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설교동영상: https://youtu.be/txFfuJgAr7U?t=2159
2020년 12월 27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39 ✦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라”
(창세기 32장 22~32절)
[들어가는 말]
우리 모두 학생 때 밤을 새운 적이 몇 번쯤 있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시험공부를 하느라 밤을 새는 학생들은 대개 그 동안 공부를 안 해서 마지막 벼락치기를 하느라 그러는 겁니다. 또 친구끼리 모여 밤을 지새워 얘기하느라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친구들과 같이 밤을 지새우며 즐거운 시간을 갖던 것을 우리끼리 ‘잠포지움’(잠을 자며 심포지움을 한다는 뜻)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수련회 때 추억을 만들기 위해 그러기도 하는데, 가만 보면 수련회 때 어떤 친구들은 으레 밤을 새우려고 작정을 하고 오던 것을 보았습니다.
특히 제가 기억하는 것은, 성탄절 시기에 한국에서 대학부 시절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에 같이 모여 발표회를 하고 밤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 그 다음 날 성탄절에 전방 군부대에 위문을 갔던 기억이 납니다. 갔더니 군인들이 여학생들을 보고 열광했고, 심지어 저희 남학생들을 보고도 열광했습니다. 민간인을 보는 게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먹을 것을 나누어주니까 정말 좋아했습니다. 그때 몽골의 고엘리사 선교사님 부부도 같이 찬양 팀으로 노래도 했던 추억이 생각납니다. 바로 그저께 크리스마스 날 선교사님 부부에게서 연락이 와서 그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될수록 밤을 새우는 이유가 이런 추억들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을 봅니다. 어른이 되어 밤을 샌다는 것은 대개 뭔가 걱정거리가 있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고민하는 경우입니다.
뭔가 일이 생겨서 혼자 걱정하고 끙끙거리면서 고민을 하다보니까 어느새 날이 새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경우가 바로 그랬습니다. 무슨 즐거운 모임이나 추억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 걱정이 되고 불안해서 잠을 못 이루어 밤을 지새우게 되었습니다. 이 점을 오늘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홀로 있다 갑자기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고 싸운 야곱
야곱은 20년 전 형 에서와의 갈등으로 인해 부모님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게 되었는데, 가는 도중에 벧엘에서 밤에 잠을 자다가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나 놀라운 약속을 받았습니다. 라반의 집에 도착해서 우여곡절 끝에 두 명의 아내를 얻게 되었고, 또 그들의 여종들까지 포함해서 네 명의 여인들을 통해 열한 명의 아들들과 딸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또 많은 재산과 종들도 얻게 되었고, 마침내 하나님의 지시로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다시 부모님이 계신 가나안 땅을 향해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라반의 집에 머물던 지난 20년 동안, 야곱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의 형 에서와의 껄끄러운 관계였습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챘던 사건으로 인해 형이 자기를 죽이겠다고 펄펄 뛰는 바람에 야곱은 집에서 도망쳐 외삼촌 라반의 집까지 피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세월이 많이 지나긴 했지만 그 문제는 아직 해결이 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냥 덮어놓고 있었지, 해결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야곱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면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 문제로 인하여 종들을 에서에게 보내어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렸는데, 놀랍게도 에서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오면서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군사들)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6).
이때 야곱은 에서가 분명히 자기를 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야곱은 이것 때문에 너무나 두렵고 답답하고 힘들고 걱정이 되어서 자기 일행을 두 떼로 나눕니다(7). 그리고 처음으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까지 했습니다. 형의 손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11).
