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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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6일 주일예배
✦ 21세기를 위한 고대사회의 교훈 10 ✦
“홍수 후에도 없어지지 않는 죄”
(창세기 9장 18~26절)
[들어가는 말]
아이들이 어릴 때는 아빠 엄마를 볼 때 아빠는 세계에서 제일 힘이 센 사람이고, 엄마는 세계에서 제일 예쁘고 제일 요리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점점 자라가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습니다. 그러다가 십대 청소년기가 되면 아빠 엄마는 세계에서 제일 무식한 사람입니다. 그러다 청년기가 지나면서 부모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부모라고 해서 다 완전한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자녀도 자기가 부모가 되어 보면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자녀로서 어릴 때를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내 앞에서 실수하기도 하고, 나도 부모로서 자녀 앞에서 실수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자녀가 보는 앞에서 슬쩍슬쩍 거짓말할 때도 합니다. 전화가 오면 “나 없다고 해”라고 하는데, 본의 아니게 그럴 때도 있고 귀찮아서 그럴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자녀들이 두 가지 반응을 나타냅니다. 어떤 자녀는 그런 부모의 실수를 깊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저런 실수를 이 다음에 하지 않겠다.’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다른 경우에는 그런 부모를 아주 미워하고 증오하면서도, 사실은 자기가 미워하는 그 모습을 나중에 보니까 닮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며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독한 시어머니 밑에서 훈련받았을 경우, 자기 며느리에게는 나중에 잘할 것 같은데 오히려 그렇지 못하고 자기가 구박받은 것보다 더 구박을 합니다.
자녀가 부모의 실수를 보면서 왜 미워하는가? 왜 욕하면서도 닮아 가는가? 자기 안에 그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안 좋은 모습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안에 있는 모습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안에 있는 나쁜 모습이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보고 ‘나도 저렇구나’ 하고 깨달으며 바뀌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자기가 결단하며 나아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남의 탓을 할 수 없습니다. 부모 탓을 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가 결정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자녀 앞에서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나옵니다. 그가 바로 노아입니다. 우리가 의인으로 알고 있는 노아인데, 그가 자녀들 앞에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것도 보통 실수가 아니라 엄청난 실수였습니다.
1. 홍수 후에도 계속되는 죄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18-19절)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그 아들들의 이름은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이들의 이름이 여기 다시 등장하는 것은, 이제 이들을 통해 인류가 다시 뻗어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창조의 시작을 이들을 통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특이한 것은 함을 가리킬 때 자꾸 “가나안의 아버지”라고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세 아들 중 함이 가장 불행하게 되고, 특히 가나안이 저주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노아와 가족들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게 됩니다. 다시 인류가 번성하고 다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노아는 무엇을 합니까?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0-21절)
한국어에는 노아가 그냥 농사를 시작했다고 나오는데, 원어나 영어 성경을 보면 노아는 ‘땅의 사람’ 또는 ‘땅을 경작하는 사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농사를 시작하고 포도나무를 심습니다. 그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포도 열매를 거두었을 때 포도주를 만들어 마셨습니다. 거기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시고 취한 것이 문제의 시작이 됩니다.
이런 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성도들이 반응하는 것을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이런 포도주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는 것을 볼 때 입맛을 추르릅 하고 다시면서 침을 흘리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괜히 찔리는지 고개를 푹 숙이는 분도 있고, 또 어떤 분은 절대 반대하기도 합니다.
