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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17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8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뻗어나가는 복음

(사도행전 161~10)

 

[들어가는 말]

 

오늘 본문만 접하면 생각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오래 전 다른 교회에서 부목사로 부임하여 사역할 때, 부임하자마자 교회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중에는 결국 둘로 갈라져 분열되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노회에서는 저에게 중간에서 통역도 하고 문서도 번역하라고 하여, 중간에 끼어서 굉장히 입장이 곤란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주 괴롭던 때에 갑자기 전화가 한 통 왔습니다. 어느 교회의 장로님인데, 당시 그 교회에서 한국어권 부목사를 청빙하니까 저에게 지원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이 추천을 해준 것이었는데,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아직 교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굉장히 복잡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중히 사양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사실 그때 내심 한국에 제가 관련이 있는 대형교회에서 미주 출신 목회자들을 많이 데려간다는 소식을 들었고, 특별히 당시 그 교회의 수석 부목사가 저희 부부를 소개해준 아주 잘 아는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전화로 연락했더니 조금만 더 일찍 연락하지 그랬느냐? 벌써 미국에서 몇 명을 뽑았다. 그래서 지금은 안 되고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연락을 하겠다.’라고 연락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중 매일 큐티를 하고 있는데 마침 본문이 바로 오늘 이 본문이었습니다. 마게도냐 사람이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한 내용입니다. 그때 그 장로님이 다시 전화가 와서 우리 교회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해주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알고 보았더니 저를 추천해주신 목사님이 잘 이야기를 해서 다시 전화가 온 것이었습니다. 마침 큐티도 이런 본문이었기 때문에 혹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게 아닌가 하며, 별 기대감 없이 일단 알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 교회로 가게 되었는데,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하기 직전에 섬겼던 교회입니다. 알고 보니 너무 좋은 교회였고 또 너무 쉽게 부목사가 되었는데, 알고 보니까 1차에 너무 힘들게 해서 잘 안 되고 2차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쉽게 갈 수 있는 교회가 아니었는데 저는 너무 쉽게 갔습니다그런 것을 볼 때 내가 계획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계획을 안 한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니구나. 정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하는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 간 후 이전 교회에서 분열과 다툼 속에 많은 상처를 받았었는데, 큰 위로를 받고 상처의 치유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대로,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실망이 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 길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길을 열어놓으셨을 수가 있습니다. 한쪽 문이 닫히면 끝난 게 아니고, 하나님은 이 문이 아니라 저쪽 다른 문이다. 그리로 들어가라.’ 하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실수를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삶에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일어나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악함과 부족함과 연약함까지도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 삶에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실망할 필요가 없고 좌절할 필요도 없으며,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바울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1.   디모데의 합류

 

1)  더베와 루스드라에 다시 방문하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1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했던 성들을 재방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난주 살펴보았던 것처럼, 뜻하지 않게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갈라짐은 막 감정싸움을 하고 원수가 되어 갈라진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서로 의견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의견을 좁히지는 못했지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축복하면서 보내주었고, 결국 나중에는 또 화해하고 사역을 다시 잘해나갔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게 바울과 결별한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의 첫 번째 방문지였던 구브로(사이프러스) (바나바의 고향)을 향해 먼저 출발했기 때문에, 바울은 거꾸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육로를 통하여 현재의 터키 지방으로 가서, 배를 타고 구브로로 해서 빙 돌아 갔다 왔던 1차 전도여행 때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행하면서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차 전도여행 때의 마지막 방문지였던 더베로 갔고 또 루스드라로 간 것입니다.

 

1차 전도여행 때 바울은 서쪽에서 북쪽으로 움직이며 더베보다 루스드라를 먼저 방문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순으로 갔는데, 이번에는 그 순서를 거꾸로 간 것입니다. 1차 때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던 장애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 외치며 경배하려 했고,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옷을 찢으며 루스드라 사람들을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부터 바울을 죽이기 위해 뒤쫓아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모함하며 선동해서 루스드라 사람들을 격동함으로써, 그 선동에 넘어간 루스드라 사람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바울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그 돌팔매질이 얼마나 심했던지 바울이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졌는데, 사람들이 보고 죽었다 할 정도로 되어 쓰러졌습니다. 그런 그를 성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가 내팽개쳐 버리고 갔는데, 그런 죽음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기적의 능력으로 일어난 바울은 돌에 터지고 찢어진 몸의 상처를 치료받을 겨를도 없이, 그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1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방문지인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그 더베와 루스드라를 다시 찾아간 것입니다. 거꾸로 가서 더베로 가고 또 루스드라로 갑니다. 어쩌다가 우연히 어쩔 수 없어서 그곳으로 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더베와 루스드라가 2차 전도여행의 1차 목표지였습니다. 루스드라는 바울이 1차 전도여행 때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곳입니다. 그때 바울에게 돌을 던졌던 루스드라 사람들이 모두 다른 데로 이사를 갔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루스드라에 살고 있습니다. 그 말은, 그가 이들의 눈에 띄면 다시 죽음의 돌팔매질을 당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다시 거기에 가면 안 됩니다.

