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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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3일 주일예배
✦ 21세기를 위한 고대사회의 교훈 11 ✦
“온 땅으로 흩어진 노아의 후손들”
(창세기 10장 1~32절)
[들어가는 말]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한자’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하루는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셨습니다. 각자 자기가 어디 성씨인지 본과 파를 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알아왔는데 그 중에 재미있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성이 나 씨였는데 “너는 어디 나 씨냐?” 그랬더니 “예, 저는 ‘나폴레옹 나 씨’에 ‘부르주아 파’입니다.”라고 했다가 얻어맞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저는 ‘평창 이씨, 노산군파’인데, 그때는 평창이 어디냐고 했지만, 지금은 다 알고 있습니다. 바로 얼마 후에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바로 그 평창입니다. 사실 평창 이씨는 거의 없는데, 나중에 미국에 와서 부교역자 생활을 할 때 신기하게도 가는 교회마다 꼭 한 분씩은 평창 이씨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동성동본이면 결혼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십 년 전쯤부터 아주 가까운 친척이 아니면 결혼할 수 있게 법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전에 제가 한국에 교환학생을 갔을 때 학교에서 친해진 전도사님에게 아는 자매를 소개시켜주려 했는데 같은 ‘경주 이씨’라 할 수 없었습니다. 대학 시절에 저에게 친해지려고 접근했던 자매(친구)가 있었는데, 같은 평창 이씨인 것을 알고 안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처럼 한국 사람들은 족보를 중시합니다. ‘족보 없는 집안’이라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로 족보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람들은 고향에 가서 죽기를 원하고, 힘들거나 어려울 때 고향에 가기를 원합니다. 추석 같을 때 보면 성묘를 하러 고향에 많이들 내려가는데, 그것은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려는 본능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족보 이야기 같은 데에 너무 심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약에 보면 족보를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물론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우리의 고향이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김 씨 가문, 이 씨 가문, 박 씨 가문이 아니라, 예수님 가문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곳곳에서(특히 구약에서) 족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족보 이야기나 자기 집안이 이렇게 훌륭하다고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인간이 어떻게 뻗어나갔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것을 읽으며 느낀 것은, 이 이름들을 다 발음하기도 쉽지 않지만, 어떻게 그 옛날(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이렇게 자세히 알고 기록을 했는가 놀라게 됩니다. 이 부분은 창세기 강해를 하는 목사님들도 그냥 넘어가는 부분인데, 중요한 교훈이 있어서 같이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1. 서론 (1절)
창세기 10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론인 1절과 결론인 32절, 그리고 본론 부분인 2절부터 31절까지입니다. 본론도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야벳의 후손들이 나오고, 그 다음에 함의 후손들, 그리고 셈의 후손들이 나옵니다. 숫자를 따져보면, 먼저 야벳이 후손들 14명, 이어서 함의 후손들 30명, 그리고 셈의 후손들 26명이 나오는데, 도합 70명이 나옵니다. 이 이름들은 단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인명을 넘어서 지명과 국가를 의미합니다. 이 사람들을 통해 뻗어나가서 민족들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계보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선적인 계보’(linear genealogy)라고 하는데, ‘누가 누구를 낳고, 누구를 낳고...’라고 하며 위에서 아래로 죽 내려가는 족보를 말합니다. 두 번째는 ‘부분적인 계보’(segmented genealogy)인데 ‘방계 족보’라고 합니다. 하나를 이야기하고 형제까지 이야기한 다음, 다시 아래로 내려가서 또 형제들을 이야기하는 식입니다. 창세기 5장과 11장은 선적인 계보, 즉 위에서 아래로 죽 내려가는 계보입니다. 그런데 특정한 형제들을 중심하여 수평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식이 오늘 본문입니다.
