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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7일 주일예배
✦ 성탄절 메시지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장 1~14절)
[들어가는 말]
성탄절이 될 때마다 고민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본문으로 설교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신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그 내용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매년 같은 본문으로 설교해도 괜찮습니다. 다가오는 느낌이 매번 다르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다음 주일에 성탄주일로 지키면서 연합예배를 드립니다. 영어권과 어린이들과 더불어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깊이 나누기가 힘들고, 또 전도사님이 어린이와 모든 연령층을 아우르는 메시지를 전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탄절 메시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마가복음에는 아예 없고 요한복음에도 그 자세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의 별명이 ‘제4복음서’입니다. 제5복음서도 있는데 뭔지 아십니까? 바로 ‘내가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빗대어 농담으로 나온 겁니다.
소위 ‘공관복음’이라고 하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나오는 것과 90%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 다루어진 여러 중요한 주제들이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세례,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당하신 것, 변화산 사건, 나병환자와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신 것, 예수님의 여러 비유들, 성만찬 사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내용, 십자가에서 외치신 것,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신 승천과 같은 사건이 요한복음에는 안 나옵니다. 또한 같은 사건이라도 ‘오병이어’처럼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남자만 5천 명을 먹인 그 기적 사건이 다른 복음서들처럼 나오기는 하지만 내용이 아주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학자들이 말하는 것은 요한복음이 쓰일 때쯤(AD 90년경)에는 성도들이 이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내용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반복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 요한의 별명이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요한이 남들이 잘 모르는 내용들을 알려주려고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요한복음은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설명보다는, 사건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더 강조하는 복음서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들과 같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의 탄생이 동정녀에 의한 것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에게서 태어난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아주 강조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표현의 방식은 달라도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보여줍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는 분들은 성경을 어디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실 것 같은데, 대개 마태복음이나 창세기부터 읽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창세기도 갈수록 어려워지고 출애굽기, 레위기로 가면 어렵습니다. 마태복음도 처음에 ‘누가 누구를 낳고...’만 나오기 때문에 거기서 포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부터 읽으시면 크게 도움이 됩니다. 특히 주님의 영광을 보기 원한다면 이 요한복음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1. 독생자의 영광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4절)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영광’이 뭔지 대충은 압니다. 대통령의 영광을 보기 원한다면 미국에서는 백악관으로, 한국에서는 청와대로 가야 할 것입니다. 천재적인 음악가의 영광을 보기 원한다면 그 음악가가 연주하는 곳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아주 뛰어난 운동선수의 영광을 보기 원한다면 그 선수가 경기를 하는 곳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학자의 영광을 보려면 그 학자가 강의를 하거나 발표하는 곳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독생자” 즉 하나님의 외아들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14절을 보면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된 영광’입니다. 이 “말씀”이라는 것은 신약성경이 쓰인 헬라어 원어로 보면 ‘로고스(Logos)’라는 단어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에는 ‘로고스’라는 단어에 단순히 말씀이라는 뜻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헬라(그리스) 사람들만이 이 로고스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한’이나 ‘화병’이라는 단어는 한국 사람만이 정확히 알 수 있듯이, ‘로고스’라는 단어는 헬라 사람들만이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단어였습니다. ‘말씀’ 그 이상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BC 6세기부터 1세기에 이르기까지 헬라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하던 철학의 중심이 바로 로고스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신이 로고스이고 로고스가 신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알든 모르든, 로고스라고 하면 ‘아, 신을 이야기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로 헬라 사람들은 누구나 그 개념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위대한 철학자인 플라톤 같은 사람도 “어느 날 신으로부터 로고스가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로고스를 온 우주를 컨트롤하는 하나의 능력이자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하나의 초월적인 존재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당시 사람들은 그 로고스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이 아덴(아테네)에 가서 전도할 때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된 제단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제사를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신이 누구인지 알려주겠다.’라고 하며 전도를 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로고스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런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너희들이 매일 로고스, 로고스라고 말은 하는데, 그 로고스가 누구인가 내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겠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로고스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절)
주(note)를 보면 ‘말씀’이라는 단어에 ‘로고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로고스라는 단어는 말씀 이상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태초”라고 할 때 성경에서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하는 말씀에 나와 있는 것처럼, 태초는 시간의 시작을 말합니다.
