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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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31일 주일예배
✦ 새해에는 이렇게 살라 1 ✦
“믿음으로 행동하는 신앙인”
(마태복음 25장 31~46절)
[들어가는 말]
제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이사를 한 후로 저와 동생은 동네에 있는 교회를 다녔고, 부모님은 오래 전부터 섬기시던 교회의 직분자였기 때문에 계속 그 교회를 다니셨습니다. 제가 중2 때까지는 교회를 딱 주일 학생예배만 참석을 했고, 토요모임이 있었지만 참석을 안 했습니다. 아무래도 부모님이 없이 저만 다니다 보니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6학년 때 하루는 친구들이 하도 같이 가보자고 해서 토요모임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선생님들이 인도하던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다음 주에 그 내용에 대해 퀴즈대회를 해서 상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그 스토리를 몰랐기 때문에 하나도 못 맞추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그것이 기독교 고전인 <천로역정>이었습니다. 주인공의 이야기가 아주 흥미롭게 들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천로역정>에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 어렵게 그려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인데, <천로역정>은 온갖 고난을 겪고 시험을 다 이겨내야 겨우 가는 곳이 천국인 것처럼 그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천국은 들어가기가 쉽습니까, 아니면 어렵습니까? 여러분은 ‘나는 확실히 천국에 들어간다.’ 하고 확신을 갖고 계십니까?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천국에 들어갑니다. 우리의 공로는 전혀 필요 없습니다. 내가 뭘 열심히 해서, 착한 일을 해서 가는 게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힘입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에 가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고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한 번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고백을 했다 해서 구원을 확실히 받았다고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항상 믿고 있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믿음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내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말씀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은 추상적이지 않습니까? 구원에 이르는 진짜 믿음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에 정말로 예수님을 섬기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은 주님의 뜻대로 사는 행위가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을 정말로 구주라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절대 자기 마음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는 삶이 있을 때 구원을 받는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정말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그 삶을 어떻게 사는지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참된 믿음은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는 첫 번째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의 비유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심판주로 오십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성탄절이 있었고 그 전에 4주 정도를 대강절(대림절)로 지킵니다. 대강절의 의미는 예수님이 이 땅에 아기로 오신 것을 기다리는 기간이기도 하지만, 사실 더 큰 의미는 앞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텐데, 심판주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판주로 오실 때 사람들을 나누십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1-34절)
제가 이 본문만 읽으면 고등학교 시절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고등부 학생들이 했던 뮤지컬이 생각납니다. 그 제목이 <갓스펠(Godspell)>입니다. 1970년대에 나온 뮤지컬인데도 불구하고 노래와 내용이 너무 좋습니다. 그때 예수님 역할을 했던 1년 선배가 있는데, 요즘 영화와 드라마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또 몽골의 허에스더 선교사님도 그 뮤지컬을 했습니다.
이 장면이 그 뮤지컬에 나오는 장면인데, 여기서 “양”은 구원받은 사람을 의미하고 “염소”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른편에 있는 자들” 즉 “양”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 뒤를 죽 읽어보면, 놀랍게도 그들은 어려운 이웃을 도와준 사람들이며 그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5-36절)
왜 어려운 이웃을 도왔다고 구원을 받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절대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믿음이 없어도 선행만 하면, 어려운 사람을 돌보고 살펴주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무엇인가? 반드시 이렇게 주님의 뜻대로 행동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순서를 헷갈리시면 안 됩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받습니다. 그런데 내가 구원받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입은 자로서 그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할 때 내가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 정말 구원받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을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착한 일을 해서, 어려운 사람을 돌봐서 구원받은 게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구원받는 믿음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이 사랑이 나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나는 믿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구주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바른 삶의 행위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믿는다면 행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믿는데 행동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불렀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고 생각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서는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삶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믿었는데 주님의 뜻대로 살지는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 믿은 게 아닙니다. 다른 것을 믿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믿자마자 죽는 사람이 있다면 행위가 없어도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강도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행위가 없는 것이 아니라 행동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경우에 해당이 안 됩니다. 그런데 만약 믿은 후에 살아갈 시간이 있었다면, 반드시 믿고 변화된 행동이 나왔을 것입니다.