이전에는 셈과 함과 야벳의 순서로 언급되었는데, 여기서는 야벳과 함과 셈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학자들은 셈이 장자라고 동의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어를 번역할 때 번역상에 논란이 있습니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21절)
여기서는 셈을 “야벳의 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영어성경 중 대표적인 NIV에서는 셈을 이야기한 다음 ‘셈의 형이 야벳’이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형인지 확실하지가 않았습니다.
9장 24절에 보면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작은 아들”은 함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가 둘째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본에는 그가 ‘막내아들’이었다고 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래도 더 많은 사람들이 셈, 함, 야벳의 순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순서가 다릅니까?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1절)
여기서는 “셈과 함과 야벳”의 순서로 말해놓고는, 본론의 첫 부분을 셈이 아니라 야벳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야벳, 함, 셈의 순서로 하여 거꾸로 갑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나이순으로 배열한 것이 아니라 지역별로 배열한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방향을 이야기할 때 동서남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북남동서로 이야기합니다. 북쪽, 남쪽, 동쪽, 서쪽 순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여기도 마찬가지로, 지역적으로 이스라엘의 북쪽으로 퍼져나간 야벳 자손들을 먼저 이야기하고, 다음에 남쪽의 함의 자손들을 이야기하고, 마지막으로 가나안 동쪽 메소포타미아에 해당하는 셈의 후손들이 언급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진을 차고 행진할 때 보면 북남동서로 배열하는 것을 봅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저 북쪽으로, 남쪽으로, 동쪽으로 퍼졌습니다.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유럽 쪽, 중동 및 아프리카 쪽으로, 또 동쪽으로 많이 퍼졌습니다. 하나님은 홍수로 쓸어버리신 다음 노아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보면, 북쪽이든 남쪽이든 동쪽이든 서쪽이든, 너무나 악한 모습들이 많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가족들로부터 다시 시작하셨지만, 죄는 없어지지 않았고 그러한 죄의 모습이 계속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홍수가 끝나자마자 그 의인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던 노아가 한 일이 죄를 범한 것이었고, 그 모습은 계속 이어져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여전히 악합니다. 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즘 목회편지에도 상처에 대해서 쓰고 있는데, 상처가 계속 내려가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이상한 이단적인 가르침에서 말하는 것처럼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아니라, 상처를 받은 사람이 아이를 낳으니까 그 아이에게 자기 안에 있는 상처를 전달해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또 상처를 받고 자기 자녀에게 또 상처를 전달하는 겁니다.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는 이것이 인간의 죄성이고 현실이고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여전히 악합니다.
제가 ‘거절감’에 대해 쓰면서 미국이 큰일이라고 느꼈습니다. 거절감의 상처를 받을 만한 원인이 너무 많습니다. 세대가 지나면서 X세대, Y세대, 밀레니얼 세대라고 이름을 붙어놓았지만, 그래봐야 죄성은 계속 내려가는 겁니다.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자기 자녀에게 상처를 주고, 그 자녀는 또 자기 자녀에게 상처를 주며 계속 내려가는 겁니다.
이번에 <새로운 삶>에서도 다루었지만, “10/40 창”이라고 해서 북위 10도와 40도 사이에 있는 나라들, 주로 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등에 집중되어 있는 나라의 사람들 대부분이 마약과 굶주림과 질병과 인권 탄압으로 동물과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인신매매(human traficking)를 통해 납치해서 성적 노리개로 팔아버리는 아이들의 나이가 세 살, 두 살로 내려갔다니까 너무 끔찍합니다. 그런 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바뀌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세계를 보는 눈을 키워주기 위해 여행을 하기도 하는데, 미국에도 좋은 데가 많이 있습니다. 저도 안식월에 좋은 곳들을 많이 다니는 기회를 얻었지만, 유럽이나 이스라엘 성지 순례 등 가볼 만한 곳이 세상에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데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 모습은 바로 그 뒤에 있습니다. 그러한 화려한 곳의 뒷골목에도 있고, 동남아시아나 인도나 중동 등 여전히 사람들이 탄압을 당하고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당하는 것이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현실이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라, 노아와 아들들로부터 다시 시작하셨지만 그때부터 계속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그런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인간을 구분하는 법이 많고, 여기서도 셈과 함과 야벳으로 나눌 수 있지만, 크게는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하나님께 반항하는 사람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반항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거나 믿지 않고 그냥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전 세계 인구로 볼 때, 크리스천들이 많다고 해도 사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른 채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로마서 1장에서 아주 잘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한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다.” (롬 1:21-23)
그러니까 하나님 없는 삶은 비참한 죽음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성을 여전히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족하지만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이 여전히 죄가 가득하고, 너무 끔찍한 모습들이 많고,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 있는가 하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도 소수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노아의 후손은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2. 본론: 노아의 후손들 (2-31절)
1) 야벳의 후손들 (2-5절)
먼저 야벳의 후손들이 나오는데, 여기에 보면 여러 지명들이 나옵니다. 고멜, 마곡, 마대, 야완, 두발, 메섹, 디라스, 아스그나스, 리밧, 도갈마, 엘리사, 달시스, 깃딤, 도다님 등입니다.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어디인지도 잘 모르는 이름들입니다.
