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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주일예배
✦ 21세기를 위한 고대사회의 교훈 12 ✦
“하늘에 닿는 탑을 쌓는 사람들”
(창세기 11장 1~9절)
[들어가는 말]
20세기 인류 문명의 최대 자랑거리를 하나 선정하라고 한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아마도 우주항공공학일 것입니다. 꿈에도 그리던 달에 사람이 다녀올 수 있게 되고, 우주 왕복선이나 우주 정거장 등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21세기에는 인간 문명의 최고 관심사가 무엇이 되겠습니까? 21세기 초반에는 인터넷이었습니다. 사실 지금 인터넷이 없으면 작동되지 않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스마트폰, 태블릿 PC, 컴퓨터 등, 다 그렇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한지 얼마 안 됐을 때 두 가지 예언 아닌 예언을 한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 “지금도 어느 정도 가능하긴 하지만, 우리는 이제 얼마 안 되어 실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과 선명한 화면으로 얼굴을 보며 전화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요즘 그렇게 비디오 채팅을 안 하는 가족들은 거의 없습니다.
둘째로, “휴대전화기의 기능도 더 크게 변화된다고 합니다. 전화기, 전자수첩, 인터넷, 비디오카메라를 모두 합쳐놓은 기기가 나온다고 하니, cell phone을 바꾸려고 하는 분들은 내년까지만 기다려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그때는 당연하지 않았고 스마트폰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첫 iPhone 3G가 2007년 6월에 출시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휴대전화 시장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원래 1950년대에 처음 개발된 인터넷은 1980년대에 들어 크게 발전하다가 1995년에 일반 대중도 사용이 시작되었고, 그 후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의 다음 단계는 무엇이 될 것인가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에 있어 영어권 2세들이 하는 농담이 있는데 미국 사람들은 도저히 못 알아듣는 내용입니다. “인터넷의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인터 다섯’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지금 한창 진행 중인 것이 ‘인공 지능’입니다. 그와 더불어 ‘복제 인간’도 있는데, 앞으로 이 부분도 엄청난 발전을 이룰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인류가 큰 발전을 이루어오고 있고, 1~19세기를 합친 것보다 20세기 한 세기가 더 많은 과학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선지 17년이 지났지만 이 21세기에 더 엄처난 발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또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1. 인간의 교만과 행동 (1-4절)
오늘 본문에는 그 유명한 ‘바벨탑’ 이야기가 나옵니다. 10장에서 여러 민족들의 리스트를 지난주에 살펴보았는데, 70개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처럼 다양한 민족들이 온 땅에 흩어져 살면서 각기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한 것인데 1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1절)
1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바벨탑 이야기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1절은 마치 온 인류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온 땅”이라는 말은 세계 전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떤 특정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1절의 상황을 언어가 정말 하나였던 것으로 이해한다면 ‘온 땅’은 전 세계라는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창세기 10장 이후의 상황으로 특정 지역을 생각한다면, 시날을 중심으로 하는 메소포타미아 유역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언어가 하나”였다는 것도 ‘같은 나라의 말’이었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여기에서는 ‘같은 내용의 말’이라고 보는 게 더욱 타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같은 내용의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1절의 의미는 똑같은 언어를 사용했다는 데 초점이 있다기보다는, 동일한 목적의 말만 주고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10인 10색이라고 사람마다 다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똑같은 말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벨탑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같은 내용의 말만 반복하고 주고받으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2절)
사람들은 “동방으로” 즉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시날에서 평지를 만납니다. 그런데 이 “동방으로”라는 말이 ‘동쪽으로부터’라는 뜻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쪽으로 갔다는 뜻도 되고 동쪽에서 왔다는 뜻도 됩니다. 어쨌든 사람들이 시날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시날’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지금의 이라크 지역)을 말하는데, 시날은 나중에 바벨론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이 시날이 역사에 나오는 ‘수메르’와도 연결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이 여기에서 초점을 두는 것은 그들이 살게 된 곳의 정확한 위치가 어딘가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마침내 살기에 적당한 곳을 찾았고 거기에 정학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벨탑' 하면 무슨 구름 잡는 옛날 얘기나 ‘전설의 고향’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바벨탑은 역사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전에 세계사를 공부했던 기억을 좀 되살려보시면, '지구라트(Ziggurat)'라는 것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대학 때 일반대학이었지만 구약학 과목을 들었는데, 마지막 프로젝트로 한 가지를 정해서 연구하여 페이퍼를 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 바벨탑에 대해 알아보자 하고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전에는 성경에 나오는 전설적인 이야기 정도로 생각을 했었는데, 실제로 연구해보니까 바벨탑이 바로 이 지구라트 중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10:8-10을 보면, 세상에 첫 용사였던 니므롯이 시날 땅에 세운 도시 중 하나가 바벨입니다. 