그렇게 기도를 했으면 하나님을 정말 믿고 기다리면 얼마나 좋습니까? 하지만 야곱은 또 다시 자기 머리를 굴려서 에서에게 줄 선물들을 종들을 통해 보내는데,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서 나누어 보냅니다. 그렇게 함으로 에서가 몇 번씩 선물을 받으면서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누그러뜨리기를 바랐던 것입니다(20).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그는 마음속에 있는 불안함을 여전히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저녁 때 잠깐 눈을 부치고 밤에 일어납니다. 잠이 안 오기 때문입니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2-23절)
이것은 에서가 와서 자기를 치기 전에 얍복 강을 건너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북쪽의 갈릴리 호수와 남쪽의 사해 사이를 흐르는 강이 요단강입니다. 요단강에 지류가 몇 개 있는데, 중간쯤 있는 강이 얍복 강입니다. 그러니까 야곱 일행이 요단강 동편에 있다가 건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강을 건너는 도중에 에서의 사람들이 들이닥친다면, 제대로 도망갈 수도 없고 그대로 몰살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뜻밖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4절)
야곱은 모든 가족들과 소유를 먼저 건너도록 하고 나서, 자신은 뒤에 홀로 남았습니다. 이렇게 홀로 남은 것은 아마도 자신의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 이런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도 진정시키고 또 하나님께 조금 더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혼자 남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전혀 대비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를 공격해 와서 싸움을 하게 됩니다. 여기 24절에는 ‘씨름’이라고 되어 있고, 영어 성경에는 ‘wrestle’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한국의 전통 씨름처럼 규칙이 있어서 모래로 된 경기장에 앉아 서로 샅바를 잡고 심판이 ‘준비, 시작!’ 하면 시합을 하는 그런 게 아니라, 서로 치고 받으면서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하는 격투기 같은 겁니다. 요즘의 UFC라는 격투기가 있지만 그것도 규칙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싸움은 아무 규칙도 없는 생명을 건 싸움입니다.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하는 싸움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서 알기 때문에, 이 사람이 하나님 또는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야곱은 그것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 괴한이 혹시 형 에서가 보낸 자객이 아닌가 하고 느꼈을 수 있고, 아니면 치사한 것으로 따지면 자기보다 한 수 위에 있는 라반이 자기와 언약을 했음에도 그것을 어기고 보낸 암살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최선을 다해 싸웁니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이 싸움을 시작한 것이 누구이냐는 것입니다. 야곱이 시작한 싸움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쪽에서 먼저 야곱에게 싸움을 걸었다 하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왜 먼저 야곱에게 싸움을 거셨습니까? 무슨 이유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죽 보면, 하나님이 누구에게 싸움을 걸어서 이렇게 치고받고 싸운 예가 전혀 없습니다. 야곱 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야곱에게 먼저 싸움을 거셨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주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곁에 아무도 없고 홀로 남아 있는 야곱에게 싸움을 거심으로써 아주 중요한 뭔가를 그에게 가르쳐주려 하신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종종 벌어집니다. 다른 누구도 해결해줄 수가 없고, 오직 나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문제가 종종 일어납니다. 내 부모님도, 배우자도, 자녀도, 친척도, 친구도, 그 누구도 해결해줄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내가 혼자 해결해야 합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직면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해보지만 상황이 더 꼬이고 해결책이 안 보입니다. 그것이 인간관계이든, 경제적인 문제이든, 관계의 문제이든, 진로 문제이든, 건강 문제이든,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반드시 내가 혼자 해결해야 되는 그런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허락하십니까? 왜 나에게 어려움이 생깁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지는 않으실망정, 왜 이런 상황을 나에게 허락하셔서 나를 괴롭게 만드십니까? 이해가 안 가지 않습니까? 혹시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으시더라도 그냥 가만히 계시면 좋겠는데, 왜 상황을 더 힘들게 만드시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주님의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놀라운 축복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을 잘 통과하고 나면 놀라운 축복으로 가는 통로가 됩니다. 마귀의 시험은 우리를 어떻게든 넘어뜨리려고 하는 ‘유혹’(temptation)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험은 오히려 우리를 굳게 세워주시려는 믿음의 ‘테스트’입니다.
