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2018년 12월 31일 새해맞이감사예배
✦ 송구영신 메시지 ✦
“어떤 땅으로 살 것인가”
(마가복음 4장 13~20절)
[들어가는 말]
어느덧 2018년의 마지막 날 마지막 순간이 되었습니다. 작년 이맘때에도 아마 우리는 비슷한 심정으로 이 순간을 맞이했을 것이고, 내년 이맘때에도 아마 지금과 비슷한 마음으로 이 순간을 맞이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어떤 관점에서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맞이하여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앙인, 그리스도인인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말씀의 열매를 거두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며 또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좋은 본문이 바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말씀이 떨어진 땅이 왜 열매를 맺지 못하는지, 또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이 비유는 세 공관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다 나오는데, 이전에도 몇 번 다룬 적이 있지만 오늘은 마가복음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이 비유의 뜻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뒤 문맥과 마가복음 전체의 문맥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해 주시는 것에 따르면, 네 가지 종류의 씨가 뿌려진 네 종류의 땅은 네 가지 종류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씨가 말씀을 지칭하면서도 동시에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또한 씨가 뿌려진 땅도 씨를 받아 열매를 맺어야 할 사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씨에 해당하는 인물이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누구일지 살펴보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도 과연 어떤 땅으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며 결단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씨를 뿌리는 자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3-14절)
예수님은 씨가 ‘말씀’을 의미한다고 하시면서도, 씨를 뿌리는 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씨 뿌리는 자는 당연히 예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뿌리시는 말씀을 잘 듣고 열매를 맺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과연 어떤 말씀을 얼마만큼 들었습니까?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와 주일예배에 참석하여 30~40분 정도의 설교만 들은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한 주 동안 말씀을 붙들고 열심히 살다가 오면 그럴 수 있지만, 대부분 그냥 듣고 흘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다른 생각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말씀의 열매가 말씀을 듣는 시간과 반드시 정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보다 말씀을 열심히 듣는 사람이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큰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열심히 안 듣는 사람과 열심히 듣는 사람 중 누가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더 높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10년 전 나와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의 <아웃라이어(Outliers)>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1만 시간의 법칙’(The 10,000 Hour Rule)이 나오는데,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가 된 사람들의 공통점들 중 하나가 그들이 자기 분야에 전문가가 되기까지 최소 1만 시간을 투자했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비슷한 이론을 말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법칙을 우리에게 적용해서 생각해보면, 어떤 교우가 주일예배를 1시간 동안 드린다고 할 때 1년이면 52시간이 됩니다. 20년을 그렇게 하더라도 1,040시간 밖에 안 됩니다. 여기에 주일 오후 예배나 저녁 예배가 있다고 가정하고 20년간 꾸준히 출석했다고 하면 1,040시간이 더해져서 2,080시간이 됩니다. 또 수요예배까지 매주 참석한다고 하면 다시 1,040시간이 더해져 총 3,120시간이 됩니다. 거기에다 일주일에 한 번 2시간 정도씩 20년 동안 성경공부나 소그룹 모임에 참석한다면 2,080시간이 더해져서, 모두 합치면 총 5,200시간이 됩니다. 아직도 1만 시간이 되려면 반 정도(4,800시간)를 더 채워야 합니다. 매일 1시간씩 20년 동안 큐티와 새벽기도를 한다고 하면 7,300시간이 확보되어서, 모두 합쳐 12,500시간이 됩니다.
