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2019127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5

역사적인 예루살렘 공의회

(사도행전 151~11)

 

[들어가는 말]

 

미군이 이라크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2007년에, 미국의 군사 관련 저술가 랠프 피터스(Ralph Peters)라는 예비역 중령이 미국 시사 잡지 <아메리칸 인터레스트(American Interest)>에 글을 하나 올려서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미군의 고급 장교들을 미국의 명문 대학인 동부의 아이비리그에 보내어 대학원 교육을 받게 하는 미군 교육제도를 비판하면서, 그 교육제도가 결과적으로 이론에만 밝고 현장감은 떨어져서 적합하지 못한 지휘관을 양산해낸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는 지휘관은 전장을 잘 파악하는 군인이지 사회과학 이론에 충실한 학자가 아니다. 대학교의 교수진은 20세기 국제 관계와 전쟁 이론에는 해박할지 몰라도, 21세기 분쟁의 현실에는 문외한이다. ‘박사지휘관이 이라크에 가서 사태를 망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참담하다. ‘전쟁하는 방법만 빼고 다 아는박사 지휘관 때문에 무수한 병사들이 죽어갔다. 이런 장군들은 대통령에게 진실을 말할 배짱도 없다. 물론 군대도 폭넓은 학문과 지성을 중요시해야 하지만, 지적 허세는 금물이다. 더욱이 박사 학위는 오히려 군인의 시야를 좁힐 수 있다. 전쟁에는 현명한(intelligent) 장군이 필요하지, 지적(intellectual)이기만 한 장군은 오히려 해를 끼친다

    역대 명 지휘관들이 가졌던 것은 학위가 아니라, 폭넓은 현장 경험이었다. 조지 마셜(George C. Marshall) 장군은 젊은 시절 러일전쟁을 관찰하기 위해 수개월 동안 그 전쟁 현장에 머물렀고,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도 여러 해 동안 필리핀의 현장에서 복무했다. 따라서 뛰어난 장교를 예일이나 프린스턴이나 하버드 대학원에 맡기는 대신, 아랍어 같은 언어나 다른 문화를 가르친 후에 현장 적응 훈련을 보내는 것이 더 유용할 것이다.”

 

물론 피터스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강조한 현장의 중요성 그 자체에 대하여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위태로운 전쟁 상황에서는 현장 경험을 가진 지휘관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런데 현장의 중요성은 군대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현장이 중요합니다. 인생은 어떤 이론이 아니라, 매일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세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이론적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하지만, 즉 삶 공부도 듣고 큐티도 하고 말씀 통독도 하면서 열심히 말씀의 기초를 쌓아야 하지만, 현장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말씀을 많이 배워도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말씀을 배우며 사랑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배우는 것이 필요하지만, 실제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전도에 대해서배우는 것이 필요하지만, 실제로 나가서 전도해야 합니다. 선교훈련을 받는 것이 필요하지만, 실제로 선교현장에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젊은이들에게 연애학 강사가 있는데 한 번도 연애를 해보지 못한 모태솔로가 강사라고 하면 그 말을 듣겠습니까? ‘전도왕이라고 하면서 전도학 강의를 하는데 한 번도 전도를 안 해봤다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탄탄한 이론을 갖춘 다음에 그것을 가지고 나가서 실습을 하고 실천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론에 아주 강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현장에 충실했던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집니다. 이 논쟁은 교회 역사상 첫 번째 공의회인 예루살렘 회의가 열리게 된 직접적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1.   예루살렘 공의회가 모이게 된 배경

 

먼저 역사적인 예루살렘 공의회가 모이게 된 배경을 우리가 조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회의는 교회사에 너무나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때가 주후(AD) 50년경인데,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교회 공동체에 들어오게 된 지도 수년이 흐른 때입니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이사랴의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10장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이 복음을 듣고, 믿고, 성령이 내리셔서 그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소식을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들었을 때, 이의를 제기하는 대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11:18).

