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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21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34 ✦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일”
(사도행전 11장 1~18절)
[들어가는 말]
오래 전 다른 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을 때 약간 황당한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30대 중반이었는데 70대이신 집사님이 오셔서 제게 이야기를 좀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따로 방에 들어가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본인에게 인사를 안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사를 안 한 적이 없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지금까지도 미스터리입니다. 제가 일부러 피하며 인사를 안 한다고 하셔서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그분의 아들 나이 정도 밖에 안 되었으니까 그분이 제게 인생의 선배로서 이야기하겠다고 하시며 “자네가 말이지...”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잘 알겠다고 하며 잘 듣고서 그 후부터 그분만 나타나시면 빨리 가서 90도 각도로 열심히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전만 해도 “자네가 말이지...”라고 하시던 분이 “아이고, 목사님 오셨습니까?” 하며 태도가 바뀌신 것을 보았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은데 종종 오해를 받는 일이 벌어집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하거나 내가 한 일을 안 했다고 하면, 억울함을 느끼면서 화도 납니다. 하지만 그 두 가지는 금방 해결될 수 있습니다. 사실 확인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내 진심을 이야기해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할 때, 아무리 이것이라고 해도 저것이라고 하며 다르게 해석할 때 정말 답답합니다.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양심에 전혀 거리끼지 않게 행동했는데도 상대방은 계속해서 내가 한 일에 대해 오해하며 이해하려고 들지 않을 때, 정말 답답하고 억울하며 또 화가 납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우를 당하실 때 보통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대개는 그런 경우 씩씩거리며 자기를 이해해주는 사람 앞에 가서 분을 토로하거나, 아니면 자기를 오해하는 그 사람을 안 보며 멀리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가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단순하게 해결했습니다. 사실 그대로를 진술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의 설명의 내용이 아니라, 그런 답답하고 억울한 상황에서 그가 어떤 태도를 보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1. 할례자들의 비난
베드로에게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듣고 세례까지 받은 고넬료와 그의 집안사람들은 베드로에게 자신들과 함께 며칠 더 머물러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10:48). 베드로로부터 더 많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열정 때문입니다.
지금도 중국 교회나 아프리카 교회는 예배를 한 번 드렸다 하면 두 시간, 세 시간씩 드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특히 부흥회를 하면, 초기 한국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며칠씩 밤을 새우며 하는 열정이 있습니다. 이들도 베드로를 언제 다시 볼지 모르니까 주님의 말씀을 더 듣고자 하는 갈망으로 며칠 더 머물러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에 그 소식이 유대에까지 전해집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1절)
베드로가 정확히 며칠이나 더 고넬료의 집에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유대로부터 북쪽에 위치한 가이사랴의 고넬료 집에 머무는 동안,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이 거기서부터 남쪽에 있는 유대 지방에 있는 사도들과 믿음의 형제들에게까지 전해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여러 날이 지난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까지 유대 지방에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있던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이 그야말로 놀라운 소식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가이사랴의 고넬료 집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이제 이방 선교의 길을 열어 주님이 원하셨던 교회의 방향을 보여준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너무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하며 환영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정반대의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2절)
여기서 ‘비난했다'는 말은 단순히 약간 질책했거나 이의의 제기한 정도가 아니라, 적대감을 가지고 정죄의 의도로 비난하고 논쟁한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들이 왜 베드로를 비난할 수밖에 없었는가의 문제를 밝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데, 지금의 우리에게도 너무나 중요합니다. 사도행전이 지적해주는 대로, 그들이 베드로를 비난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확인해놓고 보면, 우리는 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3절)
‘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느냐?’ 하고 비난하며 묻지 않았습니다. ‘왜 이방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했느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왜 우리 할례자들의 전통과 관습을 깨고 무할례자들(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의 집에 가서 함께 먹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왜 전했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왜 그런 개 돼지 같은 것들과 함께 먹었느냐는 것입니다.
‘무할례자’란 두말할 것 없이 이방인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할례 받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에 대한 우월의식을 강조할 때, 그들은 이방인을 ‘무할례자’라고 불렀습니다. '할례도 받지 않은 짐승 같은 것들'이라는 경멸의 의미였습니다.
