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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4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33 ✦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
(사도행전 10장 34~48절)
[들어가는 말]
십여 년 전부터 오스트리아, 벨기에, 독일, 프랑스, 스웨덴 등 유럽 각국에서는 외국인을 혐오하면서 외국인 이민자를 추방해야 한다는 정당이나 단체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시리아나 아프리카의 난민들을 많이 받아주게 된 최근 몇 년 전부터는 그런 주장이 더욱더 커지고 있습니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는 민족 간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는 아직도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동남아시아, 특히 미얀마에서는 인종 간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 여러 지역에서 이슬람이나 힌두교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기독교 박해가 일어나고 있고 심지어 사람들을 죽이는 일들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대립과 갈등과 전쟁의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다르다(different)’고 하지 않고 ‘틀렸다(wrong)’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주 말씀드렸던 것처럼, 전 세계에 단일민족으로 된 나라가 딱 두 나라입니다. 그 중 하나는 한국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입니다. 결국 한국 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요즘 외국인들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단일민족임을 자랑하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단일민족이란 모두가 한 핏줄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겪었던 민족입니다. 지금도 남한에서는 여전히 갈등이 지역별, 계층별로 심한 상태입니다.
3년 동안 계속되었던 6.25 한국전쟁 동안 남한 측 사상자는 약 230만 명이고, 북한 측 사상자는 292만 명이었습니다. 남북한 합하여 무려 522만 명의 사상자가 났습니다. 당시 남북한을 통틀어 총인구가 3천만 명 정도 밖에 안 되었으니, 노인과 여자 그리고 어린이를 제외하고 나면 성인 남자 두세 명 중 한 명은 죽었거나 다친 셈입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당시 중공군 사상자 약 90만 명과 유엔군 사상자 15만 명까지 합치면 한국전쟁의 총 사상자는 무려 627만 명에 달합니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이 세계 전쟁사에서도 같은 동족 간에 치러진 전쟁 중에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은 이 엄청난 희생자의 숫자 때문입니다.
요즘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외국인에 대한 차별의식이 있습니다. 특히 서구 사람들보다는 동남아시아 사람들이나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해 굉장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일하는 제3세계 근로자들 중에서 악덕 기업주들에 의하여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노동자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단지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차별하고 거부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사실은 이것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인간의 공통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을 보면 정상적인 경우 두 눈과 두 귀가 있고, 코 하나와 입 하나가 있습니다. 머리 하나, 팔다리는 둘씩, 손가락과 발가락은 각각 열 개씩 있습니다. 몸 속에 있는 내장이라든지 그 구조와 기능도 똑같습니다. 이것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인종이라도 똑같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국적과 언어, 역사와 사상, 피부 색깔과 체취 등입니다. 그런 인간의 공통점에 비하면 차이는 별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수없이 많은 공통점들은 제쳐 놓고, 그 작은 차이로 인해서 같은 인간을 잘 받아들이지 않고, 심지어 폭력과 살인과 전쟁마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십시오. 이처럼 인간이 같은 인간을 나와 다르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면, 우리와 존재 자체가 다르신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을 받아들이신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인간을 보아도 힘든데, 하나님이 인간을 보시면 얼마나 받아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올라오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과 전혀 다른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신 데 비해 우리 인간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지만 인간은 유한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지만 인간은 추악한 죄인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이렇듯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을 받아주신다는 것은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을 받아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보면서 ‘나는 너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장벽을 치는 상황인데, 그 이상 되시는 하나님께서 오히려 ‘괜찮다. 나는 다 받아준다.’라고 놀라운 말씀을 오늘 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지난 두 주 동안 살펴본 대로 베드로와 고넬료 관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1. 베드로의 깨달음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고넬료가 어떻게 해서 베드로를 청했는지 말을 들은 베드로는 영적으로 새로운 눈이 열리면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의 뜻이 무엇인지 그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되어서 감탄을 하며 말합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34-35절)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가리는 분이 아니시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어느 민족이든 관계없이 다 받아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이때까지 베드로는 정통 유대인으로 유대인의 전통과 율법, 그리고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투철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문화였고,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환상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이제야 정확히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당시의 사회에서 이방인의 집을 방문하여 그들과 교제한다는 것은, 유대인들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고 조롱을 받으며 심하면 돌팔매질까지 당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깨달은 것은 첫째, 진리처럼 알고 믿었던, 유대인들만이 택함 받은 민족이고 이방인들은 개, 돼지 같은 민족이라 여겼던, 그래서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그 장벽을 하나님이 깨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우리도 깨야 한다는 것입니다.