포도주를 마신 것보다 취하는 것이 문제인데, 본문에서는 취했다는 것도 사실 큰 문제가 안 됩니다. 하지만 그가 취해서 벌거벗었다는 것이 문제를 크게 일으키는 발단이 됩니다. 노아는 주사가 옷을 벗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장막에서 옷을 벗은 것은 큰 사건입니다. 처음에는 ‘포도주 한 잔쯤이야...’ 하며 마신 것이 자신을 취하게 할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를 취하게 하고 옷을 벗게 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노아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노아는 의인이고 당대에 완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즉 늘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서 노아와 그 가족들을 통해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특별히 선택하신 의인입니다. 놀라운 사람,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600세 되던 때까지 아주 깨끗하게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랬던 노아가, 그렇게 의인이라고 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던 노아가, 거기에 걸맞지 않게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대낮에 옷을 벗고 누웠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여기에 자세히 나오지는 않는데,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이 굉장히 큰 사건입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2절)
여기서도 함을 가리킬 때 또 “가나안의 아버지”라고 하며 그것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함도 문제이지만,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정말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특히 창세기가 쓰이고 읽힌 첫 번째 독자들에게 ‘가나안’이라는 것은 아주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나안은 정말 하나님을 반역하는 민족이고 저주받은 민족이라는 것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노아의 벗은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셈과 야벳에게 알렸습니다. 여기서 가장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나중에 노아가 이것 때문에 저주를 하는데 함이 아니라 그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합니다. 분명히 가나안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게 뭔지는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확대 해석을 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겠습니다.
여기서 하체를 보았다는 것은 그 당시 성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아들이고 남자인데 성적인 의미가 있는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벌써 홍수로 하나님이 심판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적인 것이 아직도 남아 있었고 심지어 가족간에 그랬다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큰일인데 그 옛날에, 홍수 심판 후에도 죄가 사라지지 않고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홍수로 심판당한 사람들이 하던 죄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무너진 의인
그 다음에 셈과 야벳은 무엇을 합니까?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3절)
제가 어릴 때 성경을 읽다가 이 부분을 읽고, 목욕탕에 갈 때마다 제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모릅니다. 괜히 봤다가 저주를 받았으니까, 저도 보지 않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거기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그 다음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여기서 노아가 한 일이 첫 사람인 아담이 한 것과 패턴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타락의 과정의 패턴이 똑같다는 것을 봅니다.
처음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따먹었습니다. 노아는 홍수 후에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로 포도주를 만들어 마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열매를 따먹고 두려워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해서 입었습니다. 노아의 모습은 그와 반대로 나타났는데,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고 취하여 옷을 벗고 누웠습니다.
그 후에 아담과 하와의 아들들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저주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노아도 아들들이 분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세 아들들 중 한 아들의 가문이 저주를 받습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다시 시작을 하자마자 노아도 아담이 했던 것과 똑같은 죄악으로 빠져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이 홍수로 심판하셨는데, 그때 의롭다는 노아를 뽑아서 다시 시작을 하셨지만 노아도 자기 조상이 걸었던 그 길을 똑같이 가고 타락의 과정을 밟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저 사람은 착하고, 의인이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라고 해도 어느 순간 갑자기 이런 게 나옵니다. 왜 나옵니까? 그 안에 있기 때문에 나옵니다. 없는 게 나오는 게 아니라 있으니까 그런 게 나오는 겁니다. 노아도 그 당시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애쓰는 것을 보시고 그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를 통해 다시 시작하신 것이지, 그가 죄인이 아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첫째, 아무리 의롭고, 아무리 은혜를 입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엄청 은혜 받고, 다 뒤집어지고, 다 바뀌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고, 성자처럼 살고, 다른 사람들이 다 존경하고 인정하는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역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롬 3:10-11, 새)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의인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고 해주셨습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지성적으로, 인격적으로 훌륭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든든하고 아무리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도, 언제든지 죄에 빠질 수 있는 게 인간입니다. 사람들이 영웅이나 성자로 취급하고, 박수를 보내고, 정말 존경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완벽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룩하고 존경받고 귀하게 살아온 사람이 어느 순간 처참하게 죄인의 모습으로 무너지고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성경만 교훈으로 남겨주는 게 아닙니다.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십시오. 정치인 중에도, 목회자 중에도, 학자 중에도, 존경받고 잘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한 모습으로 변질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원래도 그런 것이 있었는데 가려져 있던 것뿐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가려져 있었는데, 방심하고 교만하고 자기가 하나님 노릇을 하게 되니까 그런 것들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무너집니다. 그런 게 인간입니다.
