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2018년 12월 16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1 ✦
“이방인에게로 향하는 복음의 빛”
(사도행전 13장 44~52절)
[들어가는 말]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전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전도를 얼마나 하셨습니까? 그리고 전도에 얼마나 성공하셨습니까? 혹시 전도했다가 실패해서 마음 아파한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전도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여기 나와 있는 우리 모두도 누군가의 전도의 열매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도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있고, 중간에 믿은 분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딱 한 명의 전도로 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전도가 쌓이고 쌓여서 우리가 믿게 된 것이거나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벽돌 한 장 쌓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벽돌을 쌓기만 하면 실패는 없는 것입니다. 꼭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처음 역할을 할 수도 있고, 중간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마지막에 ‘예수님 믿으세요!’ 할 때 믿게 되는 마지막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사용할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도 사역을 하실 때 말씀을 전하셨는데, 예수님이 전하셔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네 가지 토양을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길 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고, 돌짝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고,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고, 또한 옥토(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죽 살펴보면 사도 바울도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지만, 항상 그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항상 있는가 하면 거부하는 사람들도 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전도할 때 혹시 받아들이지 않고 반응이 좋지 않으며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오늘 본문을 볼 때 바울의 설교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수용과 거부입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거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1. 복음에 대한 두 가지 반응
1) 수용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바울이 설교를 마치자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더 듣기 원한다고 하며 다음 안식일에도 와서 설교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42). 바울과 바나바가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43)고 권면한 것을 보면, 그들 중 다수는 실제로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안식일이 되자 온 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듭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4절)
우리가 믿은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줍니다. 여러분, 혹시 내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는데 전혀 변화가 없다면, 내가 믿은 것이 진짜 복음이 아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냥 철학이고 지식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지식으로 믿는 사람은 변화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나와도 이전이나 지금이나 그냥 그게 그거인 것입니다. ‘별 다를 게 있나? 다 그렇고 그런 거지.’라는 태도를 가집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런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닌 것을 잘못 믿고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복음을 믿은 게 아니고,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인 줄로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진정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냥 죽으신 분이 아니라 정말로 살아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복음을 통해 우리의 삶을 통째로 뒤집어버리시는 겁니다. 우리의 삶도 변화되고 가치관도 변화됩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믿었지만 가치관이 안 바뀌고 이전이나 믿은 다음이 똑같다면, 삶의 변화가 없다면, 생각도 똑같고 안 믿을 때나 믿을 때나 같다면, 안 믿는 사람과 똑같다면, 그것은 정말 믿은 것이 아닌 겁니다. 정말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변화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2) 거부
그러나 거기에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그런 사람들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45절)
몇몇 유대인들은 마음에 시기와 분노가 가득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반박하고 비방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며, 시기하고 질투하고 비방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합니다.
이 두 가지 반응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니 더 오래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도 선지자들이 말씀을 선포했을 때 들은 사람도 있고 거부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복음이 드러나면 그것을 받아들이며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서 괜히 빈정대며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회당으로 모였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일입니까? 말씀을 전하는 바울과 바나바는 존경받아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시기하는 이유가 아주 기가 막힙니다.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무슨 잘못이나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들이 바울을 시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바울을 시기한 이유는 단지 바울의 설교를 들으러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날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 회당으로 모여든 사람들의 수가 일주일 전과 비슷했거나 그보다 적었다면, 이들은 바울을 시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안식일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 문제였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유치합니다. 우리가 굉장히 고상하고 품위가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아주 유치합니다. 우리가 마음이 상하고 삐지는 것이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그런 것은 없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 정말 별 것도 아닌 것, 유치한 것 때문에 우리가 넘어갑니다.
