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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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8일 주일예배
✦ 추수감사절 메시지 ✦
“우리에게 충분한 주님의 은혜”
(고린도후서 12장 7~10절)
[들어가는 말]
오래 전 제가 우리 교회에 오기 전에 다른 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길 때 어느 유명한 미국 대형교회에서 주최하는 리더십 컨퍼런스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아주 유명한 강사가 주강사 중 한 명으로 왔습니다. 당시는 그 사람이 베스트셀러 책을 하나 써서 인기리에 판매되던 때였는데, 그 책의 제목은 <Good to Great>(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이었습니다.
그 전에 이분이 유명한 책을 써서 1980년대에 첫 번째로 히트를 쳤던 책이 <Built to Last>(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입니다. 이분의 이름은 짐 콜린스(James C. “Jim” Collins)입니다. 아주 유명한 강사이고 특히 기업의 성공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한 사람이며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일이 잘 안 되었을 때는 거울을 보고, 잘 되었을 때는 창문을 본다.
반면 실패하는 사람은 잘 안 되었을 때는 창문을 보고, 잘 되었을 때는 거울을 본다.”
거울을 본다는 것과 창문을 본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거울을 보면 누가 보입니까? 자기가 보입니다. 그런데 창문을 보면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성공하는 사람은 일을 하다가 실패했을 때 거울을 보듯이 자기를 보면서 실패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패하는 사람은 실패의 책임을 다른 사람이나 환경 탓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성공의 원인을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돌리는 반면, 실패하는 사람은 성공의 원인이 자기라고 생각하며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명한 학자가 여러 기업을 연구해서 내린 결론이지만, 사실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실패했을 때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라고 하며 자기가 책임을 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가운데 반성하면서 발전하게 됩니다. 동시에 주변 사람들은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을 보면서 실패의 책임을 면하니까 고맙게 생각하며 더욱 협조적이 됩니다. 그래서 조만간 더 큰 성공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게 되면,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할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더 발전을 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악화됩니다. 남의 탓을 자꾸 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반대로 성공했을 때 다른 사람 덕분이라고 하면 자신은 교만에 빠지지 않으니 좋고, 주변 사람들은 고맙게 생각하며 더욱 협력을 잘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공을 전부 자기가 잘해서 그렇다고 한다면, 자기는 교만해지고 주변 사람들의 협조가 없어져서 성공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잘 안 풀릴 때에도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자신이 책임을 지는 태도는 남을 원망하지 않는 마음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또 일이 잘될 때 다른 사람 덕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감사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공하는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최대한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결국 감사하는 사람이 성공하게 됩니다. 대개 우리는 일이 잘될 때 감사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에 앞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성공할 수 있게 됩니다. 성공보다 감사가 먼저 오는 것입니다.
1. 우리의 삶에서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하는 감사
그런데 이러한 원리는 인간관계에서만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남에게 원망을 들으면 협력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감사와 칭찬을 들을 때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사실 인간은 감사와 칭찬을 들을 자격이 원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말을 들을 때 협력을 하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은 원래부터 감사와 찬송을 받으실 자격이 있는 분이십니다. ‘찬송’은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을 칭찬해드리는 것’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분이시기 때문에 칭찬을 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사와 찬송만 받으실 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영광스러운 분이시기 때문이고,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이 감사와 찬송을 받지 않으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감사와 찬송을 받으시는 것이 정상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셔서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할 때도 용서해주십니다. 우리가 형편없어도 받아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평이나 원망을 듣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은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을 하시는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 밖에 돌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만 일이 잘 안 되어도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 있는가?’라고 하지 않습니까? 일이 잘될 때는 하나님이 인도해주셨다는 생각을 안 하면서, 일이 잘 안 되면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느냐고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원망을 들으시면 하나님에게 해가 되고 감사와 찬송을 받으셔야 하나님의 기분이 좋아지시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면 우리가 복에서 멀어집니다. 반면 감사하게 되면 하나님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되기 때문에, 우리가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라” (신 6:24)
쉽게 이야기해서, 왜 이렇게 계명을 많이 주시고 하라 하지 말라 하십니까?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하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안 하면 정말 복을 받는 삶이 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만 하면 분명히 행복하게 되고 성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성공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며 친절을 베풀면 성공합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대로만 살면 성공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 중에 감사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감사하면 성공합니다. 이웃에게 감사해도 어느 정도 성공하겠지만, 하나님께 감사하면 정말 성공합니다.
