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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9일 주일예배

추수감사절 메시지

환난 날에 부르는 감사의 노래

(하박국 316~19)

 

[들어가는 말]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절이 찾아왔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절기에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감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이 시간 잠시 올해 자신의 삶을 한 번 돌아보며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해주신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드리도록 추수한 열매는 무엇인가?’

 

우리가 이렇게 추수감사주일에 따로 기억하며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가 매주 드리는 예배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하나님이 내게 해주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또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생각하는 겁니다. 열심히 일주일 동안 각자 가정과 생업에서 살고, 함께 모여 다른 지체들과 마음을 모아 하나님을 예배하며, 특히 일주일 동안 내가 살았던 그 삶을 하나님 앞에 드리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헌금으로도 표현하고, 찬양과 기도로 표현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그냥 와서 참석하는 게 예배가 아니라, 내가 일주일 동안 살았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 주에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 이것 하나는 제가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고 가지고 나와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렇게 일주일 단위로 할 뿐 아니라, 이렇게 1년에 한 번 추수감사주일로 모여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들고 나온 게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겁니다.

 

올해 자신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났든지,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일이 잘 풀렸든 어려움을 당했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감사하게 됩니다. 만일 감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너무 당연한 줄로 아는 사람은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부자이거나 유명하거나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안타깝고 실패한 인생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난하거나 약하거나 힘들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주신 하나하나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그러한 삶은 주님 보시기에 성공한 인생입니다.

 

감사에 눈을 뜨면 감사의 조건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의 제목이고 은혜입니다. 따뜻한 가정이 있고, 의지할 부모 형제가 있고, 일할 직장이나 사업체가 있고, 일용할 양식이 있고, 입을 옷이 있고, 계절마다 바뀌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고, 예배드릴 교회가 있고, 사랑을 나눌 성도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입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죄인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영생을 얻고 천국이 나의 것이 되었다느 것이 가장 큰 감사의 조건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나 시험조차도 감사의 눈으로 바라보면 내게 유익한 하나님의 선물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고통 속에 정금 같은 보화를 숨겨 놓으셨고 고통 속에 놀라운 영적 비밀을 숨겨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난의 시간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아주 힘이 듭니다. 그러한 때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너무 당연한데, 왜냐하면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산다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이러한 고통의 시간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 인생길에 늘 주어집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왜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 사람들에게도 고통이 찾아오는지에 대해 성경은 우리에게 확실한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고통의 시간에도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아픔이 닥치고 고난도 닥치며, 어쩌면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사실은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8:28; 고전 2:9).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반드시 시련은 찾아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한다고 해서 어려움이 없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난의 시간은 견디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고통과 흑암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숨겨놓으신 보화를 캐내는 사람들, 하나님이 감추어놓으신 비밀을 찾아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중에 감사의 제목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영적 실력입니다. 뭘 보고 믿음이 좋다고 하겠습니까? 말씀대로 사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인데, 그럼 말씀대로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상황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은 믿음이 성숙한 게 아닙니다. 어렵지만 그 가운데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제목을 찾아내는 것이 영적인 실력이고 믿음이 성숙한 것입니다.

 

 

1. 인생의 어두운 밤

 

고통 가운데 굳건히 하나님만 붙들고 그분이 숨겨 놓으신 보화를 찾은 사람, 영적 비밀을 찾아낸 사람이 하박국입니다. BC 7세기 초반(610년경) 선지자였던 하박국은, 갈수록 어려워지는 나라의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나라가 무너져 내리는 상황에 살고 있었습니다. 피를 토하듯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사람들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살며 전쟁의 위험과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는데, 그러한 앗수르와 또 애굽(이집트)을 누르고 당시 강대국으로 부상한 바벨론이 주변 나라들을 공격해서 영토를 계속 확장해 나가던 상황이었습니다. 다음 차례는 유다가 될 것이라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온 나라가 초상집이 되었습니다. 사납고 빠르기로 유명한 바벨론의 기병대가 자신들을 공격하러 온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망했구나.’ 하고 생각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정말 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창자가 뒤틀리듯 무서움을 느낍니다. 입술은 떨리고 뼈가 썩는 듯한 아픔을 느낍니다. 그런 상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6)