 

두 번째로, 수리아 안디옥에서 이름이 나오지 않은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기 시작했을 때(11:20), 수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전까지는 유대인들에게만 전했는데, 안디옥에서는 이방인인 헬라(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더니 믿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것에 대해 듣고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 보낸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가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기뻐했습니다(11:23).

 

그 후 세 번째로 사도행전은 첫 번째 선교 여행을 보여주는데, 그 기간에 로마 사람인 구브로 총독 서기오 바울이 최초로 믿게 됩니다. 후에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이 거부하니까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겠다’(13:46) 하고 담대한 선언을 하며 나아갑니다. 그 후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간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모두 믿었으며, 열정적인 갈라디아 사역 후에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온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14:27)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오랫동안 머물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은 누가 봐도 아주 확실한 일이었습니다. 고넬료와 안디옥의 헬라 사람들이 회심한 후에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역사하셨다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이 바울의 선교 정책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가 중요한 관건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방인 회심자들이 조금씩 나오더니 곧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방인들이 믿게 된다는 일반적 개념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많은 구약성경의 본문에서 그들도 포함될 것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한 가지 특별한 질문이 그들의 마음 가운데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어떤 방법을 통해 이 믿음의 공동체(교회)로 들어오도록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들어오는 방법, 통로의 문제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들이 할례에 의해 이스라엘에 합쳐질 것이며,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진실한 일원으로 인정될 것이라고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놀라게 만드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방인 회심자들이 할례도 받지 않고 그냥 세례를 받는 것만으로 교회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타민족으로서 그들 고유의 전통과 고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즉 유대인이 되지 않고서도 그리스도인이 되어 교회 공동체로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 외에는 다 이방인이니까 우리 자신도 이방인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믿고 교회 공동체로 들어오는 것을 다 압니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고백하여 세례를 받고 교회 공동체로 들어오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질문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1세기 당시 그리스도인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은 다 유대인들이었고 그것도 본토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 후 헬라파가 들어올 때도 약간 잡음이 있었는데 그래도 유대인이니까 오케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방인들이 들어오는데 유대인으로 되지 않고 들어온다는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특히 전통주의자, 유대주의자들에게는 아주 문제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이방인들의 회심을 인정해준 것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할례 없는 회심, 즉 율법의 행위 없이 그냥 예수님을 믿고 들어오는 것, 유대교로 바꾸지 않은 채 예수님을 믿고 헌신하는 것을 허락해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굉장히 큰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시야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유대교 내의 개혁 운동이 아니라 전 세계를 위한 생명의 소식이라고 볼 만큼,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유대교의 한 종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국제적인 가족으로 볼 만큼 충분히 넓은가?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같은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에 오랫동안 있다가 예수님을 믿고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은 그래도 유대인이 된 다음에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보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 15장은 사도행전의 중심부이고 전환점입니다. 사도행전 전체가 28장까지 있지만, 15장이 거의 가운데쯤 있고 중심부이며 전환점입니다. 15장에서 예루살렘은 여전히 관심의 초점인데, 베드로가 여기서 마지막으로 나오고 더 이상 사도행전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사라지고 대신 바울이 주인공이 됩니다. 바울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힘차게 나아감에 따라 예루살렘은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물러나고, 이제는 로마가 시야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의 의도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교회사의 관점에서 볼 때, 예루살렘에서 열렸던 이 첫 번째 전 기독교적인 회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회의의 결과에 따라서 예수님이 너희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하신 그 말씀이 이루어질 것인지, 아니면 제대로 가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인지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 결과에 달려 있습니다.