참 믿음은 주님께 순종할 결단을 합니다. 그래서 부족해도 주님께 순종하는 행위가 반드시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 마태복음은 행동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야고보서도 그렇지만, 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이 믿으면 행동한다는 것을 아주 강조합니다. 산상설교에서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마 7:21-23, 새)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냥 볼 때는 믿는 사람 같았는데, 주님이 보시기에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는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기적도 행하니까 당연히 자기는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여기서 핵심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바마 전 대통령이나 지금 트럼프 대통령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압니까? 진짜 아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우리를 모릅니다. 나도 그를 알고 그도 나를 아는 게 진짜 아는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문제는, 자기 생각에는 주님을 알았는데 주님은 그들을 모르신다는 것입니다. 관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관계가 있을 때 진짜로 믿는 것이고 아는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설교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낫게 해도, 주님과 관계가 없고 주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관계가 없이도 이런 기적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종교에도 기적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기적이 주님을 믿는 증거가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가 바르게 살아야 하고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들을 때 율법주의적인 설교가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믿음을 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믿음은 어떤 사실이 옳다고 단순히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인정합니다. 믿습니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믿는다면 그분 뜻대로 순종하며 섬기는 것이 믿는 겁니다. 행위가 있다고 꼭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행위가 없는데 믿음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 2:19)
귀신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처럼, 어쩌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나 귀신들이나 똑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섬기는데, 귀신들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강조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약 2:26). 사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행함이 없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말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이 행동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이론적이거나 단순히 인정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믿음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은 주님께 순종하고 섬기며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정말로 믿은 사람은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물론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어도 때때로 넘어집니다. 죄도 짓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다른가 하면, 성령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바로 깨닫고 회개하며 다시 주님을 붙들고 나아가는 삶을 삽니다. 싸움을 계속 싸워 갑니다.
그런데 믿었다고 하면서 계속 죄 가운데에만 거한다면, 요한일서에 의하면 그것은 정말 믿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지속적으로 어두움 속에 거할 수 없다는 겁니다. 잠시 넘어질 수는 있지만, 다시 일어나 또 싸워 나갑니다.
그렇게 애쓰며 나아가는 것이 소위 ‘받는 구원’ 즉 성화의 과정입니다. 구원은 ‘받은 구원’(칭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받는 구원’(성화)의 과정이 있습니다. 성화의 과정을 밟지 않는 사람은 정말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2. 믿음의 행위는 삶 전체에서 나타나야 한다
둘째로, 믿음이 행위로 나타나게 되지만 그 행위는 종교적인 영역만 아니라 삶 전체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여기서 무엇을 물어보십니까? 교회에 얼마나 다녔는가? 교회 봉사를 얼마나 했는가? 성경을 얼마나 아는가? 기도를 얼마나 하는가? 그런 것을 물어보지 않으십니다. 단순히 평소에 어려운 사람들을 얼마나 돌보았는지, 그것만 물어보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절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무슨 착한 일을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았으니까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또한 결코 종교 행위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인용했던 마태복음 7:21-23에서도 사람들이 자기 딴에는 잘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항의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너희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내게서 떠나라.”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은 설교하고 전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기도하며 능력도 행했습니다. 종교적인 행위와 업적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냥 봐도 그들은 너무 믿음 좋은 사람들로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자기들은 잘한 줄 알았는데, 실제로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법을 행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쫓겨납니다. 왜 불법을 행했다고 하셨습니까? 주님과의 관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섬기는 행위가 따라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행위가 예배 참석 잘하고,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고, 교회 봉사 잘하는 행위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눈도 오고 추운 주일 아침에 눈이나 미끄러운 길을 뚫고 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너무 귀한 일입니다. 이런 것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더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읽고 예배드리고 봉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반드시 기억할 것은, 그런 것들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평소에 사랑을 베풀며 사는 것이 중요한 믿음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로부터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꾸중을 들은 사람들은 사랑이 없이 자기 잘난 맛에 그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니까 헷갈릴 수 있는데 그것을 ‘사랑’으로 바꿔서 보십시오. ‘행함이 없는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나는 플라토닉 러브를 하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플라토닉 러브’가 그런 게 아닙니다.
