관두고 가거나 조금 해보고 안 된다고 그만두면 안 되겠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아도 시간을 드리며 기다려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며 매달려야 할 이유는, 그래야 하나님이 계획하신 베스트를 우리가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뜸을 들이고 계시는데 자꾸 뚜껑을 열어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설익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주인(Master)이십니다. 우리에게 베스트가 무엇인지를 잘 아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베스트가 아니라면 그분을 믿는 우리 신앙이 지금 이 2021년까지 어떻게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지난 2천 년 동안 교회 역사를 통해 검증된 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진 신앙입니다.
우리에게는 권리가 있습니다. 기도하면 응답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권리를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가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베스트를 분명히 경험하게 됩니다. 나는 응답받을 권리가 있지만, 예수님처럼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하는 겁니다.
그분의 시간과 방법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주실 것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할 일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나아갈 때 주님께서 최선의 것을 최선의 때에 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