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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31일 새해맞이예배
✦ 새해에는 이렇게 살라 2 ✦
“깨어 있어 준비하는 신앙인”
(마태복음 24장 36~44절)
1.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하나님
지금까지 저는 설교한 것을 기록해놓고 있는데, 작년까지는 제가 우리 교회에서 새벽예배를 제외하고 1년에 보통 140번 이상 설교를 했고, 어떤 해에는 거의 150번 가까이 설교를 했습니다. 올해 1월에 스티브 홍 전도사님이 부임해서 제가 더 이상 영어예배 설교를 안 하게 되니까, 올해는 지금 이 설교가 딱 97번째 설교입니다. 100번이 조금 안 됐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13년이 다 되어 가는 동안 세어보니까 다 합쳐서 1680번 정도 말씀을 전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많은 숫자입니다. 물론 그 전에 한 설교(650번 정도)까지 합치면 더 많습니다. 2300번 이상 한 겁니다.
그뿐입니까? 매년 봄가을로 삶 공부를 하는 것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생명의 삶> 24기(1기에는 3반이었으니까 모두 13주씩 26번 강의), <새로운 삶> 13번, <경건의 삶> 6번, <확신의 삶> 5번, <부모의 삶> 4번,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2번, <말씀의 삶> 2번, 그 외에 <목자 목녀의 삶>, <기도의 삶>, <일터의 삶> 1번씩...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많이 했다고 자랑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말씀을 많이 전하고 가르치면서 보니까, 그 수많은 성경 이야기들을 다루면서 그 이야기들이 서로 약간 차이는 있을지라도 중심적 주제는 한 가지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이며, 또 그렇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예상치 못하게 우리가 경험하는 ‘놀라움’도 또 다른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그 하나님의 역사에 따라 인간이 놀라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마음이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준비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예상을 뛰어넘어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고, 기다리지도 않았고,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자기에게 오실 때가 많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을 초월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세월이 지나면서 들어서는 안 될 말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뻔한 사람이야.’라는 말입니다. 충분히 예상이 되고,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너무 안전하게만 하고, 상식에 갇혀서 사는 사람, 뻔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뻔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유롭게 움직이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원하면 오시고 원치 않으면 못 오시는 우리에게 갇힌 분이 아니라, 오고 싶을 때 오시고 가고 싶을 때 가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우리가 세게 기도하며 크게 부르짖는다고 해서, 우리 마음이 깨끗하다고 해서, 우리가 무엇을 했다고 오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시거나 안 오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지, 우리가 그 어떤 모양으로 노력을 하든지 우리 마음대로 불러올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무당이 굿을 해서 신을 불러오는 것처럼 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상하지 않고 있을 때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때문에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어렸을 때 이민을 온 후 필라델피아에서 살았습니다. 그 당시 환경이 좋지 못한 지역에서 살았는데, 하루는 그 목사님 가족이 나가 있을 때 도둑이 빈 집에 들어와서 아파트에 있던 물건들을 다 훔쳐 갔습니다. TV나 오디오뿐 아니라, 별로 비싸지도 않은 숟가락, 젓가락, 포크, 접시들까지 싹 쓸어 갔다는 겁니다. 그때 그 목사님은 어린 마음에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빨리 다른 집으로 이사 나가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생각해보니 그것이 너무 감사한 일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몰랐고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그날 도둑이 든 사건은 결과적으로 그 목사님과 어린 동생에게 오히려 유익한 일이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처음 이민을 와서 미국에 적응하며 영어도 배우고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에 그 목사님과 동생은 해야 되는 공부는 안 하고 텔레비전만 보며 온종일 빠져 있는 때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둑이 다 훔쳐가서 볼 수가 없으니까 공부만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은 역설의 연속이라고 깨닫습니다. 도둑을 맞을 때는 겁도 나고 너무 두려운 일입니다. 다 도둑질을 당해서 아무것도 없을 때 얼마나 막막합니까? 그런데 그것을 통해 오히려 더 풍성한 삶을 누릴 수가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평생 물건을 모으며 살아갑니다. 저희가 사는 동네에도 차고 문들이 열려 있을 때 지나가다 보면 많은 가정들이 차고에 차를 안 세우고 물건을 쌓아 놓습니다. 너무 물건이 많아서 차를 세울 데가 없어 차는 밖에 세워놓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춥고 눈이 오면 고생을 합니다.