34절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연히 고넬료가 워낙 인물이 안 좋아서 외모를 안 보신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절대 벽을 놓지 않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세워놓은 것일 뿐입니다.
두 번째는, 35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오직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유대 민족 외의 각 나라, 즉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멸시하던 민족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면 기뻐 받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구약 때부터 하나님은 이것을 계속 이야기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이야기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다.”라고 하시며 왜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시느냐 하면 “너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겠다.”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통해 이방인들도 복을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이사야서에서도 성전을 가리켜 “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만 기도하는 게 아니라 누구라도 와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그것을 다 보여주셨는데, 유대인들은 애써 그것을 외면하고 있다가 이제 베드로가 그것을 정말로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으로서의 편견이 깨뜨려지고 장벽이 무너지며, 이방인을 향한 복음의 전파를 위한 새로운 빛이 선포되는 위대한 순간입니다. 이 순간 이후에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인 크리스천들 중에서 이 문제로 베드로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11장). 또 이방인도 유대인이 된 다음에 예수님을 믿고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고 논란이 일어나는데(15장), 그래서 예루살렘 종교회의를 통하여 확정 짓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 논란이 일어날 때마다 그 의미를 알려주고 방향을 보여주는 확고한 원리와 지침이 바로 이 고넬료와의 만남에서 확정되고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칫 잘못 이해하면 고넬료가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받아 주신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방인 고넬료를 먼저 받아 주셨기 때문에, 그 은혜를 깨닫고 고넬료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는데 그것을 깨닫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고넬료가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한 것입니다.
더욱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아직 알지 못하는 고넬료와 그의 집안과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생명의 복음을 전해주시기 위해,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으로 보내시기까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역사하셨는지에 대해 지난 몇 주 동안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고넬료에게도 환상을 보여주시고 베드로에게도 보여주시고 서로 만나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러운 죄인인 인간을 받아 주시되, 죄인이기 때문에 그냥 아무렇게나 받아주신 게 아니라 정성을 다해 기쁨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고넬료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고넬료를 영접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종교적으로 대단한 것을 깨달아서 주님을 만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먼저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내밀어주신 손을 붙든 것뿐입니다. 놀랍게도 그런 우리를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넬료가 하나님을 영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영접해주신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더러운 죄인을 죄인의 모습 그대로, 역겨운 죄의 악취를 가진 그대로, 형편없는 수준 그대로 다 영접해 주신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같은 인간끼리 서로 받아들이지 못해 서로 다투고 심지어 다르다고 죽이기까지 하는 인간에 비추어 볼 때, 인간과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께서 보잘것없는 인간을 온 정성을 다해 받아주신다는 것은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형편없는 우리를 다 받아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외아들마저 기꺼이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예배 맨 앞에서 성가대가 찬양곡을 부를 때 그 가사는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시네, 연약함 그대로 사랑하시네”입니다. 이 가사가 정말 성경적인 내용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십니다. 내가 뭘 잘해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형편없는데도 사랑하시며 안아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국에 살던 어떤 한국 여성이 있었는데, 본래 주님을 믿지 않았고 전혀 믿을 마음도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전도하는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그 친구의 체면을 살려 주기 위해 딱 한 번이라는 조건으로 친구를 따라 갔는데, 교회도 아닌 동네 구역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여성들만 낮에 모이는 구역 모임이었는데, 그날 구역장이 교회에서 받아온 순서지에 따라 무덤덤하게 그냥 성경 말씀을 읽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그분으로서는 물론 평생 처음 들어 보는 주님의 말씀이었고, 구역장은 받아온 것을 그저 책을 읽듯이 담담히 그 구절을 읽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고 그 중에도 ‘다’라는 말에 꽂혔습니다. ‘다 오라시면 나까지도 말이야? 나까지도? 한 번도 주님을 찾은 적도, 알려 해본 적도 없는 나까지도?’ 그와 동시에 그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그 동안 주님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던 자신마저 다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깊이 느껴졌다고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어떤 조건을 거시면서 ‘내가 너희를 구원해주는데 너희는 형편없는 죄인들이기 때문에 이 조건에 맞아야 받아주겠다. 자, 최고의 지성인을 구원해주겠다.’라고 하셨다면, 저는 분명히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완전한 인격자를 구원해주겠다.’라고 하셨다면 역시 저는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돈 많은 갑부나 지체 높은 사람만 오라고 부르셨더라도 당연히 저는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시되 조건 없이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시고 다 받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저와 같이 부족한 죄인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여기 계신 분들 중에 아직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셨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다 오라고 부르시는데, 그 초청에 믿음으로 응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 받아 주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다면, 그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 속에서든 우리의 삶을 책임져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사실을 정말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받아주신 사람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의 선포
