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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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13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3 ✦
“루스드라에서의 치유와 그 후의 혼란”
(사도행전 14장 8~18절)
[들어가는 말]
‘인도의 성자’로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기독교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쓴소리를 했습니다. “당신들이 믿는 예수는 좋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싫다. 당신들 기독교인들은 당신들이 믿는 예수와 너무나 다르다.” 간디가 싫어한 기독교인들은 주로 그가 인도나 영국에서 직접 체험한 영국 성공회 교인, 즉 개신교인들이었습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는 개신교인이었고 무교회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동시대를 산 중국의 석학 우징숑 박사는 가톨릭 신자였는데, 그 두 사람 역시 묘하게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언행을 보면 도저히 주님을 믿을 수 없지만, 성경으로 돌아가면 주님을 믿지 않을 수 없다.’는 요지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예수님의 모습과, 신교와 구교를 막론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크리스천들의 모습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그것을 압니까? 그러니까 믿음이 눈에 보인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기쁨’이란 단어는 추상명사입니다. 추상적이라는 말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기쁨에 무슨 실체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언어적으로 말하는 것일 뿐,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쁨’이란 단어 그 자체는 보이지 않는 추상명사이지만, 실제로는 기쁨은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쁨이 있으면 좋아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기쁨이 있으면 그 기쁨은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도 똑같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도 추상명사지만, 믿음은 반드시 눈으로 보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예수는 좋지만 크리스천들과 교회는 싫다고 말한 것은 자기가 만났던 크리스천들의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을 자기 눈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와 중국의 우징숑 박사가 기독교인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 도저히 주님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믿음은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인간의 참된 믿음은 어떤 형태로든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전도할 때 어쩌면 가장 힘든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처럼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은 거기에 감각이 별로 없을 가능성이 높은데,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신 분들이나 아직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지 않은 분들은 더 확실히 느끼실 겁니다. 왜 그 동안 교회를 안 나왔고 크리스천들을 멀리 했는가? 예수는 좋은 분인 것을 알겠는데, 그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별로 예수처럼 살지 않는다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1. 구원 받을 만한 믿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동남쪽으로 약 100마일 떨어져 있고 30개의 산을 지나야 하는 이고니온에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그 결과 그곳의 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만약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아니 그 전에 버가에서 풍토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비시디아 안디옥에 갈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이고니온으로 갈 일이 없었을 것이고, 또 이고니온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루스드라로 갈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비록 바울과 바나바에게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지만, 그곳에 있는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100마일이나 떨어진 곳을 산 넘어 갔지만, 이고니온에도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적으로 우세한 이방인들을 선동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관리들까지 끌어들이면서 바울과 바나바를 쫓아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이 돌로 치려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이고니온에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일어났던 일이 이고니온에서도 똑같이 반복된 것입니다.
이고니온에서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 남쪽으로 약 30마일 떨어져 있는 루스드라로 갔습니다. 2천 년 전 당시 30마일이면 걸어서 하루 반나절 꼬박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루스드라로 갔을 때 거기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8절)
여기서 바울과 바나바가 한 사람을 만났는데 본문은 그 사람을 가리켜서 세 가지로 묘사합니다. 첫째로는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 둘째로는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된 사람’, 세 번째는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같은 의미의 표현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합니다.
이런 것만 봐도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의사인 것이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은 그냥 다리를 못 쓰는 사람이라고 하며 넘어갈 것을, 의사 누가는 자세히 보고 세 번씩이나 같은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이 사람은 선천적으로 다리를 못 쓰는 사람이고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므로, 의학적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9절)
이 사람이 몇 살인지는 모르지만, 태어난 후로 성인이 되기까지 한 번도 일어서거나 걸어 본 적이 없이 평생 하반신이 마비되어 살았다면, 그의 삶은 절망 밖에는 없는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무엇을 한 것입니까? 바울이 와서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루스드라를 찾은 바울은 그곳에서도 어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루스드라에서는 복음을 전할 때 이전의 다른 곳들(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과는 다른 점이 발견됩니다. 이전까지 바울과 바나바는 어디를 가든 어디로 갔습니까? 먼저 그 도시에 있는 유대인 회당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 회당은 많은 사람들을 손쉽게 만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거기에는 동족 유대인들이 있고 또 경건한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스드라에서는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 회당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제국 은퇴 군인들이 많이 살던 루스드라에는 유대인들이 많지 않아서 유대인 회당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루스드라 사람들을 위해 야외에서 복음을 전한 겁니다. 그런데 그때 바로 이 사람, 즉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들었습니다.