 

1차 전도여행을 하고 돌아왔는데, 1차 전도여행의 핵심은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복음이 아시아의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해졌는데, 정말로 이 복음이 땅 끝까지 갈 것인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과가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2.   문제의 발생과 해결 방안

 

1차 전도여행 이후 수리아 안디옥 교회가 누리던 기쁨과 평안은, ‘유대인이 먼저 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던 유대주의자들이 옴으로써 산산이 깨어집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1)

 

바울의 1차 선교여행에 대해 북 갈라디아설이 있고 남 갈라디아설이 있는데 저희는 남 갈라디아견해를 따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보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갈라디아서가 그와 바나바가 첫 번째 선교여행 때 방문했던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즉 남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써 보낸 것이고, 그는 예루살렘 공의회가 그 위기에 대한 결론을 내기 전 이 갈등(유대인이 되고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그냥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는 주장 사이의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 편지를 썼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편지에서 사도들이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전에 쓰였으며 바울의 편지들 중 가장 먼저 쓰였을 것이라고 학자들이 생각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아마도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직 그 회의가 시작되지 않았기에 갈라디아서에서 그 회의의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누가가 사도행전 15장 서두에 묘사하고 있는 상황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에서 언급하는 상황과 똑같은 것이라는 견해가 남 갈라디아설입니다.

 

그 견해가 옳다고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1)라는 대목은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그리로 오자”(2:12)라는 내용과 일치합니다. 야고보가 그들을 실제로 보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후에 야고보는 자기가 보낸 적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갔다’(24)라고 합니다그러나 그 사람들은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야고보가 보내서 왔다.’라며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야고보가 자기들의 지지자이고 바울은 반대자라고 꾸며대며 이간질하면서, 야고보와 바울을 갈라놓으려고 했습니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자 야고보서를 썼으며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와 같은 사람입니다. 1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 야고보가 자기들을 보냈다고 거짓말을 하며 바울과 야고보를 갈라놓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파’(5)였으며 율법에 열성을 가진 사람들’(21:20)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하고 가르쳤습니다(1).

 

그들이 요구한 것은 이방인 회심자들의 할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상까지 나아갔습니다.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을 믿고 들어온 사람들도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5). 그들은 할례 없는 회심을 적합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우리가 종종 유대주의자혹은 할례파라고 칭하는 소위 시민단체(?)를 결성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 선교를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 선교가 반드시 유대 교회의 권위 아래 있어야 하고, 이방인 신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뿐 아니라 유대교로 전향한 사람들처럼 할례와 율법을 지키는 의무에도 복종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율법을 다 지키면서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2)

 

엄청나게 토론하고 논쟁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흥분하며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었으며 어떤 점이 문제가 되었는가에 대해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나중에 이 일을 요약하면서 자세한 내용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할례 없이는 회심자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백성의 표시였고, 유대주의자들은 그것을 강조했습니다. 혹시 모르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는데, 할례는 남자 생식기의 포피를 자름으로 하나님의 백성 됨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요즘의 포경수술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보다 더 멀리까지 나가서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만들었습니다. 할례를 안 받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구원받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믿음에 할례를 더하고, 또 할례에 율법 지키는 것을 더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문제는 너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구원의 길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방인들은 먼저 다 유대인이 된 다음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이 당연히 나옵니다. 복음이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토대 자체가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매우 분명하게 알고 있었으며 아주 격분합니다. 그들이 당시 안디옥에 있었던 그 유명한 사도 베드로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였을 때 바울의 분노가 극에 달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갈라디아서 2장을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베드로가 안디옥에 먼저 와서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분명히 예수님을 믿고 회심을 했습니다.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믿었고, 성령을 받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가 이방인인 로마사람 고넬료에게 10장에서 이미 복음을 전하여 고넬료와 가족들이 믿고 성령을 받고 세례를 받은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안디옥의 이방인 신자들과 자유롭게 교제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일을 마음 편히 즐겁게 하고 있었습니다. 분명 여기에는 그들을 주 안에서 형제자매로 인정하여 성만찬을 함께 나누는 것도 포함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세례와 성만찬이 신약교회의 성례전이기 때문에, 그들은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기에 함께 성찬을 행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인 할례파가 크리스천이 아닌 게 아닙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유대교에 깊이 심취한 그 할례파가 안디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베드로에게 강력히 항의하면서 이 자리를 떠나 물러가라. 어떻게 이방인들과 같이 먹느냐?’ 하고 주장한 것입니다. 불행히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그 후 일어난 일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나머지 유대인 신자들도 베드로의 나쁜 본보기를 따라서 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이 너무 강력하게 나오니까 베드로는 평화를 위해서 잠시 물러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장면을 보면서 위선을 행했다고 강력하게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베드로가 확신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자기는 유대인 사도이고 예수님의 수제자이며 교회의 최고 리더 중 한 명인데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한 것이 알려지면 자기가 곤란을 당할까 봐 그 자리를 피했다고 바울은 본 것입니다. 그때 심지어 바나바까지도 거기에 휩쓸려서, 그가 첫 번째 선교여행 동안 경험했던 모든 엄청난 역사들에도 불구하고 그 물결에 휩쓸려 함께 끌려갔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바울은 불같이 노했습니다.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안 받아들여져서 개인적으로 불쾌하다고 하는 분노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지금 손상되고 있는 것에 분노한 것입니다. 그는 베드로와 그의 제자들이 복음의 진리대로 똑바로 걷지 않고 있다는 것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베드로)의 잘못된 행동을 책망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복음을 수치스럽게 부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나 다 구원해주셨는데, 아직도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를 따지면서 멀리하며 파를 가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216절에서 이렇게 말하는데, 마치 베드로에게 말하는 것과 같이 썼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즉 당신 베드로나 나나)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16, )