 

제가 사도행전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침 좋은 책을 발견하고 읽고 있는데, 1차 전도여행에 대해 쓴 <실라의 일기>라는 책입니다. 진 에드워즈라는 분이 쓴 책으로, 물론 소설이지만 상상력을 동원해서 성경의 내용을 아주 실감나게 쓴 글입니다. 2차 전도여행 때 함께 한 동역자 실라의 눈으로 본 1차 전도여행의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너무 생생합니다. 2차 전도여행에 대한 것은 <디도의 일기>로 나와 있고, 3차에 대한 것은 <디모데의 일기>로 나와 있습니다. 가능하면 많이 구입해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전자책으로도 다 나와 있습니다.

 

루스드라는 돌에 맞았던 곳, 죽을 뻔했던 곳입니다. 거기는 가면 안 되는 곳인데, 가면 또 맞아 죽을 수도 있지만 바울은 또 그곳으로 갑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또 돌에 맞아서 죽어도 좋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사명감이 현실의 위험이나 위협보다 더 강했기 때문에 그리로 갑니다.

 

바울을 부르신 주님은 바울의 죗값을 대신 치러 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제물로 돌아가셨다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그분이 주신 사명을 따라가는 한, 그 어떤 현실의 위험이나 위협도 바울에게는 장해물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바울을 통해 주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하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바울을 부르신 주님께서는 바울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우리도 부르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셨고 우리 교회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현실의 위험이 있고 또 여러 가지 위협이 있다 하더라도,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도 주님 안에서 얼마든지 이 시대를 새롭게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보잘것없지만, 우리를 부르시고 또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께서는 죽음을 깨뜨리고 영원히 부활하신 능력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  디모데를 동역자로 삼다

 

그렇게 생명을 아끼지 않고 오직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더베를 거쳐 루스드라에 도착했을 때 너무나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아주 놀라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디모데라는 청년을 만나서 그가 바울의 동역자가 된 것입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1-2)

 

오늘 본문은 디모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디모데는 제자였습니다(1).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디모데를 자신의 동역자로 선택하고 함께 갈 때, 당시 디모데의 나이를 학자들은 대략 18세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겨우 고등학교 졸업반 정도나 대학교 1학년에 해당하는 나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린 디모데를 본문은 제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란 말입니다.

 

우리말로 디모데라는 제자가 있으니에서 있으니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문법에서 미완료형이라는 것은 계속 반복되는 행동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디모데가 예수님의 제자로 산 것은 한 번, 두 번 그렇게 하고 끝낸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후부터 계속 예수님의 제자로 살며 성장해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루스드라는 바울의 1차 전도여행 때 바울에 의해 처음으로 복음이 전해진 곳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루스드라에 살던 디모데도 그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당시 복음을 전한 바울이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돌에 맞아 쓰러지고 질질 끌려 성 밖에 내팽개쳐질 때, 다 죽었다고 생각하던 그때, 디모데가 그것을 다 목격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자칫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구나.’ 하는 것을 그는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때 그런 것을 보면서 나는 이제 그만 믿어야겠다.’라고 간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더 신실한 주님의 제자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이때까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온 것입니다.

