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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0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7 ✦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에 관한 진실”
(사도행전 15장 30~41절)
[들어가는 말]
오래 전 어느 교회에서 문제가 일어나 교회가 두 파로 갈라져 다투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격해져서 서로 밀치며 싸우기까지 해서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고, 서로 뭔가 증거를 잡겠다고 비디오를 찍기도 하면서 아주 험한 모습들이 연출되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교회는 둘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나가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 새로운 목회자를 청빙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신학생이었는데, 그렇게 갈라진 다음 해에 원래 교회의 교육전도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몇몇 분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얼핏 들었습니다. “아이고 뭐, 성경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도 서로 싸우고 갈라섰는데, 우리야 그들보다 훨씬 못한 사람들이니까 이렇게 되는 것도 당연하지. 그래도 결국 바울과 바나바도 한 팀에서 두 팀이 되었고, 그래서 세계 선교가 더 활발하게 됐잖아? 우리도 한 교회가 두 교회로 되었으니 어떻게 보면 잘된 거지.”
과연 그럴까요? 정말 두 교회가 되었으니까 복음을 위해서 더 잘된 일일까요? 그리고 두 사람이 다투고 갈라섰다는 것이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에 대한 모든 것일까요? 정말 크리스천들도 싸우고 갈라져도 괜찮은 건가요? 우리가 싸워서 교회가 갈라지고 새로운 교회가 생길 때, 바울과 바나바 이야기를 하면서 ‘위대한 사도들도 그랬는데 우리 정도야 괜찮겠지’ 하며 합리화해도 되는 걸까요?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점에 대해서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그 동안 우리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에 관한 진실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안디옥에 예루살렘 공의회의 편지를 전달하다
1) 크게 기뻐하는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크리스천들
주님을 영접한 이방인 크리스천들의 할례 문제를 놓고 열렸던 제1회 예루살렘 공의회가 끝난 다음, 예루살렘 교회는 유다와 실라로 하여금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가서 그곳의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공의회의 최종 결정 내용이 담긴 편지를 직접 전달하게 했습니다(27). 공의회 판결 내용에 대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교회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0절)
여기서 “그들”이란 안디옥 교회의 공동목회자인 바울과 바나바, 그들과 함께 갔던 몇몇 사람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유다와 실라입니다. 그들은 안디옥으로 함께 가서 교인들에게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과로 나온 사도들의 편지를 전달합니다.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1절)
성경에는 “위로한 말” 앞에 숫자 1이 붙어 있는데, 아래쪽의 주를 보면 “또는 권면”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로하며 권면한 것을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공의회의 판결 내용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안디옥의 이방인 크리스천들은 유대인이 아니고 헬라 사람들인데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의사 누가도 이 안디옥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가운데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다와 실라를 통해 받은 편지에 담긴 공의회 판결 내용을 읽고 모두 기뻐합니다.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2절)
여기도 “권면”이라는 단어에 주가 달려 있어서 “또는 위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간 유다와 실라가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말씀 사역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 말로 안디옥의 이방인 크리스천들을 권면하고 위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하나님의 권면과 위로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었겠습니까?
27절에서 “이 일을 말로 전하니라”는 것은 공의회 판결 내용을 담은 편지를 전달해줄 뿐 아니라 이들이 말로도 설명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유다와 실라는 먼 안디옥까지 찾아가 단지 공의회 판결 내용이 담긴 편지를 전해주는 택배기사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공의회와 관련된 모든 내용을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에게 소상하게 설명해줌으로써 그들의 기쁨을 더 한층 크게 해주었습니다. 안디옥의 이방인 크리스천들이 공의회 판결 내용을 읽고 또 들은 후, 너 나 할 것 없이 기뻐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8절)
여기에서 “짐”이라는 것이 유대주의자들이 강조하던 할례이며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가 이방인으로 예수님을 믿고 교회로 들어온 크리스천들은 유대인처럼 할례를 행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할례는 할례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따라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구원의 조건이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가 된다는 말이기 때문에 아주 위험한 말이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할례의 짐을 지우지 않겠다는 것은 이방인 역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얻는다는, 모든 민족들을 위한 복음의 선포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 당연하게 다가오지만, 그 당시에는 굉장히 혁명적인 결정 내용이었습니다.
