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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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28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35 ✦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
(사도행전 11장 19~30절)
[들어가는 말]
저희도 단기선교를 갈 때 경험하게 되는 일인데, 어느 교회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빈민 집단부락을 지원할 때 단기선교를 가서 벌어진 일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단기선교 팀은 주일이 되어 작은 예배당에 꽉 들어찬 남아공 흑인들과 함께 아주 은혜로운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 예배당 마당에서 예배하러 온 교인들과 함께 사랑의 점심식사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마침 점심식사 후에, 서울의 어느 대형 교회가 보낸 헌 옷을 나누어주기로 예정되어 있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식사 후 교회 사무실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헌 옷 박스를 풀었는데, 박스에서 나온 옷들은 대부분 헌 옷들이 아니라 몇 번 입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는 새 옷들이었습니다. 단기선교 팀이 입고 갔던 옷보다 더 좋은 옷들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곳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님의 말이었습니다. 서울의 대형 교회들이 종종 옷들을 보내는데, 그 옷들의 주머니 속에서 한국 동전은 말할 것도 없고 만원권 지폐에서부터 10만원권 수표, 심지어는 여자의 귀고리 같은 귀금속까지도 심심찮게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자 옷보다는 여자 옷에서 더 많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자 옷을 더 차지하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나누어 줄 옷들의 주머니를 미리 점검하던 흑인 청년들에 의해 그 즉석에서 발견된 돈만도 2만 원이 넘었다는 겁니다.
드디어 그곳 사람들에게 옷을 나누어 주는 시간이 되었는데, 예배당 마당은 박스를 여는 즉시 완전히 난장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차례대로 한 사람당 옷 세 벌씩이라는 원칙을 정해서 이야기했지만, 더 좋은 옷을 더 많이 가지려는 사람들의 욕심 앞에 그 원칙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원칙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저마다 옷더미에 달려들어 한 벌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서로 밀고 당기며 아우성을 치고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단기선교 팀의 눈에 비친 그들의 얼굴은, 조금 전 예배드릴 때의 그 거룩하고 경건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점심식사를 나눌 때의 순박한 얼굴도 아니었습니다. 아주 험악한 얼굴이었고,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추악한 얼굴이었다는 것입니다. 방금 전에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던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아닌가 하고 느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치열한 전투와 같았던 옷 쟁탈전이 끝나자, 그들은 즉석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머지 옷들은 미리 준비해 온 가방에 쓸어 담았다고 합니다. 그곳 흑인 빈민촌이 순식간에 강남 패션으로 뒤덮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언제 원수처럼 옷을 놓고 싸웠느냐는 듯, 서로 옷맵시를 뽐내거나 나무 그늘에 둘러앉아 잡담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오후 찬양 예배 시간이 되자, 그들은 모두 그 멋짓 옷들을 입고 예배당으로 함께 들어가 아주 거룩하고 열정적인 모습으로 열심히 찬양하며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그들의 진짜 모습이겠습니까? 거룩하게 예배하는 모습이 진짜 모습입니까, 아니면 서로 옷을 더 차지하겠다고 달려들어 싸우는 모습이 진짜 모습입니까? 사실은 그 모든 모습이 다 그들의 참모습이었습니다. 