이들은 다 북쪽의 민족들을 말합니다. 고멜은 키메르족, 마곡은 아르메니아와 갑바도기아에 있는 고겟 땅의 사람, 마대는 앗시리아 동쪽과 카스피해 서남쪽에 있는 메대족입니다. 메대는 바로 오늘의 쿠르드 족의 조상입니다. 야완은 헬라족이며 소아시오와 이오니아족, 두발과 메섹은 본도와 아르메니아 등 터키 지역, 디라스는 펠라스기족으로 해변에 정착한 족속입니다. 이렇게 야벳의 후손들은 주로 터키와 그리스 및 유럽 지역에 퍼져 살았다는 것입니다.
2) 함의 후손들 (6-20절)
함의 후손들에 대해서 설명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특히 함의 후손들은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유럽 쪽에 있는 사람들의 조상은 야벳이라고 볼 수 있고, 중동이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주로 함 계열의 족속들입니다.
여기도 여러 이름들이 나옵니다.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 스바, 하윌라, 삽다, 라아마, 삽드가, 스바, 드단, 니므롯, 루딤, 아나밈, 르하빔, 납두힘, 바드루심, 가슬루힘, 갑도림, 블레셋, 시돈, 헷, 여부스, 아모리, 기르가스, 히위, 알가, 신, 아르왓, 스말, 하맛 등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주지 않고 나가서 마구 떠든 사람입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자녀가 부모에게서 상처를 받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수치를 감싸 드릴 의무가 있습니다. 부모의 수치를 드러내는 자녀가 복을 받겠습니까, 아니면 부모의 수치를 그래도 가려주는 자녀가 복을 받겠습니까?
함은 아버지가 술을 먹고 하체를 드러냈을 때, 이상한 눈으로 보는 행동을 했을 뿐 아니라 나가서 형제들에게 떠들었습니다. 그래서 함은 저주를 받았는데, 특히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이 쓰였을 당시 가나안 민족들과의 관계가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땅을 가나안 민족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이 구스를 낳고 구스는 니므롯을 낳았습니다. 함의 손자 중 하나가 니므롯인데, 이 사람에 대해 특별히 몇 절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8-12절)
니므롯을 고대의 영웅이라고 여기서 소개합니다. 세상의 첫 용사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니므롯이라는 이름의 뜻이 ‘하나님께 반역한다’라는 의미입니다. 고대사회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사회이거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따르는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께 반역하는 사회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반역한 문화의 끝이 무엇입니까? 다음 11장에 나오는데, 바로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이 어디 있었습니까?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10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바벨탑이 세워진 곳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반역하는 문화의 마지막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자, 우리가 하나님처럼 한 번 높아져보자.’입니다. 이것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뱀이 아담과 하와를 꼬이면서 ‘너희가 요것만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 그래서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보니까 너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해서 탁 따먹었습니다. 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반역의 끝입니다. 지금 세상을 보십시오. 자기가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신앙생활의 싸움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인으로 모셔 들이는데, 그 말은 ‘내 삶의 주인은 이제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다스려주시고 저는 따라가는 종입니다.’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은 겁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다음에도 끊임없이 마귀는 우리 귀에 속삭입니다. ‘그래도 네가 주인으로 살아봐. 네가 주인으로 살아봐.’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서 구원받고 천국에는 가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자꾸 내가 주인 노릇, 하나님 노릇을 하는 겁니다. 그 끝은 뭔가? 바벨탑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주인 노릇을 계속 하며 살아가면 결국 바벨탑을 쌓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높아지겠다.’라고 하며 교만해지는 것이 끝입니다.