인간은 늘 물건을 모으며 살아갑니다. 창고나 스토리지에 가보십시오. 얼마나 물건이 많습니까? 옷장도 열어보십시오. 얼마나 옷이 많고 신발이 많습니까? 그런데 입을 게 없고 신을 게 없다고 말합니다. 하루 이틀 쌓아놓은 그 물건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아서 자기를 끌고 간다는 사실을 모른 채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계속 모으고 쌓습니다.
분명히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지금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물건들을 통해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은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오히려 너무 많아서 빈곤합니다. 물건은 많은데 빈곤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반면, 잃는 것 같아도 참된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가진 것은 사라졌지만 삶의 질은 풍성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갑자기 오실 주님
오늘 본문은 준비된 삶을 살면서 기다려 온 사람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그때가 곧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에 금방 다시 돌아오실 것으로 생각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다시 오시지 않은 채 한두 명씩 죽다가 그 세대가 다 죽었습니다. 다음 세대들도 또 기다렸지만 또 안 오셨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다림의 연속인 것을 보며 실망도 같이 커졌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 그리고 여유 없이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43-44절)
이 도둑은 참 이상한 도둑입니다. 우리의 것을 빼앗아 가는 도둑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도둑입니다. 주님은 어떤 경우 우리가 스스로 귀하게 여기며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을 가져가심으로써 우리도 모르게 그것에 매여 있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시켜주시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유를 얻은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전심으로 살게 해주십니다. 또 어떤 때는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도 못하던 선물을 주시며 우리를 놀라게 하십니다.
가끔 보면 간증집회가 열리고 강사가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를 간증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삶 공부를 수료할 때마다 대표를 정하여 간증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만 간증이 아니라, 매주 목장에서 감사의 제목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것 자체가 간증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서 역사해주신 것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창한 간증집회 때의 간증뿐 아니라, 우리 삶의 소소한 부분에 대한 나눔을 들어보면 그것이 다 간증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그분들이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거나 알지 못한 것들을 하나님이 베풀어주시고 인도해주셨다는 것을 고백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능력을 주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구하지도 않았거나 구한 것보다도 훨씬 더 풍성하게 허락해주십니다.
이 세상은 연말연시를 맞이하여 달력에 12월이라는 시간을 정해놓고 1년의 삶을 돌아보면서 한 해를 결산하고 정리하는 마지막 시간을 갖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TV를 틀면 각 도시마다 새해를 맞이하려고 사람들이 모여 파티를 하고 있는 장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화려하게 해놓고 카운트다운을 합니다. 그런데 교회력으로는 대강절이 새해의 시작입니다. 왜 그런 것 같으십니까? 예수님이 태어나신 성탄절을 준비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회력은 ‘사도신경’의 예수님에 대한 부분에 따라 돌아갑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대강절과 성탄절)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고난주간)
-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부활절)
- 하늘에 오르시어(승천, 성령 강림절)
-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보통 시간)
-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대강절)
세상은 1월을 새해 첫 시작으로 정하고 새로운 다짐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중심으로 하는 주님의 교회는 대강절을 교회력의 첫 시간으로 정하여 믿음 안에서 새로운 헌신으로 나아갑니다. 세상에서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새해에 뭔가 새로운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며 나아갑니다.
여러분, 작년 이맘때 또는 1월 1일에, 올해는 이렇게 하겠다고 결심한 게 생각나십니까? 뭔가 해보겠다고 한 것 같은데 생각이 잘 안 납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 모든 일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겸손히 고백하며, 오히려 정신 차리고 깨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방향을 추구하며 나아갑니다.