예배당에서는 거룩하고 경건하게 그리스도인으로 예배드리고, 교회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점심식사를 나눌 때는 순박한 이웃으로 있다가, 자기 이익이 걸린 일에서는 원칙이고 뭐고 없고, 상황이 끝난 다음에는 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예배당에 나와 찬양에 열중하는 그 각각의 모습이 다 그들의 진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남아프리카공화국 흑인 빈민들의 모습일 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 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배당에서는 이렇게 다 멋진 옷을 입고 와서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하는 그리스도인이고,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이웃이지만, 자기 이익이 걸린 일에 대해서는 원칙과 법을 무시하는 불의마저 서슴지 않는 모습, 그러다 다시 예배 시간이 되면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당에 들어와 앉는 것이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이 아닙니까? 그래서 숫자는 많지만 세상을 새롭게 하는 생명력을 갖지는 못한 채, 영적 무기력 속에 빠져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무엇입니까? 언제 어디서나, 밤이나 낮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단순히 역사 앞에 서 있는 정도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코람데오 Coram Deo)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말과 행동을 늘 조심하고, ‘내가 이 말을 하고 이 행동을 했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생각하며, 특히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웃에게 덕을 세우며 사랑으로 대하려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사람에게는 안 보이지만 하나님은 아시는 자신의 생각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게 되도록 애쓰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바로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1. 무명의 전도자들에 의하여 시작된 이방인 선교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19절)
스데반의 죽음 이후 흩어진 사람들이 페니키아(지금의 레바논 지역), 구브로(키프로스 섬 Cyprus), 그리고 안디옥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다. 사도행전은 이제 어떻게 외부를 향한 복음 운동이 두 가지 방식, 즉 지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확장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첫째, 지리적으로 선교는 ‘유대와 사마리아’(8:1)를 넘어서 지금의 레바논에 해당되는 베니게와 구브로 섬, 그리고 시리아의 안디옥 시까지 북쪽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둘째, 문화적으로 선교는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에게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때 대부분의 전도자들이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히 그들 가운데 구브로(바나바의 고향 키프로스, 4:36)와 북아프리카 연안인 구레네(지금의 리비아 트리폴리 지역)에서 온 몇몇 사람들이 안디옥에 와서는 헬라인에게도 전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0절)
‘헬라인’에 주가 달려 있는데 ‘어떤 사본에는 헬라파 유대인에게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헬라파 유대인에게도 전한 것이고, 주된 전파의 대상은 헬라인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단시 ‘그리스도’, 즉 구주로서만 아니라 ‘주’로서 선포를 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의 이러한 전도활동은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손이 함께하셔서 놀라운 역사가 많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1절)
이 새로운 전도 활동이 일어난 곳이 안디옥인데, 요즘도 교회 이름이 ‘안디옥 교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이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 안디옥은 어떤 곳인가? 안디옥은 첫 번째 국제적인 교회의 설립 장소입니다. 그리고 전 세계적 선교의 발판으로서 이보다 더 적절한 장소가 없다고 할 정도의 도시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300마일 정도 떨어진 수리아 지역의 안디옥은, BC 300년에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나서 그의 장군들이 땅을 나누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인 셀레우쿠스(셀류코스) 니카토르(Seleucus Nicator)에 의해 설립된 도시입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이름을 따라서 ‘안디옥’이라는 이름의 도시를 많이 세웠습니다. 여기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오랫동안 그 도시는 멋진 건물들로 인해 ‘아름다운 도시 안디옥’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약간 전에 유대 땅을 셀류코스 왕국이 다스렸는데, 바로 그 셀류코스 왕국의 수도가 안디옥이었습니다.