이제 모든 민족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깨달은 베드로는, 모든 비난과 어려움을 겪을 각오를 하고 고넬료의 집에 말씀을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1) 만유의 주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6절)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이 말은 그동안 베드로의 설교에 나타나지 않던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베드로가 변화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베드로의 설교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선지자들로부터 예언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그를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고, 다시 오실 것을 우리에게 약속해주셨습니다.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만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특히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환상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베드로가 깨달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시라는 것입니다. ‘만민의 주’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이 더 깊어지고 넓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고넬료의 집에서 이루어진 베드로의 설교에 새롭게 나타나는 신앙고백입니다.
‘만유의 주’에서 ‘만유’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인데, 동시에 ‘만민’ 즉 모든 민족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환상과 계시의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된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은 단지 우리 민족의 주님이 아니라 만유의 주시다.’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방인에게도 ‘주’가 되신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에게는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 베드로에게는 정말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런데 만유의 주로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화평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성경과 찬송가를 보면 화평, 평화, 평안 등의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로는 모두 peace입니다. 히브리어로는 평화가 ‘샬롬’이고 헬라어로는 ‘에이레네’입니다. 그것을 우리말로 각각 다르게 번역한 것뿐이고, 성경과 찬송가 속에서 그 단어들은 모두 같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치고 평화를 원치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개인이든 단체이든 모든 사람은 평안의 삶, 화평의 삶을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좋아하며 많이 부르는 찬송 중에 412장이 있습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흘러나네... 평화 평화로다...” 이 찬송가의 작사자인 워렌 코넬(W. D. Cornell)은 4절을 통해 이렇게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 땅 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저는 이것을 부를 때마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을 하며 부릅니다. 이 세상의 삶은 험한 길이고 거기에는 참된 평화가 없습니다.
10여 년 전 미국의 투자은행인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의 파산으로 금융 위기가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세계 경제가 요동을 쳤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 일기장을 봐도 그렇고, 큐티노트를 봐도 그렇고, 옛날 신문을 찾아봐도 그렇고, 항상 어렵다고 적혀 있습니다. 지금도 경제는 어렵고,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에도 어려웠습니다. 항상 어렵습니다.
그뿐 아니라 요즘도 폭탄 테러가 계속 일어나고 있고, 인종 간 살인이 일어나고 있고, 어린 여자아이들을 납치하는 일(human trafficking)이 계속 일어나고 있고, 시리아 내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터키, 쿠르드 족, 이라크 쪽도 계속 복잡합니다. 민족 간에 수없는 갈등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종교 간 갈등도 아주 큽니다. 자연재해는 또 어떻습니까? 요즘은 동시다발적으로 지진에, 해일에, 허리케인과 태풍과 화산 폭발 등이 일어나기 때문에 어느 한 군데를 특정해서 구제헌금을 할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너무너무 자연재해가 많습니다. 미국은 총기사고가 또 문제입니다. 바로 며칠 전 제 아들이 다니는 학교가 속한 학군의 책임자(superintendent)가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학교 근처에서 총기사고가 있었다고 보고되어 학교 문을 잠갔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지금은 정말로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이처럼 국내외, 동서남북, 세계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평화를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정말로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정말 평화가 없습니다. 불안과 걱정거리 밖에 없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워렌 코넬의 찬송 가사처럼 “이 땅 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는 참 의미심장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코넬은 질문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찬송가 412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정말 평화는 하늘에서 밖에 오지 않습니다. 평화는 이 땅에 없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땅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려주셔야만 받을 수 있는 게 평화입니다.