어떻습니까? 현실에 가능합니까?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한 번도 안 빠지는 것도 아니고, 또 모든 예배와 성경공부와 목장과 수요예배와 새벽기도에 매번 참석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아니 참석하는 게 훨씬 적거나 아예 없기 때문에 그보다 시간이 훨씬 모자랍니다. 아무리 집에서 한다고 해도 그렇게 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지 않는데, 씨가 뿌려지지 않는데, 우리가 어떻게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 삶에 열매가 별로 없다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말씀을 읽고 또 읽는 것이 중요하고, 씨 뿌리는 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듣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2. 씨가 뿌려진 네 종류의 땅
씨 뿌리는 자가 뿌린 씨는 네 종류의 땅에 떨어집니다(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 그런데 이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왜 농부는 좋은 땅에만 씨를 뿌리지 않았을까요? 다른 데는 열매를 거두지도 못하니까 그냥 좋은 땅에만 씨를 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에 정착했는데, 이스라엘 전역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특히 중앙 산악지대에서는 농사를 지을 땅이 없었기 때문에, 석회암으로 된 척박한 산지를 농지로 사용하기 위해서 그들은 ‘계단식 농경지’(terrace)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각 계단 끝에 담장을 만들어 비가 내려도 농작물이 쓸려 내려가지 않게 했습니다. 그런데 석회암 산지를 얇게 덮은 토양은 비가 조금만 집중적으로 와도 땅속으로 빗물이 흡수되지 않기 때문에 한꺼번에 산비탈로 휩쓸려 내려가 담장을 허물고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될 때 각 계단의 끝에 있는 담벽 근처에는 비가 올 때마다 위에서부터 쓸려 내려온 고운 흙 때문에 이 비유 속에 나오는 ‘좋은 밭’이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다른 곳들은 땅을 갈아엎어서 좋은 땅을 만들지만, 산지는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각각의 계단식 농경지에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있었는데, 이 길이 비유에 나오는 딱딱한 ‘길가’입니다. 그런 계단식 농경지는 위로 올라갈수록 토양이 얇아지고 바위가 많은 ‘돌밭’이 됩니다. 또 농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계단식 농경지의 담 주변에는 ‘가시떨기’ 밭이 만들어졌습니다.
1) 길가에 뿌려진 씨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5절)
그러면 먼저 ‘길가에 뿌려진 씨’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이 씨는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새들에 의해 먹혀 버립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대해 어떤 반응을 일으키기도 전에 그 말씀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처음부터 말씀에 대해 대적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땅이 씨를 받아들일 수도 있었는데 그러기 전에 새가 날아와 먹어치운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땅의 표면 자체가 딱딱해서 씨가 들어갈 수 없는 채로 있다가 곧 새가 와서 씨를 먹어버린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이것은 길가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들이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마음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안식일에 손이 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을 고소하려고 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죽일 음모까지 꾸몄습니다(3:6).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한 것을 보시고 탄식하시며 노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막 3:5-6)
또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반응이 기가 막힙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막 6:2-3)
이들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본 후 그 지혜와 권능 때문에 놀랐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 배경을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이처럼 아무리 예수님이 말씀을 뿌리신다고 해도 마음이 닫혀 있거나 딴 생각을 하고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아무리 가르치고 이적을 보여줘도 말씀을 배척할 뿐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중요한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을 뿌리실 때 사탄은 새처럼 그 말씀을 가로채 가려고 24시간 대기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단 한 번이라도 우리가 방심할 수 있는 때가 없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을 생각해보십시오. 한 해 동안 우리에게 말씀이 주어졌는데도 내가 가져가지 못하고 마귀에게 가로채인 말씀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2) 돌밭에 뿌려진 씨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6-17절)
네 종류의 씨 중에서 그 설명이 가장 긴 ‘돌밭’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말씀을 들을 때 “즉시”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둘째, 말씀으로 인해 박해가 올 때 “곧”' 넘어집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마가복음의 등장인물들로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들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을 때 어떻게 합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막 1:17-18)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곧” 따른 것은 참 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돌밭에 뿌려진 씨가 말씀을 들을 때 ‘즉시’ 그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처음이 좋으면 끝까지 좋아야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좋았지만 중간에 넘어지는 겁니다.
또 4장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비롯해 여러 비유를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게 됐는데, 광풍이 일자 즉시 예수님을 따랐던 이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막 4:38, 새)
이 말을 가만히 보십시오. 부드럽게 이야기한 게 아니라 막 소리를 지른 겁니다. 어부들인데도 불구하고 배가 가라앉게 생기니까 위기상황에서 외친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님이 너무 무심하다고 볼멘소리를 해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광풍이 오니까 곧 넘어졌습니다. 즉시 예수님을 따른 것은 좋았는데, 어려움이 오니까 곧 넘어졌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후에 그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꾸짖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넘어지는 일은 예수님에 대한 배반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본문 17절에서 사용된 ‘넘어지다’라는 단어는 14장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에서 다시 사용됩니다. 새번역으로 보면 이것이 더 분명합니다.