이 시날이 역사에 나오는 수메르이고, 더 나아가 바벨론 문화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이 된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이런 지구라트를 세웠습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3절)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노아 홍수 직후 인간 문명의 자랑거리는 무엇이었습니까? 벽돌로 집을 짓는 기술이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벽돌을 만든 사건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인터넷을 만들어 낸 것과도 같은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벽돌이 없을 때 사람들은 동굴에 살았거나 돌을 옮겨와서 지은 집에 살았습니다. 돌은 운반하기도 어려웠고 모양을 다듬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곳 시날에 와 보니까 많은 점토가 있었고, 그 흙을 불에 구웠더니 아주 단단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만든 벽돌을 견고하게 연결할 수 있는 역청도 많았습니다. 역청이 무엇입니까? 자연산 아스팔트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날이 바로 요즘의 석유가 나오는 곳이었습니다. 아스팔트 구덩이들이 많이 있었던 곳이므로 그것을 가져다 집을 지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는 신화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4절)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이며, 인류의 큰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문제가 무엇입니까? 성읍과 탑을 건설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는 일 자체는 오히려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진짜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건축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은 첫 번째 이유는 하늘에 닿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탑은 사람이 사는 건물이 아니라 일종의 신전이었는데, 그러니까 인간 기술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선전하는 신전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탑을 쌓아 하늘에 닿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도전하기 위해서 쌓은 것입니다. 벽돌을 만드는 기술을 갖게 되자 사람들은, ‘야, 이제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 벽돌로 집을 짓고 성읍과 탑을 건설하면 우리 힘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지구라트 사진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사실 하나도 안 높습니다. 아주 낮습니다. 그걸 지어놓고 하늘에 닿겠다고 하니까 정말 가소로운 수준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눈으로 보면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기술의 혁명을 이룬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벽돌을 만들고서는 자기들이 마치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처럼, 마치 다 이룬 것처럼 의기양양해졌습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10년 전에 멀리 한국에 떨어져 있어도 화면으로 선명하게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막 자랑했다면, 지금의 눈으로 볼 때 너무 당연하고 가소로운 수준을 자랑하나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도의 능력과 기술이면 하나님 없이도 충분하다고 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죄의 핵심은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교만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며 하나님 자리에 앉는 것이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처럼 되어보고자 열매를 따먹었다가 타락한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그처럼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이 다 있습니다. 우리가 겉으로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생각하거나 말하지는 않지만, 무엇이든 내 맘대로 하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삶을 자기 마음대로 살고, 다른 사람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고자 애를 씁니다. 부모는 자녀가 자기 맘대로 되기를 원하는데 자녀가 말을 안 듣습니다. 자녀는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고 부모는 자기 말을 들으라고 해서 갈등이 생깁니다.
부부간에도 자기 맘대로 하려 하니까 갈등이 생깁니다. 인간관계도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좋아하는 대로 움직이려고 하니까 서로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하신 하나님이나 하실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덤비니 거기에서 사고가 안 나겠습니까? 사람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아니, 되어서는 큰일 납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주인이 되어 버리면 그 인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고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은 예배 때만 하나님입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예배당을 나가는 순간 정말 하나님이 내 주인이신가?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합니까? 한 번 잘 생각을 해보십시오. 정말 많은 경우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하는 것이나 뭘 결정할 때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지만 내가 싫으면 안 하고 하나님은 하지 않기를 원하시지만 내가 좋으면 합니다.