2001년 초에 8년간의 임기를 끝내고 퇴임하던 빌 클린턴(Bill Clinton) 전 대통령이 이렇게 자기의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지금처럼 사상 유례가 없는 번영과 평화의 시기에 정권 교체를 이룬 적이 없었다.”라고 당시 미국을 ‘번영과 평화’로 표현하며 스스로 8년 동안 대통령으로 이룬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언급한 평화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평화(샬롬, 에이레네)일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몇 달 후 9월 11일에 9.11 테러로 그 평화가 산산조각 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깨어지는 평화라면 참된 평화일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평화인데 조금 있으면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 일어난다면 진짜 평화가 아닙니다. 참 평화는 언제나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쟁도, 비극적인 사건도, 살인적인 자연재해도, 치명적인 질병도, 참된 평화를 앗아갈 수가 없습니다.
만약 내 평화를 빼앗겼다면 그것은 참된 평화가 아닐 것입니다. 위로부터 온 평화가 아니라, 세상의 어떤 것을 의지하면서 얻은 일시적인 평안일 뿐입니다. 참 평화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깨어질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참 평화가 세상에서나 아래서나 옆에서 올 수 없는 이유입니다. 세상의 것은 전부 변하고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언젠가는 무너지고 사라질 이 세상의 것으로부터 어떻게 영원하고 절대적인 평화가 생길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내가 지금 의지하며 사는 게 뭔가?’ 돈입니까, 지위입니까, 내가 가진 재산입니까? 그런 것들은 다 없어질 것들입니다. 만약 내가 거기서 안정을 얻으며 살고 있다면, 그 평안은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습니다. 참 평화는 어떤 경우에도 상대적일 수 없기 때문에 평화는 언제나 위로부터, 영원하시며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집니다.
뉴욕에 가보신 분들은 그것을 더욱 느끼실 것입니다. 소위 쌍둥이 빌딩이 9.11 테러로 무너져서 지금 다시 새 건물을 세웠습니다. 무너지기 전에 그것이 무너질 것으로 생각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경제와 금융의 상징과도 같았던 쌍둥이 빌딩이 테러 공격으로 아주 비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건 다 그렇게 언젠가 무너질 것들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평화를 얻으며 살고 있다면, 내 평화는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는 가짜 평화라는 것입니다.
이 땅 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주시는 평화입니다. 그 평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인으로 모신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 평화가 솟아나는 한, 우리는 어떤 험한 일이 이 땅에서 벌어진다 할지라도 다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내거나 다른 것에서 얻어 온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주신 주님의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을 선포하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헛된 것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라!’
2) 이 땅에서의 사역과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
그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7-38절)
무엇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들이 그 일에 증인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여기 이 내용은 “너희도 알거니와”, 즉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도 다 아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39-41절)
여기서 좀 특이한 것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미리 택하신 자기들에게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소위 ‘부활 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사도들에게 나타나시고, 오백 여 형제들에게도 나타나시고, 또 바울에게도 나타나셨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나타나지는 않으셨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따르고 섬기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3) 재판장 예수 그리스도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재판장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42-43절)
오늘도 고백했지만, 매주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내용 중에 바로 이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하나님의 공의를 완성하러 오십니다.