그러므로 혼자 직면하여 해결해야만 하는 어떤 어려움이 생긴다면,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변장된 축복’이라는 사실을 빨리 알아채야겠습니다. 혹시 지금 그런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을 잘 견디고 나면 놀라운 축복이 임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새로운 이름을 받은 야곱
1) 영적인 민감함을 가지고 간절히 축복을 구하며 떼를 써야 한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5절)
이 싸움에서 야곱이 얼마나 최선을 다해 싸웠는지, 이 사람은 야곱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그것이 어긋나게 합니다. 그러니까 탈골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 ‘허벅지 관절’이 정확히 어느 부위인지는 알 수 없는데,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허벅지 관절’이라고 번역했지만 영어성경 NIV에서는 ‘the socket of Jacob’s hip’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골반뼈가 어긋났다는 겁니다. 대개 학자들은 골반뼈라고 생각합니다. 골반과 허벅지를 이어주는 사이 관절이 빠진 겁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야곱이 이 싸움에서 상대방의 공격으로 인해 신체의 중요한 부위를 얻어맞아 뼈가 뒤틀리고 탈골이 될 정도였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야곱이 밤새 최선을 다해 싸웠는데, 이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혹시 자기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한방 얻어맞고 뼈가 탈골되어 다리 관절이 빠져버리니까 움직이지도 못하고 굉장히 고통스러운 상황이 된 겁니다.
그래서 야곱은 깜짝 놀랍니다. 왜 놀랍니까? 이처럼 한방에 자기에게 중요한 골반 뼈를 탈골시킬 정도라면 진즉에 자기를 제압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그런 사람이 뭐 하러 이렇게 오랫동안 밤을 새워서 자기와 싸움을 합니까? 뭔가 이상합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6절)
여기는 너무 부드럽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새번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날이 새려고 하니 놓아 달라고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아주 꽉 붙들며 ‘절대 못 갑니다.’라고 떼를 썼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날이 새니까 가겠다고 합니까? 날이 새면 안 되는 영적 존재이니까 빨리 가려고 하는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영화를 너무 많이 보신 겁니다. 이것은 영화에서 귀신들이 날이 밝아오면 도망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이 사람과 밤새 씨름한 것이 결코 자기가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저 한방에 자기 뼈가 나갈 정도라면 얼마나 센 사람입니까? 그러니까 자기를 봐줘서 그런 것임을 깨달은 겁니다. 마음만 먹었으면 오래 걸 것도 없고 처음부터 한방에 야곱을 때려눕히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24절에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는 ‘쳤다’고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슬쩍 만졌다’, ‘건드렸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도 ‘touched’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골반뼈가 살짝 만지면 빠지는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게 말이 안 되는 건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뼈가 탈골되고 큰 부상을 입힐 수 있을 정도라면, 이 사람은 얼마나 힘이 센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완전히 자기를 봐주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 나를 봐주었을까? 왜 나를 한방에 눕힐 수 있었는데 안 그랬을까?’라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건 인간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닌 겁니다. 하나님인지 모르겠고 천사인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신적 존재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도 야곱이 축복을 정말 갈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를 축복해주지 않으면 보낼 수 없다.’라고 생떼를 부린 겁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야곱이 못 보내준다고 붙들며 떼를 쓰면 이 사람이 못 갑니까? 다리를 한 번 툭 털어버리면 저리로 날아갈 텐데, 야곱이 놓아주어야만 갈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래도 야곱은 떼를 씁니다.