유대인인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며칠간 머문 것은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와 함께 있으면서 여러 끼니를 함께 먹고 거기서 자며 함께 교제했던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예루살렘의 할례자들은 그것을 빌미로 베드로를 비난하며 공격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했기 때문이 아니라, 랍비의 유전 즉 그들의 전통과 관습을 어겼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할례 받은 유대인들은 무할례자인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수치와 치욕으로 여기며 부정한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무할례자들의 식탁에는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부정한 음식도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이 무할례자 이방인들의 식탁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더럽히는 부정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수치와 치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을 철저히 신봉하는 유대교인들이 이방인 고넬료와 함께 며칠씩이나 식사를 나눈 베드로를 비난했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지금 베드로를 비난하고 나선 할례자들이 누구입니까? 이 할레자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유대교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고 이전에 유대교인이었다가 그 후 예수님을 믿고 교회로 들어온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할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릇된 자기 우월감에 젖어 있던 그들은 이방인을 ‘무할례자’라고 경멸하면서, 베드로가 그런 부정한 무할례자들과 식사를 나누었다고 하며 베드로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이 비난은 단지 베드로가 무할례자와 함께 식사한 행위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무할례자인 고넬료와 함께 식사한 것이 그들의 관습을 어긴 잘못된 행위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무할례자인 고넬료 일행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 것 또한 잘못된 행동이라고 하는 비난인 것입니다.
결국 이 할례자들은 무할례자들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교제하고 식사하며 머물렀던 베드로보다도 자기들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할례자들로서, 베드로와는 달리 이런 무할례자들, 이방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며 거룩함을 지키는 사람들, 종교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왜 선택하셨습니까? 사실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기보다는 아브라함 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던 시대에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 그의 후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것을 공식화한 것이 이집트를 나올 때 모세를 통하여 시내 산에서 ‘이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라고 확인시켜주신 때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인데, 그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잘났거나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도 이집트에서 우상들을 다 섬기고 또 노예로 고생하던 사람들인데 뭐가 잘났겠습니까? 오히려 택하시려면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던 이집트 사람들을 택하셔야지, 왜 형편없는 노예들을 택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때문입니다.
신명기 7장에 의하면, 이스라엘 민족은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적은 민족이라고 했습니다. 인구의 수가 곧 힘을 상징하던 고대시대에, 그 수가 너무 적어서 보이지도 않는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베풀어주시는 선물임을 온 세계에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제사장 민족으로 삼으셔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고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하는 도구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표로서 할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할례 그 자체는 할례 받은 사람의 자기 우월감을 드러내는 표시나 자기 의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자기 교만에 빠진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됩니다. 그것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을 따라 살겠다는 순종과 겸손과 결단의 표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를 자기 우월감의 과시와 자기 의로 삼는 자기 교만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할례자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할례 그 자체를 자기 의로 삼는 자기도취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는데, 그 구원이 마치 자기들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 즉 유대인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처럼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서도 주님께서 구원하시려는 이방인을 마치 구원받지 못할 무할례자인 것처럼 경멸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풂으로써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룬 베드로, 그래서 교회가 비로소 정말 교회답게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그 베드로를 비난했습니다. 그릇된 우월감으로 베드로와 자신들을 분리하며 자기들이 더 낫다고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들은 비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유대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인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들은 그처럼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거저 받았으면서도, 단지 자기들은 할례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자기들에게 자격이 있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처럼 착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교만한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고서 구원받았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말을 했지만, 또 실제로도 그렇게 믿고 있었지만, 그렇게 된 것은 자기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자격이 있기 때문에 된 것이고, 저들은 자격이 없기 때문에 안 된다며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결국 땅 끝을 향해서 나아가야 할 복음의 가장 큰 장애물은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이 복음을 땅 끝까지 가지고 나가겠다고 하는 증인들 자신이었다는 아이러니컬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교회에서 죽도록 충성하고 너무나 열심히 봉사하며 너무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의 일꾼들 때문에 오히려 교회에 안 나가고 있는 아이러니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1세기 당시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를 비난했던 할례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전통과 관습과 고정관념과 이론을 바꾸거나 포기할 수 없어서 더 근본적인 문제들을 망치고 마는 일들을 우리가 교회 안팎에서 얼마나 자주 봅니까? 성경을 보아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슬프시게 만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항상 슬프시게 만들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에 우리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적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대개 캐주얼한 복장을 입고 교회에 나옵니다. 오래 전 어느 청년 하나가 예배에 왔는데 조금 늦게 왔습니다. 그런데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들어왔습니다. 끝나고 나서 어떤 분이 막 야단을 쳤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는데 어떻게 모자를 쓰고 예배를 드리느냐? 건방지게 어떻게 모자를 쓰고 하느냐?’ 그 다음부터 그 청년은 당연히(?) 안 나왔습니다.