“너희가 모두 걸려서 넘어질 것이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목자를 칠 것이니,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하였기 때문이다.” (막 14:27, 새)
이 예언이 있은 지 얼마 안 있어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합니다(14:50). 특히 베드로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그렇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14:29), 나중에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는데 자기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의 대표적 인물은 베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에서 베드로의 실수가 부각이 됩니다. 그 원인 중의 하나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이 마가복음을 쓴 사람이 마가였는데 이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 때 데리고 갔던 그 마가라 하는 요한입니다. 후에는 베드로의 통역관이라고 할 정도로 베드로와 같이 사역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가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을 것이고 많은 소스를 주었을 것이기에 이 마가복음을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베드로가 자신이 실수한 것을 많이 이야기해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실수가 마가복음에 많이 나옵니다.
‘베드로’(페트로스)라는 이름이 ‘바위’ 혹은 ‘돌’이라는 뜻의 헬라어 ‘페트라’에서 온 것이란 점을 상기할 때, 베드로는 돌밭에 떨어진 씨를 대표합니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으로 높여졌지만, 마가복음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해 환난이 올 때 말씀을 저버리는 ‘돌밭’으로 묘사됩니다.
사실 베드로만 그렇습니까? 베드로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박해가 올 때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연약한 인간이 아닙니까? 이전에 그런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처음에 교회를 나오면서 너무 기뻐하며 교제도 하고 ‘생명의 삶’도 하고 예배하며 좋다고 하다가, 얼마 후 어려움이 오거나 스케줄이 바빠지니까 넘어지고 그냥 안 나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냥 넘어지고 끝난 게 아니라, 다시 일어나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금방 예수님을 따르다가 또 금방 넘어질 수 있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심지어 생명까지 바치며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3)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18-19절)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마가복음의 인물이 누가 있을까 볼 때, 첫째로 영생의 길을 찾아 예수님께 왔다가 재물에 대한 욕심과 염려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부자 청년(10:17-22)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0장에서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달려와서 꿇어 앉아”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 하고 존칭까지 써 가며 예수님께 영생에 대해 묻습니다. 배우는 사람의 자세로 더할 나위 없는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 청년은 이미 십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할 정도로 계명에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라고 자부했던 적이 있는 것을 보면, 1세기 당시에 십계명을 철저히 지켰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십계명을 다 지킨 것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뭔가 채워지지 않으니까 율법을 열심히 지킨 것입니다. 그런데도 안 채워지니까 예수님을 찾아 나온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막 10:21-22)
예수님이 무조건 우리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따라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닙니다. 이 청년에게는 재물이 우상이었습니다. 이 재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구원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그것을 다 팔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네 우상을 포기하고 와서 따라라. 그래야 해결이 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어릴 때부터 율법을 지키는 너무 훌륭한 청년이었기에 예수님도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습니다(10:21). 그런데 예수님이 그에게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준 다음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고 말씀하셨지만, 그는 거기에 순종하지 못하고 근심하며 떠나갑니다. 참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그 후에 그가 안 나오니까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는, 빌라도입니다. 물론 그는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가시떨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빌라도는 처음에 예수님을 옹호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지만, 민란을 우려해 군중들의 요구에 따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고 맙니다. 자신의 지위에 대한 집착, 또 그것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죄 없는 다른 사람(예수님)의 생명을 빼앗는 데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 생명을 지키려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는 헤롯대왕의 아들로 분봉왕 헤롯인데,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의 말을 들을 때 괴로워하면서도 “달갑게” 들었습니다(6:20). 그러나 그는 헤로디아의 딸의 요청에 못 이겨서, 또 자신의 체면을 지키느라고, 세례요한을 죽이는 처형을 허락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다른 두 가지 땅(길가, 돌밭)보다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처럼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기타 욕심 때문에 말씀의 결실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특히 교회를 좀 다니고 신앙생활을 좀 한 경우에는 이 부분이 가장 문제입니다. 길가나 돌밭보다 가시떨기로 계속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문제입니까? 결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못 맺습니다. 수십 년을 신앙생활 했는데 열매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시떨기에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 특징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며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자기 우상을 따로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것이 옛날 이스라엘의 문제였고 그래서 망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것도 대충 하는 게 아니라 열심히 섬깁니다. 그런데 자기 우상이 또 있습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깁니다. 그러다 보니까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겁니다. 이것이 요즘 신앙인들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가시떨기에 머물러서 열매를 못 맺고 있습니다. 나는 과연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점검해보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습니다.