보통 교회들이 부흥회를 할 때 대부분 봄과 가을에 합니다. 그런데 사실 부흥집회가 가장 절실히 필요한 때는 어쩌면 대강절, 성탄절, 연말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력에 따른 새 출발의 시간인 대강절을 맞이하면서 깨어 있기를 바라는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연말 이 12월 31일 같은 때에 시간에는 끝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주님이 갑자기 오실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한 해를 보내는 이 시점에 자신의 것을 지키고 새해에는 일이 더 잘 풀리며 편안하게 지내고 싶은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히 가지고 있을 수 없는 것들을 정리하고 버리며 영원히 나와 함께 할 것을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다 끝날 것들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갈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끝나도 나와 함께 영원히 같이 있을 것들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잠자고, 일어나고,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일하고(또는 학교 가고), 집에 오고, 씻고, 드라마나 영화나 예능 보고, 뉴스 보고, 인터넷 하고, 스마트폰 하고, SNS 하고, 골프 치고, 운동하고, 여행하고, 싱글이면 연애하고, 결혼한 사람이면 배우자와 시간 보내고, 아이 키우고, 교회에 일주일에 한 번씩 예배에 참석하고, 더 나아가 수요예배나 새벽기도에 참석하고, 봉사하고, 목장 가고, 그러다 몇 번씩 빠지거나 안 가고, 전화하고, 다른 사람에 험담을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하고, 교회 이야기하고, 쇼핑가고...
대개 이런 것들입니다. 대부분 삶이 이런 것 아닙니까? 이 중에서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중에 천국까지 들고 갈 수 있는 게 뭐가 있는가? 아마 거의 없거나 아예 없을 겁니다. 그럼 아주 심각한 문제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너는 내가 하라고 한 것(사명)을 하고 왔느냐?’라고 물으실 때 뭐라고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오’라고 하면 정말 큰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게 있었나요?’라고 하면 더 큰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내 마음대로 살아서는 내 삶에서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은 하나도 안 하고, 전부 이 땅을 떠나면 같이 끝날 일들, 그것도 별 가치도 없는 일만 하다 가게 됩니다. 우리 각 개인의 삶에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필요합니다. 우리 가정도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필요합니다. 우리 목장도 또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필요합니다. 우리 직장도, 사업체도,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필요합니다. 나라도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우리 삶이 불편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키고 싶은 안전이 흔들리거나 무너지고 위험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지 않고 내가 알아서 다스리면 잘 되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하면 잘할 것 같이 생각되어도 아주 잘못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 있으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야 합니다.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6절)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그때를 잘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밤이라도 갑자기 예수님이 오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솔직히 저는 괜찮지 않은 것 같습니다. 준비가 너무 부족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하는 다니엘금식기도 같은 시간을 통하여 스스로를 깨워야 합니다. 영적으로 잠자고 있는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은 깨어 있으십니까? 아주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정말로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은 깨어 기도할 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마치 이 세상이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분명히 세상의 끝이 있습니다. 분명히 역사가 끝나는 날이 옵니다.
힌두교나 불교의 시간 개념의 핵심은 윤회 사상으로,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 겁니다. 시간이 돌고 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직선의 시간 개념을 가르쳐줍니다. 세상의 시작이 있었고 끝이 있을 것임을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역사의 끝을 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37-39절)
여기에서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나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홍수에서 구원받은 노아의 가족도, 먹었고 마셨고 시집가고 장가갔습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라는 말씀입니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것은 건강하게 지내면서 가정을 이루고 아기를 낳아 미래를 꿈꾸며 번성하는 데 있습니다. 행복하게 사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그리는 행복한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홍수가 나는 순간 그 모든 꿈과 계획은 다 소용이 없어집니다. 홍수가 나면 그냥 다 끝납니다. 아무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홍수를 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노아처럼 방주를 짓고 그리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노아 가족 외에 아무도 홍수에 대비하지 않았고 그래서 홍수가 난 순간 그들의 모든 인생은 다 끝장났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0-41절)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남녀의 역할이 집 안과 집 밖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를 보면 두 남자가 똑같이 밭에서 일을 하는데 한 명만 데려감을 받고 다른 한 명은 버림을 받습니다. 또 두 여자가 똑같이 맷돌을 가는데 한 명만 데려감을 받고 다른 한 명은 버림을 받습니다.