 

얼마나 충격적인 상황이었으면 환난의 소문을 듣고 그는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심히 떨렸다고 표현하겠습니까? 이 모습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심각한 병이 있는 상태입니다. 속이 뒤틀리고 배가 엄청나게 아프며 입술이 덜덜 떨리는 상황입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에서, 하박국은 탄식을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7)

 

이 짧은 한 절 속에 없다는 말이 6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주 암담하고 절망적입니다. 지금 이것은 어떤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망했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먹을 음식이 없고 마실 물도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집이 완전히 망한 겁니다. 채권자들이 와서 집안에 있는 모든 물건에 빨간 딱지를 붙이고 전부 다 경매에 붙이게 되는 상황과 같습니다. 완전히 망했습니다.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다 빼앗깁니다. 자녀는 학교에서 퇴학당합니다. 돈도 없어서 꼭 필요한 음식이나 물을 살 수도 없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합니다. 도무지 어떻게 될지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것이 하박국이 처한 상태(사실은 더한 상태)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과연 언제 죽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상황입니다. 소망이 전혀 없는,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으십니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도저히 앞길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입니까? 아무리 열심히 해도 되는 것이 없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상태입니까? 그렇게 되면 일단 슬프고, 분하고, 답답하고, 그러면서 자꾸 남들이 원망이 되며, 하나님까지도 야속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나를 내버려 두시나? 왜 나를 안 돌아보시나?’ 그러면서 포기하고 싶은 충동까지 듭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막막함 속에서 자살을 선택합니다.


부부간에도 관계가 정말 나빠져서 돌이키기 힘든 상태에까지 이르렀을 때, 얼마나 많은 부부들이 이혼을 생각합니까? 신앙 때문에, 자녀 때문에,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지만, 확 전부 다 관둬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혹시 지금 그러한 마음 상태에 있으십니까? 다 포기해버리고 싶은 마음, 그냥 다 두고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이십니까? ‘나는 더 이상 할 수 없어. 이것은 불가능해.’ 이런 생각을 하십니까? 개인적인 것뿐 아니라,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목회에서 오는 갈등과 어려움으로 괴로워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분들이 목회를 그만둡니다.


우리 교회가 영어권 교역자로 작년 이맘때 Steve Hong 전도사님과 연결되어서 오기로 확정된 때였습니다. 요즘 2세 영어권 목회자들이 굉장히 귀합니다. 사실 우리 교회가 여러 가지 형편으로 볼 때 full-time 영어권 교역자를 모시기가 정말 어려운 상황인데, 재정이 되더라도 오려고 하는 사람이 사실 없습니다. 찾는 교회는 너무 많고 영어권 교역자는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모셨다는 것은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제가 공부할 때에 비하면 영어권 교역자들이 요즘 더 줄어들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각자 소명을 받아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합니다. 그러면서 신학대학원 시절에 대개 근처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을 하게 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한인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문화적인 갈등도 겪게 되고, 20대 후반이나 30대인데도 아이 취급을 당하고, 결정적으로 어른들이 서로 싸우고 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과정을 겪으며 목회에 대한 회의가 들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목회를 하기로 한 생각을 접고 다른 길로, 원래 자기 전공 분야로 나가게 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목회를 그만 두지는 않더라도, 한인 교회로는 절대 가지 않습니다. 대신 미국 교회나 영어권 독립 교회로 갑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의 아들이었던 전도사님이 있습니다(지금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목회하실 때 그 교회가 엄청난 분란을 겪었습니다. 제가 잘 압니다. 그런데 나중에 목회의 길로 들어선 것을 보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전도사였을 때 제가 만났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이룬 아름다운 공동체로서 좋은 일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나쁘고 악한 사람들이 모여서 싸우고 다투는 곳이었다.” 그분은 대학생 때 그런 일을 겪고 교회를 떠나 한 동안 방황을 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치유를 받고 하나님의 부르심까지 받아 돌아와서 신학교에 가고 이제 목사도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목회자만 그렇겠습니까?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인해 교회를 떠나고, 심지어 신앙까지 포기해버리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 눈앞에서 엄청난 폭력적 사태까지 벌어지는 것을 보면 누구인들 거기에 환멸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 있더라도, 아무리 큰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아무리 괴로운 갈등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우리에게는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놀랍게도 극심한 상황, 다 포기할 만한 상황 속에서 하박국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도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8)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인생의 캄캄한 밤에도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절망의 시간에 노래가 나올 수 있습니까? 어떻게 실패의 자리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까? 갈수록 사업은 안 되고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인데, 몸이 여기저기 아픈데, 엄청난 병이 발견되었는데, 하는 일 중에 되는 일이 없는데, 직장에서 해고되게 되었는데, 어떻게 입만 열면 무조건 감사가 나옵니까? 잘 보십시오. “여호와로 말미암아...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금 상황은 다 무너져 내리지만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쉽게 그냥 나온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노래할 수 있었던 이유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2.   인생의 고통 중에 부르는 노래