그 선포로 인하여, 그 동안 율법을 지키며 할례를 받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던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혼란스러워 하던 안디옥 교회의 크리스천들이 그것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아주 크게 기뻐한 것입니다.
2) 안디옥에서 계속되는 사역
안디옥의 이방인 크리스천들은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유다와 실라로부터 이방인 크리스천의 할례 문제에 대한 예루살렘 공의회 결정 내용을 듣고 나서 모두 기뻐했습니다(31). 예루살렘 교회가 모든 교회의 어머니 교회 격인데, 모교회가 예루살렘 공의회의 판결을 안디옥의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직접 전하기 위해 파송한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야기하면서 큰 위로와 격려를 주었습니다. 공의회 내용을 편지로도 전달해주고 그것을 말로도 설명하며, 여러 말로 안디옥 이방인 크리스천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며 믿음 위에 굳게 서도록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33절)
유다와 실라가 안디옥에서 한참 말씀 사역을 하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34절은 “없음”이라고 되어 있고 거기에 또 주가 달려 있습니다. 그 주를 보면 “어떤 사본에 ‘실라는 그들과 함께 유하기를 작정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성경의 원본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원래 성경을 쓰신 분들이 기록한 것을 계속 베껴 쓰고 또 베껴 썼으며, 신약성경도 계속 받아 적었기 때문에 원본은 없고 사본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본에는 그런 내용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본에는 그 내용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그냥 “없음”이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한이 다 차고 나니까 유다와 실라가 안디옥 이방인 크리스천들의 전송을 받으면서 원래 파송을 받았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남아 계속 말씀 사역을 감당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35절)
이전에 안디옥의 영적 지도자들이 있었는데,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2.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다
1) 바울과 바나바의 의견 충돌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 결정 내용을 담은 편지를 들고 안디옥을 방문했던 유다와 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안디옥의 이방인들에게 계속 복음을 전했고,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안정기에 접어듭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헌신으로 안디옥교회는 크게 부흥했습니다. 즉, 안 믿던 사람들이 계속 믿고 들어왔습니다.
그들의 1차 전도여행이 성공적으로 끝났을 뿐 아니라, 한때 안디옥 교회를 혼란스럽게 했던 이방인 크리스천의 할례 문제도 제1회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해 깨끗이 해결되었습니다. 교회 역사상 첫 번째 공의회에서 훌륭한 결정을 내림으로 교회는 안정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 중 하나였던 바울에게도 어느 때보다 안정된 삶이 보장된 상황입니다. 마음껏 말씀을 전하고 함께 형제자매들과 기뻐하며 교제하고 예배하고 얼마든지 사역할 수 있는 편안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바울에게는 안정되고 편안한 삶 자체가 인생의 목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한 군데에 가만히 머물며 목회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바울이 바나바에게 1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했던 각 성으로 다시 찾아 방문하자고 제안합니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6절)
“며칠 후”라고 되어서 3일쯤 후에 가자고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한참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 1차 전도여행 때 자신들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갈라디아의 크리스천들을 다시 만나서 그들의 믿음을 다져 주고, 또 새로운 전도의 기회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바울의 제안에 대해 바나바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7절)
바나바는 즉시 마가도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마가는 1차 전도여행 때 같이 출발했던 사람이며, 바나바의 친척입니다. 마가는 성경의 마가복음을 쓴 바로 그 마가인데, 요한이라고도 하고 마가라고도 합니다. 마가는 로마식 이름입니다. 그도 데리고 가자는 것입니다. 2차 전도여행을 떠나자는 바울의 제안에 대해서 바나바도 그러자고 동의한 것인데,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려가자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4장을 보면 우리 한국어 개역개정성경에는 “바나바의 생질”이라고 되어 있는데, 조카라고 볼 수 있지만 원어를 보면 사촌동생도 됩니다. 그러니까 사촌 동생인지 조카인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대개는 조카라고 보지만, 큰 상관은 없습니다. 직계 조카라기보다는 5촌 이상쯤 되는 조카인데, 어쨌든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그들의 수행원으로 함께 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뭐라고 반응합니까?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8절)
바울은 마가를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의 제안에 대하여 반대 의사를 보입니다. ‘좋지 않다. 데리고 가지 말자.’ 1차 전도여행 초기에 마가가 구브로(사이프러스) 섬에서 떠나 밤빌리아 버가에 도착했을 때 전도 팀을 이탈했습니다. 물론 이야기하고 갔겠지만 ‘나는 더 이상 못 가겠습니다.’ 하고 이탈하여 집으로 돌아가 버린 사람입니다.
