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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9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37 ✦
“심히 두렵고 답답할 때 우리가 할 일은”
(창세기 32장 1~12절)
[들어가는 말]
저는 대학생 때 미국에 이민을 왔는데, 대학에 편입하여 졸업을 했고 당시 부모님께서 졸업 선물로 한국행 비행기 표를 사주셔서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불과 3년 여 전에 함께 성경공부를 하며 진리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던 선배들과 친구들을 만나 너무 반가웠는데, 다시 만났을 때는 그들의 관심이 ‘아기 기저귀를 싸게 파는 데가 어딘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결혼한 사람과 싱글인 사람은 관심사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나 친척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관심사가 서로 비슷한 듯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분명히 같은 한국 사람이고, 똑같이 한국말을 하고, 생긴 것도 비슷하지만, 서로 떨어져 지내는 기간이 길다보니까, 아무래도 각자 자기가 있는 곳에 적응해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각자 상황이 다른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생활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염려되는 것이, 남한과 북한이 해방 이후 분단되어 산지 벌써 75년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같은 말을 하고 같은 한국인이지만, 서로 떨어져 산 것이 너무 오래 되어 생각과 생활방식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처럼 떨어져 살아도 달라지지만, 아무리 형제지간이라도, 또 부부로 같은 집에서 산다고 해도, 두 사람의 신앙이 각각 다르면 대화가 잘 되지 않습니다. 우선 세상을 보는 관점이나 가치관이 너무나 다릅니다. 한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시간 낭비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의미 있게 생각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쓸 데 없는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더구나 믿지 않는 사람이 믿는 사람을 보면 마치 자기만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 앞에 있으면 왠지 판단 받는 듯한 느낌이 들고 무시당하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믿는 사람은 신앙이 없는 친구나 형제들 앞에서 잘 이야기가 통하지 않으니까, 자꾸 같은 믿음의 식구들끼리만 어울리려고 하고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구들을 잘 만나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나서 이야기해보았자 상처만 받고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통계도 나왔는데, 예수 믿은 지 5년이 지나면 비신자 친구들이 거의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믿지 않는 가까운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그들과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밖에 사는 게 아니라 세상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이제 라반의 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불편하고 부담스럽지만 피할 수 없는 만남이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20년 동안 하란에서 종살이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에서와의 만남입니다.
20년 동안 라반의 집에서 종살이를 끝내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야곱은, 이제 형인 에서와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은 형의 주관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 에서는 아버지 이삭의 집에 있지 않고, 멀리 떨어진 에돔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형인 에서가 조금이라도 반대를 하면 아버지 집에 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에서가 20년 전의 감정 때문에 야곱을 해치려고 하면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서를 만나자니 너무나 부담스럽고, 안 만나자니 아버지 집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미묘한 상황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해결하겠습니까?
1. 뜻밖에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다 (1~2절)
야곱은 라반과 헤어져서 길을 가다가 하나님의 천사들의 무리를 보게 됩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1-2절)
야곱은 20년 전 에서를 피해서 도망치다가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누워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사닥다리 위로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꿈이 아니라 길에서 직접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난 것입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여러 천사들을 만났습니다. ‘마하나임’은 ‘군대’ 또는 ‘진영’이라는 뜻인데, 특히 ‘두 진영’이란 뜻이니까 두 무리나 되는 천사들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어떻게 하나님의 천사들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것은 그의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열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평소에 못 보던 하나님의 군사들이 두 부대나 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1절을 잘 보면, 야곱이 그들을 찾아서 본 게 아니라 천사들이 야곱에게 찾아와서 그가 그들을 볼 수 있었던 겁니다.
천사는 영이라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때는 야곱의 눈에 보였습니까? 그것은 앞으로 야곱에게 닥칠 위험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바로 잠시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큰 위기에 닥칠 그를 지켜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천사 군대가 출동하여 그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심으로써, 야곱을 안심시키시고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께로 나아오도록 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모르는, 아니 바로 몇 시간 후의 일도 알지 못하는 연약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미리 체험하게 하셔서 우리를 준비시켜주십니다.