반면 여기 요한복음 1:1의 태초는 시간의 시작이 아니라 영원한 과거를 의미합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과거, 언제 시작했는지 도저히 인간의 머리로 알 수 없는 그것이 바로 요한이 말하는 태초입니다. 로고스는 우리가 그 시간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 저 영원 전부터 계신 분입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같은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파와 오메가’라고 표현합니다. 우리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힘든 개념입니다.
이처럼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셨는데 또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이런 데서 삼위일체의 개념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삼위일체(Trinity)’라는 말은 안 나오지만,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고, 성자 하나님의 부분을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2-3절)
말씀이 곧 성자 하나님이셨는데, 그분도 천지창조 때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말씀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동시에 모든 만물을 존재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것은 그분이 생명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이 존재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바로 이분 때문에 모든 생명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생명을 갖고 있는 것도, 우리의 영혼이 육신을 벗고 이 땅을 떠날 때 영원히 살 수 있는 것도, 다 이 생명의 근원이신 말씀(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흘러나오는 생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명이 눈에 보이게 나타났는데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생명은 눈에 안 보이지만 빛은 눈에 보입니다. 빛은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빛이 안 비치면 어둡고 침침하고 곰팡이가 끼는데, 거기에 햇빛이 쫙 비치면 그런 것들이 사라집니다. 잡초가 폈던 곳도 아름다운 뜰로 바뀔 수 있습니다. 햇빛이 비칠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은 우리가 자연에서 다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이 말씀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을 눈에 보이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가시는 곳에 생명이 태어납니다. 그분이 가시는 곳에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곳에는 거짓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참된 것이 참된 것으로 드러나고, 진리가 진리로 드러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말씀은 빛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신데, 그래서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는 어두움이나 거짓이 없고 참된 것과 진리만이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거짓에 사로잡혀 있다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2. 육신이 되신 하나님
그런데 여기서 정말 놀랍고 신비로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14절에서 보았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고, 창조자이시고, 생명이시고, 빛이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되어’라는 말은 ‘사람이 되어’라는 말보다 더 강한 표현입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사건입니다.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스케노센’인데, 이 단어는 장막(텐트)을 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가 이끌고 이집트에서 나와서 광야생활을 했는데, 거기서 장막(텐트)을 치고 살았습니다. 텐트를 치고 있다가 하나님의 불기둥이 움직이면 따라가곤 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생활 중에 텐트를 치고 살았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성막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성막이 있었던 것을 연상시키는 단어가 바로 ‘거하다’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성막을 치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구름이 가득 채워서 아무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데, 그런 하나님의 영광을 히브리어로 ‘쉐키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광야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동행하시는데, 그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성막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성막을 치고 거기에서 같이 해주시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해주신 장면을 연상하게 해주는 단어가 ‘우리와 함께 거하시매’라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와 늘 함께 해주시는 것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1:23)
마태복음에서 태어날 아기는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에서는 그 하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나간다는 것이 가볍거나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엄청난 사건입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이런 엄청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시시한 사람들이 아니라 엄청난 사람들입니다. 지금 앞뒤좌우에 계신 분들이 시시한 사람이 아니라 엄청난 분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를 쳐다보면서 ‘엄청난 분이십니다.’ 하고 칭찬해주며 그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함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로고스는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그분 외에 하나님으로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으로 오셔서 나사렛에서 자라시면서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목수의 모습으로 이 땅에 사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영원 전부터, 태초부터 계셨던 그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가 태어나고 자란 것을 보았는데 자기가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그러냐고 하며 이해를 못한 겁니다. 시골인 나사렛 촌 동네에서 목수 일만 하던 그 예수가 엄청난 가르침과 기적들로 인하여 하루아침에 온 이스라엘에 알려진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많은 사람들, 특히 같은 동네인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인정하기에는 너무 비천해 보였습니다. 