성경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이나 이웃 사랑과 상관없이 그냥 내가 좋으면 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 이 행동을 함으로, 이 말을 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안 하실까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가 좋으면 하는 겁니다. 내가 이 행동을 함으로, 이 말을 함으로 이웃이 상처를 입을까 안 입을까, 그 사람에게 유익이 될까 안 될까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가 좋으면 하는 겁니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 노릇을 하는 삶’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 때부터 있었고, 바벨탑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은 두 번째 이유는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러한 기술을 개발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이걸 했다. 우리가 최고다. 우리를 좀 봐라. 우리가 이 정도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이름을 내고 자신들을 알아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남에게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스타가 되기를 원합니다. 옛날의 썰렁한(?) 농담과 같이 ‘스타’는 ‘스스로 타락한 사람’이라는 뜻이 정말 맞습니다. 자기가 스타가 되려고 하면 정말 타락합니다. 교만해집니다.
그런데 사실 겉으로는 우리가 ‘나는 스타다’라고도 안 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내가 이런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인데 좀 알아다오’ 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다 있지 않습니까? 교회에서도 ‘나를 좀 알아다오’ 하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우리 이름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예배에서 개회기도를 할 때마다 뭐라고 합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빈말이나 입에 붙은 종교적 반복이 아닙니다. 이 예배에 인간이 드러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야지, 설교자나 성가대나 기도자나 그 누구라도 우리의 주목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알아달라는 마음이 우리 안에 다 있습니다. 우리 봉사와 섬김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이 드러나셔야 하는데 ‘나를 좀 알아다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혹시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 다 보고 알아주십니다.
교회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기 얼마 전에 “제자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사명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여 믿게 해서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드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분들에게 나아가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주 오래 걸리는 일이고 속도도 아주 느릴 수 있습니다.
요즘 한 영혼이 주님 앞에 나오는 게 평균적으로 5년에서 7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너무 오래 걸리고 너무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바른 길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길입니다. 좁은 길이고 어려운 길이고 결과도 빨리 얻을 수 없는 길이지만, 바른 길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묵묵히 계속 갈 뿐입니다.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인정을 위해서 애쓰지 마시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혹시 사람들은 몰라줘도 하나님이 아시니까 괜찮다는 마음만 있으면, 교회에서 봉사하고 사역할 때 진정한 자유함을 느끼고 기쁨도 맛보게 됩니다. 특히 교회에서 봉사하시는 분들이 꼭 가져야 하는 마음이 이것입니다. 사람은 몰라줘도 하나님이 알아주시니까 괜찮다는 마음입니다. 그럴 때 믿지 않는 한 영혼을 섬길 때 잘 안 되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 섬기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그런 나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십니다.
세 번째로, 그들이 바벨탑을 쌓은 이유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8). 또 홍수로 온 세상을 멸망시키신 다음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아의 가족들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9:1).
그런데 사람들은 이제 함께 뭉쳐 살려고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함께 모여 사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하나님도 모든 인류가 서로 사랑하며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 됨이란, 모든 인간이 먼저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그분과 동행하면서, 또 서로 주님 안에서 하나 되어 주님의 힘을 의지하면서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흩어짐이란,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온 세상에 흩어져서 자기가 있는 바로 그 장소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로 함께 모여 예배하고 교제하고 사랑을 나누고 서로 섬기고 열심히 해야 하지만, 거기서 힘을 얻고 흩어져서 각자 있는 곳에서 사랑을 나누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그런데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이 시날에서 정착하여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과 진정한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목적으로 편의상 함께 있었던 것뿐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이 당연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가 되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가 정말 중요합니다. 조폭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무섭습니까? 일사불란하게 하나가 되어 움직입니다. 그런데 하나가 되어서 무서운 일들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가 되어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같이 모여서 한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아주 끔찍한 일입니다.