 

그 이유를 찾으려면 1장부터 찾아보아야 합니다. 하박국 1장에 보면 그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사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원망의 기도였고, 항변의 기도였습니다. 조국이 처한 현실을 볼 때 눈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래서 부르짖으며 절규합니다. 괴로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이런 식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이게 말이나 됩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못을 했다고 해도 하나님을 모르는 저 이방인들보다는 더 낫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와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밟고 허물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 죽일 수가 있습니까?”


하박국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따지고 있습니다. 불평을 쏟아놓습니다. 그냥 보면 이것이 얼마나 불경한 일입니까? 감히 하나님 앞에 불평을 하다니! 그런데 이렇게 따지고 항변하는 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런 기도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런 기도를 안 하고 그냥 뛰쳐나가 알아서 삽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와서 이런 기도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역사를 통치하신다.’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와서 따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임을 확실하게 믿기 때문에, 그분이 통치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그는 지금 하나님께 여쭤보면서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대답 좀 해보세요. 하나님, 살아계시는데, 통치하시는데,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제게 이야기 좀 해주십시오.” 이것이 하박국의 항변의 기도였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이해가 안 가는 일이 막 벌어지고, 도대체 말이 안 되고, 너무 답답하고, 괴롭고, ‘어떻게 하나님이 내게 이러실 수 있는가?’라고 할 때에, 포기하면서 나는 이제 하나님을 안 믿겠다.’ 하며 나가서 알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때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입니다. 나가서 따지십시오. ‘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하박국을 읽으십시오. 굉장히 공감이 갈 것입니다.

 

하박국은 씩씩거리고 숨을 몰아쉬면서 이 모든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게 대답 좀 해주십시오.’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렸다고 믿었고, 항변할 만큼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심정을 아시고 이미 말씀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먹구름처럼 덮여 있던 모든 의문을 단번에 밀어내는 강한 바람처럼 위력을 발휘합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2:4)

 

하박국아, 세상 사람들은 재산이 늘어나고, 은행 구좌에 돈이 쌓이고, 부동산이 늘어나고, 큰 집 사고, 비싼 새 차 타고,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 잡고, 세상 일이 잘되는 재미로 산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나를 신뢰하는 재미로 산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항변하듯 아픔을 토해놓는 하박국을 향해 하나님은 이미 말씀을 준비해놓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박국의 마음은 마치 극심한 갈증 끝에 아주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신 것처럼 시원해졌습니다. 하나님이 결국 악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그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에게 엄청난 어두움과 아픔으로 다가오는 이런 고통의 밤도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득세하며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악한 사람들에게 무시무시한 심판주로 오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미리 보면서 그는 전율했습니다.

