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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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6일 주일예배
✦ 새해 메시지/임직식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공동체”
(골로새서 3장 9~17절)
[들어가는 말]
우리 중에는 교회생활을 평생 해온 분들도 있고, 또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을 줄로 압니다. 그것이 뭔가 하면, 교회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교회에 오래 다니면서 또 목회자가 되어 사역을 하면서, 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좋은 분들도 많이 보았고, 상대하기가 힘든 분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공동체,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까다로운 사람, 나와 다른 사람, 나에게 불편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크리스천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서로 하나가 되어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 훈련, 봉사, 전도, 선교 등 다른 것들은 너무 잘하는데 서로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교회가 주님의 참된 교회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런 교회라면 진정한 교회,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사람만 골라서 교회를 이룰 수 없습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나 내가 뽑은 사람들만 모인다면, 그것은 어떤 단체는 될 수 있지만 교회는 아닙니다. 내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든지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이든지, 우리는 함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법을 배우고 함께 실제로 사랑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으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주신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다 느낍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1. 교회는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임을 기억하라 (9-11절)
1) 더 이상 사람을 나누고 차별하는 구분이 사라진 공동체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자들과 함께 소위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그들의 발을 씻겨주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요 13:34-35, 새번역)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원하신 크리스천 공동체, 즉 주님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시면서, 모든 사람이 주님의 이 새로운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다 초청하셨습니다.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당시 죄인인 세리들, 창녀들, 로마 백부장, 간음하다 잡힌 여인, 사마리아 여인, 삭개오, 막달라 마리아 같이 여러 죄인들을 다 초청하시고 교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비유 중에서 하나님의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소위 ‘혼인 잔치의 비유’로 불리는 말씀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주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큰길과 산울타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 (눅 14:21, 23, 새)
주님은 사람들을 강하게 권하여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놀랍게도 주인이 데려오라고 한 사람들은 다 여기에 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첫 교회는 주님의 이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바로 그런 모습이 오늘 골로새서 본문에 나옵니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9-11절)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말씀이 쓰인 주후 1세기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정말 놀랍고 혁명적인 내용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사람들을 수백 년 동안 갈라놓았던 옛 기준들을 언급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기준들 때문에 오랫동안 서로 적대시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그렇게 사람들을 나누고 차별하는 구분은 다 없어졌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먼저, 놀랍게도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더 이상 적대감이 없다고 합니다. “헬라인”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유대인이 아닌 다른 민족 사람들을 부를 때 사용하던 말입니다. “할례파나 무할례파”도 똑같은 뜻입니다. “할례파”는 할례 받은 유대인들을 말하고, “무할례파” 즉 ‘할례 받지 않은 자’란 표현도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경멸하는 용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헬라(그리스) 사람들을 불결한 이교도로 취급했습니다. 지금도 한국이나 중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헬라 사람들과 함께 먹지 말아야 했고, 그들에게 말을 걸지도 말아야 했고, 그들과 아예 상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그들이 이제는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함께 찬송을 부르고, 함께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함께 서로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심지어 할례를 받지 않은 그리스도인들, 즉 이방인 크리스천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는데 그들 중에서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할례를 받은 사람들 즉 유대인들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이전에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또 바울은 “야만인”을 언급하는데, 헬라 사람들은 그들을 굉장히 무시했습니다. ‘야만인’이라는 것은 헬라(그리스)어를 말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Barbarian’이라는 영어 단어는 헬라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헬라 사람들이 다른 언어를 들을 때는 그 말을 모르니까 자기들이 들을 때는 그저 ‘바르(bar), 바르, 바르’라고 들렸기 때문에 ‘barbarian’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야만인들 중에서도 ‘스구디아인’들은 아주 먼 북쪽 변방에서 살던 종족이었는데, 그래서 가장 낮고 천하며 야만적인 자들로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그들을 들짐승이라고까지 불렀습니다. 바울 당시에 ‘스구디아인처럼 행동한다’는 말은 행실이 아주 나쁘다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었고, 심한 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스구디아인 같은 야만인들 중의 야만인들이 교양 있는 문화인들과 함께 있습니다. 무식한 자들과 배운 자들, 권세가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이 함께 앉아 예배드리고, 함께 말씀을 나누고, 교제하고, 함께 식사를 합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전에 미국과 영국과 한국에도 있었지만, 1세기 당시에 노예와 자유인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당시 노예들은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고 그저 살아 있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즉 노예들에게는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전혀 없었습니다.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주인은 그들을 때릴 수도 있었고, 심지어 조금 잘못했을 때 죽여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바울 당시 골로새 지역의 주민들 중 1/3이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크리스천 공동체 속에서는 노예와 주인이 옆에 같이 앉아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저 소유물이고 살아 있는 도구로 취급되던 노예들이, 가르치는 은사를 받았을 경우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자기를 따르는 교인들 중에 자기 주인도 있습니다. 도대체 세상 어느 곳에 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기적이 초대 한국교회에도 일어났습니다. 소위 양반과 상놈이 같이 예배를 드리고, 천민 중에 리더가 나오고, 종이 장로가 되는데 주인은 초신자라서 자기 종인 장로를 따르는 등, 이런 놀라운 일이 우리 한국교회에도 일어났습니다.