사람의 일도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토록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 사람을 다시 데리고 간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바울이 판단한 것입니다. 이 길이 요즘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즐겁게 여행 가는 것도 아니고, 강도의 위험과 홍수나 지진이나 기근 등의 위험이 있는 아주 힘든 길인데, 헌신되지 않고 한 번 자기들을 버리고 간 사람을 다시 데리고 간다는 것은 맞지 않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가고자 한 동사와, 바울이 마가를 데리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 동사가 모두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미완료형이라는 것은 행동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바나바가 한두 번 마가를 데려가자고 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마가를 데리고 가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바울은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2)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
바나바는 계속 마가를 데려가자고 하고 바울은 안 된다고 계속 맞섰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39절)
안타깝지만 교회가 분열되어 갈라질 때 그것을 경험한 분들이 39절을 읽으며 엄청난 은혜를 받습니다. ‘이들도 이렇게 다투고 갈라지지 않았느냐? 그러니 우리도 괜찮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가 각자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상황을 가리켜 “서로 심히 다투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는 ‘심히’라는 말은 없습니다. 이것은 disagreement, 그러니까 서로 동의하지 않고 일치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말 ‘다툼’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영어로는 disagreement로 번역되었는데 헬라어로는 ‘파록시스모스(paroxysmos)’입니다. 여기서 paroxysm이라는 영어 단어가 나왔습니다. ‘발작’이나 ‘발열’이라는 뜻의 의학 용어입니다. 이 단어에는 ‘설전’이나 ‘불일치’라는 뜻이 있는데, 그러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자기주장을 내세우며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굉장히 흥분하면서 자기 의견을 내세우며 설전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치고받고 싸운 게 아니라, 말로 논쟁을 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끝내 의견이 일치하지 못했습니다. 끝까지 불일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갈라서고 맙니다.
이 사실은 우리를 대단히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대체 바울과 바나바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초대교회 최고 지도자 그룹에 속한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이며 사도들입니다. 그들은 2천 년 교회 역사상 최초로 이방 땅 안디옥에 세워진 이방인 교회의 지도자들이고, 교회 역사상 최초로 지중해 세계 전도여행에 오른 선교사들입니다. 그들은 최소한 1년에서 최대 2년 정도까지 소요된 것으로 추정되는 1차 선교여행 동안에, 온갖 고난과 위험 속에서도 완벽한 팀워크를 보여준 동역자들입니다. 또 그들은 율법을 따르며 할례를 받지 않는 한 절대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안디옥 교회를 지켜 낸 복음의 일꾼이며 용사들입니다.
이제 그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해주며 하나님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 편안한 안디옥에서의 삶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기꺼이 2차 전도여행을 다시 떠나려고 하는 주님의 신실한 제자들입니다. 사명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명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안 데리고 가느냐 정도의 생각의 차이는 극복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통로로 살기 위해 편안한 삶을 버리고 또 교회 지도자로서의 기득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사람들이라면, 이 정도의 자기주장은 내려놓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결별하고 말았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아름다운 동역의 관계를 이루고 있던 바울과 바나바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다툼을 벌이다 끝내 결별했다는 본문을 통해 우리는 무슨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얼마든지 이렇게 다투고 갈라설 수 있구나’ 생각하며, 자신의 허물이나 모난 성품으로 이 사람 저 사람과 부딪치고 헤어지며 교회가 분열하고 갈라지는 것도 괜찮다고 합리화하는 데 사용하는 본문이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성경에 묘사된 바나바는 성품이 아주 온화하고 착한 사람입니다. 덕이 많고, 남을 세워주며, 격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남들에게 위로를 잘하고 권면을 잘하고 덕을 세우는지, 그의 이름이 바나바가 되었습니다. 원래 ‘바나바’는 그의 이름이 아니라 별명입니다. ‘위로의 아들’, ‘권면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정도로 남을 잘 세워주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겠다고 살기등등하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고꾸라지고 회심했을 때, 모든 크리스천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이 뭔가 수를 쓰는 거다.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를 잔멸하려고 위장전술을 펴는 거다.’라는 식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때 ‘아니다. 주님께서 정말 이 사람을 이방인의 도구로 쓰시려고 부르셨다. 택하신 그릇이다. 주님께서 택하신 이 사람을 우리도 받아들여야 한다.’ 하며 설득하고 추천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사울을 받아들이도록 해준 사람이 바로 이 바나바입니다.