 

둘째로, 디모데는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1). 디모데를 설명하면서 아버지보다 먼저 어머니가 믿는 유대 여자라고 강조하는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대개 아버지를 먼저 말하고 그 다음이 어머니인데, 여기서 어머니를 먼저 내세웠다는 것은 물론 어머니가 더 중요했다는 뜻도 있지만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디모데가 믿는 유대 여자의 아들이라고 할 때, 이 믿음은 유대교 신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두 번째 편지이자 자신이 쓴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 15절에서 디모데의 어머니 이름이 유니게였다고 밝힙니다. 그런데 이미 신자였다고 말합니다.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믿음을 이어서 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디모데는 자기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의 신앙을 전수받음으로써 신앙이 잘 전수되는 귀한 믿음의 가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참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외할머니와 어머니만 나온다는 것은, 외할머니도 과부였고 어머니도 과부였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그런 집안에서 디모데는 귀한 믿음으로 잘 자라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로,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는 자였습니다(2).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믿음이 위에서 아래로 전수된 것뿐 아니라, 디모데의 믿음은 옆으로 다른 사람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잘 맺고 있는 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자신의 고향 루스드라뿐 아니라 루스드라에서 약 30마일 떨어진 이고니온 사람들로부터도 칭찬을 받았습니다.

 

지금이야 30마일이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지만, 우리는 여기서 근처에 있는 다른 교회에 귀한 일꾼이 있는데 칭찬받을 만한 일꾼이라고 하는 사정을 잘 모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가까운 교회의 사정도 잘 모르는데, 그 당시 걸어가야 하는 시대에 30마일 떨어진 교회에까지 디모데가 훌륭한 제자라고 칭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칭찬받다라는 헬라어 동사 역시 원문에는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디모데가 칭찬받을 일을 한두 번 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칭찬받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요약해보면, 디모데는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파하는 동역자가 되기에 아주 훌륭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와 함께 데리고 가기를 원합니다. 이때부터 바울의 생애 내내 바울의 동역자가 된 디모데는 바울이 기록한 거의 모든 편지에 이름이 등장합니다. “나 바울과 디모데는이라고 많이 나옵니다.

 

특히 신약성경 가운데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세월이 흘러 나중에 에베소 교회의 담임목사로 목회를 하고 있던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편지 속에서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생전의 바울에게 여러 명의 동역자들이 있었지만, 그 동역자들 가운데 바울이 아들이라 부른 사람은 디모데와 디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와 후서, 디도서는 자신의 아들과 같은 동역자들에게 쓴 목회서신입니다. 그런데 이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3)

 

그의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디모데는 두 계통의 사림들과 다 교류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 친척들도 만났을 것이고, 이방인인 헬라인 친척들도 만났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디모데를 데리고 가면서 같이 전도할 생각을 하니까,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할례 문제가 마음에 걸린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핵심적으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할례를 행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디모데를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것은 정말 이상한 모습이 아닙니까? 바울의 이중적인 모습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지금까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흥분하고 분노하며 논쟁을 했고 또 예루살렘 공의회까지 갔었습니까?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이 오니까 자리를 피한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가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유대주의자들이 와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너희가 먼저 할례를 받고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면서 유대인이 먼저 되고, 그 다음에 예수님을 믿고 크리스천으로 살아야 한다.’ 하며 잘못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그런 것이 다른 복음이며 믿으면 안 된다고 강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도 왜 디모데에게는 본인이 그토록 반대한 할례를 행합니까?

 

사실 바울에게는 할례를 받느냐 안 받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할례를 받든 안 받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굳이 할례를 필요로 하면 할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이미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정이 나왔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오직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도록 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 것과 같습니다. ‘디모데야, 네가 유대인을 만날 때는 할례를 받은 것을 말해라. 그러나 헬라인을 만날 때는 그것을 강요할 필요가 없다. 할례란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이며, 그런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제사 음식도 마찬가지다.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할례를 받는 것이 좋다.’ 디모데의 할례 의식을 통해 바울은 그런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2)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 내용을 전하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동역자로 부른 후에 길을 떠나 여러 성으로 갑니다.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4)

 

바울 일행은 이제 세 명이 되었는데, 떠날 때는 바울과 실라 두 명이 떠났지만,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 이제 세 명이 되었습니다. 디모데는 1차 전도여행 때의 마가와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그들은 계속 서쪽을 향해 나아갑니다. 여기서 여러 성이란 것은 거쳐온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을 비롯히여 또 서쪽에 위치한 소아시아의 도시들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성을 다니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지키도록 합니다(4). 이 규례들은 바로 15장에서 예루살렘 공의회가 결정한 내용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결정 사항을 전달했을 때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5)

 

그 결과로 첫째,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졌습니다. 둘째로는, 수가 날마다 늘어났습니다. 이것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늘어났다는 뜻일 수도 있고, 교회의 수가 많아졌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전에 주님을 모르던 이방인들(헬라 사람들)이 믿고 많이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이방인 교회들은 믿음이 더 견고해지는 내적 부흥과, 수가 늘어나는 외적 부흥을 모두 경험하게 됩니다.