은혜를 이미 받은 상태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과, 전혀 준비 없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을 잘 간직하고 있으면 견딜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물론 걱정도 되고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견딜 만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것이 전혀 없이 어려움을 맞이하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에 기도와 말씀으로 준비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 동안 어려움을 많이 당하셨습니까? 이전에 어려움을 많이 당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어려움이 없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더 어렵고 힘든 일들이 앞으로 더 많이 닥쳐 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없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려움은 반드시 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어려움을 이길 준비를 해야 합니다. 준비되어 있으면 시련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준비는 무엇보다 평소에 기도와 말씀과 예배로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늘 QT를 하다 보면 잘 안 되는 날도 많고, 특별한 말씀의 깨달음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할 바에야 안 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때도 해야 합니다. 안 되는 게 아닙니다. 효과가 없는 게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소위 ‘영적 내공’이 쌓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코로나 사태 가운데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느냐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온라인 예배로 드리더라도 계속해서 예배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쉬지 않고, 삶 공부를 하고, 새벽기도를 하고, 말씀묵상을 하고, 성경을 읽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늘 사모하면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면,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쉽게 넘어지지 않게 되고 그것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2. 드디어 에서를 만나다 (3~6절)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3~5절)
야곱은 이제 에서에게로 사람들을 미리 보내어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지금 야곱은 어떻게 해서든 에서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굉장히 애쓰고 있고, 최대한 자기를 낮추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는 쌍둥이 형제라면 서로 반갑게 얼싸안으며 만날 것 같은데 왜 야곱은 완전히 무서워서 설설 기는 것처럼 나옵니까? 예를 갖추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야곱과 에서의 사이에는 아주 미묘한 감정의 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이 생겼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믿음 때문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 형제였지만 서로를 향한 불편함과 적개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형제끼리 경쟁하느라 생긴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신앙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같은 집에 살면서도 가치관이 다른 가족입니다. 그들은 내면적인 변화나 영적 성숙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비신자 가족이 크리스천인 가족에게 묻는 질문은, ‘하나님이 밥 먹여 주냐?’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을 믿는데 세상에서는 돈도 못 버냐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점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러면 그냥 무시하면 됩니다. 그러나 같은 집에 살면서 자기 일에 아주 뛰어날 뿐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약점이나 부족한 부분을 꼬집어내는 가족은 아주 고통스럽고 괴로운 존재입니다. 같이 살지 않는다고 해도 어쩌다 한 번씩 만날 때마다 한두 마디 툭 던지는데, 그 한두 마디가 1년 동안 열심히 쌓아온 믿음을 뒤흔들어 놓는 겁니다.
에서와 야곱은 인간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형제였지만, 영적으로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에서는 그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남성다움이 뛰어난 남자의 기준이었고, 얼마나 사냥을 잘하느냐는 것이 남성다움의 조건이었습니다.
에서는 아주 뛰어난 사냥꾼이었고 온몸이 털로 뒤덮여 있고 근육질인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모릅니다. 반면 야곱은 영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장자권의 중요성도 알았습니다. 그가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았던 것도, 힘이 없어서 그랬다기보다는 내면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려고 한 동기나 의미도 서로 완전히 달랐습니다. 에서는 아버지의 축복을 통해 집안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 했고,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그런 야곱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이 동생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 남자가 사냥도 안 나가고 허구한 날 집구석에 쳐 박혀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신체적인 조건이나 사회적인 면으로 보면, 야곱은 괜찮았지만 분명히 에서 자신보다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늘 뭔가 자기보다 더 아는 것 같았고, 자존심도 더 강했습니다.
야곱이 에서와 만나서 대화를 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야곱아, 네가 내세울 것이 뭐가 있냐?’ ‘나의 내면이, 내 속이 변화되었어.’ ‘뭐, 속이 안 좋아? 그럼 화장실 가야지.’ 둘이 대화가 전혀 안 통합니다.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막 괴롭히는 것도 힘들지만, 이해를 못 해주는 게 사실은 더 힘듭니다. 야곱에게 에서는 가장 가까운 형제이면서도 자신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적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속사람이 변화되면 그것이 겉으로도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변화가 곧장 나타나지 않고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20년, 30년이 걸릴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족들은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당장 직장이 없다고, 돈을 못 번다고 공격을 퍼붓습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은 왜 그런 것도 안 해주시냐? 왜 복을 안 주시냐?’라고 공격을 합니다.
야곱은 마치 친형제가 아니라 좋지 않은 관계에 있는 적국에 자기 사자를 보내는 것처럼 에서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20년 만에 만나는 형제, 그것도 쌍둥이 형제인데 왜 그런 식으로 접근합니까? 먼저 야곱은 자기가 에서에게 신세를 지러 가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최대한 공손하게 자기가 왔다는 사실을 알리며 에서의 이해를 구합니다. 특히 이제는 자기도 가난하지 않으니까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음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6절)
에서는 왜 야곱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무려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데리고 옵니까?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먼 길인데 굳이 400명씩이나 함께 올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무력 시위를 벌이는 것입니다.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에서가 야곱을 공격하고 복수하려고 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공격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야곱에게 에서는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고 싶었습니다. 그 동안 에서가 이기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자기가 늘 야곱에게 당하기만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야곱에게 군사 400명과 함께 나타남으로써 자신의 세를 과시하고, 야곱의 기를 확실히 꺾어 놓겠다는 것입니다.
3. 위기 상황에서 기도하다 (7~12절)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7-8절)
에서가 자기를 만나기 위해 400명이나 되는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즉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오던 길에 하나님의 천사들의 군대를 만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심한 두려움에 빠집니다. 야곱은 이제 ‘난 이제 정말 죽었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환영하러 오는 것인지 싸우러 오는 것인지 정확하지도 않은데, 미리 제 발이 저려 자신을 치러 온다고 생각하면서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둘로 나눕니다. 에서가 한 쪽을 치면 다른 한 쪽은 피해서 반이라도 건져보겠다 생각합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야곱의 모습입니다.