과거에는 서로 원수였던 모든 종류의 사람들, 사회적인 기준에 의해 오랫동안 서로 나뉘고 갈라졌던 사람들이 이제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9-10).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으로 인하여 새 사람이 되니까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욕심 중심이었을 때는 그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 마음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니까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2) 원수도 사랑하는 공동체
초대교회는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던 놀라운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결코 완벽한 공동체였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도 많았습니다. 저번에 살펴보았던 사도행전 6장에 보면, 교회 내에서 헬라파(헬라어 사용)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소위 국내파와 해외파 사이의 갈등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과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할례 받은 교인들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또 사도행전 15장 뒷부분(36~41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다투고 갈라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또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고린도 교인들 안에 ‘게바파’, ‘바울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에도 갈등과 싸움과 갈라지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불완전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아주 쉽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그런 이상적인 공동체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길 수 있고, 까다로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기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은 이미 다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장벽을 넘어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여러분, 잠시 자신의 삶과 관련된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중에 나와 함께 하기가 아주 힘든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기가 참 힘든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누군가가 ‘사포(sandpaper)’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그것을 ‘빼빠’라고 불렀습니다. 거친 면에 문질러서 부드럽게 만드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까칠까칠한 면으로 나를 막 문질러서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과의 관계에서는 항상 안 좋은 마찰이 생기기 때문에, 이름 그대로 사포와 같은 사람들, 아주 까칠까칠하고 까다로운 사람들, 그래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기운이 빠지고 불편하며 빨리 떠나고 싶습니다. 아주 어색하고 답답하며, 그 사람 때문에 화가 날 때도 많습니다. ‘이 사람이 내 눈 앞에서 사라져주었으면’ 하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런 사포/샌드페이퍼와 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분 한 번 손을 들어보십시오. 아무도 없습니다. 혹시 그런 사람이 정말 없으면 주중에 저에게 연락하십시오. ‘고객님, 친절하게 연결해드리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십시오. ‘혹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사포인 것은 아닌가?’ 우리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삶에 있어서 그렇게 까다롭고 까칠까칠한 존재입니까? 내 배우자에게, 내 자녀에게, 부모님에게, 형제자매에게, 교회 성도에게, 친구에게, 직장 사람들에게, 사업체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저 사람 좀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해주십시오.’라는 것이 내 기도제목이겠지만, 놀라운 것은 그런 까다로운 사람이 내 삶에 있다는 것이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아십니까? 믿기 어렵더라도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까다로운 사람이 내 삶에 있을 때 내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표시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새 계명’에 의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세상의 안 믿는 분들이 본다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스스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의 표시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었고, 심지어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까지도 용서하셨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이고 우리가 그분을 믿고 따릅니다. 그 예수님께서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고 좋아할 만하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좋아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의지적으로 사랑을 한다면, 우리는 정말 엄청난 영적 성장을 체험하게 됩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우리는 왜 영적으로 잘 성장하지 못합니까?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하고, 가까이 할 사람은 가까이 하고 멀리 하고 싶은 사람은 멀리 하고... 이러니까 성장이 안 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영적 성장은 결코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큐티 많이 하고 기도 매일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배운 말씀대로 실천할 때, 기도한 대로 나아갈 때, 특히 가장 큰 계명 즉 하나님을 내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것과 내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실천할 때, 그러니까 하나님 사랑을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실천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영적 어린아이에 머물고 맙니다. 신앙의 연륜은 오래 되었는데 영적 어린아이로 그냥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피할 사람을 피하기 때문에 성장이 안 되는 겁니다.
10여 년 전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던 <목적이 이끄는 삶(The Purpose Driven Life)>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p.200).