 

 

2.   드로아에서 본 환상

 

1)  성령께서 막으시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 사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차 전도여행 때 갈라디아 지역의 네 교회가 개척되었고, 2차 전도여행 초기에 또 다른 아시아 지역까지 갔습니다. 성경에서 아시아라고 하면 한국이 포함된 아시아가 아니라 지금의 터키 지역을 말합니다. 로마의 속주 중 하나인 아시아입니다. 바로 그 지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소아시아에서 사역하기를 원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사역자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하더라도 사람에 의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아주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6-7)

 

바울은 아시아(터키)에서 복음 전도에 성공함으로써 계속 아시아에서 사역하려고 했지만, 놀랍게도 성령님이 그것을 막으십니다. 바울은 브루기아(비시디아 안디옥 근처)와 갈라디아를 이미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서쪽에 있는 무시아를 항하다가 거기서 북쪽에 있는 비두니아(지금의 터키 중북부 지역)로 가기를 원했는데, 성령께서는 그것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성령님은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서쪽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디에 도착하게 됩니까?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8)

 

무시아, 즉 지금의 터키 서쪽에서 북쪽인 비두니아로 가려 하니까 막으셨지만, 서쪽 끝에 있고 유럽을 바라보는 항구 도시인 드로아에 가는 것은 막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이 복음 전도에 생명을 건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일이 다 순조롭게 풀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봅니다. 그는 복음 전도를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인 사람입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은 사람입니다. 돌에 맞아 거의 죽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위하여 힘차게 나아감에도 불구하고, 가려 하는 곳마다 막으셔서 실패하는 겁니다.

 

6절의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7절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평면적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강도를 만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야 치안이 잘되어 있는 편이지만, 당시에는 강도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것이 또 질병이었을 수가 있습니다. 발목이 삐었거나, 발바닥에 뭐가 나서 걸을 수 없었다든지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로마 군대가 갑자기 작전을 펴서 길을 막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해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한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상관없이, 아무리 올바른 목적과 방식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며 나아가는 복음 전도라 할지라도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길이 막힐 수도 있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주님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가서 제사 삼으라.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들라고 하신 명령에 순종하며 애쓰기만 하면 척척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열심히 주님의 뜻대로 바르게 하더라도 안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일이 안 되는 실패가 아닙니다. 다른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실수를 자주 저지르는데, 때로는 성령께서 복음전도자들, 우리 그리스도인들과는 전혀 다른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실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사도 바울이 아시아(터키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으셨는데, 영원히 막으신 것이 아니라 이때 막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다(7). 이때 그러신 것입니다. 나중에 보면 비두니아에는 베드로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거기에 편지도 썼습니다. 결국 바울 일행은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가게 됩니다(8).

 

 

2)  환상을 통해 인도함을 받다

 

드로아에 도착한 바울은 한 사건을 만나는데, 그것은 밤에 바울에게 환상이 보인 것입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9)

 

계속적인 성령의 막으심으로 인하여 드로아까지 오게 된 사도 바울은, 원래 이 드로아에 오려는 계획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환상을 통하여 자신이 가야 할 새로운 사역지가 어디인지를 보게 되는 기회를 얻습니다. 이 환상의 내용은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바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환상 속에서 마게도냐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합니다.

 

이것을 요즘말로 하면 뭔지 아십니까? ‘마게도냐로 드루와, 드루와(들어와, 들어와)’, 그래서(?) 여기가 드로아입니다. 물론 우스갯소리이지만, 환상을 본 도시 이름을 외우기가 아주 쉽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로 와서 도와달라는 환상을 어디서 보았는가?’ ‘드루와, 드루와(들어와, 들어와)’, 바로 드로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드로아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바로 트로이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트로이 목마가 있던 바로 그 트로이가 이곳 드로아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 역사적인 도시에서 바울이 환상을 본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사도 바울의 환상에 등장한 인물을 마게도냐 사람이라고 알게 된 것은 옷차림이나 말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요청의 내용(‘마게도냐로 건너와서’)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바울이 환상을 보았을 때 그의 일행은 즉시 마게도냐로 떠나려고 시도합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0)

 