단순히 에서가 오고 있다는 말만 듣고 야곱이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지나친 면이 있습니다. 에서는 일종의 무력시위로 400명을 이끌고 오는데, 야곱은 굉장히 예민하고 극단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곱의 마음속에 에서라는 존재가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이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면, 그 문제로 인한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처가 다 나았으면 그것을 남에게 보여주어도 괜찮고, 남이 건드려도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처가 아직 아물기 전에는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도 싫고, 또 누가 건드리기도 전에 미리 과민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에서가 400명과 함께 온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일종의 비상사태를 선포합니다. 사실 야곱은 비상사태를 넘어서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머릿속에 벌써 에서가 쳐들어와 자기 가족들을 죽이는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상대방 집안의 씨를 말리는 일이 예사였습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여 버렸습니다. 야곱은 그런 경우를 생각하며 준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에서가 무엇을 하러 오는지 확인도 안 된 상태에서 자기 생각으로 이렇게 일을 벌이며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서 마귀가 노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에서가 온다는 소식 앞에서 신앙의 모습을 다 잃어버리고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이 핵심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지난 20년 동안 함께 하시고 복을 내리셨지만, 그분을 믿는 신앙이 에서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품게 하고, 스스로 형편없는 존재라고 믿게 하는 것이 마귀의 공격입니다. 그래서 항상 사건보다 중요한 것이 해석입니다.
야곱은 지금 에서라는 외부적인 어려움과 자신의 내부에 있는 상처를 통해 괴로워합니다. 에서가 없으면 좋은데 하나님은 왜 에서와 같은 두려운 존재를 주셨습니까? 야곱의 마음속에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남아 그를 괴롭히는데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 중 하나가 교만인데, 야곱이 교만해지는 것을 막으시기 위함입니다.
나를 그토록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이웃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마음속에 극복하지 못한 마음의 상처와 분노가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교만을 다루시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 안에 변화되어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천사들을 보고 그렇게 의기양양했던 야곱이, 에서가 400명을 데리고 온다는 소식 앞에 벌벌 떠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이 엄청나게 두려운 순간 야곱은 무엇을 합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합니다. 사실 이 정도의 두려움이 찾아올 때 기도가 잘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 때문에 기도가 안 되는 겁니다.
야곱도 처음에는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재산부터 둘로 나누고 일을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기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들게 된 것입니다. 야곱의 기도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자신이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약속이라는 사실입니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9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는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하며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둘쨰,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10절)
20년 전에 이곳을 지나갔을 때에는 지팡이 한 개 밖에 없던 자기가, 지금은 두 떼나 되는 무리를 거느리게 된 것은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진 것들이 사실은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셋째, 자기 안에 있는 두려움과 고민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1-12절)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갈등과 고민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삶에 이처럼 진실하고 간절하면서도 하나님 뜻에 맞는 기도를 드린 적이 없습니다. 이 기도 안에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과,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지금 닥친 문제를 있는 그대로 아뢰는 솔직한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로부터 듣기를 원하시는 기도가 바로 이런 기도입니다. 야곱과 같은 기도를 드리면 모든 위선과 거짓과 교만이 빠져나가게 됩니다. 야곱은 이 기도를 통해 승리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나가는 말]
사탄은 어려운 상황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하기를 원합니다. 어려운 일이 다 사탄이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 허락하시는 경우도 있고, 그냥 닥치는 어려움도 있고, 내 욕심 때문에 생기는 경우도 있고, 정말 사탄이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지, 그 상황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원망하며 서운해하기를 원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한탄하며 무기력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사람, 구원받은 사람임에도 전혀 구원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게 사탄의 전략입니다.
우리 입에서 ‘5년, 10년 말씀을 들었어도 나의 에서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은 나를 돌봐주지 않으시는구나.’라는 소리가 나오기를 원하는 겁니다. 여러분, 그럴 때가 어떤 때입니까? 바로 기도할 때입니다.
저번에 시카고 불스(Chicago Bulls) 농구 팀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경기 시작할 때마다 선수들이 모여서 서로 파이팅을 외치면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한 선수가 “What time is it now?”라고 하니까 모두가 “It’s Game Time!”이라고 외칩니다.
여러분, 어떤 어려움이 와서 의심과 불안이 들 때마다 “What time is it now?” “It’s Prayer Time!” 기도할 시간이라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마귀는 우리가 무너지며 하나님을 원망하기를 바라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기도를 통해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를 통해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데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지금 저는 두렵고 떨립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할 때 놀랍게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심히 두렵고 답답할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칠수록 더욱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 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놀라운 승리를 맛보며, 주님께서 열어 놓으신 복된 삶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