무조건 다른 사람과 연합한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 성경에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데 있어서는 평소에 서로 원수였던 바리새인들(민족주의자)과 헤롯당(로마의 앞잡이)이 연합했습니다. 또 서로 정적이었던 빌라도와 헤롯이 예수님을 재판할 때 사이에 두고 친구가 되었습니다. 역사에서 봐도, 공동의 적을 제거하기 위해 힘을 합치지만, 제거한 뒤에는 서로 싸웁니다. 그러므로 뭉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뭉치는지, 무엇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지, 그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집단을 만들었습니다. UN, EU, NATO, G7, ASEAN 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사실 전 인류의 복지와 세계 평화가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그런 단체에 속한 나라들은 각각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뭉친 것뿐입니다. 다른 나라를 도와준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나라가 더 잘되기 위한 방법일 뿐입니다. 한국도 오래 전에 IMF를 겪었지만, IMF 구제 금융 같은 것도, 거기에서 나오는 이익이 없으면 안 빌려줍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평소에 혈연, 지연, 학연을 잘 따집니다. 어느 지역 출신인가, 어느 학교 출신인가 따져가면서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과 한 집단을 형성하려고 합니다. 그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거기서 뭔가 자기가 얻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관계가 되면, 평소에는 서로를 위하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막상 자기 이익과 관련된 일이 생기면 금방 깨집니다.
자기가 소속한 단체의 이익이나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이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애씁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이 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것이 바로 흩어짐을 면해보려고 함께 바벨탑을 쌓는, 죄인 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2. 하나님의 결단과 행동 (5-9절)
인간들이 그런 식으로 하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5절)
이것은 하나님이 멀리 있는 것을 보실 수 없기 때문에 오셨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이 너무나 높이 계시고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표현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자고 세우며 자랑하는 탑과 성읍이,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와서 보셔야 할 정도로 작고 미약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려오신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6절)
“이후로는 사람들이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인간이 조금 더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통제할 능력이 없으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뿐이라는 것을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떤 죄라도, 어떤 악이라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탑을 쌓아 올라가면서 얼마나 서로 싸웠겠습니까? 슬쩍 죽이고 그 속에 묻는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계속 막 나가다가는 또 다시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뭘 약속하셨습니까? 이제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다’는 말은, 이렇게 놔두면 금방 다시 심판해야 할 일이 생기기 때문에 더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흩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벨탑을 다 쌓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누가 제일 큰 공을 세웠냐, 누가 가장 큰 일을 했느냐를 따지며 서로 싸우게 될 겁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애를 쓰다가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모함하며 폭력을 쓰거나 결국 서로를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십니까?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7절)
여기에 하나님의 유머가 나옵니다. 3절에서 사람들이 ‘자, 벽돌을 만들자’고 하고, 4절에서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자’라고 하니까, 하나님도 ‘자, 우리가 내려가서 혼잡하게 하자’라고 하십니다. “바벨”이라는 말 자체가 '혼잡케 한다'라는 뜻입니다. 각자 다른 언어를 말하게 되니까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되게 되어 마침내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8-9절)
하나님은 인간의 잘못된 의도와 행동을 막으시기 위해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실제로 진짜 언어가 안 통하게 되었다는 뜻도 되고, 마음이 하나갇 되지 못했다는 말도 됩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게 해서 사람들이 잘못된 일을 계속 진행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이 안 통하니까 흩어지게 되었고, 성읍과 탑을 세우는 일도 중단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처벌인 동시에 더 심각한 죄에 빠져들지 않게 하시기 위한 예방조치입니다. 이것을 9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라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죄를 범하는 인간들 사이에 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흩어지게 만드셨다는 말씀입니다.
3. 바벨탑과 대비되는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 (사도행전 2장)
그런데 이때 바벨탑에서 나뉜 언어가 다시 일치가 되는 기적이 오랜 후에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오순절에 다락방에서 함께 기도하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 얼마 안 되어서 그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는데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새로운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각기 다른 방언으로 똑같은 내용, 즉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이전에는 이들도 서로 누가 크냐 하며 싸웠습니다. 특히 열두 제자는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누가 그 다음이 될 것이냐 하며 싸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교만과 명예욕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던 그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사람들로 변화가 되었습니다(행 1:14). 자신의 이기적인 유익을 위해서 거기 함께 모인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을 챙기려고 잠시 있던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구하면서 완전히 한마음 한 뜻이 되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들이 같은 언어로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각기 다른 방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내용의 말을 했습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같은 말을 사용했지만 속마음은 제각기 달라서, 자신의 유익만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서 간절히 주님께 기도했고, 그랬더니 같은 성령님께서 같은 내용의 말씀을 같은 목적을 위해, 즉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으로 복음이 전파되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나가는 말]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바벨탑을 쌓던 시대와 요즘 시대는 서로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당시에 벽돌을 만들면서 인간이 교만해지고 자기들 능력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이 시대에도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은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자랑합니다. 그래서 소위 신의 영역을 넘어간다고 이야기합니다.