여기 보면 환상을 드로아에서 보고 떠나려 하는데, 10절에서 눈에 탁 띄는 단어가 뭡니까? ‘우리가입니다. 지금까지는 바울이’, ‘바나바가’, ‘바울과 실라가’, ‘디모데가’, ‘그들이등 항상 3인칭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누가 썼습니까? 누가복음을 쓴 누가가 누가복음에 이어서 썼습니다. 그러니까 드로아에서 의사인 누가가 바울 일행에 합류했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소위 우리 단락’(We-sections)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네 번이 나오는데, 여기 16:10~17에 나오고, 두 번째로 20:5~15, 세 번째로 21:1~18, 그리고 네 번째로 27:1~28:16에 나옵니다. 다른 데는 그들이’, ‘바울이라고 나오는데 여기서는 우리가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떠나기를 힘썼다는 것은 바울 일행이 아주 긴박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이렇게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라고 자기들을 부르신 줄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는 크게 둘로 나뉘어 있어서, 북쪽은 마게도냐(마케도니아)이고 남쪽은 아가야(아카이야)입니다. 북쪽 마게도냐의 수도는 데살로니가이고, 남쪽 아가야의 수도는 고린도입니다. 결국 2차 때 유럽으로 넘어감으로써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테네, 고린도까지 가게 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부르신 줄로 인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지금도 환상으로 역사하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조심해야 합니다. 환상을 보고 자기가 무엇이 된 것처럼 하면 이단으로 많이 빠집니다. 환상은 항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특히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그 당시에는 환상으로 역사하실 때가 많았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런데 환상을 보았다는 사실과 내용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해석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10장에서 주님이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온갖 이상한 짐승들이 담겨 있는 보자기가 내려왔다 올라갔다 하는데 그 안에 있는 것을 잡아먹으라고 하셨을 때 못한다고 했습니다. 세 번이나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뭔지 확실하지 않아 베드로는 의아했습니다. 그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고, 베드로는 그것이 주님께서 자기를 이방인들에게 보내시는 메시지라고 해석하며 순종했습니다.

 

여기서도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며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데, 만약 그 옆에 개 한 마리가 지나갔다면 개꿈인가?’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무시하거나 굉장히 이상한 일도 다 있네. 내가 헛것을 봤나?’ 하면서 끝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이 환상을 제대로 해석했습니다.

 

그 동안 왜 그렇게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던 것을 막으셨는가?’ 한 것이 풀리는 겁니다. ‘, 그래서 그랬구나! 이제는 복음을 들고 마게도냐(그리스 북부) 즉 유럽으로 나아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기는 그냥 아시아에서만 뺑뺑 돌면서 전하려고 했는데, 주님께서는 여기서만 하지 말고 유럽으로 나가라 하시는 넓은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인정하다라는 동사는 헬라어 원문에 1인칭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 혼자 그렇게 인정한 것이 아니라, 바울의 동역자들 모두가 다 그렇게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본 바울이 자기 일행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님께서 내게 보여주셨으니까 오직 나를 따르라!’ 하고 외치며 마게도냐를 향해 나아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본 환상의 내용을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드로아에서 합류한 누가에게 자세히 설명했고, 네 사람은 바울이 본 환상에 대해 서로 자신들의 영성과 지성과 모든 것을 사용해서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자신들을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함께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즉시 순종하여 마게도냐를 향해 길을 떠납니다.

 

 

[나가는 말]

 

와서 우리를 도우라!” 지금도 예수님을 모르는 분들은 이처럼 심각하게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영적인 음성을 듣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래 전 선교단체인 위클리프 번역선교회에서 만든 선교 영상이 있었습니다. 그 영상은 한 싱글 여자 선교사가 어느 지역에 가서 성경을 번역해주고 그곳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번역해주고 복음을 전해주니까 원주민들이 그 선교사님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조금 더 일찍 오셨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헛되게 살지 않았을 텐데,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세계 곳곳의 영혼들은 우리를 향해 바로 그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돈이나 지식이나 문화적 우월성이 아니라, 당신이 가지고 있는 예수가 필요합니다. 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우리 주변에 있는 VIP 분들도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그런데 혹시 우리는 그분들이 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까? “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는데, 혹시 우리는 여기로 와. 오면 우리가 도와줄게.’라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가서 제자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왜 가야 합니까? 안 오니까 그렇습니다. 그분들은 자기 발로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서 주님께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여 주님께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바울과 동역자들은 성령님을 통해 이 음성을 들음으로써 드디어 유럽에 복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우리도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기를 바랍니다.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영혼들의 애절한 외침을 우리가 외면하지 않고, 지금 삶의 자리에서부터 시작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시작하여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으로서 복음을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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