 

무슨 착한 일을 조금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알고 우리 자신이 그것을 체험했다면, 어떻게 이방인 신자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가? 더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그들도 믿음을 통해 받아들이셨다면, 어떻게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하나 된 형제자매들인데 서로의 교제를 깰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우리는 유대인이고 너희는 이방인이라고 하며 파를 지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논리는 아무 문제가 없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베드로에게 이 사실을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참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쯤 그는 자신이 잘못한 것을 확실히 깨닫고 인정하면서, 이 공의회 동안 계속 은혜의 복음 및 이방인과 유대인 간의 교제에 그것이 미친 결과를 신실하게 간증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 역시 그때 회복이 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몇 가지 질문들에 의해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  ‘죄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에 의해 사람이 오로지 믿을 때에만, 즉 피난처이신 예수님께 피할 때에만 구원을 받는 것인가?’ 

*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의해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는가, 아니면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예수님의 은혜에 의해,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선행과 종교적인 공적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인가?’

*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믿음과 행위, 은혜와 율법, 예수님과 모세의 혼합에 의한 것인가?’

*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교의 한 종파인가, 아니면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영적 가족의 진정한 일원인가?’

 

바로 이런 것들이 공의회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복음이 앞으로 더 뻗어나가지 못하게 되는 아주 큰 위기상황인 것입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이 중대한 문제의 해결책을 얻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합니다(2). 그래서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린 것입니다.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3)

 

120마일 정도를 걸어서 가야 하니 먼 거리입니다. 그 중간에 있는 베니게(페니키아/두로와 시돈/지금의 레바논 지역), 그리고 유대인들이 쳐주지도 않던 사마리아에도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만나 이방인들이 주님께 돌아온 소식을 전하며 함께 기뻐합니다.

 

 

3.   논쟁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모인 최초의 공의회

 

1)  바울 일행과 바리새파 신자 사이의 논쟁

 

이제 안디옥에서 온 대표단, 즉 바울과 바나바와 다른 몇 사람이 도착하여 예루살렘 교회, 특히 사도들과 장로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4)

 

환영을 받고 하나님께서 1차 전도여행 중에 하신 일에 대해 간증하자마자 논쟁이 새롭게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유대주의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5)

 

그들이 할례와 율법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한 것은 전적으로 성경적인 것입니다. 선물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들을 이방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1절에서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율법을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합니다. 할례 받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6)

 

드디어 예루살렘 공의회가 시작됩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도 거기 참석하긴 했지만, 사도행전은 당시 벌어졌던 아주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련된 세 사람이 연달아 행한 아주 단호한 내용을 요약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도 베드로이고(7-11), 두 번째는 바나바의 지원을 받는 사도 바울이며(12), 세 번째는 예수님의 동생이자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실질적인 담임목사였던 야고보의 발언입니다(13-21). 그 중에서 오늘은 베드로가 말한 내용까지만 살펴보겠습니다.