너무 잘 아는데 무슨 하나님이냐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은 믿겠는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원자라는 것은 못 믿겠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요한복음을 죽 읽어보면 끝까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하나님은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셨는데,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그러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조금이라도 양보를 하셨다면 십자가에서 죽을 일이 없으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고 선포하시면서,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짜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자로, 로고스로,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과대망상증에 걸린 정신병자나 사기꾼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로 유명한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라는 영국의 지성인이 있는데, 캠프리지 대학교의 교수였습니다. 그가 회심하고 위대한 크리스천 학자가 되었는데, 그가 남긴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과거와 현재에 하나니의 아들이라고 믿든지, 아니면 미친 사람이나 그보다 더 상태가 나쁜 어떤 존재로 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그를 바보라고 몰아칠 수도 있습니다. 귀신들렸다고 하면서 그에게 침을 뱉을 수도 있고 돌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못하겠다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이야말로 나의 하나님입니다.’ 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위대한 스승이니, 성인 중 하나니 하는 허튼 생각에 빠져서 그분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붙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죄인들 가운데 거하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분의 영광을 보기를 원한다면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중간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그래도 그렇지, 이게 말이 되는가?’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연구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요즘 직분자 교육으로 선택해서 읽는 책이 있는데, 뉴욕의 유명한 리디머 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를 담임하다 막 은퇴하신 팀 켈러(Tim Keller) 목사님이 쓰신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라는 책입니다. 쉽지는 않은 내용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예수가 하나님이냐? 어떻게 구원자냐?’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느냐?’와 같은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아주 철학적이고 신학적으로 잘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여러분 혹시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는가? 그럴 리가 없다.’라든지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의 구원자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예수가 구원자일 리가 없다.’라는 것도 하나의 신앙입니다. ‘예수가 구원자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모든 기적들을 일으키셨다.’라고 하는 등 크리스천들은 그런 엉터리 같은 것을 어떻게 믿느냐고 한다면, 그것을 안 믿는 것 자체도 하나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안 계시다.’라고 하는 것도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논증을 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최고다. 신앙은 말이 안 된다.’라고 하는 것도 신앙입니다.
모든 게 다 자신의 신앙인 것이지, 증명이 되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의심을 가지셨다면, 의심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면 그 의심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 믿는 분들이 그런 확인하는 작업이나 진지한 연구는 없이, 무조건 ‘기독교는 엉터리다. 성경은 말이 안 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성경이 정말 진리인지 아닌지 연구를 안 합니다. 안 하고는 그냥 자기 생각대로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곧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진짜냐 가짜냐를 우리가 정말로 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그런데 누가 예수님한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있습니까? 14절에서는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일차적으로는 요한복음을 쓴 요한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목격하고 직접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만 이 ‘우리’에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2-13절)
그러니까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 믿는 사람은 ‘우리’라고 하는 그룹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바로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압니다. 그 부모가 낳았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사람이 많은 속에서도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디 있는지 금방 알아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서 난 자, 곧 생명을 얻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금방 압니다. 이것을 머리로 이해해서 아는 게 아니라 그냥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겁니다. 그냥 진리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죽 읽어 보면 거기 나오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3년 동안 계속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기적도 체험하고 많은 좋은 것들을 경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 정도로 밖에 못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는 따라다니면서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거기에 기적도 있고, 따라다니면 먹을 것도 생기고, 병자들도 낫고, 귀신들도 쫓겨 가고, 엄청난 기적들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는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하는데 가담하기도 했고, 대부분은 도망갔습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힘도 없고 소수였지만, 예수님을 보자마자 그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어떻게 보면 마른 줄기처럼 초라해 보이는 그 모습 뒤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그들은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과 못 본 사람, 이렇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예수님에게서 보고 계십니까, 못 보고 계십니까? 지금도 우리에게 성경은 도전합니다.