사실 이 사람이 ‘이제 나로 가게 하라.’ 하는 것은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진짜 가겠다는 게 아닙니다. 야곱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에게서 믿음의 반응을 이 상황에 이끌어내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역에서 만난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 딸이 귀신 들려 고통 받고 있으니까 딸을 고쳐달라고 했을 때 굉장히 냉담하게 반응하지 않으셨습니까? “자녀의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옳지 않다.”라며 ‘개’라고 모욕적인 말까지 하셨는데, 그 여인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보신 것입니다. 믿음의 반응을 이끌어내려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딸이 그냥 고침받고 끝나면 예수님과 아무 관계가 안 생깁니다. 구원의 길로 가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정말 구원자로 믿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세워주시기 위해서 시험을 하신 것입니다. 그랬을 때 여인이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개들도 자녀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은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지금 그때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날이 새니까 나로 가게 하라.” 야곱에게서 믿음의 반응을 이끌어내려는 것입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방금 자기 뼈를 슬쩍 만져서 탈골시킨 사람이 이제 완전히 KO시키고 죽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나로 가게 하라.” 라고 하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이때 야곱이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게 웬일이냐? 이제는 죽는 줄 알았는데 가겠다고? 그래, 빨리 가라. 잘됐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야곱이 그렇게 했으면 그는 결코 이때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신적 존재임을 깨닫고 자기에게 축복해달라고 매달린 것입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인 우리에게 일부러 큰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을 주실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가 할 일이 뭡니까? 이 고통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으며 여기에는 분명히 주님의 선한 목적이 있음을 깨닫고 더욱 하나님을 붙들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교회에 열심히 다녀보니까 오히려 일이 잘 안 풀리더라.” “신앙생활 좀 잘 해보려고 하는데 오히려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라고 하면서 교회를 안 나오거나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그때가 놀라운 하늘의 복을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그걸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우리는 결코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그럴 때 ‘나를 축복해주지 않으면 가지 못합니다!’라고 떼를 쓰며 붙들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겠습니다. 더 열심히 외치며 구해야겠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지는 것과 같은 기도, 바울이 가시가 떠나도록 세 번 생명을 건 기도를 한 것과 같은 그런 기도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와서 도끼로 7번, 8번, 9번을 쳤는데 안 넘어가니까 ‘에이, 안 되나 보다.’ 하고 그냥 갔는데, 그 다음 사람이 와서 한 번 툭 치니까 넘어갑니다. 한 번만 더했으면 되었는데 그걸 안 해서 못 얻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이런 투지를 불태우기도 합니다. 10번을 찍었는데도 안 넘어가니까 뭘 생각합니까? ‘아, 이건 나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도끼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도구를 바꾸어 와서 다시 찍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귀한 태도입니다.
바로 이런 겁니다. 영적인 삶에서 해보다 안 된다고 포기하고 ‘기도해봤지만 안 되더라.’라고 한다면 정말 기도하는 사람이 아닐 겁니다. 정말 기도하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대충대충 하는 게 자기에게 유익일 것 같지만 굉장한 자기 손해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을 보며 ‘교회에 너무 빠지지 말라’고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왕 하는 것, 거기에 완전히 빠지는 것이 좋습니다. 미지근하게 하는 것이 더 안 좋습니다.
운동을 하나 해도 최선을 다해 그것을 배우고 열심히 해야 제대로 할 수 있지, 대충 적당히 해서는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확실히 하든지 관두든지 그래야지, 하는 둥 마는 둥 해서는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정말 주님께서 이때 나에게 복을 주지 않으시면 안 된다고 하는 끈질긴 태도로 기도하며 간구하는 태도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2) 자신의 참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드러낼 때 변화가 된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7절)
끈질기게 떼를 쓰며 달라붙는 야곱에게 그 사람은 이름이 뭐냐고 묻습니다. 지금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묻습니까? 하나님이실 수도 있고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일 수도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보통은 천사라고 나옵니다. 지금 몰라서 묻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여기서 천사냐, 하나님이냐, 너무 따질 게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존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름을 물으십니까? 요즘에도 이름이 중요하지만, 그 당시에는 더 중요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란 이름에는 “발뒤꿈치를 잡다, 속이다, 사기꾼” 등의 뜻이 있습니다. 야곱은 이전에도 이름이 뭐냐고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 하고 불렀다. 그러자 이삭이 ‘나 여기 있다. 아들아, 너는 누구냐?’ 하고 물었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입니다.’” (27:18-19, 새번역)
그때 야곱은 자기가 야곱이라고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에서라고 하며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나중에 자기가 속은 것을 안 에서도 야곱을 가리켜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녀석의 이름이 왜 야곱인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 녀석이 이번까지 두 번이나 저를 속였습니다. 지난번에는 맏아들의 권리를 저에게서 빼앗았고, 이번에는 제가 받을 복까지 빼앗아갔습니다.” (27:36, 새)