나중에 사울이 자기를 아무도 써주지 않으니까 고향에 가서 13년 정도 칩거하고 있었는데, 그런 사울을 불러다가 안디옥에서 자기와 함께 사역을 감당하며 펼치도록 장을 마련해준 사람, 데리고 온 사람, 기회를 준 사람, 발탁한 사람, 키워준 사람이 바로 이 바나바입니다. 1차 전도여행 때 원래는 ‘바나바와 사울’이었는데 중간에 ‘바울과 바나바’로 바뀝니다. 사울이 히브리식 이름이니까 이제 헬라 세계로 나아가 전도하기 위하여 바울로 이름을 바꿔서 나아갑니다. 그 바울을 앞에 세우며 ‘나보다 네가 더 잘한다. 네가 해라.’ 하고 앞세워준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 없이는 사도 바울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 바나바가 전도여행에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제안합니다. 인간적인 정이나 상식으로 보면, 바나바 때문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사람이 바울인데 그의 요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피상적으로만 보면 바울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철면피로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바울이 나쁜 사람이어서 여기서 반대하는 것일까요?
38절을 다시 한 번 잘 보시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는 마가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1차 전도여행에서 구브로 섬에서 본토인 밤빌리아에 도착했을 때 마가는 버가에서 바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마가를 데리고 가면 안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마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데 그러지 않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자’고 하며 정확히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마가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라고 하지 않고,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라고 합니다. 그 당시 헬라어 용법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인칭대명사(그)를 써서 말할 때와 고유명사인 이름(마가)을 넣어서 말할 때는 의미가 달라집니다.
만약에 바울이 여기서 ‘마가를 데리고 가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면, 이것은 마가라는 사람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뭐냐 하면, ‘나는 마가라는 사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직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이전처럼 행동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안 됩니다. 이 사람이 변화된 다음이면 몰라도 지금은 아닙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아주 사소한 차이 같아도 이것을 확실히 구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나에게 미운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이 다 미워 보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이 다 좋아 보입니다. 어떤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이 하는 일 하나 하나를 놓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자체로 그냥 다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하면 잘하는 것도 밉게 보이고 못하는 것은 더 밉게 보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면 잘할 때는 너무 예쁘고 못해도 예쁩니다.
한국 사람의 정서가 대개 그렇습니다. ‘저 사람이 하는 일은 분명히 좋은 것이고 잘하는데, 그래도 그냥 기분 나빠.’라는 식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것을 분명하게 구분해줍니다. 바울을 통해 그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마가라는 사람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을 거부하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 사람 자체와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잘하는 것은 잘한다고 인정해줄 수 있어야 하고,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잘못하는 것은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좋아한다고 다 괜찮다고 하거나, 미워한다고 다 싫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면 더 알 수 있지만, 바울은 마가가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는 측면을 강조한 것입니다. 반면에 바나바는 ‘마가가 아직 변화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다시 한 번 기회를 줘서 같이 다니며 전도여행을 하다 보면 변화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측면을 강조한 것입니다. 역시 바나바다운 태도 아닙니까? 바나바는 위로의 사람이니까 다시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사람을 데려갔다가는 아직 변화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더 어려워질 수도 있고, 이 사람 자체도 더 안 좋아질 수도 있고, 우리의 복음 사역이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옳습니까? 바울이 옳습니까, 바나바가 옳습니까? 사실 둘 다 옳습니다. 교회도 똑같습니다. 한쪽은 완전히 맞고 다른 쪽은 완전히 틀리면 결정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그런데 여기도 맞고 저기도 맞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는 측면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겁니다. 그런데 대개 우리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나와 당신은 다릅니다.’라고 하는 대신 ‘당신은 틀렸소.’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르다고 틀린 게 아닙니다.