“모든 교회는 그리고 모든 소그룹 안에는 적어도 한 명 이상 서로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특별히 감정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안정되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하는 버릇이 있거나,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기술이 부족할 수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특별히 더 필요로 하는 사람들’(EGR: Extra Grace Required)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신 것은 그들과 우리 모두의 유익을 위해서다. 그들은 우리가 성장할 수 있고, 또한 우리의 교제를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우리는 그들을 형제자매와 같이 사랑하고 존중할 것인가?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특이한 버릇과 다른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공동체란 서로 얼마나 잘 어울리느냐 와는 상관이 없다. 우리의 교제의 바탕은 하나님과의 관계다.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산상설교”(마태복음 5~7장)에서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마 5:43-45, 새)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렇게 원수를 사랑할 때 정말 하나님의 자녀다워진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원수를 사랑한다면, 가족끼리 서로 닮아 가듯이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닮게 될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추어주시고, 또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모두에게 비를 내려주십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과 반역하는 사람, 예수를 잘 믿는 사람과 교회의 ㄱ자나 예수의 ㅇ자만 나와도 거품을 물고 욕하며 비난하는 사람 모두를 다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처럼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계속해서 그 뒤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마 5:46-47, 새)
이것을 요즘 말로 바꾸면 이런 식이 될 겁니다. ‘만약 너희가 너의 친구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이 있겠느냐? 좋아하는 사람끼리만 서로 위해주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하겠느냐? 그런 일은 조폭이나 테러리스트들도 다 하는 일이 아니냐?’
영화 같은 데 보면, 조직폭력배들이 남을 해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테러리스트들도 상대방을 다 죽입니다. 그런데 자기편이나 자기 부하 한 명만 죽어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러워하고 웁니다. 너무 슬퍼서 그렇습니다. 그것과 뭐가 다르냐는 것입니다. 남들은 다 해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면 그게 뭐가 다르냐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글쎄요, 저는 원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원수’란 무슨 철천지원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랑하기 힘든 모든 사람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 까다로운 사람들, 즉 사포와 같은 사람들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영적으로 자라게 해준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 내 맘에 들게 말하고 행동하며 나에게 친근하게 해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해가지고는 결코 영적으로 성장하기가 힘듭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할 때 성장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답게 됩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것은 아무나 못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 가능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시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 사람들을 지금까지 사랑해보려고 노력조차 안 했구나. 이제는 정말 사랑해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지금 내 안에서 진행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결단이 마음에 올라올 때 빨리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예배 끝나고 그냥 잊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성령의 역사하심에 우리가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깨달음이 왔다면 그것은 성령님께서 우리를 성장하게 하시려고, 세워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남은 인생 내내 그런 까다로운 사람에 대해 분노하고 미워하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왜 거기에 내 아까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합니까? 사랑하기에만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2.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먼저 자신을 준비시키라 (12절)
본문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며 나아가려는 우리를 향해 뭐라고 부릅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2절)
‘내가 정말 사랑해보겠다’ 하고 나가는 사람이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입니다. 그러한 자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장 먼저 할 일은, 우리 각자가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무엇을 준비합니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옷을 입는다는 것은 원래 나에게 있는 게 아닌데 가져다 입는 것입니다. 몸에 맞지 않는 사이즈의 옷을 입을 때 불편합니다. 자기 사이즈의 옷을 입어야 편합니다. 우리에게 맞는 사이즈의 옷이 뭡니까? 크리스천에게 어울리는 옷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먼저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해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자비’는 관대함의 다른 표현입니다.
‘겸손’은 교만의 반대인데, 조금 전 언급한 릭 워렌 목사의 <목적이 이끄는 삶> 책에 나온 정의가 참 좋습니다. 겸손은 스스로를 ‘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자기를 덜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겸손한 사람은 자기를 생각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에 더 관심을 갖는 사람입니다.
‘온유’는 통제되고 있는 힘을 말합니다. 길이 잘 든 힘센 말에 대해 표현할 때 사용되던 용어입니다. ‘오래 참음’이란, 나머지 덕목들에 대해 끝까지 충실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여기서부터 입니다. 혼자 있을 때에는 그렇게 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뉴스에서 불쌍한 사람들이 나오고, 난민들과 아프리카의 못 먹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프지 않습니까?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아, 나는 너무 긍휼이 풍부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또 밤에 잠들어 있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때는 작은 천사와 같은 아이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깨어나면 상황은 전혀 달라집니다. 내 아이가 아니라 그 누구라고 해도, 원수라고 해도, 그가 잠들어 있을 동안에는 얼마든지 잘 지낼 수가 있습니다. 자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하지만 양쪽이 다 깨어 있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다 자기는 잘하는데 남들이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나는 천하에 겸손하고 착한 사람인데 저 사람이 참 문제다.’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목장이 중요하고 교회가 중요합니다. 그런 엄청난 착각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 성숙은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 테스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혼자 있으면 되게 잘난 사람인 줄 알고 있고 아주 괜찮은 사람인 줄로 아는데, 같이 있으니까 진짜 자기 모습이 나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자기 혼자 살 때는 굉장히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했는데도 자꾸 싸웁니다. 상대방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는데 이상하게 결혼하고 나니까 변했습니다. 그러나 변한 게 아니라 진짜 모습을 이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것을 통해 자기가 변화되는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서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3.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려면 서로에게 이렇게 하라 (13-17절)
바울이 골로새서를 쓸 1세기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본문을 보십시오. 오랫동안 원수였던 사람들, 서로 적대시했던 사람들이 지금 같이 모여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이 까다로운 사람들, 불편한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3절)
1) 서로 용납하라
여러분, 지금 저에게 불만이 있으십니까? “서로 용납하라! 용서하라!” 이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
서로 용납하라는 것이 하나 됨의 공동체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이 말은 서로 참아주고 관용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이것을 위한 실제적인 방법 한 가지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내 마음 밖으로 내쫓으려 노력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을 쫓아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을 함부로 내 기준에 의해 판단하지 말고, 그들이 사포(sandpaper)와 같은 사람이라는 나의 판단이 어쩌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 내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겸손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또 그들에게 의도적으로 고통을 가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일부러 톡 쏘는 말을 한다든지, 일부러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행동하는 시도를 아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 사람이 내게 까다로운 사람인 것은 아는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대부분 모릅니다. 그래서 그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우리가 서로 용납하며 참아주는 것입니다.