야곱은 이러한 자기 이름 때문에 평생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라고 물으면 ‘사기꾼입니다.’라고 하는 게 말이 됩니까? 자기가 야곱이라고, 사기꾼이라고 인정하기가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이전에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였던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은 정말 싫었습니다. 하지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실 때, 야곱이 이번에는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저는 야곱입니다. 저는 남을 속인 사람이고, 비열한 사람이고, 사기를 친 사람입니다.” 그러자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28-29절)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너는 더 이상 속이는 자, 비열한 자, 사기꾼이 아니다. 너는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스리시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승리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도록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네 이름이 뭐냐고 했을 때 만약 야곱이 ‘알 필요 없어요.’라고 대답했으면 이스라엘이 되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제 더 이상 자기를 속이지 않고, 하나님을 속이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진짜 모습, 즉 자기가 야곱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보시면서 이렇게 외치신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 됐다. 이제 네가 극복했구나. 이제 너는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하나님과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는 말은 싸워서 이겼다는 말이 아니라 극복했다는 말입니다. struggle했는데 overcome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디어 바로잡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자기 꾀를 의지하며 남을 속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다 콤플렉스나 열등감이 있지 않습니까? 어느 부분에 열등감이 있으십니까? 나에게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어떤 일이 있습니까? 열등감을 일으키는 콤플렉스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 앞에서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 자존심이 상하는 것, 한이 맺힌 부분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자라면서 형제자매가 많았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공부를 못했다거나, 학벌이 모자란다거나, 외모가 못하거나, 키가 작다거나, 경제적으로 어렵다거나, 집안이 안 좋다거나, 남들보다 직장이 안 좋다거나, 가정에 어떤 문제가 있다거나, 이런 여러 가지가 우리에게 열등감을 일으키는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숨기고 쉬쉬 하며 안으로 집어넣는 게 아니라, 드러내고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앞에서 그것을 솔직하게 드러낼 때 변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냥 덮어둬서는 이스라엘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목장에서 하는 것이 그게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목장에서도 자기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며 고백할 때, 그것을 정죄하고 ‘그것 밖에 안 되냐?’ 하는 게 아니라, 품어주고 ‘얼마나 힘들었겠냐?’ 하며 같이 아파해주고 같이 기도해주는 것이 교회이고 그것이 목장에서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드러낼 때 문제가 해결됩니다. 쉬쉬 하다가 잘못되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드러내고 기도해줄 때 회복되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진정한 해결의 길이고 축복의 길이고 변화되는 길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이 다스리시는 사람으로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게 됩니다.
3) 새롭게 변화가 될 때 놀라운 삶을 살게 된다
그날 밤 야곱은 처음에는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혼자 있었는데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나서 새로운 이름도 받고 축복도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곳을 걸어 나오던 야곱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그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30-32절)
이때 야곱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곳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부릅니다. 해가 돋는 것을 보며 절뚝거리면서 걸어 나왔는데, 그때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얼굴은 환해졌습니다. 웃음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구나. 나를 새롭게 하셨구나.’ 하는 감사와 감격이 넘쳤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제 에서를 만나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는데 이제 더 이상 두려울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리를 절게 되었지만, 절뚝거리는 자신의 몸의 상처야말로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시며 이제 자기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표시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다리를 절게 된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나가는 말]
이번에 비행기를 오랜만에 탔는데, 비행기가 가장 많이 흔들릴 때는 고도를 잡는 지상 1000피트 정도를 통과할 때라고 합니다. 낮은 구름으로 덮여 있는 이 높이를 통과하고 나면 거의 흔들리지 않고 죽 편안하게 날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도 어려움과 고통이라는 낮은 구름이 가릴 때 우리 삶에 큰 흔들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멈추어선 안 됩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흔들림 없이 죽 날아갈 수 있고 그러한 신앙의 고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혹시 나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세상에 나만 홀로 남겨진 것 같이 느껴집니까? 바로 그때 실망하거나 원망하기보다는, 또 다른 데로 자꾸 눈을 돌리기보다는, 오히려 이것이 놀라운 축복으로 가는 길이며 새롭게 되는 과정임을 잊지 말고, 더욱 주님을 붙드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할 때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놀라운 역사가 바로 우리 모두의 삶에도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