사실 감사한다는 것은 너무 좋은 것인데 삶 속에서 하나님께 제대로 감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좋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감사하고, 해를 당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원망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감사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셨다는 것만 깨달으면 됩니다.
정말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인간으로서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까지도 하나님의 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사실 우리를 가장 해롭게 하고 우리가 가장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존재가 사탄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우리를 해칠 생각만 하며 삽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시는 자녀에게 해를 끼치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마음이 아플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자녀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사탄은 하나님을 직접 대적해서 이길 수가 없으니까, 하나님의 연약한 자녀들에게 해를 끼쳐서 하나님을 괴롭히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바울도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몸에 심각한 병을 일으켰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7절)
이것이 얼마나 괴롭고 또 전도와 선교에도 방해가 되었으면 “사탄의 사자”라고 부르겠습니까? 육체에 가시가 찌르는 것처럼 너무 고통스러워서 “사탄의 사자”라고까지 부릅니다. 이것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학자마다 다른데, 안질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간질병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뭔가 아주 고통스러운 병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바울은 당연히 이 병이 낫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병이 나아야 이곳저곳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더 잘 감당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8절)
바울은 자신의 병이 낫기를 위해 세 번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세 번 기도했다는 것은 새벽기도에 하루, 이틀, 사흘 와서 5-10분 정도 하고 갔다거나, 앉아서 “낫게 해주세요”라고 세 번을 말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생명 걸고 하는 기도, 40일 금식기도 같이 생명을 걸고 하는 기도를 세 번 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바울 자신이 굉장한 치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 아닙니까? 사도행전에서 나중에 보면 바울이 손만 대어도 낫고 바울이 지나갈 때 근처만 가도 나을까 싶어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심지어 드로아에서 설교할 때 위층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라는 청년도 살려냈습니다. 그런데 자기 병은 낫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에게 알려주시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깨달은 바울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9-10절)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고 주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오늘 제목이 약간 이상한데 “우리에게 충분한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이 말씀을 직역한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베풀어준 은혜와 사랑은 이미 충분하다. 지금까지 받은 것으로도 충분하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되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심지어 이것이 사탄이 주는 사자라고까지 했지만, 사탄이 우리를 해치려고 하는 악한 짓도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해치려고 주는 괴로움마저도 하나님은 복으로 바꾸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탄이 주는 어려움도 원망이나 불평거리가 아니라 감사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가 살다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되더라도, 실수를 했더라도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죄를 지었다면 회개해야 하지만, 잘못 결정했다고 나중에 후회가 되더라도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만 한다면, 혹시 우리가 때로 실수를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때부터 우리 인생을 다시 써 주십니다.
우리를 무슨 로봇처럼 프로그래밍을 해서 ‘너는 O월 O일 O시에 오른손 들어야 하고 왼손 들어야 하고...’ 하는 식으로 프로그래밍을 해놓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후회되는 결정을 한 게 있어도, 그것이 놀랍게 복으로 되도록 거기서부터 우리 인생을 새롭게 써주신다는 것입니다.
조금 이상한 것이, 가끔 보면 TV에 유명인이나 연예인이 나와서 인터뷰를 하는데 결혼 전과 결혼 후에 하는 말이 굉장히 다른 것을 봅니다. 물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것이지만, 결혼 전에는 ‘내가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고...’라며 러브스토리를 쏟아놓습니다. 그런데 결혼 후에 다시 나오게 되면 ‘요즘 밖으로 나가고 싶다.’라는 등, 이상한 소리를 합니다.