이 순서가 바뀌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예수님이 먼저 오셔서 ‘나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러 왔다.’ 하시며 다 쓸어버리셨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먼저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구원해주시고,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오실 때는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순서대로 하는 것이 바로 자비와 은혜입니다. 사랑, 그 다음에 공의입니다. 우리가 사람들끼리도 바로 이 순서대로 하면 관계가 좋아집니다. 이 순서를 바꾸면 관계가 깨집니다. 사랑을 베풀고 그 다음에 공의를 따져야지, 공의부터 따지고 사랑을 하겠다고 한다면 사실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똑같습니다. ‘누가 잘했니 못했니’부터 따져보십시오. 관계가 행복해지지 않고 풀리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녀간도 똑같습니다. 먼저 사랑을 베풀고 그 다음에 공의로 가야 되는데, 먼저 잘잘못을 따져보고 나중에 사랑하려고 하면 되지 않습니다. 부모님과도, 자녀와도 그렇게 됩니다. 성도 간에도, 친구끼리도, 가족 간에도 똑같습니다. 먼저는 사랑이고 그 다음이 공의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재판장이시며 심판주이시라는 것,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도신경의 그 내용을 매주 고백하실 때마다 너무 기쁘십니까, 아니면 두려우십니까? 놀랍게도 많은 숫자의 크리스천들이 두려움을 느낍니다. ‘심판’이라고 하니까 굉장히 두려움을 느끼는데, 사실은 우리가 굉장히 기뻐할 일입니다. 예수님이 재판장이 되시고 심판주가 되신다는 것은 기쁜 일이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먼저는 예수님이 결국은 구원을 받을 사람과 구원을 못 받을 사람을 정확히 구분해주신다는 말입니다. 만약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이 구원을 못 받아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 쪽에 낀다면 얼마나 큰일입니까? 또 구원을 못 받을 사람이 구원받을 사람 쪽에 슬쩍 낀다면 이게 얼마나 불공평한 일입니까? 정확하게, 공평하게, 아주 공정하게, 정의롭게 구분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관계에서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사람끼리 살다 보면 관계가 안 좋아지고 불편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님이 정확하게 판단해주십니다.
재판을 할 때 보면 판결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진 증거에 의해서만 판단을 하기 때문입니다. 검사나 변호사나 판사가 모르는 부분도 있지만, 아는 것과 가지고 나온 증거의 한도 내에서만 판결을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숨긴 부분, 모르는 부분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완벽하게 공정한 재판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재판장이신 것은 기쁜 일입니다.
‘나 억울하다’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재판장에 가보면 그런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사실 교통법규 하나 어겨서 티켓만 받아도 얼마나 억울해 합니까? 저도 억울한 적이 한 번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저쪽으로 나가면 굴다리가 있는데, 거기에는 ‘오후 4-6시 좌회전 금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가보면 그 시간에도 좌회전을 굉장히들 많이 합니다.
3년 전쯤 Memorial Day였는데, 평일 오후 4-6시에 좌회전하지 말라고 되어 있지만 그날은 휴일이고 트래픽도 별로 없는데다 앞의 차들도 다 돌기에 저도 따라서 돌았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거기 딱 기다리고 있다가 티켓을 줘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시간에 아무리 차들이 돌아도 경찰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상당히 불공평하고 억울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돈이 몇 십 불 나갔는데, 지금은 아무리 돌아도 안 걸리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불공평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재판정에 가면 ‘불공평하다. 억울하다.’ 같은 소리가 절대 나올 수 없도록, 완벽하게 공정한 재판을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관계에 문제가 생길 때 보면 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합니다. 자기는 옳은데 상대방이 잘못됐다고 합니다. 많이 봐줘서 ‘나도 좀 잘못한 건 있지만, 그쪽 잘못이 크다.’라고 합니다. 나는 늘 피해자이고 상대방이 가해자입니다. 부부간에도 그렇고, 자녀와도 그렇고, 친구간에, 성도 간에도 그렇습니다. 정말 누가 옳은지 정확히 판단하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판장이시라는 것이 너무너무 좋은 일입니다. 완벽히 정확하고 공평하게 판결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의 법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법대로 살면 너무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법대로 살지 않으면 두려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을 따라가면 결국 비참하게 됩니다. 그러나 억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가지시고 정확하게 판결을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3. 이방 사람들에게도 내려오신 성령님
1)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
그런데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 성령이 내려오십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4절)
유대인들 중 믿은 사람으로 베드로와 함께 온 사람들은 다 놀랍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선물로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5절)
지금 우리는 당연하게 여길 일이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정말 깜짝 놀랄 일입니다. ‘어떻게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내려주시나?’ 할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내려오신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6절)