 

비록 자기는 힘이 없지만 이제 그 하나님이 자기에게는 능력이고 구원이고 힘이 되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이 어쩌면 이렇게도 생생할 수 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 고통과 아픔의 현장, 아무것도 없는 절망의 자리에, 하나님이 우뚝 서 계시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현실은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3.   하나님께서 이전에 해주신 일들을 회상하고 기억하라

 

3장으로 넘어오면 하박국은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 (셀라)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3)

 

데만과 바란산이 어디인가 하면 시내산을 말합니다. 시내산이 어떤 곳입니까? 모세가 이끌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을 때, 모래 바람이 강하게 부는 사막 길을 얼마나 더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방황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와주셨던 곳이 시내산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고 하시며 광야에서 방황하고 불안해하는 그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계명을 주시고 약속을 주신 곳이 시내산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내 자녀들이다. 내가 너희를 돌본다. 내가 다스린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에 자기 조상들의 삶 속에 역사하셨던 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오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하박국에게도 동일한 감격과 은혜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박국은 지난날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 속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어렵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많은 분들이 예배를 생각할 때 이렇게 주일날 교회당에 와서 한 시간쯤 꾹 참아주고 가는 것을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그냥 왔다 가는 게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과거를 회상하고 기억할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집트를 나온 출애굽 사건을 회상하며 살도록 절기를 주셨습니다. 유월절을 비롯해서 초막절, 오순절과 같은 절기들은 다 과거 사건을 회상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회상하고 기억하기 위해 주일마다 모여 예배를 드릴 뿐 아니라 성만찬을 행했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는데, ‘기념이라는 말은 원래 헬라어를 보면 단순히 머리로 기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과거의 사건을 끌어와서 오늘 여기에서 그것을 다시 체험하고 맛보고 경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머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십자가의 사랑을 바로 지금 여기로 끌어당겨, 여기에서 그것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만찬이고 그것이 예배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며 기억하는 능력을 가질 때 주어지는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앞을 바라보는 비전의 능력입니다. 비전은 앞만 봐서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역사를 기억할 때 생깁니다. 과거에 우리를 인도하시고 도와주신 하나님을 오늘 여기에서 만나고, 그분의 신비의 자리에 서서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과거에도 인도해주셨던 하나님께서 장래에도 인도해주실 것이 확실하다는 비전의 능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난날들을 돌아보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새로운 삶> 공부에서 숙제를 쓸 때 자꾸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일들도 생각해서 쓰라고 합니다. 이전에 자라면서 상처받은 일도 있고, 여러 일들을 통해 받은 상처들도 있을 텐데, 그런 것들을 숨겨놓거나 덮어 놓지 말고 드러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드러내야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덮어놔서는 해결이 안 됩니다. 깨끗이 치워야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안 치우고 그냥 덮어 놓으니까 그것을 완전히 꺼내서 치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사실 올해도 많이 힘드셨지요? 몸과 마음이 아플 때도 많았습니다. 답답하고, 밉고, 불편하고, 껄끄럽고, 원망이 되고...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래도 다 견질 만하셨지요?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감격스런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놀라운 은혜가 있었고,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로 이때까지 살아온 겁니다. 참 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잘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부 감사할 것들뿐입니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날들도 물론 많았지만, 인생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날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은혜’, 즉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당연히 못 받을 것인데 받은 선물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다윗과 같은 시편 23편의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지금 어려우십니까? 지금 굉장히 답답한 상황이십니까? 그렇다면 오늘의 답답한 현실에만 파묻혀서 그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과거에는 어려움이 없었습니까? 당연히 있었습니다. 어쩌면 더 큰 어려움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답답한 일도 있었고, 고통스러워서 밤잠을 이루지 못할 고민들도 많지 않았습니까? 서럽고 외롭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아무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서 서럽고 외로웠습니다.

 

처음 미국에 와서 서럽고 외롭지 않았습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해주셨습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 올 때 생각해보면, LA 공항에 도착을 했는데 공항 직원이 뭐라고 물었습니다. 스무 살 때였는데 대충은 알아듣겠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대충 “I don’t know. I don’t know.”라고 하니까 그냥 저리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영어예배를 몇 년을 인도했습니까? 이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하나님이 여기까지 인도해주셨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시고 통치하시며 다스려주셨습니다. 어려운 수렁에 빠진 적도 있었고, 늪을 헤매는 것과 같은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마다 우리를 인도해주셨습니다.