[나가는 말]
16세기 후반 프랑스 출신 신학자로 프랑키스쿠스 유니우스(Franciscus Junius)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꽤 많은 분량이 나오는 사람입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는데, 훌륭한 목사 밑에서 자라면 어릴 때부터 그 믿음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유니우스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목회자 자녀 중에 아주 훌륭한 신앙인으로 잘 자라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아주 무신론자처럼 되는 사람도 꽤 많습니다. 그래서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실 때 제 아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주시고, 특별히 장로님들이나 직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은 직분자로 아주 훌륭한데, 그 자녀도 똑같이 훌륭한 신앙인으로 자라는 경우도 있지만 그 반대로 아예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나 직분자를 위해 기도해주실 때 꼭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유니우스도 후자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목사였지만 신앙을 떠나버렸습니다. 머리가 커지고 나중에 고등학문을 배우면서 점점 믿음에서 떠났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신앙생활을 아예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을 놓고 늘 기도하다가 강압적으로 한다고 되는 게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다가 하루는 놀라운 방법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지혜를 주셨습니다. 아들이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해서 아버지의 서재에 자주 왔습니다. 특히 아들이 잘 가는 한 지점이 있어서, 거기에 신약성경을 펴놓는 아이디어가 생각났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이 내 아들의 눈을 열어주시면 아들이 이 성경책의 말씀을 읽게 되는 날이 오겠지.’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없을 때 유니우스가 서재에 들어왔습니다. 늘 하던 대로 자기가 가는 자리에 갔는데 거기에 한 책이 펴 있는 겁니다. 무심코 보니까 거기에 이 요한복음 1장이 펴 있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구절을 슬쩍 보는데 뭔가가 가슴을 팍 때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미 대학에서 철학과 논리학을 배웠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보는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는 순간에 그 논리적인 구조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야, 이거 대단한데 내가 이전에 몰랐네.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고 군더더기도 없이 핵심을 때리는 3단계 논증을 하고 있구나. 정말 대단한데?’ 하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내친김에 1장을 죽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읽을수록 마음이 자꾸 이상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뭐?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또 이 말씀이 하나님이시라고?’ 마음이 이상해지니까 성경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황급히 서재를 나왔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진정되지를 않는 겁니다. 뭔가 흥분이 되었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또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뭔가 쫓기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들면서, 하루 종일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겁니다. 그 다음 날에도 떠나지 않는 겁니다.
너무 견딜 수 없어서 마침내 그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제가 이제 믿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제가 이제 고백합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니까 놀랍게도 그때 정말 말할 수 없는, 이전에 맛보지 못했던 평안이 그의 마음을 지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안하고 초조하던 마음이 마치 폭풍 후에 잔잔해진 바다와 같이 너무 잔잔해진 것을 그가 경험했습니다. 그는 결국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고 나중에 교수가 되어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존 캘빈(John Calvin) 밑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게, 성경의 원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만 아는 대단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은 다 사본들에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것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쓴 것인지, 어떤 것이 그냥 막 베끼거나 적은 것인지를 가려내는 것은 고도의 전문 지식이 아니면 힘든 작업입니다. 그런데 유니우스가 바로 그런 일에 쓰임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성경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들어 쓰셔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그런 수많은 학자들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이런 작업을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예수님의 초라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영광을 보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그 영광을 볼 때 세상의 헛된 영광에 취해 있던, 사실은 영광도 아닌 영광을 따르던 우리 마음이 하늘 영광의 빛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구주이신 것을 보는 눈이 열릴 때 우리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생을 기쁨으로 드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은 자신의 직업이나 사업이나 가정도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기쁨이나 행복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진짜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에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영광인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