사랑하는데 행동하지 않는 게 가능합니까? 데이트를 할 때 내 연인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합니다. 이런 게 가능합니까? 내가 내 배우자를 너무 사랑하는데,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합니다. 내 자녀를 너무 사랑하는데, 그래서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놓습니다. 이게 가능합니까? 사랑하면 상대방을 위해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으로만 사랑하거나 말로만 사랑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암 5:4-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벧엘이나 길갈이나 브엘세바로 가지 말라고 하시며 “나를 찾으라”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는 당시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예배 처소들이었습니다. 그곳들은 분명히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런 곳에 가지 말고 “나를 찾으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배하는 장소에 갔으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눈도 오는데 우리는 예배하겠다고 왔습니다. 이렇게 교회에 와서 예배를 하는데도 하나님은 자꾸 “나를 찾으라. 나를 예배하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렇게 종교적인 형식을 갖춘 예배 모임에 참석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을 찾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몸이 와 있기는 해도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졸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며 시간만 때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예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기도하고 성경 읽고 묵상하고 예배를 열심히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기도하고 성경 읽고 예배를 한 다음에 뭘 하는가? 그 다음에 어떻게 사나? 그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기도를 아주 뜨겁게 오래 하고 나가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성경을 많이 읽고 QT하고 나가서 어려운 사람이 있는데도 일부러 외면하거나, 열심히 예배드리고 나가서 욕하고 싸운다면, 그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정말 예배드린 게 아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정말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 읽고 예배드렸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제대로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1-43절)
이 “왼편에 있는 자들”(염소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왜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한 불에 들어갑니까? 단순히 이야기하면,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지 않았습니까? 주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왜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까? 주님을 정말로 믿은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읽은 아모스 말씀에서 조금 뒤로 가면, 하나님이 너무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암 5:21-24, 새)
하나님께 제사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더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여 예배드린 그 마음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돌보는 것입니다. 말이 이상합니까? 예배에 참석하고 예배를 드리더라도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예배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종교적인 행위나 의식으로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삶을 살 때 정말 하나님을 믿는 것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를 뜨겁게 드리고 기도 많이 하고 큐티하고 성경 많이 읽고 성경지식이 많은 것으로 세상의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를 믿는 사람으로 인정하는 게 아닙니다. 올바른 삶을 살 때 ‘저 사람들은 정말 예수 믿는 사람들이구나.’라고 인정해줍니다.
그런데 그 올바른 삶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 사랑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경건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사도 요한이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입니다. 살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요일 3:14-18, 새번역)
오늘 본문의 예수님 말씀을 사도 요한이 얼마나 제대로 깨달은 겁니까. 이것을 똑같이 깨달은 사도 바울도 이렇게 썼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롬 13:8-10, 새)
그러니까 우리가 그저 교회에 나오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것도 하지만 나아가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섬기며 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데도 하나님은 ‘얘야, 나를 찾아라.’ 하실지 모릅니다. 열심히 봉사하는데도 ‘얘야, 나의 일을 좀 해라.’ 하실지 모릅니다. 온 힘을 다해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큐티하는데도 ‘네게는 왜 믿음의 행위가 없느냐?’ 하실지 모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종교행위 자체를 믿음의 행위로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행위, 즉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는 것을 믿음의 행위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종교생활을 어떻게 했나 전혀 따지지 않으시고,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었는가, 그것만 따지십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주님을 믿는 사람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장으로 모이는 주된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기회를 주는 겁니다. 그래서 힘들어도 모여야 하고, 싫어도 모여야 합니다. 불편한 사람이 있어도 모여야 합니다. 