이분들은 그것을 본 것입니다. 39절에서 ‘다툼’, ‘설전’, ‘불일치’의 의미로 사용된 헬라어 단어(‘파록시스모스’)는 성경에서 딱 두 번 사용되었습니다. 한 번은 오늘 사도행전 본문이고, 다른 한 번은 히브리서 10장 24절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0장 24절에서는 이 단어가 본문 39절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담대하게 걸어야 할 믿음의 길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히 10:24)
여기서 ‘격려’라는 말이 바로 본문 39절의 ‘다툼’과 같은 헬라어 단어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다툼’이라고 해놓고, 히브리서 10:24에서는 ‘격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한다는 것이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뜨겁게 열정을 가지고 격려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성도들끼리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의 삶을 살 수 있게끔 서로 격려하고 도전해주어야 되는데, 대충 ‘열심히 살아보세요.’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이 정말 잘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열정을 가지고 격려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격려’라는 단어가 여기서 ‘다툼’이라는 단어와 똑같은 것인데, 그렇다면 무슨 말입니까? 39절에서 ‘다툼’이라고 쓰인 단어가 ‘서로 다투어 피차 갈라섰다’고 되어 있는데, 물론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논쟁을 벌였지만 끝날 때는 감정이 상하여 보기도 싫다고 하며 탁 헤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격려하면서 ‘의견이 좁혀지지 않으니까 나는 이 길로, 형제님은 저 길로 헤어집시다.’ 하며 헤어졌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39-41절)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 때문에 의견이 엇갈린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헤어진 다음 먼저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1차 전도여행 때 갔던 구브로로 떠납니다. 본래 2차 전도여행의 취지가 1차 전도여행 때 갔던 곳들을 다시 방문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굳게 해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자신의 고향이자 1차 전도여행의 첫 번째 행선지였던 구브로 섬으로 향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의 행선지를 다른 데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브로를 통해 1차를 갔던 그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육로를 통해 북쪽으로 올라가며 시리아와 터키 중부지역(길리기아)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교회들을 견고하게 합니다.
이때는 예루살렘에서 온 실라와 함께 파트너가 되어서 2차 전도여행을 떠나는데, 원래는 이전에 갔던 곳을 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시아를 조금 더 다니려고 했는데,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제는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아시아(터키) 쪽에만 머물지 않고 그리스 북부 쪽으로 넘어가게 되어서 그리스 남부까지 가게 됩니다. 원래 전혀 계획이 없었는데 바로 이 사건을 통해 성령께서 놀라운 인도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3차 전도여행 때는 유럽에서 더 많은 역사들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은, 흔히 우리가 인간 세상에서 보거나 겪는 것처럼 정말로 심하게 갈라지고 서로 상종할 수 없어서 감정이 상하여 헤어지고 분열하고 결별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인 고린도전서 9장 6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바나바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일하지 않을 권리’란 ‘노동하지 않을 권리’, 다시 말해 교인들로부터 생계비를 받을 권리를 의미합니다. 당시 전도자들은 선교지를 돌면서 교인들에게 자신의 생계비를 받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에서 그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원래 자기는 천막 제조업자였기 때문에 천막 제조로 생계를 이어 가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자비량 선교사를 가리켜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텐트메이커(tentmaker)’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 사실을 지적하면서 바나바를 예로 들었습니다. 바나바도 자신과 같이 복음을 위해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2차 전도여행 직전에 헤어졌는데, 결별한 후에도 계속 서로를 신뢰하는 동역의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서로 다투고 결별했던 바울과 바나바는 그 이후에 화해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보통은 나중에 화해했다고 보는데, 39절에서 ‘다툼’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서 10장에서는 ‘격려’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소수의 의견이기는 하지만, 어느 것이 맞아도 상관없습니다. 후에 화해를 했든지, 아니면 헤어질 때부터 뜨거운 격려 가운데 헤어졌든지 상관없이, 우리가 흔히 하는 감정적 싸움을 하고 서로 상종도 안 하게 헤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 주님의 뜻을 따라 동역하며 나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9절 이후에는 더 이상 사도행전에 바나바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안디옥 교회 또한 바울을 여기서 공식적으로 파송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하나님의 역사도 마치 바울의 손을 들어 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바나바와 마가가 여기서 사라졌다고 해서 그들이 실패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진정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망할 수도 없고 실패할 수도 없습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골 4:10)