나중에 사정을 알고 보니까 그 청년이 그날 아침 늦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가야지. 늦었어도 가서 예배를 드려야지’ 하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온 겁니다. 그런데 늦게 일어나 시간이 없어서 샤워를 못했으니까 머리가 헝클어졌고, 그래서 그냥 모자를 푹 눌러쓰고 온 겁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귀합니까? 늦었고 샤워를 못해서 안 오기가 쉬운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예배를 드리겠다고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불러 가지고 ‘어디 건방지게 모자를 쓰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느냐?’ 하고 야단을 친 겁니다. 그것이 그 청년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모자를 쓰고라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이 더 귀합니까, 아니면 거룩하게 멋진 옷을 입고 와서는 그저 졸고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도 않으며 딴 생각을 하는 것이 더 낫습니까? 여러분,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가 경험과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어기는 적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이것을 잘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2. 베드로가 설명하는 사건의 전말
1) 비난을 대하는 베드로의 아름다운 태도
이제 베드로는 이런 비난을 받고 나서,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를 차례로 설명합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4절)
사실 베드로가 얼마나 수고를 했습니까? 자기도 가기 싫었는데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니까 순종해서 갔습니다. 그런데도 같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니 얼마나 곤혹스럽겠습니까?
베드로는 잘 알려진 것처럼, 본래 성미가 불같이 급하고 또 변덕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여 예수님이 “이것을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라고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직후에 교만에 빠져서, 주님이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뒤 3일 만에 부활 것이라고 하셨을 때 안 된다고 하다가, 주님에 의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고 꾸중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몇 초 사이에 천국에 갔다 지옥에 갔다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대제사장의 명령을 받은 무리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을 체포하려 할 때, 칼을 휘둘러 가장 앞에 있던 말고의 귀를 베어 버린 사람도 베드로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주님을 버려도 저는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목숨을 버릴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한 사람도 베드로였고, 바로 몇 시간 후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면서 배신한 사람도 베드로였습니다. 그 직후에 울려 퍼진 닭의 울음소리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통곡한 사람도 베드로였고, 날이 밝은 뒤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주님을 버리고 도망친 사람도 베드로였습니다. 모두가 급하고 변덕스러운 그의 성미 탓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할례자들이 자신을 부당하게 비난하는 지금이야말로 베드로의 원래 성격이 나올 만한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이 베드로다운 행동일 것입니다. ‘아니, 니들은 예루살렘에서 편안히 지내던 주제에, 주님을 위해 먼 길을 다녀오는 사람에게 비난을 해?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 그러고도 니들이 감히 주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며 도리어 베드로가 호통치며 그들을 야단치는 것이 마땅한 상황입니다. 더욱이 베드로가 당시 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이런 비난을 베드로가 그냥 넘긴다는 것은 평소 그의 성격으로 볼 때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뜻밖의 사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 일을 차례로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베드로는 할례자들의 부당한 비난에 대해서 동일한 비난이나 분노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불처럼 화를 내면서 나간 것이 아니었고, 말없이 조용히 ‘그래, 이제 니들과 나는 안 되겠다. 갈라지자.’라고 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놀랍게도 자신을 비난하는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상세하게 설명을 합니다. 못마땅해 하거나 자존심 상해하며 대충 혹은 결과만 통보한 것이 아니라, 왜 자기가 가이사랴까지 갔었는지, 왜 가이사랴의 이방인 고넬료를 만났는지, 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까지 베풀었는지, 그리고 왜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며칠씩이나 머물면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온 성의를 다해서 처음부터 차례대로 죽 설명해 주었습니다. 굉장히 성실한 모습으로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설득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선한 일을 하고서도 같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혹독하게 비난받는 기막힌 상황 속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빠짐없이 차례대로 조용히 설명한다는 것은 사실 굉장한 인내심과 자제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불같이 급하고 변덕스럽기만 하던 이전의 베드로였다면, 칼을 휘둘러 말고의 귀를 베어 버리듯이 자신을 부당하게 비난하는 이 사람들을 쓸어버리면 쓸어버렸지, 누군가가 차례대로 설명해보라고 했더라도 싫다고 하며 거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은 후 정말 변화된 위대한 사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전이라면 마땅히 싫어했을 일을 오늘 그는 온 성의를 다해 기꺼이 행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충격적인 계시를 통한 깨달음