2) 서로 용서하라
오래 전에 제가 아주 좋아했던 책이 필립 얀시(Philip Yancey)가 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What’s So Amazing About Grace)>입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115).
“용서는 높은 도덕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용서는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다. 용서로 치유 받는 최초의 사람, 그리고 많은 경우 용서로 치유 받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용서하는 자다. 진실 된 용서는 포로에게 자유를 준다. 그러고 나면 자기가 풀어준 포로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용서보다 어려운 것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너무 맞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용납과 용서의 바탕은 결국 사랑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4-15절)
그리스도의 평강(평화)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기 나와 있는 대로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평화가 넘치게 되고, 평화가 넘치게 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3) 말씀을 붙들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6절)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고 배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기 위함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성경을 공부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큐티하는 목적은, 나 자신의 유익만이 아니라 다른 형제자매들을 말씀으로 잘 권면하여 유익을 주기 위한 것이란 말입니다.
4)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무슨 말입니까?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함께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혼자 찬송하고 혼자 예배하고 혼자 기도하면 된다. 나 혼자 하나님을 잘 믿으면 된다.’라고 하지 말고, 함께 모여서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같이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이렇게 매주 모이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배로 모이고, 주중에도 모이고, 목장으로도 모이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또 서로를 섬겨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라는 단어 자체는 단수이지만, 교회의 의미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혼자서는 교회가 안 됩니다. 최소한 두 명 이상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야 교회입니다. 그것이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크리스천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믿는 것만이 아니라 소속되는 것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크리스천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고 생각하는데,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믿는 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believe’만 있는 게 아닙니다. ‘believe and belong’이 크리스천입니다. ‘믿고 소속되는 것’이 크리스천입니다. 그러니까 ‘나 혼자 하나님을 잘 믿으면 된다. 교회에 나갈 필요가 없다.’라고 하는 것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에 소속되어 함께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있으면서 공동체 안에서 성장하도록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있든지 상관없이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이 교회를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17절)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말을 하든지 행동을 하든지,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나가는 말]
오늘 우리는 장로, 안수집사, 권사, 서리집사 등 직분자들을 세웁니다. 직분자들이 가장 최선을 다해 힘써야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 됨을 지키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바로 영적 리더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로서 교회를 분열시키고 파당을 지으며 편을 가르는 것을 가장 멀리해야겠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분열되는 것은 진짜로 막 싸우는 것도 있지만, 아주 작은 데서 시작이 됩니다. 교우들 가운데 누구만 불러낼 때 그렇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불러내고, 내가 껄끄러운 사람이나 안 친한 사람이나 불편한 사람은 제외시키면서 ‘당신만 나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마.’라고 하는 데서부터 분열과 파당이 시작됩니다. 영적 리더들은 이것을 가장 피해야 합니다. 물론 한 번은 이 사람, 그 다음은 저 사람 등 두루두루 하면 됩니다. 그런데 누구는 제외시키고 누구는 만날 때 거기서부터 분열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로서 가장 애써야 되는 것이 하나 됨을 지키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하나 됨을 지키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것이 영적 리더(직분자)의 책임이며 사명입니다. 바로 그것을 하라고 교회의 직분자를 부르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단지 직분자들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하나 됨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책임이 모든 교우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공동체 안으로 사람들을 데려올 책임도 있습니다. 외부에 대해 문을 닫고 있는 사람들, 혹시 우리와 같이 까다로운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우리에게 그들을 강권(강하게 권)하여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언젠가 “이제 내 집이 다 찼다”고 하실 때까지 우리는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세워지는 직분자들을 비롯하여 우리 모두가 주님의 그 명령에 순종하며 나아감으로써, 우리 교회가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루며, 주님께서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들라’고 맡겨주신 이 사명을 다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