사람들이 단지 많이 왔다는 이유로 바울을 시기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유대인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비시디아 안디옥의 모든 유대인들이 다 바울을 시기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유대인 회당에 나오는 사람들은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을 제외하면 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도 “유대인과 경건한 이방인들”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그 전 안식일에 바울의 설교를 듣고 다음 안식일에도 설교해 줄 것을 바울에게 요청한 사람들은 경건한 이방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일주일 전 바울의 설교 후에 바울을 계속 따랐던 사람들의 대부분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고, 입소문으로 인해서 그 다음 안식일에 수많은 사람들이 유대인 회당으로 몰려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뿐 아니라 비시디아 안디옥의 헬라인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유대인들은 그날 수많은 사람들이 회당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고 기뻤으면 기뻤지, 그것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를 시기할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을 시기한 유대인들은 어떤 유대인들이었다는 말입니까? 그들은 그 동안 유대인 회당에서 설교를 도맡아 온 유대교 지도자들과 추종자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평상시 그들이 설교할 때 이 정도의 인파가 몰려든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바울이 딱 한 번 설교했을 뿐인데 그 바울의 설교를 다시 듣겠다고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드니까, 유대교 지도자들이 시기심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바울로 인하여 자기들의 권위와 자존심에 큰 손상을 입었다고 느껴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줍니다. 여러분도 누구를 시기해본 적이 없으십니까?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의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누구를 시기하는지 가만히 보십시오. 시기하고 질투하는 대상은 언제나 자기와 가까운 사람입니다. 특히 자기가 속해 있는 같은 분야의 사람입니다.
영어로 ‘경쟁자’가 ‘라이벌(rival)’인데, 이 말은 ‘강’이라는 뜻의 ‘리버(river)’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동네에서 같은 강물을 마시며 사는 사람끼리 서로 경쟁자가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동네에서 다른 강물을 마시는 사람과 나와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서로 경쟁하거나 시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동네에 있고, 같은 강가에 살면서 강은 강물을 마시는 사람,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끼리 경쟁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릇된 경쟁심이 시기로 나타납니다.
예술가가 축구선수를 보면서 ‘야, 저 강력한 다리 힘!’이라고 하며 시기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축구선수가 예술가를 보며 ‘야, 저 섬세한 손길!’이라고 하며 시기하지 않습니다. 예술가와 축구선수는 서로 다른 강가에 살기 때문에 서로 시기하지 않습니다.
예술가는 예술가를 시기하고, 축구선수는 축구선수를 시기합니다. 정치인은 정치인을 시기하고, 사업가는 사업가를 시기합니다. 의사는 의사를 시기하고, 변호사는 변호사를 시기합니다. 학생은 학생을 시기하고, 교수는 교수를 시기합니다. 교인은 교인을 시기하고, 목사는 목사를 시기하고, 선교사는 선교사를 시기하고, 교회는 교회를 시기합니다.
우리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늘 기도와 말씀으로 한순간이라도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이 사람들처럼 자신과 같은 분야에 있는 사람들을 시기하게 마련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매일 깨어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어야 할 이유는,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거기에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시기가 무서운 것은, 인간의 시기가 절대 시기 그 자체만으로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45절을 보면, 바울을 시기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한 말을 반박하고 비방합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반박하다’라는 동사가 미완료형(imperfect)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바울의 말을 한 번 반박하고 끝난 게 아니라 계속 반박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거다’라고 하면 ‘아니다’라고 반박하고, ‘저거다’ 하면 ‘아니다’ 하고 반박했다는 겁니다. 바울이 말할 때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반박한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 스스로의 말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따라서 유대교 지도자들이 바울이 한 말을 반박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들은 그것도 모자라서 바울을 비방하기까지 합니다. 영어로 보면 말로 ‘abuse’를 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심한 말과 모욕적인 언사와 욕을 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나중에 보면(50) 그들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도록 하고 결국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아내게 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기들이 설교할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몰려든 것에 대한 시기심 때문입니다.
시기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누군가를 시기하고 계십니까? 내가 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시기할 일은 없습니다. 지금 나와 가까운 데 있는 사람, 나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 심지어 성도 간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빨리 그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시기라는 괴물이 나를 삼켜버립니다. 그리고 나를 아주 이상한 사람으로 변질시켜버리기 때문입니다.
2. 이방인에게로 향한다는 선포
유대인들의 반대와 비방에 직면하게 된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의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하기 때문에 이제 복음의 빛이 이방인에게로 옮겨지게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6절)
이 구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가야 할 복음이 왜 이방인에게로 가는지 설명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분명히 복음은 우리 유대인들에게 먼저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가야 했다. 더구나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이 복음을 거부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마땅히 먼저 너희들에게 전해져야 할 것이지만, 너희가 이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하고 버렸기 때문에, 영생을 얻는 일에 합당하지 않은 자라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이 복음을 들고 가는 것이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복음이 주어졌지만, 말씀을 들었지만,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나 영생을 얻음에 합당하지 않다고 스스로 판단하면서 그렇게 행동하는 사림들에게는 복음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길 가’에 떨어진 것과도 같습니다. 분명히 말씀의 씨앗은 떨어졌는데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축복을 거절하면 다른 데로 갑니다. 내가 복을 거부하면 다른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가 축복을 거절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저처럼 예수님을 믿는 집안에 태어난 사람들이 더욱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 다 예수를 잘 믿었고, 5대나 6대째 믿는 사람이고, 아버지는 장로나 목사이며, 심지어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는데도 엉망으로 사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부모가 믿는 복음을 그 자녀들은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부모도 마음이 아프겠지만, 그것을 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속상하시고 가슴이 아프시겠습니까?