혼자 기도하고 혼자 큐티하고 혼자 성경 읽는 게 믿음이 아닙니다. 같이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혼자 그렇게 한 것이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으로 나오는 것이 믿음입니다. 함께 모여 사랑을 실천하며 섬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정말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라도 실천해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신앙은 언제나 공동체적입니다. 혼자 하는 신앙은 불교적일지 몰라도 기독교적은 아닙니다. 공동체를 떠난 믿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공동체가 없이 어떻게 진정한 이웃 사랑을 실천하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내가 알아서 섬긴다고 말할지 몰라도, 그것은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라고 하신 사람들과 똑같을 수 있습니다. 자기는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라고 하실지 모릅니다. 자기 편리대로, 자기 스케줄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될 때 하고 안 될 때 안 하고, 내가 편할 때만 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주님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이 이웃 사랑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 편리가 아니라 상대방 편리에 따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위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자기 위주가 아니라 상대방 위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3. 믿음의 행위는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보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세 번째로, 믿음의 행위는 사랑으로 나타나는데, 그 사랑은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보는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0절)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5절)
물론 이론적으로는 작은 자만 돌보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을 돌보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높은 사람이나 강한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작은 자를 돌보며 섬기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지극히 작은 자”를 강조하시는데, 이 것을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습니다. 왜 예수님은 단순히 ‘이웃 하나에게’라고 하지 않으시고 굳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즉 ‘가장 연약하고 낮은 사람에게’라고 강조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실제로 이렇게 지극히 낮은 자, 지극히 작은 자, 비천한 자에게 한 것만이 주님께 한 것일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머리로만 믿는 게 아니라 행함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또 우리가 교회 안에서만 열심히 예배하고 봉사하고 성경공부 하는 게 아니라, 평소의 삶 속에서 이웃을 사랑하며 돌본다고 해보십시오.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웃을 사랑함에 있어서 나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실천한다면, 그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존경하거나 높은 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 또 돈과 권력을 가지고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줍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에게도 물론 사랑을 베풀어야 되겠지만, 내 사랑의 대상이 딱 그 사람들에게만 제한된다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만 사랑을 베푼다면, 그것은 믿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내가 덕을 본 적이 없는 사람, 앞으로도 나에게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사람, 존경스러운 면이 없는 사람, 예쁘지도 않은 사람, 보잘 것 없는 사람, 비천한 사람 등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으로 섬기고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참된 믿음이고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청년들이 지리산을 등산하고 타면서 여름수련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때 강사로 가셨던 목사님이 너무 고생을 하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힘들어서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무엇인가, 믿음이 정말 쓸 데 있는가 하고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각자 짐도 많았는데 공동의 짐도 있어서 일부 청년들은 배낭을 두 개씩 짊어지고 갔습니다. 아침마다 짐을 새로 쌀 때 공동의 짐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철야기도회 때 울며불며 다들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건강한 남자 청년이 하나 있었는데, 다음 날 회장이 작은 돗자리 하나를 넣을 데가 없으니 그 형제의 배낭에 넣어달라고 부탁을 하니까 냉정하게 거절했다는 겁니다. 울고불고 기도하던 것은 어디 갔는지, 그렇게 냉정히 거절하는 모습을 본 목사님이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그 수련회에서 정말 도움이 되었던 사람은 교회 나온 지도 얼마 안 된 청년 두 명이었습니다. 너무 천사 같이 보였다고 합니다.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수련회에 갈까 말까 망설이다 간신히 따라왔는데, 등산에서도 가장 베테랑이었고 또한 가장 희생적으로 모든 삶을 도와주었습니다. 힘든 상황이 되니까 교회에서 평소에 열심히 봉사하던 청년들은 가벼운 짐만 챙기고, 교회에 새로 나온 사람들이 오히려 헌신적으로 돕는 모습을 보면서 목사님은 ‘믿음이란 정말 뭔가?’ 하고 회의를 느꼈다고 합니다.
공동 짐이 남거나 특별히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이 있을 때, 청년들은 자기도 힘드니까 잘 나눠지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그 목사님이 보고 안타까워서 그 짐을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는 청년들이 와서 “목사님이 드시지 마시고 저를 주십시오.”라고 하며 빼앗아 가져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아이디어가 생겨서, 누가 힘들어 보이면 바로 목사님이 들고 갔습니다. 그러면 또 누군가가 금방 와서 받아 갔습니다.