4) 좋은 땅에 뿌려진 씨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20절)
좋은 땅에 뿌려진 씨의 특징은 말씀을 듣고 받아서 결실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아주 단순합니다. 단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결실했다’는 설명 외에는 다른 언급이 없습니다. 마가와는 달리 누가복음을 보면,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눅 8:15) 말씀을 들었다고 말함으로 말씀을 듣는 자세를 부각시킵니다. 또한 그 말씀을 “지키어 인내로 결실”(15)했다고 더 설명함으로써, 좋은 땅이 가리키는 사람은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고 또 있을 수 있는 박해를 잘 견디어내서 마침내 결실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은 단순히 설명합니다.
그러면 마가복음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좋은 땅에 뿌려진 씨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누가 있습니까? 먼저 이 땅이 이미 ‘좋은’ 땅이라고 언급되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땅이 결실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이 땅이 ‘좋은’ 땅이기 때문입니다. 결실의 1차 원인이 그 땅 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인 것 외에 결실을 위해 그 땅이 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보며 마가복음 내에서 좋은 땅에 해당하는 자들을 살펴본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혹은 능력을 ‘믿고’ ‘받아들여’ 치유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기적 이야기들이 보여주는 특징은, 예수님의 기적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즉 기적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어떤 사람에게 믿음이 있을 때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에서 치유를 경험한 사람은 믿음이라는 좋은 땅을 이미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점에서 마가복음에서는 믿음이 좋은 땅의 인간적인 표현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바로 좋은 땅인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열두 해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나옵니다(5:25-34).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막 5:27-29)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던 중에 나타난 이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5:27), 원래는 피가 나는 여인은 사람들 앞에 올 수 없는데도 과감히 무리 가운데 섞여 예수님에게 접근합니다. 이같이 정결법을 깨뜨리는 대답한 행동은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는 강한 믿음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 믿음은 어디서 왔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음으로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야말로 예수님에 대해 믿음으로 응답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 결과 그 혈루 근원이 곧 말라서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닫게 됩니다. 이 놀라운 치유는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5:34)
이 여인의 치유는 여인의 믿음으로 인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믿음이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믿음이 기적을 낳은 것입니다.
맹인 바디매오도 마찬가지였습니다(10:46-52). 바디매오도 여리고 입구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을 때, 지나가는 사람이 나사렛 예수시라고 하니까 그 말을 듣고 소리 질렀기 때문입니다(10:47). 그때 사람들이 조용하라고 하지만 더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부르시니까 그가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10:50) 왔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0:52).
수로보니게 여인도 똑같습니다(7:24-30).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 엎드렸을 때(7:25) 자기의 딸이 낫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곧 왔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자신의 딸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그녀의 믿음이 자신의 딸을 치유하는 결실을 거둔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렛 고향 사람들처럼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행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행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에게 능력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에 기적을 행하실 환경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척하는 나사렛 고향 사람들에게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6:5)으셨습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기적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기적을 행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이처럼 마가복음에서 기적은 믿음의 ‘원인’이 아니라 믿음의 ‘결실’입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들의 치유, 곧 결실을 위한 행동을 먼저 취합니다. 그러니까 치유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은 예수님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몸만 고쳐주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전인격을 고쳐주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가리키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치유를 위해 적극적으로, 또 주도적으로 믿음 가운데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나가는 말]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은 땅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씨를 뿌리는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또 그분의 능력에 대해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의 여부에 따라 열매를 맺느냐 못 맺느냐가 결정이 됩니다.
마가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란 개간된 땅, 풍성한 열매를 내는 땅입니다. 아무리 좋은 땅이라고 해도 그 땅에 말씀이 뿌려지지 않으면 개간되지 않은 땅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은 말씀이 뿌려져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뿌려져도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가시떨기가 씨를 많이 받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고, 다른 데 정신이 쏠려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뿌려지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간직할 때만이 놀라운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마가복음에서는 사람들의 병이 낫는 치유로 나타났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람이 병에 걸리는 것이 악의 세력에 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치유는 곧 악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건강과 참 자유를 누리는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오는 일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지금도 똑같이 말씀은 치유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왜 이렇게 문제가 많습니까? 말씀이 없기 때문은 아닙니까? 내 삶 가운데 정말 말씀이 있으면 문제를 이길 수 있습니다. 말씀이 없으니까 자꾸 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잘 극복이 안 됩니까? 왜 나름대로 우상을 만들고 자꾸 그리로 눈이 돌아갑니까?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열매를 맺을 때 그런 것들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승리의 비결입니다. 이제 우리가 곧 들어가게 되는 2019년에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그냥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대충 살아야겠습니까?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기로 다짐하며 결단하고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