복음을 먼저 받아야 할 대상은 유대인들이었지만, 그들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에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갔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에서 잘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복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각자 개인에게 주신 복, 우리 가정에 주신 복, 우리 목장에 주신 복, 우리 교회에 주신 복을 거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부모만 예수를 잘 믿는다고 다 된 게 아닙니다. 자녀를 가지신 분들은 자녀의 신앙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정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부모님들, 자녀를 위해서 매일 간절히 기도하고 계십니까? 간절히(?) 혼내는 분들은 많은데 간절히 기도하는 분들은 그렇게 많이 못 보았습니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믿지만, 너는 싫으면 그냥 적당히 살아라.’라고 하는 부모는 없기를 바랍니다.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가르치며 성경을 읽게 해야 하고, 가정예배도 같이 해야 합니다. 아이들 중에 ‘야, 가정예배가 너무 좋다’라고 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붙들고 해야 합니다. 기도하게 해야 되고, 교회를 나오게 해야 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해야, 그들이 커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해도 떠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 떠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에만 가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단지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택하신 게 아닙니다. ‘너희만 예쁘다’ 하고 택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부르신 것은 바로 이방인의 빛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자손들 가운데 메시야(구원자)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 메시야(그리스도)는 이방인의 빛이며, 또한 땅 끝까지 구원을 이루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7절)
이 말씀은 이사야 49장 6절의 인용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제부터 자신은 이방인에게로 향할 것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셨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방의 빛”으로 부르셨다는 겁니다. ‘너희만 잘 먹고 잘 살아라. 너희만 예쁜 내 백성이다.’라는 게 아니라, 이방의 빛으로 부르셔서 구원이 땅 끝까지 이르게 하는 도구로서 이스라엘을 사용하기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바로 거기서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셔서 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유대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고 부르셔서 복을 주신 것은, 우리만 잘 먹고 잘 살게 하시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하루 세 끼(또는 네다섯 끼) 잘 먹고, 자기 집을 넉넉히 가지고 있고, 차도 몇 대씩 있고, 자녀 교육을 하고도 돈이 남는다면, 그런 분들은 돈을 괜히 주신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재물과 건강과 지식과 지위와 신분은 우리만 그저 세상에서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살라는 뜻으로 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복을 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복만 구하는 것은 기복주의이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기복’은 괜찮지만 복만 구하는 ‘기복주의’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복’을 ‘하늘의 복’이 아니라 물질적인 복으로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이 땅에서 떵떵거리며 잘 살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그 풍성한 복이 자기 것인 줄 알고 자기만을 위해 쓰다가 그렇게 인생을 끝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에 대해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성공해도, 그것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우리에게 돈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가정도 주시고, 자녀도 주시고, 직장도 주시고, 사업도 주시고, 공부할 여건도 주시고, 이 모든 것을 주신 것은, 그저 우리가 잘 먹고 잘 살며 편안하게 지내라고 주신 게 아니라, 그것들을 잘 사용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뜻입니다.