누가가 살던 시대쯤에 가서 안디옥은 북쪽에서 남쪽까지 뻗어 있으며 나무들과 샘들이 그 옆에 나란히 늘어서 있는, 길고도 잘 포장된 넓은 가로수 길로 유명했습니다. 비록 그 도시의 설립자는 그리스 사람들이었지만, 적어도 50만 명에 이르는 그 주민들은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국제적인 도시였습니다. 동등한 시민권을 주겠다는 셀류코스의 제의에 끌려서 온 아주 많은 유대인 이민자들이 있었고, 또한 페르시아, 인디아, 심지어 중국에서까지 온 아시아 사람들도 있어서, 그 도시로 하여금 ‘동방의 여왕’이라는 이름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 후 안디옥은 오랜 역사의 변천을 거쳐 1939년 터키공화국에 편입되었고, 지금은 안타키아(Antakya)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지금 안타키아의 인구는 30만 명 정도라고 합니다. 지금도 터키에서 큰 도시에 속하지만, 2천 년 전 로마제국 시대의 안디옥은 훨씬 더 큰 대도시였습니다. 로마의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당시 안디옥의 인구를 지금보다 훨씬 많은 50만 명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니까 1세기 당시 인구를 생각하면, 지금의 30만 명보다 더 많은 50만 명이 당시에 살았으니까 안디옥은 아주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실제로 동서를 잇는 요충지인 안디옥은 로마제국 내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그렇게 큰 국제적 대도시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몇몇 제자들의 복음 전파 사역을 통해 그곳에서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여기는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라고 간단히 나와 있는데,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1장에서 이미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고, 구약에서부터 이미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돌아올 것을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지역 출신의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안디옥에 와서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했더니 놀랍게도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래부터 주님은 이렇게 하려고 하셨는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함께 해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복음만 전하면 그대로 역사해주셨을 텐데, 그 동안 전하지를 않아서 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냥 전했더니 놀랍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님께 돌아오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그냥 전하면 되는데,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떨까 너무 따지다가 주님을 모르는 분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을 주저해서 기회를 놓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 같이 식사 한 번 합시다.’ ‘집에 오셔서 식사 한 번 하시죠.’ ‘교회에 한 번 와보세요.’ 아니면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믿으세요.’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너무 따지다보니까, 단순하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사실 여기에는 다수도 아닙니다. 20절을 보면 그저 구브로(키프로스)와 구레네(리비야 트리폴리) 출신의 ‘몇 사람’이 안디옥에서 그냥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믿는 사람들이 막 나오고 교회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이방인들이 주님을 믿고 영접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안디옥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몇 사람’은 헬라파 유대인 크리스천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몇 명의 유대인 크리스천들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이방인인 헬라인 즉 그리스인들이었음이 여기 나와 있습니다.
그 몇 명의 유대인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유대인인 나사렛 예수가 온 인류를 구원하는 구세주이시며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지중해 주변 세계를 재패한 로마제국에서 보면, 유대인들은 지배 계층도 아니고 그저 로마제국 저 동쪽 끝 변방에 있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주 말을 안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골치 아픈 저 변방 어디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변방에 불과한 유대 출신, 그것도 아주 작은 동네인 나사렛 출신의 예수가 인류의 구세주이며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대인들로부터 그 말을 들은 헬라 사람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자기 민족의 문화와 문학과 철학과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언급한 그 유대인 나사렛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이변 중의 이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본문 21절에서 보는 그에 대한 해답은 ‘주의 손’, 즉 ‘하나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라고 밝혀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안디옥의 이방인들인 헬라 사람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던 무명의 몇 사람의 그리스도인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그 창조주의 손으로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손으로 인해 안디옥의 이방인들 가운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귀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누구든지 겸손하게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나는 자격이 없다. 부족하다. 지식이 없다. 교회에 다닌 지 얼마 안 된다.’ 하는 것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 조건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기만 하면 인간적인 조건은 많든 적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안 하니까 역사가 없는 것이지,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며 나아가기만 하면 분명히 주님께서 이렇게 인도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2. 바나바에 의하여 발전해나가는 이방인 선교
1) 바나바의 권면
이제 이러한 안디옥에서의 역사와 소문이 예루살렘 교회에까지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아주 중요한 결정을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2-23절)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로 파송합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가서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사실 은혜는 보이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들이 변화되고 생명을 얻은 것을 보고 기뻤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즉 굳센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합니다.
헬라어 원문에 보면 우리말로 ‘권하다’라고 번역된 단어(파라칼레오)가 미완료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문법에서 미완료형은 효력이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한 번만 권하고 끝낸 것이 아니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계속 그 권면을 반복한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이 곧 믿음이고,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이 구체적으로 또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함께 머물러 있다’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프로스메노)는 ‘꼭 붙어 있다, 찰싹 붙어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은 아주 굳세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 ‘내가 절대로 주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결단의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내 삶에 어떤 일이 생겨도, 나는 주님께 꼭 붙어 있겠다.’ 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다 보면 이렇게 나와서 예배도 드리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우리 삶에 여러 가지 우리 신앙을 흔들 만한 일들이 있습니다. 별로 예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게끔 하는 일들도 삶 속에 얼마든지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다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믿음이 무엇인가? 그런 상황이 닥치면 사실 참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님께 붙어 있겠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주님을 붙들겠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여기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안디옥의 이방인들입니다.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 사람들입니다. 원래부터 하나님을 믿어 온 유대인들도 흔들리는데, 이방인들은 얼마나 더 흔들릴 조건이 많겠습니까? 얼마나 유혹이 더 많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 닥쳐와도 주님을 붙들기로 결단하라.’ 하고 바나바가 권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지 않게 되면 절대 좋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욕망을 좇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지식 혹은 정보 이상일 수가 없습니다.