여러분, 혹시 그런 생각 들 때 없으십니까?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나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나 정도 되니까 다행이지. 나 정도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지.’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너무 기대를 하지 말아야 됩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빼줄 것 같이 신뢰하고 존경하고 따르던 사람이라도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존경하고 따르던 사람이 무너질 때 너무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착각했던 것뿐입니다. 그렇게 무너지는 모습을 주변에서 보게 되면 불쌍히 여겨주시고 기도해주십시오.
지금 세상에도 무너지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손가락질하고 비난하고 욕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이 다른 게 무엇입니까? ‘나도 저 위치에 있었다면 나도 얼마든지 저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대신 회개’하는 것입니다. 내가 직접 하지 않은 것이라도, 나 역시 저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사람들을 위해서 불쌍히 여기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 유명한 사람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욕하는 것 만큼만이라도 기도했다면 세상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뉴스에서 유명한 사람이 이상하게 되었다는 소식, 어떤 교회가 이상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손가락질하고 욕하기 전에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나도 얼마든지 저렇게 될 수 있다. 얼마나 안타까운가?’ 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윗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얼마나 위대한 사람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위대한 사람인데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그 후에 인생이 굉장히 힘들어집니다. 하지만 그 힘든 가운데에도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이 인간이고 인생이고 현실입니다. 내가 정말 존경하던 스승이 갑자기 타락하고 욕망의 길에 빠질 수 있습니다. 노아와 다윗 같은 사람뿐 아니라 저와 여러분 같은 사람에게도 그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노아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은 겉을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늘 자기를 붙들고 하나님 앞에 늘 나아가는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이때 그것을 잠시 놓쳤습니다. 그래서 이런 죄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혹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으십니까? 우리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화장실에 가서 볼 일을 보면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서 나온 겁니까? 내 안에서 나온 겁니다. 하지만 내 안에 있을 때 냄새가 안 납니다. 그런 더러운 것이 내 안에 있는데도 기관들이 그것들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냄새가 안 납니다. 그런데 나오거나 터지면 냄새가 나는 겁니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더럽고 냄새가 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다 거룩해 보이고 훌륭해 보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 추하고 냄새 나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붙들어 주신 것이 자비이고, 또 이렇게 생명을 주시고 사용해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결국 노아가 이렇게 선택을 받은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가 잘나서 된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가 실수할 기회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이 붙들어주셔서 이때까지 왔는데, 잠시 그가 방심한 순간에 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있는 때가 없습니다. ‘왕년에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잘하던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지금 현재로는 그렇게 큰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왕년에 잘한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지금 잘해야 합니다. 어제 잘했다고 오늘 방심하고 있으면 노아처럼 넘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방심할 때가 없습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서’ 다니고 있는데(벧전 5:8), 거기서 방심하고 있으면 그냥 물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끊임없이 주님 앞으로 자기를 데려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두 번째 교훈입니다. 노아가 실수한 것은 방심했기 때문입니다. 방심은 금물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홍수 이후에 얼마나 세상이 조용했겠습니까? 너무 조용하니까 노아가 방심한 겁니다. 이전에 주변에서 사람들이 온갖 죄를 저지르고, 살인과 강도와 강간과 도둑질과 서로 비난하고 비방하고 욕하고 싸우고 하는 그 복잡한 중에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들 밖에 없습니다. 조용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고, 죄 짓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때 교만하고 방심하게 된 겁니다.
우리의 삶이 안전하고 조용하고 잘 풀리고 모든 게 잘 돌아갈 때 교만이 올라옵니다. 삶이 힘들 때 교만해지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깨어 있고 하나님을 붙들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사람이 교만해질 때가 언제인가 하면, 자기가 뭔가를 잘 알 때입니다. ‘이건 내 전공이다. 내 전문이다.’라고 하는 데서 교만해집니다. 그런데 또 거기서 넘어집니다.