억지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삶을 살아야만 우리 삶이 정말로 가치가 있고 정말로 복된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착각하지 말고 잘 사용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3. 선포의 두 가지 결과
1) 수용
이러한 바울과 바나바의 선포에 대해서도 또 다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크게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반응입니다. 먼저 이방인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48-49절)
이방인들은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도록 정하신 사람은 다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는 이 말씀이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여기에서 수동태로 ‘작정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탓소’)는 ‘지명하다’, ‘지정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생을 주기로 지명(지정)하신 사람들은 다 믿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꾸로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받기로 지명 받지 못한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소위 ‘예정론(predestination)’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예정론을 잘못 이해하면 혼란에 빠지게 되니까 잘 이해해야 합니다. 며칠 전 제 아들이 갑자기 예정론이 뭐냐고 물어봐서 설명해주었는데,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실 사람과 안 주실 사람을 미리 다 예정하셨다면 뭐 하러 애써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받기로 지명된 사람이라면, 어차피 믿게 될 텐데 이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살아도 영생을 얻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내가 아무리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신앙생활을 잘해도,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기로 지명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결국 나는 영생에서 제외되는 게 아닙니까? 그러면 그렇게 열심히 하는 신앙생활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안 믿는 사람들에게 전도해야 할 이유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다 정해졌는데 뭘 그리 열심히 합니까? 그냥 아무렇게나 살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예정론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잘못 이해하니까 그런 오해가 생깁니다. ‘예정론’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됐습니다. ‘예정론’이라고 하니까 뭔가가 이미 예정되어 있고 그것을 따라간다는 운명론처럼 생각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아는 것처럼, 예정론은 미래를 내다보기 위한 렌즈가 아니라 사실은 과거를 돌아보기 위한 렌즈가 됩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오해들이 풀릴 수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아우구스투스)은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하여 예정론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인간에 대해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이성과 지성과 의지와 결단과 노력으로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인간에게는 메시아도 필요 없고 하나님의 구원도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인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는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본질적인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아무리 물에 빠진 사람이 스스로 물속에서 머리를 잡아당겨도 살아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롬 3:10)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인으로 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가끔 보면 ‘야,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어도 천국에 갈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경우를 보는데, 그 사람의 뒷조사를 해보셨습니까? 우리가 안 볼 때 무슨 짓을 하는지 다 아십니까?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십니까? 우리의 생각을 여기 스크린에 비추면 ‘나는 죄인이 아닙니다.’라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나는 죄인이 아닌데요.’라고 하신다면 이 스크린에 비춰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 있을 사람이 없습니다.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아니, 하나가 아니라 솔직히 우리가 죄를 얼마나 많이 짓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인은 한 명도 없는 겁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바른 길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알면서도 올바른 길과는 어긋나게 살고 있는 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나를 봐도 정말 죄인이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단 하나의 길밖에 없습니다.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심판하시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입지 못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선물을 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받기로 지명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 어거스틴이 설명한 방식입니다.
종교개혁자인 존 칼빈(쟝 깔뱅, John Calvin)은 ‘교회’와 관련하여 예정론을 설명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교회에 다니는 것은 아니고, 세상에는 평생 예배당에 한 번도 가보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 위해 나를 지명해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의 찬양을 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회당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어떤 사람들을 보면서 ‘너희들은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이 아니구나.’라고 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너희들은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이구나.’라고 판단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을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찬양한 사람들은 ‘아, 이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들이구나.’ 하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미리 다 정해놓고 구원하셨다는 미래를 향한 예언이 아니라, 결과의 시점에서 그 이전을 되돌아보며 사실을 그냥 말한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예정론이라는 것을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게,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죄 때문에 타락한 인간의 무능과 무기력과 무자격과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정론은 누구는 구원을 받기로 이미 예정됐고 누구는 구원을 못 받고 지옥 가기로 이미 예정됐다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에 감사하며 감격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이 미리 다 정해놓으셨다는 것이 예정론이 아니라, ‘아, 하나님이 내게 이런 은혜를 주셨구나. 너무 감사하다. 그래서 이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선물이다.’라는 확신을 갖게 해주는 것이 예정론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이 생명의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안 믿는 분들보다 더욱 의롭기 때문에,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겉으로는 멀쩡하게 앉아 있지만, 사실 우리가 얼마나 악한 마음을 가진 인간인지는 우리 자신이 가장 확실한 증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까닭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우리 각자를 지명하여 선택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조금 어려운 말이지만, 진리입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1)
“야곱”과 “이스라엘”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만 말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믿는 우리까지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것 역시 우리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2) 거부
바울과 바나바의 선포에 대해 기뻐하며 반응했던 이방인들과는 달리 유대인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50절)
유대인들은 성내의 권력자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고 쫓아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떠난 게 아니라 계속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로 인하여 복음이 비시디아 안디옥 전역에 두루 퍼져 나가게 됩니다. 49절은 아주 간단하게 되어 있지만, 계속 복음을 전하여 믿는 사람들이 나오고, 그들이 또 복음을 전하여 두루 퍼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교 지도자 그룹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경건한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고 아예 그 두 사람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아내버린 것입니다. ‘박해’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몸에 해를 가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고문을 가한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경건한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그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고문을 하고 때리면서 그들을 그 성에서 쫓아내도록 만든 것입니다.