눈에 안 보이는 성령께서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것이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방언이 나타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마리아처럼 다른 곳에서와는 달리 안수를 한 것도 아니고 세례를 준 것도 아니었는데,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을 하며 특히 방언으로 하는 것을 보니까 성령을 부어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 세례를 받은 이방인들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47-48절)
자기들과 똑같이 성령을 받았으니까, 베드로는 이들도 물로 세례를 주자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같이 온 여섯 명의 형제들이 세례를 베풀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이제 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은 이방인 형제자매들에게서 터져 나오는 감격스러운 요청을 보십시오. “우리와 함께 며칠 더 머물러 주십시오!” 지금 한 성령, 한 세례를 받은 데서 더 나아가 이제는 한 교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넘을 수 없었던 편견과 장벽이 이제 무너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굉장히 멸시했지만, 사실 로마 사람 입장에서는 얼마나 가소롭습니까? 힘도 약한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무시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헬라 사람들이 보기에도 무식한 사람들이 왜 그러나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장벽이 무너졌다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장면입니까? 바로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고넬료 일행에게는 베드로와의 만남이 그들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와의 만남을 통해 그들은 세상의 허망한 옛 삶을 벗어던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생명의 삶을 이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로부터 조금 더 듣고 더 교제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장면입니까?
[나가는 말]
20세기 독일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의 한 명인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미군의 공습으로 온 도시가 날로 폐허가 되고 있었지만, 틸리케 목사는 주일마다 예배드릴 수 있는 장소를 옮겨 가며 교인들에게 ‘주님의 기도’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그 설교문이 스위스로 전달되어 <세계를 부둥켜안은 기도>라는 책으로 출간되었고, 그 책이 전선에 배치된 독일군과 또 연합군에게 붙잡힌 독일군 포로들에게 전해지면서 많은 독일인들의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틸리케 목사가 교인들과 함께 어느 건물 지하실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폭탄이 떨어져 그 지하실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에 순식간에 50명이 넘는 교인들이 즉사했습니다. 예배 처소가 사람들의 비명 소리로 가득한 그때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틸리케 목사에게 한 부인이 다가오더니, “당신이 틸리케 목사이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폭격으로 흙먼지를 뒤집어써서 곧바로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틸리케 목사를 확인한 부인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남편도 이 아래서 죽었습니다. 그이는 저 구멍 바로 아래에 있었죠. 시신을 수습하던 대원들이 그의 자취를 찾지 못했어요. 단 하나 남은 건 그이가 썼던 이 모자뿐이랍니다. 그이와 제가 마지막 시간을 보낼 때, 당신의 강연을 들으려고 교회에 갔습니다. 이제 이 폭탄 구멍 앞에 서서 당신께 감사를 드리고 싶군요. 당신은 그이를 영원한 곳으로 인도해 주셨어요.”
자기 남편이 폭탄으로 인해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면, 그 참혹하고 끔찍한 비극의 현장에서 이 부인은 당연히 대성통곡하며 우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통곡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 끔찍한 전쟁 속에서도 틸리케 목사를 은혜의 도구,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은 남편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편을 반드시 영원한 저 나라에서 다시 살려주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부인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죽음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던 온 세계는 지금 몇 년째 경제 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습시오. 물질을 포함하여 세상의 것은 섬기면 섬길수록 우리를 더욱 고통스럽게 할 뿐이지, 절대로 우리를 영원히 살려 주지 못하고 평화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영원히 살리십니다.
유대인들은 나사렛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님을 영원히 다시 살리셨습니다. 로마제국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드로를 다시 살리셨고, 그래서 베드로는 2천 년이 지난 오늘도 믿음의 모델로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호흡이 멎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토록 다시 살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체가 죽은 뒤에만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갈릴리의 무식했던 어부 베드로를 그의 생전에 위대한 사도로 다시 살리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반드시 우리를 다시 살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으로만 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모든 삶의 어려움으로부터 반드시 우리를 다시 살려주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죽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바로 그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믿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고귀한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