 

 

2)  베드로의 결정적 증언

 

베드로가 기여한 것은, 회의에 모인 사람들에게 고넬료 사건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아마도 10년 전쯤 일어났던 그 사건에서 베드로는 주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성령께서 그를 그리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먼저, 그는 모든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겸손하게 말합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7)

 

베드로는 내가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 하나님이 하시기 위해 나를 택하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래 전부터 그들 가운데서 그를 택하셔서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선택도 하나님의 것, 특권도 하나님의 것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8)

 

둘째로,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유대인인 자신들에게 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셔서 증거하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베드로가 이전에 한 말,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다 받으신다’(10:35) 하고 고넬료와 가족들 앞에서 했던 그 말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데에는 인종적인 장벽은 아무것도 없고 전혀 없다는 보여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을 때에만 그들을 그분의 가족으로 맞아들이신다는 의미에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들을 인정해주셨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9)

 

셋째로,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셔서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않으시고 똑같이 보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특별하게 보시고 이방인은 낮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보십니다. 그러므로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외적인 음식물이나 의식의 정결이 아니라 내적인 정결이라고 합니다. , 마음이 어떤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삼중적인 하나님의 역사(베드로를 선택하심, 성령을 이방인들에게 주심, 마음을 깨끗하게 하심)를 말하면서 베드로는 피할 수 없는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그것을 표현하면서 먼저 베드로는 그 정반대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0)

 

왜 그분이 이미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에 저항함으로써 그분을 자극시키는 것인가? 그분에게 불순종하는 것인가? 우리 유대인들은 율법에 순종함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방인들이 그렇게 하기를 기대한다는 말인가? 그럴 수 없다!’ (영어성경에 “No”라고 나오는데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11)

 

베드로가 이 마지막 말을 할 때, 우리는 그가 바울이 안디옥에서 공개적으로 그를 책망하면서 했던 복음의 선포를 상당히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바울에게 막 야단을 맞았는데, 바울이 야단친 내용과 이 베드로의 말의 내용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2:16, )

 

베드로는 여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그들도 꼭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11절, 새)

 

그런데 나는 믿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베드로가 말한 내용이 상당히 압축된 내용인데, 네 번에 걸쳐서 우리를-그들을또는 우리는-그들은이라는 주제가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주셨다’(8).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다’(9).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도 감당할 수 없었던 멍에를 지우는가?’(10)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도 은혜로 된 것이요, 그들이 구원을 얻은 것도 은혜로 된 것이다.’(11)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만일 유대주의자들이 하나님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에 아무런 차별도 두시지 않고 둘 다 믿음을 통한 은혜로 구원하시는 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그들도 역시 차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은혜와 믿음은 우리를 다 평등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 앞에서 내가 잘났고 너는 못났다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위이고 너는 아래다라고 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형제자매의 교제를 가능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마지막에 나는 믿노라가 아니라 우리는 믿노라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나가는 말]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예루살렘에서 제1차 공의회가 열립니다.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으로 이방인에 대한 할례를 주장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주장이 오랫동안 맞섭니다. 우리가 회의하는 것과 아주 비슷할 수 있습니다. 완강하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끝까지 들은 다음에 마침내 베드로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들어서 이방인 고넬료 일행에게 어떻게 구원의 은혜를 거저 베풀어 주셨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조건으로 율법의 행위를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하신 하나님의 백성에게 죽음의 멍에를 씌우는 것으로서,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범죄행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우리는 믿는다하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 말을 할 때를 상상해보십시오. 베드로가 우리는 믿는다라고 할 때 어디를 보고 있었겠습니까? 대충 아무나 본 것이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를 보면서 이야기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당신도 그렇게 믿지? 나도 그렇게 믿는다. 당신이 나를 야단치지 않았느냐? 나도 그렇게 믿는다.’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다음번에 결론을 살펴보겠지만,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면 우리도 지금 예루살렘에 가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의식들을 행해야 합니다.