결국 유대교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 원하던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쫓겨나는 바울 일행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것도 얻어맞아 비틀거리며 간신히 발걸음을 옮기는 바울과 바나바를 보면서 이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누구보다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거부에 대해 바울과 바나바는 어떻게 합니까?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1절)
그들은 ‘복음을 거부하면 발의 먼지를 떨어뜨리고 떠나라’고 하신 예수님이 가르침대로(눅 9:5, 10:11) 그들의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립니다.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린다’는 것은 유대인의 풍속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자신은 상대와 더 이상 관계가 없다거나 혹은 상대의 잘못은 자신과는 무관함을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는 이제 이고니온으로 갑니다. 유대인들의 반대와 비방과 박해가 오히려 복음이 다른 곳으로 전파되도록 만든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전혀 계획한 것이 아닌데 그렇게 일이 진행됩니다. 바로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유대인들과 귀부인들과 시내의 유력자들이 악하게 한 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악하게 하면서 모르고 쓰임을 받는 경우도 있고, 바울과 바나바처럼 알고 사명을 다하며 쓰임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52절)
여기 언급된 “제자들”은 복음을 받아들인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바울과 바나바는 비록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났지만, 그들로부터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기쁨이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충만했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그랬다는 것입니다. 한 번 기쁘고 만 것이 아니라, 계속 기뻤고 계속 성령이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본래 비시디아 안디옥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가득한 황제의 도시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나서 제국이 네 명의 신하에 의해 네 개로 갈라질 때, 그 중의 한 명인 셀류코스(Seleucus)라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이름을 따서 안디옥이라는 도시를 여러 군데에 세웠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파송 받아 나온 곳도 시리아의 안디옥이고, 이곳은 비시디아의 안디옥입니다.
그러니까 안디옥이라는 도시는 황제의 도시, 권력의 도시, 세속도시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헛된 욕망을 위해 자기 생명을 깎아먹으며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나아가면서 그것을 모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니까, 새 생명을 누리는 그들의 삶이 엄청난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했다는 것은 삶이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던 삶에서 이제는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지도 못한 채 오직 죽음으로만 향하고 있던 그들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삶으로 변화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저절로 된 일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의지나 노력의 결과도 아닙니다. 자기들이 열심히 해서 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와 같은 새 생명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그들을 위한 바울과 바나바의 자기희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향한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픈 몸을 이끌고 이곳까지 온 바울의 그 헌신과 희생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살리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의 제물이 되시고 철저히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와 같은 주님의 자기희생 때문에 우리가 지금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새 생명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은혜와 사랑을 입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러한 생명을 주신 주님의 통로가 되어서 자기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으로 변화가 됩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만 잘 먹고 잘 살고, 자기만 편안하게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군가를 위한 주님의 통로가 되기 위해 자기 시간과 재물과 생명까지도 희생하는 것은, 유한한 자신의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영원에 들어가게 해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몇 년 살고 끝나는 인생이, 영원히 사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사실 그보다 더 자기 자신을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길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 중요한 사실을 바르게 깨달았고, 그래서 평생 자신의 삶에서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그가 그토록 복음을 위해 헌신했던 것은 그 비결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형편없는 죄인인 자기를 살리시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신 주님의 사랑을 깨달았기에,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평생 그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되어서 자기희생을 멈추지 않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처럼 그가 가는 곳마다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인생이야말로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착하고 신실한 종의 인생인 것입니다.
[나가는 말]
운동경기나 콘서트나 영화가 끝나고 나면 사람들이 떠난 그 자리에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남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뭔가 생명을 만들어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재미를 위해 또 소비하기 위해 모인 소비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쓰레기가 남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그루의 나무를 심으러 간 사람들이 나무를 심고 떠난 자리에는 무엇이 남습니까? 나무가 남고, 결국은 그 나무에서 나오는 열매가 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돈과 시간과 재능과 가족과 지위를 자기만 위해 써버리는 소비자적인 인생을 살면, 그 인생이 끝나고 남는 것은 쓰레기뿐입니다. 그것도 아주 엄청난 양의 쓰레기입니다. 보기에도 흉할 뿐 아니라 썩어서 아주 악취가 심하게 납니다.
그러나 자기를 희생하여 땀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은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물론 나무가 남고 또 열매가 맺힙니다. 그것도 아름다운 향기를 내는 아름답게 생긴 열매가 풍성하게 맺힙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하여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바로 그렇게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고 땀을 흘리고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늘 질문하십니다. ‘너도 그렇게 살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