세포를 복제해서 인간과 동물을 합치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는 말들이 있습니다. 자기들끼리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보겠다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뇌를 복제해서 몸을 만들어 거기에 옮겨서 영원히 살아보겠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소설 같은 이야기인데 몇 년 안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제는 우리가 알아서 한다. 하나님은 필요 없다.’라고 합니다.
경제적인 풍요로움도 자랑합니다. 또 핵이니, 인공지능이니, 인간 복제니 하는 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요즘 핵 때문에 얼마나 난리입니까? 북한도 그렇고, 이전에 이란도 그랬고, 서로 핵을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마치 그런 것을 가지기만 하면 자기들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업적에 취해서 자기 이름을 내려고 하고, 서로 힘을 합쳐 한번 해보자고 연합하는데 사실 그 연합은 자기 이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그렇게 해도 하나님이 저 멀리서 내려오셔야 확인하실 정도로 미약한 것이 인간의 수준입니다. 마치 시편 2편에서 큰소리를 뻥뻥 치는 민족들을 비웃으셨다는 표현이 딱 맞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이민을 왔든, 유학을 왔든, 일하러 왔든, 우리가 사는 이 미국처럼 풍족하고 자유롭고 편하게 사는 곳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미국은 참으로 이상한 나라입니다. 빚은 산더미 같이 지고 있으면서도 국민들은 풍성하게 누립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완전하다고 자랑할 수 있습니까? 각종 범죄가 넘쳐나고, 위험해서 밤에는 혼자 다니기가 힘들고, 특히 밤에 험한 지역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집이 없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총기사고가 계속 일어납니다. 인종차별 및 인종 간의 갈등, 마약 중독, 아동 학대, 성추행 문제도 심각합니다.
인터넷의 발전이 좋기는 하지만, 그에 따라 개인의 privacy가 침해되고 개인 정보가 새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또한 웹 사이트의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음란물입니다. 핵 기술의 개발도 어려가지 좋은 점이 있지만, 그것이 잘못되면 구소련의 체르노빌 발전소나 일본 쯔나미 이후에 일어났던 방사능 오염과 같이 대형 참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인간복제의 기술을 발전시켰다곤 하지만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면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올 수 있습니다. 타락한 죄성을 지닌 인간의 업적들의 이면에는 이처럼 여러 부작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탑을 지을 수 있는 기술을 허락하셨던 하나님께서, 왜 오늘날 이런 과학기술 문명과 물질적 풍요를 우리에게 주셨겠습니까? 우리가 왜 그런 것들을 누리게 하셨겠습니까? 바벨탑이 무너진 것은 결코 탑을 쌓는 것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가 되어 일을 한 게 나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들의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컴퓨터나 인터넷이나 과학기술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너무 풍요로워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하는, 자기가 다 할 수 있다는 교만, 또 자기 이름을 내려고 혈안이 된 명예욕, 겉으로는 연합하는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고 하는 이기심이 문제입니다.
결국 인간의 문제는 교만과 명예욕과 이기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물질적 풍요를 누린다면 인간은 반드시 죄를 짓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주 비극적인 것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흩으실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여기 함께 한 교회로 모이는 이유가 어떤 교만이나, 자기를 알아달라고 하는 마음이나, 이기심 때문이라면, 결국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 잘못되고 더 망가져버리기 전에 우리를 흩어버리실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수한 마음과 열정으로 함께 하나가 되어 주님의 뜻을 구하고, 간절히 주님 앞에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하며 순수하게 나아간다면, 성령님께서 오순절에 역사하셨던 것처럼 우리 가운데에도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같은 마음과 같은 방향성을 주시고 오직 주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나아가도록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초대교회에 부어주셨던 성령의 역사가 우리에게도 일어나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늘 바로 그 초대 교회의 성령의 역사가 우리 교회에도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바로 우리 가운데에도 넘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초대 교회처럼 하나가 되어 기도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세상으로 나아가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그러한 우리 각자와, 우리 가정과, 우리 목장과,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