그래서 니므롯에 대해 많이 쓴 겁니다. 그가 대단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대단한 사람들을 그렇게 크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왜 니므롯에 대해 이렇게 많이 설명합니까? 그가 바벨탑과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도 여러 사람들이 함을 통해서 나왔습니다. 나중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나와 광야를 지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때 바턴 터치를 해서 여호수아가 이끌고 들어갑니다. 가보니까 거기 거인들이 있고 일곱 족속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름이 빠지거나 약간 다르기도 하지만, 대부분 함의 후손들입니다. 야벳과 함의 족보를 보면 그들이 역사의 중심을 이루는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문화를 만들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셈의 후손들 (21-31절)
셈의 후손들도 보면 엘람, 아수르, 아르박삿, 룻, 아람, 우스, 훌, 게델, 마스, 셀라, 에벨, 벨렉, 욕단, 알모닷, 셀렙, 하살마웻, 예라, 하도람, 우살, 디글라, 오발, 아비마엘, 스바, 오빌, 하윌라, 요밥 등입니다.
다른 데서는 위에서 밑으로 죽 내려가는데, 여기서는 하나 내려가서 옆을 설명하고, 또 하나 내려가서 또 옆을 설명하는 식입니다. 이렇게 발음하기도 힘든 사람들의 이름을 다 기록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합니다.
여기서 배우는 교훈은 기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말씀묵상을 하실 때 눈으로만 하십니까?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내가 지금 기록해놓은 것이 나중에 큰 힘을 발휘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실 때, 기도하실 때, 노트를 마련해서 기록해보십시오. “또렷한 기억력보다 흐릿한 펜이 더 오래 간다.”라는 말처럼 기록을 했을 때 나에게 영적으로 큰 유익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사람들이 어떻고 족보가 어떻다고 이야기하기 위함이 아니라, 노아의 후손들의 결론은 바벨탑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나왔지만, 결론은 바벨탑 아니면 아브라함이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장황하게 말한 겁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니므롯의 중심지였던 시날 땅의 바벨로 가서 “우리가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 노릇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주신다.’라고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면 괜찮지만, 자기 삶에 하나님이 없으니까 내가 나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공격하는 것이 두려워서 성을 쌓습니다. 쌓고 또 쌓고 또 쌓고 하늘 꼭대기까지 쌓습니다. 그런데 사실 자기는 그 성 안에 갇히게 되는 겁니다.
우리 인간의 운명이 바로 여기서 결정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고 신뢰하며 나아가면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복을 직접 받으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챙겨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사람들은 결국 선택한 곳이 넓고 좋아 보이는 시날 땅입니다. 거기서 그들이 결정하고 선택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 하나님과 대항해서 우리끼리 살아보자.’ 그것이 결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벨탑입니다. 그 바벨탑의 문화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후에 바벨론 제국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그 바벨론 제국은 요한계시록에 가보면 마지막 시대에 악한 도시의 상징으로 나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무너지는 곳입니다.
창세기 11장에 가면 바벨탑 사건 이후에는 셈과 함과 야벳 중에 딱 한 명의 족보만을 기록합니다. 그것이 바로 셈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셈의 족보를 죽 기록하는 이유는 한 사람,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되셨는지, 어떻게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 그 한 사람을 택하셨는지의 이야기가 죽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족보가 그 이후에 죽 나오면서 결국 거기서 다윗도 나오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십니다.