 

제가 오늘 설교제목을 정하면서 역사적인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평범하게 지었는데, 사실은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아싸가 인싸 되고 인싸 중에도 핵인싸가 되는 놀라운 역사’(?)라고 할 뻔했습니다. ‘아싸아웃사이더(outsider)’이고 인싸인사이더(insider)’입니다. 완전한 아웃사이더가 인사이더로 된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아주 핵인싸즉 핵심인물, 중심인물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 바로 오늘 예루살렘 공의회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믿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바울과 바나바와 베드로처럼 진정으로 이렇게 믿음으로 하나가 된 신앙 공동체를 이룰 때, 우리가 서로 눈빛만 보아도 통할 수 있는 깊은 영적 교류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어느 시대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 진리를 붙들고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이 진리를 선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98 복음 전파의 열매와 억울한 투옥 (행 16:11-24)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9 (2/24/2019) kpccoh 2019.02.24 1974
197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뻗어나가는 복음 (행 16:1-10)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8 (2/17/2019) kpccoh 2019.02.17 2284
196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에 관한 진실 (행 15:30-41)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7 (2/10/2019) kpccoh 2019.02.10 8170
195 이방인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행 15:12-29)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6 (2/3/2019) kpccoh 2019.02.03 1991
» 역사적인 예루살렘 공의회 (행 15:1-11)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5 (1/27/2019) kpccoh 2019.01.27 3496
193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행 14:19-28)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4 (1/20/2019) kpccoh 2019.01.20 2715
192 루스드라에서의 치유와 그 후의 혼란 (행 14:8-18)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3 (1/13/2019) kpccoh 2019.01.13 3099
19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공동체 (골 3:9-17) * 새해 메시지 (01/06/2018) kpccoh 2019.01.06 7003
190 송구영신 메시지: 어떤 땅으로 살 것인가 (막 4:13-20) * 새해맞이감사예배(12/31/2018) kpccoh 2019.01.01 1047
189 담대히 선포한 은혜의 말씀 (행 14:1-7)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2 (12/30/2018) kpccoh 2018.12.30 2303
188 왕께 경배하기로 작정한 사람들 (마 2:1-12) * 성탄주일 메시지 (12/23/2018) kpccoh 2018.12.23 1120
187 이방인에게로 향하는 복음의 빛 (행 13:44-52)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1 (12/16/2018) kpccoh 2018.12.16 2620
186 무엇을 믿고 살 것인지 결정하라 (행 13:26-43)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0 (12/9/2018) kpccoh 2018.12.09 2771
185 버가를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행 13:13-25)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39 (12/2/2018) kpccoh 2018.12.02 3243
184 따로 세움을 받는 바나바와 사울 (행 13:1-12)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38 (11/25/2018) kpccoh 2018.11.25 3274
183 우리에게 충분한 주님의 은혜 (고후 12:7-10) * 추수감사절 메시지 (11/18/2018) kpccoh 2018.11.18 906
182 헤롯의 죽음과 복음의 전진 (행 12:18-25)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37 (11/11/2018) kpccoh 2018.11.11 4286
181 죽임 당한 야고보, 구출 받은 베드로 (행 12:1-17)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36 (11/04/2018) kpccoh 2018.11.04 3252
180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 (행 11:19-30)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35 (10/28/2018) kpccoh 2018.10.28 3425
179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일 (행 11:1-18)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34 (10/21/2018) kpccoh 2018.10.21 1969


9480 S. Old State Rd, Lewis Center, OH 43035 / Tel: (614) 433-7155 / E-mail: kpcco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