10장에서는 고넬료가 본 천사의 환상으로 시작하여 4일 동안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11장에서는 베드로는 자신이 경험한 바대로 사건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사건들의 순서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그의 체험을 통해 그와 함께 하면서 하나님이 왜 어떤 사람도 속되게 여기거나 깨끗하지 않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셨는지(10:28), 그것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설명하듯이 그의 인종적, 종교적 편견이 극복되기 위해서는 네 번 연속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베드로도 철저한 유대주의자였고 원래는 오늘 본문의 할례자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주 충격적인 계시를 연속 네 번 보여주셔서 베드로를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환상
첫째는 짐승들과 새들을 담고 있는 보자기의 환상이었습니다.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5-10절)
6절에서 ‘들짐승’이라는 말과 자신이 ‘주목하여(자세히)’ 그 보자기 속을 ‘들여다보았다’는 베드로의 말이 나와 있습니다. 그 환상이 나타난 후에 한 목소리가 베드로에게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는 깜짝 놀랄 만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가 못한다고 하니까 그 소리는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며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 명령과 꾸짖음을 포함한 전체 환상이 세 번 반복되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깨끗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들이 깨끗한 사람들과 부정한 사람들, 즉 할례 받은 사람과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을 나중에 고넬료를 만난 후 깨닫게 됩니다. 이 보자기는 모든 인종과 모든 계층을 어떤 차별도 없이 다 담고 있는, 주님이 원하셨던 그 교회를 보여줍니다.
(2) 하나님의 명령
두 번째 하나님의 충격적인 계시는 그를 데리러 가이사랴에서 온 세 사람과 함께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11-12절)
‘바로 그때’ 그 환상이 끝난 직후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머물던 집에 도착합니다. 그들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었지만 성령님은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 여섯 형제가 이전에 욥바에서 가이사랴로 그를 호위해 간 사람들인데(10:23), 그들이 예루살렘까지 같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어난 일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더불어 그들은 일곱 명으로 이루어진 무리였는데,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었을 애굽 법률에는 어떤 사실을 입증하려면 총 일곱 명의 증인이 필요했으며, 또한 그들 역시 잘 알고 있었을 로마 법률에서는 유언장같이 정말 중요한 서류가 진짜라고 보증을 하려면 일곱 개의 봉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까지 일곱 명이 같이 간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런 내용을 알고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준비
세 번째 충격적인 계시는 하나님의 준비하심이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3-14절)
베드로와 일행이 고넬료의 집에 들어섰을 때, 고넬료는 하나님이 그들의 방문에 대하여 어떻게 그를 준비시키셨는지 말했습니다. 한 천사가 나타나 욥바로 시몬 베드로를 찾으러 보내면 그가 구원의 말씀을 갖고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0장에 보면 베드로에 대한 고넬료의 메시지 자체는 언급되지 않습니다(10:5-6, 22, 32-33). 그러나 베드로는 천사가 고넬료로 하여금 무엇을 기대하게 했는지를 여기서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고넬료와 베드로 둘이 만나도록 조정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고넬료는 고넬료대로 각각 다른 곳에 있는데, 이 두 사람이 각각 환상을 보게 하시고 절묘하게 만나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직접 이들의 만남을 준비해주셨습니다. 완벽하게 동시에 이 두 군데의 사건이 일치하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을 곰곰이 생각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며, 신중하게 순종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셨을 때 순종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4) 하나님의 행동
네 번째로 베드로에게 주어진 충격적 계시는 하나님의 행동하심이었습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5-16절)
베드로가 아직 말을 하고 있을 때(10:44)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셨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임하신 것이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처음 오순절에 불같이 또 소리로 임하셨던 그 성령님이었는데, 그와 같은 현상이 여기서도 일어났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처음 성령님이 자기들에게 내리셨을 그때의 현상과 지금 고넬료의 집에 내려오신 성령님의 현상이 너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베드로가 탁 생각한 것은(물론 성령께서 주신 생각이었겠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말씀하신 것이 생각난 것입니다(1:5). 즉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3) 모두 다 하나님이 하신 일
그렇다면 이것들이 베드로를 포함한 유대인들의 인종적 편견을 겨냥하여 보여주신 네 개의 강력한 펀치가 된 것입니다. 아주 충격적인 계시였습니다. 곧 환상, 명령, 준비 그리고 행동인데, 하나님이 다 해주셨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들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성령의 선물을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고넬료의 집에 있을 때 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10:47)
두 번째 질문은 여기 예루살렘에 왔을 때 그를 비난하는 할례자들 앞에서 한 것입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7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이것이 두 번째 질문입니다. 두 질문 다 반박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 회심자들이 성령을 받았는데 왜 물 세례를 금하겠습니까? 이미 하나님께서 성령 세례를 주셨는데, 외부의 힘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어떻게 금지하겠습니까? 베드로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설명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사실, 곧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그는 말끝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덧붙였습니다.