만약 루스드라에도 유대인 회당이 있어서 바울이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면, 유대인의 회당에 이런 장애인이 들어올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못 들어옵니다. 그래서 하반신이 마비된 이 사람은 복음을 들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루스드라에 유대인 회당이 없었다는 것도 이 사람에게는 굉장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에게 뭔가가 없고 부족한 것이 이렇게 은혜의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 사도 바울이 아무리 야외에서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해도 그 장애인이 그 자리에 없었거나 말씀을 들어도 듣지 않거나 딴 짓을 했다면 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 절망적인 삶을 살다가 구걸이나 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다 어둠 속에서 삶을 마감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날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절망 속에 빠져 있던 그의 삶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렇게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굉장한 사건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듣되 경청해서 잘 들어야 합니다. 대충 듣거나 딴 생각하거나 졸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될 수 없습니다. 젊은 두 남녀가 사귈 때도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줘야 관계가 시작되고 깊어지지, 상대방의 말은 듣지 않으면서 “I love you”만 남발한다고 관계가 세워지는 게 아닙니다.
헬라어 원문에 ‘들었다’는 동사가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바울의 말을 한 번 듣고 끝내거나 대충 들은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온 마음을 집중하여 계속 경청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자신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든 많은 사람들 중에 특별히 말씀을 경청하는 이 장애인을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십시오. 믿음이 눈에 보였습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10절)
여기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몸이 치유받을 수 있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고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태어난 후 한 번도 일어나본 적도 없던 이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걸어갑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바울이 생전 처음 보는 그에게 그렇게 명령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의 설교를 경청하는 그를 계속 주목했고 또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입니다. ‘아, 이 사람이 뭔가 마음속에 믿음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는 것이 바울의 눈에 보였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바울의 눈에 그것이 보인 겁니다. 그가 아무리 바울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했다고 해도 바울이 그를 계속 주목해서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그가 치유 받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눈이 탁 마주친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장면을 이미 사도행전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인데,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 미문(아름다운 문) 앞에서의 장면입니다. 거기에도 똑같이 선천적으로 다리를 못 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40세가 넘는 그 사람은 매일 그곳에서 구걸하는 걸인이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그를 보았습니다. 그 걸인은 평소대로 그저 건성으로 베드로에게 ‘한 푼 줍쇼’ 하면서 구걸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그를 주목해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을 똑바로 보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다리 못 쓰는 걸인은 베드로를 보았고, 그때 베드로의 눈과 걸인의 눈이 탁 맞부딪쳤습니다. 그 시선의 맞부딪침 속에서 베드로가 다리를 못 쓰던 걸인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네가 원하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행 3:6)
바로 몇 년 전 멀리 떨어진 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났던 기적이, 오늘 본문에서 이방 땅인 갈라디아의 루스드라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미문 앞의 다리 못 쓰던 걸인도, 오늘 루스드라의 걷지 못하던 사람의 눈길이, 각각 베드로와 바울을 통해 역사하신 주님의 눈길과 마주친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기 눈으로 본 게 아니라 성령 충만하여 믿음의 눈으로 그 사람을 봤고, 바울도 성령 충만하여 믿음의 눈으로 루스드라의 이 사람의 눈을 봤습니다. 결국은 주님의 눈과 그들의 눈이 부딪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는데 ‘생명의 삶’에서는 믿음이 ‘주님께 기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이란,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고 우리를 먼저 주목해서 보시는 주님의 시선에 우리의 시선을 마주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를 봐주고 계십니다. 그 눈을 우리가 보는 겁니다. 