세상에 수많은 민족들이 있고 사람들이 있습니다. 발음하기도 힘든 이름들이 지금도 여전히 많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왜 하필 아브라함을 부르셨는지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왜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하필 아브라함인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을 때 그 기회를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그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 순종한 사람의 몸에서 여러 사람들이 나오고, 그 중에 다윗이 나오고, 또 예수님이 나오셨습니다.
특히 은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이고, 이삭의 아들이 쌍둥이 에서와 야곱입니다. 에서는 장자였지만 믿음을 버렸습니다. 그는 그냥 자기 길을 갔습니다. 분명히 믿음의 집안의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길을 택해서 나가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열하고 속이고 속고 험악한 인생을 살았던 쌍둥이 동생 야곱이 장자를 이어가면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정말 은혜가 되는 것은 그 야곱이 이스라엘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요셉처럼 훌륭한 사람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이 아니고, 그 험악한 세월을 살았던 야곱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 은혜가 되는 것은, 유다가 나오게 되고 다윗이 나오게 되고 예수님이 나오게 되는 계보를 이루도록 하는 역할을 한 결정적인 여인이 누군가 하면, 야곱이 그토록 사랑하던 아리따운 아내 라헬이 아니라 천대받던 레아였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레아, 아버지에게도 버림받고 남편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던 레아를 통해서 유다라는 아들이 나왔고, 유다의 계보에 다윗이 나왔고, 또 나중에 예수님이 나왔습니다.
사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를 살펴보면 5명의 여자가 나오는데, 다 이상했습니다. 라합은 기생이었는데 사실은 신전 창녀였습니다. 룻은 이방인인 모압 사람이었습니다. 밧세바는 불륜을 저지른 여자였습니다. 그 전에 유다의 며느리 다말도 잘못된 관계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 빼고는 다 이상한 출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따지는 게 뭡니까? ‘어디 출신이냐? 돈이 얼마나 많으냐? 얼마나 잘생겼냐? 얼마나 예쁘냐? 학벌이 얼마나 좋으냐? 얼마나 성공했냐?’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는 건 뭡니까? ‘믿음이 있냐? 순종하느냐?’입니다.
우리는 보통 무엇을 성공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을 좀 버려도, 돈 많이 벌고 높아지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좀 떠나도, 이 세상에서 높아지고, 돈 많이 벌고,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 잡고, CEO 되고 그러면 성공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정말 따르는 사람인가, 순종하는 사람인가를 보십니다. 다말이나 라합이나 룻이나 밧세바 같은, 이상하고 천한 출신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면 되는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왔지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 하나면 충분한 것입니다.
3. 결론 (32절)
결국 결론이 무엇입니까? 야벳의 자손에 대한 결론을 보십시오.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5절)
함의 자손에 대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20절)
그리고 셈의 자손에 대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이들은 셈의 자손이니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31절)
그리고 마지막 결론은 이것입니다.
“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 (32절)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세기의 흐름이 바로 이것입니다. 노아에 대한 이야기를 그 동안 죽 하다가 10장에서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민족들의 이름이 나오는가? 바로 이 11장과 12장을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민족들이 셈과 함과 야벳의 자손들을 통해 나왔지만, 결론은 둘 중 하나라는 겁니다. 결국 ‘바벨탑 쪽으로 가느냐? 아니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고 따라 가느냐?’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바벨탑은 화려해 보입니다. 높아 보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힘든 길을 갔습니다. 그러냐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삶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지금 전 세계에 70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70억이 넘는 수많은 사람들을 둘로 보십니다. 하나님을 정말 믿고 따르는 사람들, 아니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들어가겠습니까? 혹시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눈은 여전히 세상을 바라보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도전합니다. ‘선택하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선택하라! 아브라함의 길, 순종의 길을 선택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름다운 삶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