소위 믿음 좋은 이 청년들이 왜 목사님은 도와주고 다른 청년들은 안 도와준 것입니까?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게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 도움이 되는 사람, 자기 위에 있는 사람은 잘 돕지만, 보잘것없는 사람은 잘 안 돕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평소에 누구를 주로 대접하십니까? 우리 교회도 안 믿는 VIP 분들을 초청하자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VIP 두 명이 있다고 해보십시오. 한 명은 사회적 지위도 있고, 잘나가고, 돈도 많고, 신앙생활에 대한 관심도 있고, 마음도 착합니다. 다른 한쪽은 사회에서 안 알아주는 노동을 하고, 가난하고, 별 볼 일 없습니다.
이 둘 중 우리는 누구에게 먼저 다가가겠습니까? 당연히 괜찮은 사람에게 먼저 가지, 왜 이 별로인 사람을 끌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비천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 사람이 도움이 될까 안 될까를 계산하면 안 되고, 이 사람에게 우리가 도움이 될 것인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종을 대접할 때 주님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목회자들을 많이 대접해주십니다. 음식을 먹기 위해 줄을 서도 먼저 하라고 해주십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교인 중에 가난한 청년이 있어서, 세 끼 이상 잘 먹고 사는 목사와 한두 끼 먹을까 말까 한 성도 중에 누구를 대접하는 게 주님을 대접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물론 누구를 대접해도 사랑으로 한다면 주님을 대접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신경을 써야 할 사람은 아무도 신경을 안 쓰고 아무도 안 돌보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 가운데에도 있을 수 있고, 우리 주변의 VIP들 가운데에도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인 줄 모르고 어려운 사람들을 대접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대접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쳤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무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 생애에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도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할 때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사랑을 베풀고 돌보고 섬기더라도, 진정한 신앙인은 그것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우리가 내놓을 것은 여전히 주님의 십자가뿐입니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선행을 했다고 하시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언제 그랬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37-39절)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사랑이고 선행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사실 우리가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잘했다고 어떻게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주님의 은혜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지, 내가 잘했다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은 것이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다 보니까, 이웃을 향한 사랑을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하는 선행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 자녀가 있으신 분들은, 자녀가 아기 때 기저귀를 갈아주는데 그 똥기저귀가 얼마나 냄새나고 더럽습니까? 그런데 ‘나는 내 아이의 똥기저귀를 1년 365일 이렇게 갈아주었다.’라고 자랑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렇게 자랑한다면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 자녀의 똥기저귀는 일주일만 갈아주어도 대단한 일을 했다고 어느 정도 인정해줄 만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녀는 당연히 사랑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믿음으로 주님을 사랑해서 섬기고 순종하면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봉사하고 세상에서 어려운 사람을 돌보고 구제한 것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정말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그런 일을 한 사람은 ‘나는 이렇게 하는데 너는 왜 안 하느냐?’ 하고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자기가 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가는 말]
오늘이 12월 31일이고 내일이 1월 1일입니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여러분, 이 새해를 맞이하면서 어떤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십니까?
새해에는 한 번 제대로 예수님을 대답해보겠다는 소망을 가지십니까? 하나님께 큰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아보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으십니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웃, 특별히 어려운 이웃에게 유익을 주고 감동을 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해주는 도구로 쓰임을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큰 칭찬을 받으면서 구원받은 사람의 길을 힘차게 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참 믿음은 예수님을 정말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예수님을 구주라고 인정만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믿기 때문에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고 섬기며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믿으면 사랑의 행위가 따라옵니다. 교회에서 예배하고 봉사하고 또 기도하고 큐티하고 말씀 읽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그것부터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이제 새해가 곧 밝아옵니다. 이 새해에 바로 나 때문에, 우리 가정 때문에, 우리 목장 때문에, 우리 교회 때문에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이, 특별히 어려움 가운데 비탄에 빠져 있는 이웃이, 바로 우리 때문에 주님을 만나는 역사, 주님의 사랑을 입는 역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들이 넘쳐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