혹시 결혼한 분들 중에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궁금한 분이 계십니까? 혹시 여러분의 첫사랑이나 옛날 애인을 생각하며 ‘그 사람과 결혼할 걸 잘못한 게 아닌가?'라고 하십니까? ‘내가 그 사람과 결혼했으면 더 나아졌을 텐데’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배우자와 결혼한 것이 실수였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런 분이 없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결코 실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이미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있는데 ‘이 일 말고 다른 일을 했으면 어땠을까?’ ‘저번에 A와 B 중에서 A를 선택했는데, B를 선택할 걸 잘못했네’, ‘여러 학교가 있는데 여기 말고 다른 데를 갈 걸’, ‘아, 내가 콜럼버스로 오는 게 아니라 저기를 갔어야 했는데’라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혹시 어떤 결정을 함에 있어서 실수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좋은 결정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미 그것을 새로 다시 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것은 실수일 수가 없습니다. 지금 현재가 주님이 주신 가장 복된 길입니다. 그러니까 쓸 데 없는 생각은 아예 안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때 그럴 걸’ 하는 게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주님의 진리를 깨달은 바울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라고 고백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좋은 것을 자랑하는데 바울은 약한 것을 자랑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만약 간질병이었다면, 이렇게 설교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거품을 물고 쓰러져서 바들바들 떨며 눈도 돌아갑니다. 여러분이 그 설교를 듣는 회중이라면 어떻게 느끼시겠습니까? ‘저런 사람이 무슨 말씀을 전한다고 저러나?’라고 할 것입니다. 안질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보이지도 않아서 헤매고 있으면 ‘야, 저런 사람이 무슨 말씀을 전하나?’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라고 합니다. 왜 자기의 고통스러운 것을 기뻐한다고 합니까? 그것이 바울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어주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더 많이 나타내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이렇게 약한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렇게 써주신다는 것이 너무 놀랍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자랑한다는 것은 ‘나 이 정도야’라고 자랑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 대해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약한 것들을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그런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이 받았던 그 무한한 은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은혜를 깨닫고 늘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디모데전서에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죽기 바로 얼마 전에 보낸 마지막 편이지고, 그 몇 년 전에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가 디모데전서입니다. 거기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12 나는 나에게 능력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나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나에게 이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15b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괴수)입니다. 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끝없이 참아 주심의 한 사례를 먼저 나에게서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딤전 1:12-13, 15b-16, 새번역)
얼마나 놀랍습니까? 요즘 우리가 사도행전을 계속 살펴보고 있지만, 바울이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잔멸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스데반이 죽는 데 역할을 감당하는 등, 얼마나 난폭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정말 훼방자였고, 박해자였고, 폭행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들어쓰셔서 사도로 삼으시고 복음의 일꾼으로 삼아주셨다는 것이 너무 감사한 겁니다.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이렇게 써주시나?’ 이게 너무 감사한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고통이 오더라도 그것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잘 보면, 바울이 처음부터 이런 고통에 대해 자랑하고 기뻐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떠나도록 간절히 기도한 것을 보면(8), 바울도 그 병이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것을 자랑하고 감사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이 바울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주님께서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어려움과 병으로 인한 고통이 사실은 주님께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주신 귀한 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힘든 일을 만날 때 ‘이게 왠 고생이냐? 왠 손해나?’라고 생각하면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어려움이 오히려 나에게 유익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일 텐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소금장수 두 사람이 소금을 지고 높은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산 너머에 있는 마을에 가서 소금을 팔기 위해서입니다. 산을 힘겹게 오르다가 잠시 쉬게 되었는데, 젊은 소금장수가 높은 산을 원망하며 말합니다. “이 산의 높이가 지금의 반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자 나이가 많은 소금장수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그런가? 나는 이 산이 지금보다 세 배는 더 높았으면 좋겠어.” 그러자 젊은 소금장수는 깜짝 놀라며 묻습니다. “아니, 지금도 산이 높아 쩔쩔매는데 세 배나 더 높았으면 좋겠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자 나이가 많은 소금장수가 말합니다. “이 산이 더 높아야 저 마을 사람들이 소금 구하기가 어려워져서 소금 값이 더 오를 것 아닌가?” 이런 걸 가리켜 요즘 말로 ‘빅 픽처’(?)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오늘 같이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이렇게 나와 예배드리는 분들은 참 귀한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은혜를 입고도 그것을 다 잊어버린 채 감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감사하고 나쁜 일이 있을 때 원망하는 사람은 보통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도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하고 나쁜 일이 생기면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신앙의 하수입니다. 신앙의 고수는 바울처럼 나쁜 일이 생겨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절기뿐 아니라 늘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일이 잘 풀리고 기분 좋을 때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힘든 상황으로 인해서도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것이 가능합니다.