여기서도 밭에서 일하거나 맷돌질을 하는 것이 나쁜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 중 하나는 데려감을 받기 때문입니다. 둘 다 버림을 받은 게 아니라 한 명은 데려감을, 다른 한 명은 버려둠을 당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버려둠을 당하게 되는 다른 원인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노아의 때에 사람들의 진짜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닌데, 그들은 그것만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일상생활에만 푹 빠져서 심판 때까지도 전혀 깨닫지를 못했다는 점입니다(39). 그러니까 그들의 문제는 그런 삶에만 정통하고 영적으로는 무지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일상적인 일에만 몰두하다가 정작 영원의 문제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 때에도 많은 사람들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이 없이, 매일 그저 자기 나름대로 바쁘게 살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며 아주 일상적인 일에만 몰두하다가, 결국 깨닫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42절에 보면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왜 깨어 있어야 합니까?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43절에서 “깨어 있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44절에서 “준비하고 있으라” 하십니다. 왜 준비해야 합니까? 생각하지도 못할 시간에 주님이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의 제자인 우리가 할 일은 깨어 있는 것이라고 오늘 말씀에서 강조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할 일은 자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 있는 것입니다. 밭에서 일을 해도 좋고, 맷돌을 갈아도 좋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도 좋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더라도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 것인지 정확한 시간을 모릅니다(36). 그런데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하신 것처럼(32),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징조들을 통해 그 시기가 가까웠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요즘은 너무나 많은 사건과 재난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자연재해, 테러 공격, 끊이지 않는 전쟁과 특히 민족 분쟁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주님 오실 날이 가까이 왔음을 깨달아야 합니다(33). 노아 때의 사람들의 문제는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간 그 자체가 아니라 깨어 있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냥 그 일만 하며 산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자고 있었습니다. 자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무슨 이상한 일을 한 게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일만 했습니다. 아주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일만 했습니다. 노아도 다른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결혼했지만,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노아는 그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창 6:9, 새)
노아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세상에서 살면서 어떻게 보면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처럼 세상의 삶에 푹 빠져서 잠자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깨어 있었습니다. 일은 하고 있지만 언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지 깨어 기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고 홍수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깨어 준비했기 때문에, 심판이 언제 임하든지 상관이 없었습니다. 항상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심판이 언제 와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바로 우리가 그렇게 지금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 심판이 임하고 주님이 다시 오시든지 상관없을 정도로 깨어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준비가 잘 안 되어 있는 경우가 사실 많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우리 삶이 너무 복잡하고 빨리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신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들이 많지만 가장 큰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시간과 관심을 빼앗기는 겁니다. 내 인생에서 영원한 가치를 가지지 않은 것들, 비본질적인 일들에 시간을 많이 빼앗기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이것이 정말 큰일입니다.
이민 온지 꽤 되는 분들은 그 시절이 기억나십니까? 한국 비디오 가게에 가서 ‘이거 주세요’라고 하며 빌려다 큰 비디오 테이프를 넣어서 봤습니다. 그런데 요즘 누가 그런 걸 봅니까? 요즘 한국 드라마나 예능이나 영화를 너무 쉽게 볼 수 있게 되었고, 미국 프로그램들도 Netflix, Prime Video, YouTube TV, SlingTV 등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시간에 아무 때고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너무 많아지니까 우리의 마음을 혼탁하게 만들고 집중을 분산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영적으로 잠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도적으로라도 영적으로 깨어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 바로 이번에 하는 ‘다니엘 금식기도’나 중보기도 사역 같은 것입니다. 또 평소에 참석하는 목장 모임을 통해 서로 삶을 나누고 기도해주고 격려하고 영적으로 깨어 있도록 서로 도와주는 겁니다.
아무리 깨어 있자고 말씀드리면서 다니엘금식기도나 중보기도를 하고 목장 모임이나 삶 공부에 힘쓰자고 해도, 별 관심이 없거나 피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귀찮아하면서, 그냥 자기를 가만 놔두면 인생이 잘 돌아갈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면 잠을 자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휩쓸려 가는 겁니다.
흐르는 강물에 멈춰서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가만히 그 자리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강물에 흘러 떠내려가고 맙니다.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강력한 세속적 물결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물결이 얼마나 센지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의 신앙 수준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휩쓸려 가는 겁니다. 퇴보합니다. 세상의 물결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셉니다.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그 강력한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맙니다. 저 낭떠러지가 멀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기 전에 빨리 헤엄쳐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붙잡아주며 세상의 강력한 물결을 헤쳐 나가도록 서로 돕는 겁니다.
[나가는 말]
이제 2017년도 어느덧 저물어가고 새해가 다가옵니다. 여러분, 우리가 새해에도 계속 잠만 자며 살아야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언제 주님이 오시든지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깨어 준비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너무 사랑하십니다. 매순간 우리와 동행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나감으로써 새해에는 더욱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며 더욱 주님께 쓰임 받는 시간으로 삼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