직장에서 잘 풀릴 때, 사업이 잘되어 돈도 잘 벌 때, 건강할 때, 모든 걸 내가 하면 다 될 때, 내 뒤를 봐 주는 든든한 사람이 있을 때, 공부하는 사람은 교수님이 나를 잘 봐줄 때, 그렇게 되면 사람이 겸손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목에 힘을 주고 우쭐해지면서 교만해집니다.
권력과 돈과 힘이 생기고 유명해지면 이상하게 사람은 겸손해지지 못하고 교만해집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힘이 생기고 돈이 생기고 유명해져 보십시오.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리고 막 떠받들어 줍니다. 그렇게 되니까 우쭐해지면서 그들 위에 군림하며 지배하려고 듭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때 방심하고 교만하게 되는 겁니다.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는데, 하체가 다 노출되어서 자식들이 보고 수치를 당할 때까지 방심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일이 잘 되고 평안할 때 더 조심해야 합니다. 평안할 때가 사실은 더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힘들 때에도 기도해야 하지만, 평안하고 일이 다 잘되고 있을 때 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언제 교만하고 방심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3. 함의 진짜 문제
22절에서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본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하체를 보았다는 것의 의미가 확실치 않기 때문에 그것을 더 확대하기보다는, 그 뒤가 더 문제라는 것을 봐야 합니다. 그가 무엇을 했습니까?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함의 진짜 문제는 아버지의 하체를 본 것이 아닙니다. 봤으면 덮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을 더 드러내고 광고를 했습니다. 나가서 형제들에게 알리고 떠든 것이 그의 진짜 문제입니다.
이렇게 아버지가 실수한 현장을 지나가다 우연히 볼 수도 있는 것이고, 의도적으로 봤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여기서는 의도적으로 천천히 뜯어보았다고 하는 것이 히브리어 원어로 볼 때 더 맞습니다. 아버지의 하체를 자세하게 의도적으로 이상한 마음을 품고 보았다는 것이 타당한 해석입니다. 그런데 그 후가 더 문제라는 겁니다. 그 후에 나가서 고발을 했습니다. 떠들었습니다.
<경건의 삶>에서 배우는 것 좋은 것들 중 제 마음에 남는 말이 있는데, 우리가 늘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고 늘 하나님 앞에서 자기 마음을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고백의 훈련’ 때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늘 고백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에게 고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지 않으면, 사람에게 나가서 떠들게 됩니다. 그것이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큰 교훈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아십니까? 나가서 이런 것을 떠들 때 결코 나쁘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아주 나쁘게 막 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도와주는 척하며 포장해서 욕을 합니다. 걱정해주는 척하면서 마음에 막 불을 지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게 함이었고, 그게 우리 인간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살다보면 그런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 뭔가를 알았습니다. 그러면 입이 근질근질해지면서 이것을 어디 가서 말하고 싶어집니다. 그리하여 가서 말을 하는데, 정확히 말하지도 않습니다. 거기에 내 것을 보태고, 있던 것은 빼고, 해석을 하고 확대하고 증폭해서 알리는 겁니다. 굉장히 걱정해주는 척하면서 말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욕을 하는 것입니다.
함도 진짜 아버지를 걱정했으면 보았을 때 덮어주고 나왔을 겁니다. 그러나 함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 없는 겁니다. ‘아버지가 저렇게 형편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그 전에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뭔가 큰 상처를 받은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야단을 쳤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사람이고 거룩하게 살려는 사람인데, 그 거룩한 사람이 무너졌으니 사실 얼마나 마음에 통쾌하고 쌤통이라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가서 떠드는 겁니다. ‘아버지가 저럴 수 있느냐? 그렇게 거룩한 척하더니 이게 뭐냐? 아버지가 한 일 좀 봐라. 수치스러운 일을 했다. 우리 아버지는 의인이 아니다.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떠든 겁니다. 사실 이런 일이 우리 삶에도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한국의 학교 폭력이 더 심해졌다고 합니다. 돈을 뜯어 오라고 시키는 우두머리를 ‘짱’이라고 하는데, 그 ‘짱’이라는 아이들 대부분이 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아이들이라는 겁니다. 늘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고 매 맞는 대로 나가서 친구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겁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대로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직접 경험한 대로 하기 때문에, 남에게 그대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가 그대로 자녀에게 전달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불행이 계속됩니다.