주님과 눈을 마주치며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거기서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아십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물론 매일 거울을 보지만, 그것은 내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라 거울을 통해서 본 겁니다. 내 눈으로 나는 못 봅니다. 사실은 내가 나를 더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십니다. 내가 내 몸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압니까? 모릅니다. 의사도 몸을 열어보고 여기저기 찾아봐야 간신히 아는 정도이지만, 하나님은 우리 몸을 만드셨기 때문에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몸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우리 마음속 깊은 곳까지도 다 아십니다. 때로 우리는 ‘내 마음을 내가 모르겠어’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도 내 마음을 모르는데, 하나님은 내 마음을 다 아십니다. 지금 세계 인구가 77억이 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77억 세계 인구 가운데 우리 개개인을 발견하시고,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우리를 주목해 보시면서 ‘나를 보라!’ 하고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나의 아픔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내 가족도, 배우자도 알지 못하는 고민을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깊은 슬픔을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극심한 고통을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모르는 나의 고독을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아십니다. 그래서 나를 인도해주십니다. 그분이 바로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바로 그 주님을 오늘 본문의 이 사람이 만난 것입니다.
2. 루스드라 사람들의 잘못된 숭배
그런데 이 기적이 일어나자 루스드라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1-12절)
다리를 못 쓰고 한 번도 걷지 못하던 사람이 모든 사람 앞에서 벌떡 일어나니까 그것을 거기서 본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들이 이 사람을 한두 번 봤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벌떡 일어납니다. 너무 충격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소 사용하던 로마제국 공용어 라틴어나 상용어 헬라어가 아니라, 자신들의 지역 방언(언어)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왔다고 난리법석을 떱니다.
사람은 당황하면 자기 본래 말투가 나온다고 합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사투리를 모르지만 지역마다 사투리가 있습니다. 오래 전 다른 교회에서 사역할 때 장로님 한 분이 부드럽고 좋은 분이셨고 평소에는 “목사님, 잘 지내시죠?”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당황스러운 사건이 탁 벌어지니까 그분이 “뭐유? 해보자는 거유?”라고 하셔서 그분이 어디 출신이신지를 제가 알았습니다.
당시 그리스 신화를 믿던 그곳 사람들은 신들이 인간과 같은 모습을 지니고 인간과 동일한 형태의 삶을 산다고 믿었기 때문에 굉장히 놀랐습니다. 그들은 바나바를 가리켜 ‘제우스’라고 하고, 바울은 ‘헤르메스’라 불렀습니다. 헤르메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열두 신들 가운데 가장 큰 주신(主神)인 제우스의 전령이자 대변자 역할을 한다고 당시 사람들이 믿던 신이었습니다. 또 제우스의 아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설교하고 또 발을 못 쓰던 사람에게 ‘바로 일어나라’ 하고 명령했으니까, 루스드라 사람들은 말을 한 그가 헤르메스임이 분명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라 불렀습니다. 그때 바나바가 한 것은 하나도 없었고, 복음을 전하고 장애인을 일으킨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단지 바울의 일행으로서 거기에 함께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바울을 제쳐 놓고 바나바를 제우스라 불렀고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했습니다. 제우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큰 주신입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제우스 신전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리스 신화를 다루는 그림이나 영화에서 제우스는 항상 가장 멋진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보기에 바나바는 키도 크고 외모가 괜찮았는데, 바울은 외모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풍채 좋고 외모가 괜찮은 바나바를 주신 제우스라고 단정했고, 볼품없는 외모의 바울이 말을 계속 하니까 그는 제우스의 뜻을 대변하는 헤르메스라고 간주한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고린도후서 등의 편지에서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고후 10:10)라고 하며, 사람들이 자기 외모를 별볼일없다고 했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공용어는 라틴어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도록 사용해 오던 헬라어를 상용어로 썼습니다. 유대인인 바울의 설교를 루스드라 사람들이 알아들었다는 것은 바울이 헬라어로 설교했고, 또 루스드라 사람들 역시 헬라어를 상용어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리 못 쓰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걷는 것을 본 루스드라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던지, 그들은 헬라어보다 더 익숙한 자신들의 모국어로 막 소리를 친 것입니다. 그러나 루가오니아어를 알지 못하던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루스드라 사람들의 이런 미신적이고 광신적인 행위는 그 지방에 대한 배경 지식을 알면 이해가 됩니다. 그때로부터 약 50년 전에 라틴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라는 사람이 자기의 작품 <변용>(Metamorphoses)에서 오래된 그 지방의 전설을 쓴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썼습니다.