오직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꽉 붙어 있는 사람만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주님의 말씀의 능력과 생명이 온전히 역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착한 사람이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그런데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한 바나바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에게 특이한 점이 있다는 것을 누가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4절)
한글 성경에는 번역이 빠져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24절의 맨 앞에 ‘왜냐하면’이라는 뜻의 접속부사(호티)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 23절과 24절 사이에 ‘왜냐하면’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옮기면 이런 내용이 됩니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했다. 왜냐하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졌다.”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 교인들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으라고 권할 수 있었던 것은, 바나바 자신이 착한 사람이었고 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더 많은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에 믿고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만약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 아니었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안디옥 교인들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으라고 권하지 못했을 것이며, 혹시 그렇게 말했더라도 그로 인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다는 것이 곧 인격이 훌륭하고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됨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착한 사람’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동격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뜨겁게 기도하는 엄청난 기도의 사람,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 열정적으로 예배하는 사람을 보통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착하지 않으면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가능합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성령과 믿음은 충만한데 착하지 않은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다는 것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착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나바가 그런 권면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착한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성경에서 바나바를 착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것이 착한 것으로 나오는 겁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어 있는 사람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착하게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착한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착한 사람은 투철한 청지기의식을 지닌 사람입니다. 4장 37절에 의하면 바나바는 투철한 청지기의식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며 밭을 팔아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헌금했습니다.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 외면하지 않는 사람,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바른 청지기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한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착한 사람 바나바는 하나님의 소명에 언제나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본래 지중해의 섬 구브로(키프로스 Cyprus) 출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명을 받들어 예루살렘으로 간 헬라파 유대인이었고, 예루살렘의 모교회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 안디옥 교회로 파송할 때도 즉각 순종했습니다. 주저했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사실 그 동안 예루살렘 교회에 닦아 놓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중에 바울과 같이 마가요한을 데리고 선교여행을 가는데, 그 마가가 바로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셨고, 거기에 120명이 모여 있다가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곳도 바로 그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그 마가의 어머니가 굉장히 부자였고, 그 마가의 어머니와 바나바는 남매관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서 누님과 자기가 많은 것을 제공한 집안 출신인데, ‘너는 저 위의 안디옥에 가서 사역을 해’라고 했을 때 ‘내가 왜 가? 네가 가!’라고 하며 기득권을 고수하려 하지 않고 ‘예, 알겠습니다.’ 하고 즉시 순종하여 갔습니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듣고 간 것이 아니라 ‘아, 하나님이 나를 안디옥으로 보내시는구나.’ 하며 소명을 느끼고 갔습니다. 이렇게 소명에 언제나 순종하는 바나바를 어찌 착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셋째,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착한 사람은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착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악과 불의를 행치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과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어 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착한 사람으로 인정하신 이 바나바가 바로 하나님의 선과 공의를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바나바를 통해 큰 무리가 주님께 돌아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을 생각해봐야겠습니다. 혹시 나를 통해서는 별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내가 착한 사람이 아닌 것이 아닌가? 내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지 않은 게 아닌가?’ 하고 늘 돌아봐야겠습니다. 먼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 될 때,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착한 사람으로서의 표시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를 통해서도 이것과 똑같은 주님의 권능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3. 사울에 의하여 견고하게 서 가는 이방인 선교
이제 교회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교회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5-26절)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사울의 고향인 다소로 갑니다. 젊은 나이에 고향 다소에서 13년 정도에 걸쳐 속으로 무르익는 계절을 거친 사울이 드디어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나바를 통해 이제 사울을 사역의 현장으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거기 있는 산맥이 아마누스 산맥인데, 그 산맥을 넘어서 안디옥에 이르게 됩니다. 이제 사울은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를 1년 동안 공동목회를 합니다. 이방 세계에 세워진 최초의 이방인 교회에서 이방인을 위한 주님의 도구로 선택받은 사울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사울로 불리던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1년 동안 안디옥에서 최선을 다해 목회한 결과는, 이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크리스티아노스’)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혹은 작은 그리스도를 일컫는 용어입니다. 우리말로 쉽게 표현하면 ‘예수쟁이’란 말입니다.