바울은 마가를 영접하라고 골로새 교회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또한 디모데후서에서도 마가를 언급한 부분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체포되어서 음습한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이제 다가오는 겨울을 바라보며 마지막을 예감하고 유언처럼 남긴 편지입니다. 실제로 디모데후서를 쓴 지 얼마 안 되어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딤후 4:9~11)
바울은 2차 선교여행 직전에 데리고 가면 안 된다고 했던 마가를, 긴 시간이 흐른 다음에 자기에게 데리고 오라고 디모데에게 부탁합니다. 이것은 그때 바울이 마가를 동역자로 생각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마가를 가리켜 “나의 일에 유익”한 사람이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비록 한때는 선교의 험한 길을 포기하고 도망갔던 사람이 마가입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마가는 바울에게 유익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는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그런데 마가를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로 만들고 양육하고 세워준 인물이 누구였겠습니까?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마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동행하면서 그를 훈련시켰습니다. 양육했습니다. 세워주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를 데리고 가지 말자고 했던 바울에게까지 마침내 ‘이제는 그가 유익한 사람이다.’라고 인정을 받는 자리까지 올려준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바나바와 마가는 바울과 헤어진 다음에 더 이상 사도행전에 안 나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눈으로는 당장 눈앞에 결과가 없다고 쉽게 실패했다고 할 수도 있고, 뭔가 결과가 있다고 금방 성공했다고 하고, ‘잘났다 못났다’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때의 실수와 좌절과 실패까지도 다 품으시고 그것까지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한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은 정말 진리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이끌어주십니다. 우리의 가장 최악의 순간까지도 하나님은 사용하셔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결국 좌절도 없는 것이고 실패도 없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다시 한 번 정리해봅니다.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를 놓고 바울과 바나바의 의견이 갈렸습니다. 사람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무책임한 청년 마가를 또 다시 데려갈 수는 없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자고 하는 바나바의 주장은 그 간격이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각자 자기주장을 되풀이하면서 상대를 누르고 제압하고 부정하며 자기주장만 옳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의와 불의나 선과 악처럼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라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는 같은 주님을 섬기고 있지만,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고 주님께서 부르신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나와 너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다.’ 하며 다름을 인정하고 다른 길로 떠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즘 교인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서로 상대를 비난하며 다시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부정적인 의미의 결별을 한 것이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상대를 격려하며 헤어졌습니다. 자신들의 헤어짐으로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더욱 신비한 당신의 일을 이루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들의 이런 결별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아시아만 아니라 유럽 대륙으로 또 로마제국으로 복음이 나아가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말년에 로마의 감옥에 갇힌 바울은, 마가가 복음을 위해 책임 있는 일꾼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를 불러 자신의 동역자로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마가를 데려가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무책임한 마가를 그냥 거부하고 버리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마가가 책임 있는 일꾼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겠다는 것, 그가 바로 설 수 있게끔 그에게 도전과 자극을 주기 위함이었던 것을 이제야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말년의 바울이 가장 의지하는 동역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서로 의견 차이가 당연히 있을 수 있습니다. 다 경험하지 않습니까? 하다 보면 서로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논쟁을 할 수도 있고 다툴 수도 있고 의견이 좁혀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갈라졌으니까 우리도 갈라질 수 있다.’라고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헤어졌어도 그것은 복음의 진보를 위한 헤어짐이었다는 것, 결코 감정적으로 골이 깊어져서 다시는 서로 안 보겠다고 결별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서 다른 길이 있으니 다른 길로 가자고 결정한 것뿐입니다.
그들은 서로 격려하고 도전하며 헤어졌습니다. 의견이 달랐기에 같은 길로 가지는 않았지만, 각자 생각하는 길로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축복해주며 헤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금방 화해하고 계속 주님의 복음을 위해 나아갔습니다. 바로 이런 분들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었기 때문에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달되었고 이렇게 우리가 믿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복음을 위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격려하고 도전하며 주님께서 부르신 길을 충성스럽게 걸어감으로써, 우리를 통해 믿음의 후세대들이 많이 나오는 귀한 역사를 일으키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