2. 은혜를 깨달을수록 더욱 넘치는 감사
우리가 보통 ‘저 사람은 믿음이 참 좋아.’라고 하거나 ‘저 사람은 참 믿음이 없어.’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가리켜며 ‘저는 참 믿음이 없어요.’라고 하는데, 한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좋은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은 열매를 보고 믿음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열매라는 것은 삶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정도를 보고 믿음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지 안 사는지를 어떻게 압니까? 성경 전체를 요약하면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믿음이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지를 또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하면 간증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죄를 짓지 않으며 오히려 친절과 사랑을 베풀고 도움을 주며 섬기는 사람은 거기에서 간증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 간증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사실 감사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감사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감사가 많을수록 간증이 넘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감사가 많겠습니까?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깨닫고 감사의 조건을 많이 찾아내는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삶 속에 감사할 만한 조건이 별로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좋은 집도 없고, 좋은 차도 없고, 돈도 별로 못 벌고, 건강도 없고, 학교도 잘 안 풀리고, 직장도 안 풀리면 감사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럴 때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미 받은 큰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미 받은 가장 큰 은혜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영생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때론 어렵게 살더라도 이미 영생을 얻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얼마만 지나면 천국에서 최고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어떤 환경에도 감사할 수 있다면 대단한 신앙인인 것입니다.
러시아의 육군 장교였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소련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문서 날조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 후 시베리아에 있는 정치 수용소로 후송되어 그곳에서 11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곳에 있던 죄수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으로 심각한 고통을 받았고, 그는 그들과 함께 모든 괴로움을 견뎌야 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수용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로 인해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후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라는 책을 써서 그 수용소의 참상을 폭로하여 197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책에서 솔제니친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감방이여, 고맙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 무서운 수용소의 감옥도 감사의 눈으로 보면 고마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예수님을 만났고 자기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영적 실력이고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가 목장에서 항상 감사의 제목을 나누자고 하는데, 일주일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정보를 나누는 게 아니라,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셨는지 감사의 제목을 나누는 것입니다. 매주 똑같은 사람들 만나서 할 이야기도 없는데 그 자리에서 쥐어 짜내고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목장은 영적인 모임입니다. 왜냐하면 간증을 나누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기서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삶 속에서 말씀 한 가지를 붙잡고 그 말씀대로 살아보기 위해 애쓴, 그 ‘살아본 말씀’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애써봐야 거기서 간증이 나오는 것입니다.
간증은 거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간증이라고 하면 세례 간증, 구원 간증, 수료 간증 같이 앞에 나와서 대표로 하는 간증만 생각할 수 있는데, 감사의 제목 한 가지를 간단히 나누는 것도 간증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내가 일이 잘 안 풀리고 힘들었지만, 그 가운데에도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더 나빠질 수도 있었는데 이 정도인 것이 감사합니다.’라며 감사의 제목을 찾아 나누는 자리입니다. 그렇게 감사의 제목을 나누다 보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는 감사했지만 자기에게 있는 병으로 인해서는 감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병은 자랑거리도 아니고 기쁨도 아닌, 빨리 없어지기를 원하는 나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가시이자 사탄의 사자인 이 병 자체는 감사의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병이 있어도 다른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 병에도 불구하고 감사했습니다. 이것도 정말 훌륭한 믿음의 모습이지만, 바울은 거기서 한 단계를 더 나아갑니다.
바울은 간절히 기도하다가 병을 고쳐주지 않겠다고 하시는 주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서운할 수 있습니까? 내가 열심히 기도했는데 기도한 대로 되지 않으면 사실 얼마나 서운함이 생깁니까? 주님의 응답은 ‘내가 너의 병을 고쳐주겠다. 너는 너무 훌륭하다. 내 말을 잘 듣는 훌륭한 종이다. 그러니까 내가 당연히 고쳐주어야지!’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말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말씀을 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9a, 새번역)
무슨 말씀입니까? 바울의 병 자체가 축복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인생의 정말 어려운 문제, 해결이 안 되는 이 심한 육체적 고통이 오히려 축복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바울은 병뿐만 아니라 자기의 모든 약한 것을 기뻐하며 자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9b-10, 새번역)
놀랍게도 바울은 약한 것 때문에 감사했습니다. 약한 것 자체를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자랑하며 감사했습니다. 보통은 좋은 것 때문에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나쁜 것 때문에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복을 안 받겠습니까?