함은 그런 상처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반대로 나갔습니다. 다르게 했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고 오히려 가서 덮어드렸습니다. 수치를 가려드리고,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을 합니다.
심지어 셈과 야벳은 함을 야단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조용하게 가서 아버지를 덮어드리고 나갔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조금 잘한 것 같으면 굉장히 남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남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고 충고하려 합니다. 나는 의롭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하는데, 셈과 야벳은 함에게 ‘너는 형편없고 우리는 의롭다.’라고 하지 않고 그냥 아버지가 보인 수치를 덮어드렸습니다. 함에게도 뭐라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이 셈과 야벳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마음에 품고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방송되면 얼마나 수치스러운 게 많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덮어주십니다. 우리가 괜찮아서 덮어주시는 게 아닙니다. 덮어주시고 빨리 우리가 회개하여 정결하게 되라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여러분 중에 부모님이 돌아가선 분도 계시고 살아 계신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돌아가셨든 살아 계시든 상관없이, 우리가 부모님을 용서해드려야 합니다. 부모님도 연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여러분, 함처럼 하시겠습니까, 셈과 야벳처럼 하시겠습니까? 함처럼 해서 저주의 길을 가시겠습니까, 셈과 야벳처럼 축복의 길을 가시겠습니까?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4-27절)
여기 보면 순위가 정해져 있습니다. 셈이 가장 앞에 오고,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되니까 그 다음이며, 제일 밑이 함입니다. 특히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더라도 마음에 기도하면서 ‘하나님, 제가 부모님을 용서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셈과 야벳처럼 부모님의 허물과 실수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덮어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살아 계시다면 나에게 상처를 주신 것들에 대해 두고 보자고 할 게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구하고 내 마음을 열어주시기를 구하며 직접 용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뭔가 있습니까? 허물을 덮어주며 용서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용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죄 자체가 얼마나 수치입니까? 자녀가 죄를 짓고 실수하는 것처럼, 부모도 죄를 짓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는 부모가 그렇게 되는 것을 보는 게 상당히 힘듭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데, 내가 연약한 것처럼 부모님도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이해해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덮어주면 복이 오지만, 덮어주지 않고 드러내며 고발하면 저주가 온다는 것을 여기서 예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노아가 술이 깨어서 보니까 사건을 알고는 함이 괘씸해서 저주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4. 끝을 잘 맺는 인생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28-29절)
노아가 총 950년을 살았는데 첫 600년은 대부분 방주를 준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1년 여 방주 안에 있다가 나와서 350년을 살았는데, 보시면 아주 짧게 끝내고 있습니다. 350년을 그냥 끝냅니다. 이 350년 동안 기억할 만한 일은 포도주 먹고 취해서 다 벌거벗고 누워 수치를 당했다는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350년이라는 기간 동안 기억할 만한 사건은 그것 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입니까? 처음에는 의인이고 당대에 완전한 자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이고 좋았는데, 끝은 그냥 포도주 마시고 취해서 벌거벗고 수치를 당하여 이런 저주와 축복을 이야기하고 끝! 그것이 그의 인생이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깁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은혜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인생입니다. 앞으로 몇 년 남았겠습니까?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알 수 없습니다. 요즘 100세 시대라고 해서 아주 깁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노아처럼 실수하고 그걸로 끝인 인생이 될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인생이 될 것인가?
결국 노아를 보며 우리 자신을 봅니다. 노아처럼 그냥 끝나면 안 되겠습니다. 끝을 잘 맺는 인생이 되어야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매일매일 하나님께 더 기도하고 더 붙들고 더 나아감으로써, 끝까지 아름다운 우리 모두의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