우리말 예수쟁이도 그렇지만, 2천 년 전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도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첫째, 기독교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고 있거나 기독교를 경멸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비하하고 멸시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습니다. 둘째는 주님을 믿는 교인들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으로도 이 호칭이 사용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주님을 믿지는 않지만, 자신들과는 달리 주님의 말씀을 좇아 바르고 반듯하게 살아가는 저들을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과 구별하여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경멸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존경의 의미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안디옥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교인들을 가리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부른 것은 두 번째 의미였습니다. 물론 경멸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분명히 대부분 존경하는 마음으로 불렀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누가는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 받게 되었다’ 하고 감격스럽게 적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로소’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로소’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최초로, 처음으로’란 뜻입니다. 누가는 본문을 통해 주님을 믿는 교인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곳이 바로 안디옥이었다는 것을 감격스럽고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승에 의하면 누가가 바로 이 안디옥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고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까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만약 안디옥 사람들이 교인들을 경멸하고 비하하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다면, 누가가 이토록 감격스럽고 자랑스럽게 써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안디옥 사람들에 의해 최초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그만큼 세상과는 구별된, 세상 사람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나바처럼 이들도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들이 되었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착한 사람들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주 만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죗값을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 우주 만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자기를 꽉 붙들어 매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을 믿는 사람만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난 배후에는 바나바가 사울을 다소에서 안디옥으로 데려온 사건이 먼저 있었다는 것입니다(26). 참 놀랍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그냥 데려왔는지 아니면 간청해서 모셔왔는지 본문만 보면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에는, 바나바가 사울을 간청해서 모셔온 것으로 묘사합니다.
안디옥에 오기 전 사울이 다소에서 나름대로 잘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바나바가 사울을 안디옥에 모셔온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소에서 13년 동안 이방인 복음 전파를 통해 쌓은 경험을 통하여 안디옥 교회에 밀려들어온 많은 이방인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나바가 정말 훌륭한 사람입니다. 자기보다 사울이 더 이 사역에 적합하고 하나님이 사울을 더 크게 쓰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데려온 것입니다. 바나바는 신앙에 있어 사울보다 대선배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바나바는 예수님과 처음 함께 다니던 70명 중의 한 명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말 착한 사람이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까? 반면 사울은 저 까마득한 믿음의 후배이고, 그것도 원래 교회를 핍박했던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세운 것입니다.