바울과 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괴롭히고 못되게 굴어도, 이 고통이 오히려 축복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사람까지도 용서하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해라.” 하고 새 계명도 주셨고,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해라.”라고도 하셨고, “원수를 용서해라.” 하셨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우리가 약할 때 더욱 주님을 의지해서 강해진다고 말씀합니다(10).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일부러라도 더 약해져야 하겠습니까? 그런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더 약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약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바리새파 사람들은 ‘의인인 우리가 아니라 죄인인 저들을 부르러 왔다고 말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의인은 한 명도 없다. 너희도 죄인이다. 너희는 죄인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죄인이고, 저들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는 죄인이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의인인데 일부러라도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부러 죄를 지으려 하지 않아도 이미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사람이 의인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약한 것을 깨달으면 어떻게 됩니까? 강한 분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능력의 주님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에 내가 강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좋은 점이 또 하나 있는데, 감사가 많아진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할 때는 좋은 일이 일어나도 ‘내가 했지.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됐지.’ 하며 별로 감사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알면 일이 잘 풀리고 좋은 일이 일어날 때 ‘아, 이건 정말 내 힘으로 된 게 아니지’ 하고 깨닫기 때문에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종종 아무것도 없는 데서 본인이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소위 자수성가 하신 분들인데,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예수님을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기 힘을 믿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그런 분이 계시면 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성공한 것이 정말 다 내 힘으로 된 것인가?’
어떤 분은 높은 위치에 올라갔을 때 자기가 능력이 좋아서 올라간 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압니까? 아주 유력한 후보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다른 데로 이사를 갔던지 다른 데로 옮겨서 내가 올라간 것인지 어떻게 압니까? 그래서 자기가 잘나서 올라간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업을 하다가 성공한 것도 어떻게 내 능력으로 다 된 것입니까? 만나야 할 사람을 탁 만나고, 어디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오고, 뜻하지 않게 일이 술술 잘 풀리고, 마침 경기가 좋고... 그런 것으로 되는 것이지, 내 능력으로 다 되는 게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주님 앞에 감사하며 나오는 것이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다 자기 힘으로 된 줄 알고 튕기며 있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가 약하다는 것을 알 때 주어진 것에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원망이 많고 불평이 많은 것은 ‘내가 그래도 훌륭한 사람이지’ 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정말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되다니 너무 감사하다. 아무 자격이 없는데도 이런 좋은 것들을 누리다니 참 감사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나가는 말]
어느덧 2018년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왔습니다. 한 달 반도 안 남았습니다. 여러분, 사실 얼마나 어려우십니까? 살면서 어려움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지난 11개월 가까이를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잘 지내 왔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난 11개월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건강을 지켜주신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사실 자기 발로 예배에 나왔다는 것부터가 감사한 일입니다. 내 힘으로 숨을 쉬고 있다는 것도 굉장한 일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지켜주신 것, 직장이나 사업을 지켜주신 것, 목장식구들과 교회 성도들을 주신 것, 그들과 나누는 사랑의 교제... 얼마나 감사할 게 많습니까?
우리는 너무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영원히 돌아가 살 고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만 생각해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할 것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통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만 의지하게 해주며 부르짖게 해줍니다. 그래서 더 많은 은혜를 받고 누리도록 해줍니다. 어려움이 우리에게 복인 것입니다. 또한 고통은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교만하지 않게 우리를 말려주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큰 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어려움과 약함에서 얻는 복을 충분히 받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복으로 우리를 강하게 해주십니다. 그럴 때 교만해지지 말고 계속해서 자신의 약함을 기억하며 살아갈 때, 주님의 은혜와 하늘 복을 더욱더 많이 누리게 되고, 또 그것을 주변에 나누어주는 복의 근원 된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