“최고 신 제우스와 그의 아들 헤르메스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브루기아의 산지를 방문했다. 그들은 잠행을 하면서 사람들의 집에 나그네로 묵으려 했으나 수없이 여러 번 거절을 당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은 지푸라기와 늪에 나는 갈대로 지붕을 이은 한 초라한 오두막에 묵어 갈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는 빌레몬과 바우시스라는 늙은 농부 내외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비록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그 손님들을 후히 대접했다. 후에 그 신들은 그들에게는 보상을 내렸지만, 그들을 맞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집들은 홍수로 다 쓸어 버렸다.”
이런 이야기가 그 지역 사람들에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루스드라 사람들은 그들의 이웃 지역에 대한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만일 신들이 그 지역을 다시 방문한다면 자기들은 불친절했던 브루기아 사람들과 같은 운명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애를 썼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을 생각하며 평소에도 제우스 신전에서 제사를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오비디우스의 문학적 증거와는 별도로, 루스드라 근처에서 두 개의 비문과 돌로 된 제단 하나가 발견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함께 그 지역의 수호신으로서 숭배를 받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의 루스드라 사람들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3절)
‘시외’라는 것은 루스드라 성문 밖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문 밖에 자리 잡고 있는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들과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으로 왔습니다. 이 ‘대문 앞’은 어느 집의 대문이 아니라 ‘성문 앞’을 뜻합니다. 고대 성읍에는 성문 주위에 넓은 광장이 있고 거기서 장터나 집회 또는 재판이 열렸습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의 성문 광장에서 말씀을 전하고 다리 못 쓰던 사람을 일으켰기 때문에,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제우스와 헤르메스라고 생각되는 바나바와 바울에게 제사를 하기 위해서, 제물로 사용할 소들과 그 제물들을 장식할 화환들을 가지고 바울과 바나바가 있는 성문 앞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3. 하나님에 대한 선포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그때까지도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4-15절)
영문을 알지 못한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 있는 누구에겐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고 물어보았고, 그 사람이 헬라어로 설명을 해주었을 것입니다. 그제야 이들은 루스드라 사람들이 자기들을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으로 여겨서 자기들에게 제사 지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막 말립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 사람들이 자기들을 신으로 경배하려 한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즉시 옷을 찢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큰 슬픔을 당했을 때나,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되는 일을 보았을 때 옷을 찢어서 자신의 슬픔이나 분노를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의 재판 때도 대제사장이 옷을 찢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쇼를 한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과 바나바가 옷을 찢은 것은 분노 때문인데, 루스드라 사람들이 자신들을 신으로 경배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옷을 찢은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에게 제사하려는 무리 가운데로 뛰어 들어가서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이다.” 하고 외쳤습니다.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 역시 당신들과 똑같은 일을 겪는 사람들이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이 어린 아기로 태어났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죄인이다.’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똑같은 것을 겪었고, 똑같은 것을 겪고 있고, 똑같은 것을 겪게 될 여러분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똑같은 인간일 뿐인데, 여러분이 그런 우리를 신으로 경배하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선천적으로 다리를 못 쓰던 사람에게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라고 명령한 것은 분명히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의 명령과 동시에 그 장애인이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러니까 루스드라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것이 바울의 능력이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람 아닙니까? 어떻게 날 때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일으킵니까? 그래서 그들은 바울과 옆에 있던 바나바에게 제사를 드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그것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이심을 정확하게 알고 선포한 것입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은 굉장히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바울과 바나바에게 사실 얼마나 좋은 순간입니까? 그냥 한 번만 슬쩍 눈 감고 넘어가면 영웅적인 존재로 찬송과 경배를 받을 수 있는 순간입니다. 속으로는 ‘하나님, 우리는 절대 하나님이 아닙니다.’라는 식으로 기도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런 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복음을 전하기가 얼마나 쉬웠겠습니까? ‘야, 내가 한마디 하겠는데 너희들 안 하면 죽는다. 꼭 들어라.’라고 하면 얼마나 파워가 있겠습니까?