“내게 짐승을 집아 먹으라 하시기에 나는 먹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고넬료의 집에서 사람들이 왔을 때도 성령이 가라고 하시더라(12). 그런데 가서 물어보니까 고넬료에게도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나를 청하라고 해서 나를 청했다고 하더라(13). 내가 말을 시작할 때 우리에게 임한 그 성령께서 저희에게도 임하시더라(15). 그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더라(16).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시더라(17).”
베드로의 말의 진행은 첫째, ‘누가 이 모든 사건을 일으켰는가?’이고, 둘째, ‘나의 확신이 어디로부터 왔는가?’입니다. 두 질문의 답은 모두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건을 다 일으키셨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내가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설명을 마치고 되물은 것입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결국 이렇게까지 해주셨는데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세례를 베풀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는 것이 되고 맙니다.
3. 예루살렘 교회의 올바른 결론
이처럼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실을 가지고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베드로의 말을 듣고, 이제 예루살렘 교회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18절)
이 모든 베드로의 설명이 끝났을 때 베드로를 비난하던 사람들 가운데 감히 입을 열어 베드로를 다시 공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 잠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짐승처럼 취급하던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베드로를 통해 행하신 놀라운 구원의 역사 앞에서, 그 누군들 또다시 베드로를 비난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대신 그들은 입을 열어서 이방인도 구원하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인 동시에 베드로에 대한 사과의 표시였습니다. 베드로를 비난하던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명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보다 베드로에 대한 더 큰 사과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주장하던 것이 나중에 틀렸다는 것이 밝혀지면 대부분 은근슬쩍 넘어갑니다. 남들이 기억하지 않기를 바라며 슬쩍 넘어갑니다. 그래서 이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이 참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구원하셨다.” 하며 선포한 것입니다.
[나가는 말]
비록 이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누구에게나 아무 차별 없이 내리시는 은혜를 보여주셨지만, 안타깝게도 세월이 지나면서 교회는 계속 추한 차별의 죄를 범했습니다. 그것이 인종 차별의 형태로도 나타났고, 노예제도를 찬성하는 것으로도 나타났고, 민족주의의 형태로도 나타났고, 또 아프리카에서는 부족 중심주의의 모습으로도 나타났고, 인도에서는 카스트주의의 형태로도 나타났습니다. 또 성적인 차별로도 계속 등장해 왔습니다.
이렇게 여러 차별이 많이 일어났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은 회개하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차별 없이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에 대한 공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차별한다면 아무도 차별 없이 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공격이 되므로 신성모독이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것들이 없습니까? 노골적으로 인종차별이나 인간차별이 드러나지 않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은근히 우리끼리도 서로 거리를 두고 ‘저 사람과는 같이 하면 안 돼’라고 하면서 차별하며 파벌을 짓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 같이 점심 한 끼 먹는 일로도 파벌이 생깁니다. 누군가에게 ‘이번 주 우리 같이 만나서 점심 식사를 하자. 그런데 당신만 와. 저 사람은 데리고 오지 마.’ 여기에서 파벌이 생기는 겁니다. 여러분,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한 것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저 사람은 불편하니까 제외시키고 내가 편한 사람과만 같이 하겠다는 태도가,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했던 것과 똑같은 일이며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절대로 그런 파벌을 만들지 않겠다.’ 하고 결단해야겠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하면 그것이 무슨 사랑이냐? 원수도 사랑하라.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도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는 분이시다.’ 하는 것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을 막는 죄,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막아버리는 무서운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받아주신 주님을 믿는 사람답게 모든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주님의 마음과 사랑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보여주신 방향으로 순종하며 나아갈 때, 혹시 내 마음에는 내키지 않지만, 나는 싫지만, 그러나 주님의 명령이기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분명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아름답고 고귀한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