바나바는 원래 본명이 요셉입니다. 그런데 그가 너무 위로를 잘한다고 제자들이 그에게 바나바(‘위로의 아들’, 행 4:36)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과도 같이 교회의 중심 무대에 자기가 아니라 사울이 서도록 자리를 마련해주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신 가르치는 은사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의 욕망은 자기가 드러나는 것인데, 그는 사울이 앞에서 하게 하고 자기는 뒤로 물러났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같이 2인자가 되는 것을 즐거워하며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원치 않고 교회를 섬기던 많은 진실한 크리스천들을 통해서 큰 무리가 더해지는 복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바나바와 사울 외에 나오는 이름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나중에 몇 명 지도자들의 이름이 나오지만, 이 수많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2인자로 물러나고 항상 남을 앞에 세워주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그랬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처럼 사울과 함께 사역하기 원했던 바나바의 겸손함뿐 아니라, 이것은 엄청난 영적 판단력입니다. 바나바는 겸손과 더불어 영적 판단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는 사울이 훨씬 더 이 사역에 적합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9장). 이미 예루살렘 교회에 사울을 소개시켜주는 중간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사울을 모셔 와서, 자기가 맡은 안디옥 교회를 사울이 이끌고 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4. 그리스도인의 표지
본문은 계속해서 또 다른 사건을 알려줍니다.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7-28절)
여기서 ‘선지자’라고 했는데, 예언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는 미래를 점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서들을 읽어보면 주로 현재를 위한 말씀이 많습니다. ‘지금 현재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이것을 행하면 살 것이고, 너희가 거부하면 망할 것이다.’ 하고 전해준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이때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고 그 중 아가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일어나 성령으로 말을 하는데, ‘온 땅에 큰 흉년이 들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글라우디오 때 그렇게 되었다고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글라우디오는 AD 41년에서 54년까지 다스린 황제입니다. 이 시기는 하나의 큰 흉년이 들었다기보다는, 로마제국 곳곳에서 연이은 흉작과 심각한 기근이 많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관심은 아가보의 예언이 성취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있는 형제들에게 헌금을 보내기로 작정하고 실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29-30절)
이제는 안디옥의 성도들이 관대하게 베풀며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그들은 각각 그 힘대로, 즉 자기가 가진 것에 맞게 헌금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이 이전에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2:45; 4:35) 나누어주었습니다. 너무 많이 필요한 사람에게 적게 주지도 않고 적게 필요한 사람에게 너무 많이 주지도 않고, 정확하게 준 것과 비슷합니다.
이 원리가 하나님의 가족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안디옥 사람들의 구제금을 받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형제들’(29)이라고 불리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형제 됨이 유대 지역에 있는 유대인 크리스천들과 안디옥에 있는 이방인 크리스천들을 모두 포함하는 영적 가족의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교제는 그 두 교회의 관계에서 아름답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시 정리해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유력한 리더인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습니다. 이제 안디옥 교회는 또 바나바를 사울과 함께 다시 예루살렘으로 보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엄청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정말 하나가 되고 형제자매가 되고 가족이 된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욕망으로 눈멀었던 삶에서 손을 씻고 발을 뺀 사람입니다. 이렇게 차이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의 의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가능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손이 못 박힐 때, 우리의 더러운 손도 같이 못 박힌 것입니다. 주님의 두 발이 못 박힐 때, 추악한 우리의 두 발도 함께 못 박힌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덫으로부터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흘려주신 주님의 보혈의 피로, 우리의 더러운 손과 발을 이미 눈과 같이 깨끗하게 씻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기서 꼭 기억할 것은, 안디옥의 이방인 크리스천들이 유대에 있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도와야지. 그런데 형편이 안 되어서 안 되겠네.’라고 하지 않고, 작정한 다음에 실행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경우 작정은 했는데 실행을 못 합니까? 그럴 때가 많습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또는 부흥회에 참석했을 때 은혜와 도전을 받고 결단을 합니다. ‘아, 내가 정말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그런데 그것이 실행으로 옮겨지지를 않습니다. 또 어떤 선교사님이 와서 말씀을 전하실 때 큰 도전을 받고 ‘내가 저분을 위해 기도도 하지만 헌금을 해야겠구나.’ 하고 마음을 먹는데, 예배당을 나서는 순간 실행은 사라집니다. ‘에이, 다음에 하지.’ 그러나 작정하고 실행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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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습니까?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폭풍에 흔들리고 엄청난 비에 젖으면서도, 줄기를 곧게 세우고 아름다운 꽃망울을 터뜨리는 데에 꽃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 인생에 비바람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엄청난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칠 수 있습니다. 어떨 때는 폭풍과 지진이 일어나서 우리의 인생을 뿌리째 흔드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비바람과 눈보라가 우리의 가슴속 깊은 곳까지 얼어붙게 만들 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께 꽉 붙들린바 되어 자신의 손과 발을 진리와 생명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작정한 것을 실행하는 사람,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