오래 전에 나왔던 영화 <스타워즈> Episode VI(원래 3편)에서 작은 동물 같이 생긴 부족이 등장합니다. 거기서 씨스리피오(C3PO)라는 로봇이 신처럼 떠받들립니다. 그때 주인공인 루크 스카이워커(Luke Skywalker)가 초능력을 사용해서 의자에 앉은 그 로봇을 하늘로 떠오르게 합니다. 그래서 그 부족이 주인공들을 죽이려고 하다가 로봇이 하늘을 나는 것을 보고 말을 듣기 시작합니다.
그런 것처럼 ‘봐라, 맞다. 이 능력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다. 내가 이 정도다. 그러니 너희는 내 말을 들어라. 안 들으면 너희는 다 끝이다.’라는 식으로 하면 얼마나 복음을 전하기도 쉽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도 쉬웠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이것은 최대의 유혹의 순간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한 것 중의 하나도 바로 이것입니다. ‘네 능력을 보여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를 슈퍼스타로 떠받들며 따를 것이다.’ 이것이 자기우상화의 위험한 순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참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열심히 해서 결과를 좋게 해야 하지만, 결과가 좋게 나오게 하기 위해서 중간 과정이 순수하지 못하더라도 슬쩍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과정도 순수해야 합니다. 방법도 순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건데 뭐 어떤가?’ 하면서 불법을 저지르고 세상 법도 살짝 어기며 결과를 좋게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그런 모습이 자꾸 보여서 간디 같은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을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까닭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힙니다. 여기서 ‘버리라’고 말한 ‘이런 헛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언뜻 보면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로, 바나바는 제우스로 경배하려는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외쳤으므로, ‘이런 헛된 일을 버리라’는 것은 허황된 그리스 신화를 믿거나 사람이 사람을 숭배하려는 헛된 일을 버리라는 의미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바울이 한 말의 일차적 의미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은 그보다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울은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을 합니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6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기 전까지는 모든 인간이 자기 판단을 좇아 사는 것을 방임하셨다는 것입니다. ‘방임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묵인하다’, ‘용납하다’, ‘허용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것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모든 죄를 하나님이 무조건 다 봐주시고 무조건 용납하시고 무조건 허용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기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잠시 보류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17-18절)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기 전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당신을 계시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이 전해지기 전에도 하늘의 태양, 때에 따라 내리는 비, 결실을 위한 계절의 변화 등의 ‘자연계시’(또는 일반은총)를 통해 사람들에게 밤낮으로 당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침마다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때에 따라 비를 내리시고, 계절의 변화를 이끄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을 신으로 섬기고 경배했습니다. 사람은 굉장히 끈질깁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어떻게든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어서 섬기려고 합니다. 태양이나 나무, 바위와 짐승처럼 눈에 보이는 자연물을 신으로 경배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2천 년 전 지중해 세계 사람들은 그들이 믿던 그리스 신화 속의 열두 신 모두 인간의 형상을 지닌, 눈에 보이는 모습의 신으로 믿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제우스가 바람피우다 헤라에게 얻어맞는(?) 것처럼 사람과 너무 똑같습니다.
이것이 루스드라 사람들이 선천성 하반신마비자가 일어나 걷는 것을 보고, 바나바와 바울을 가리켜 제우스와 헤르메스라고 부르며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려 한 이유였습니다. 그들에게 신은 이 세상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체를 지닌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이런 헛된 일을 버리라’고 할 때, 헛된 일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숭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는 것을 섬기려는 헛된 일을 버리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왜 눈에 보이는 것을 숭배하는 것이 헛된 일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없어져 버릴 것을 숭배하느라 자기 인생을 건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없애버리는 지름길이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에게 그보다 더 헛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인간이 신이라 숭배하던 모든 것들과 성경을 통해 당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차이는, 오직 하나님만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만 형체를 지니지 않으신,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이시라는 것입니다. 형체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이미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토록 우상숭배를 금하셨습니다. 우상이 뭡니까? 자기를 위해서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만들어서 한 장소에 갖다 놓고 자기가 필요할 때만 가서 비는 겁니다. 그게 우상입니다. 그래서 그런 헛된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생을 망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잘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 우상들이 많은데, 어디를 가면 몸통에 여러 개의 팔을 지닌 신상도 있고 얼굴에 여러 개의 눈이 달려 있는 신상도 있습니다. 그런 신상이 보여주는 것은, 모든 사람을 볼 수 있는 눈과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손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손과 모든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77억 개가 되겠습니까? 몇 개 달려 있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다 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손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진짜로 신상에 77억 개를 갖다 붙인다고 해도 그 신상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이겠습니까? 만들어놓은 그 자리에 밖에 있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형체가 없는 영이시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온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개별적으로 함께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항상 함께해 주십니다. 내가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가도 하나님께서는 그곳으로 나와 함께 동행해주십니다. 내가 저 중남미로 가더라도, 아프리카로 가더라도, 유럽으로 가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내 곁에 계십니다. 내가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품고 계시고, 내가 바다에 홀로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 바다에서도 함께 하시며 나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분이셨다면, 아무리 눈부시고 거창해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계신 분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형체가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믿습니까? 너무 간단합니다.
지금은 그런 일이 별로 없는데 이전에는 종종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는 중에 띠리릭 하고 전화벨소리가 울린 적이 많았습니다. 그것이 뭡니까? 눈에는 안 보이는데 전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파도 우리 눈에 안 보이지만 있다고 다 믿는데,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해주셨습니다. 눈에 안 보인다고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말이 없습니다.
[나가는 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 아니신 게 분명한데,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눈에 보인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 자체가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보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남에게 보이려고 행동하는 것은 위선이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은 사람의 삶에는 믿음이 밖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조금만 가까운 사이면 다 알지 않습니까? 누가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인지, 누가 믿음보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인지, 누가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믿음의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누가 사람이 보는 곳에서만 믿음이 있는 척하는지, 우리가 다 느끼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믿음은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의 믿음을 눈으로 보고 있다면, 중요한 사실은 다른 사람들 역시 내 믿음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도 다른 사람을 보고, 다른 사람도 나를 봅니다. 단지 우리가 서로 말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내 믿음을 볼 때 어떻게 보고 있겠습니까? 특히 주님을 모르는 분들이 밖에서 나를 만날 때 나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내 안에 있는 믿음을 그분들은 어떻게 보겠습니까?
만약에 누군가가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잘하는데도 그 삶이 더 이기적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안겨 주는 삶이라면,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고 인정을 받겠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세상으로부터 비판과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왜 우리의 믿음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저 사람이 교인이라면 나는 교회를 안 나가겠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살아야 합니까? 너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왜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주님께 나와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가 그들이 주님께 나오지 못하게 방해하는 존재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내 입맛에 맞는 성경 구절만 붙들고 살아서 그렇습니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나에게 은혜가 되는 구절이나 내가 좋아하는 구절만 보고, 내가 손해를 봐야 한다거나 목숨도 버리라는 구절들은 나와 안 맞는다고 하면서 버리다 보니까 그런 식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만 붙드는 태도를 버리고, 원래 하나님이 주신 온전한 말씀으로 돌아가야 되겠습니다. 온전한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참된 믿음을 보여주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을 보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일 것이고, 또 그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