 

사람이 언제 잘못됩니까? 우리 믿음의 사람도 순간적으로 잘못될 수가 있는데, 그때가 언제인가 하면 바로 과거를 회상하고 기억하는 능력을 상실할 때입니다. 그때 잘못됩니다. 이전에 있었던 일을 잊어버릴 때 잘못됩니다.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말이 그래서 그런 겁니다. 과거에 베풀어주신 은혜와 인도하심을 잊을 때 잘못된 길로 갑니다. 우리 삶에 어려움은 언제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다 되겠지.’라고 하지만, 아닙니다. 또 있습니다.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박국이 얼마나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까? 아무리 돌아보아도 감사할 수가 없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지나온 시간들 속에서 생생하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고, 오늘도 자신의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통치하심 아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정말 어두운 밤에도, 고통의 밤에도, 환난 날에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4.   하나님은 항상 옳으시다

 

하박국이 지난날들을 돌아보다가 깨달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늘 옳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하나님이 왜 이렇게 모르시는가 하며 하나님보다 더 똑똑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덜 행복한 것을 더 행복한 것처럼 봅니다. 덜 좋은 것인데 더 좋은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정말 우리에게 가장 행복하고 가장 좋은 것을 정확히 보십니다. 그래서 지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때에 우리에게 그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당장 주어지기를 원합니다. 너무나 참지 못합니다. 하지만 한낮의 더위가 땀 흘리게 하고 답답하게 하더라도, 그때 곡식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심자마자 따는 게 아닙니다. 아기도 갖자마자 바로 태어나는 게 아닙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겨울의 추위가 온몸을 얼어붙게 해도 그때가 땅 속의 온갖 벌레들이 다 죽는 때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답답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었지만, 성경에 나오는 욥도 그렇고 하박국도 그렇고 아브라함도 그렇고 여러 다른 믿음의 사람들도 그렇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보였겠습니까? 우리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이 계산 저 계산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만 머리 굴릴 줄 알겠습니까? 그들도 많이 머리를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가 결론은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다!’

 

그것이 환난 날에도 노래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일 때문에감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일 때문에 감사하는 게 아니라, 악한 일 가운데 있더라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박국이 깨달았을 때 지금 처한 현실이 비록 안 좋아 보여도 자신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하고, 도우심을 확신한 것입니다. 지금 그의 삶의 조건과 상황은 우리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도저히 감사할 수 없고 기뻐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기뻐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조건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고백을 합니다.

 

예배가 언제 시작됩니까?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누가 나를 이날까지 살게 하셨고 이때까지 인도해주셨는가를 알고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내가 잘나서 내 능력으로 이때까지 살았지라고 하는 사람은 예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겸손하게 돌아볼 때, ‘물론 나 자신도 최선을 다했지만, 순간순간 하나님이 해주시지 않으면 될 수가 없는 것인데 하나님이 해주셨구나.’라고 인정할 때 거기서 예배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어떤 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아는 마음이다. 주인이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자기가 주인이며 자기가 알아서 다 했다고 하는 사람은 감사할 수 없고 예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해주셨음을 아는 사람은 감사할 수 있고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보통 가진 것이 많아지고 배부르고 넉넉해지면 더 이상 감사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 속에서도 예배를 드렸고 늘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옛날에도 역사하셨고 바로 오늘도 일하고 계십니다. 내가 평안할 때도, 고난을 당할 때도, 형통할 때도, 실패할 때도, 하나님은 정확하게 인도하시며 역사하고 계십니다. 내 눈에 안 보여서 그렇지, 나 잘되라고 하나님은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하박국이 발견하게 되고 새롭게 고백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인생의 한밤중에도, 고난의 밤에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고난의 순간에도 노래하며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혹시 지금 평안함 가운데 있으십니까? 행복하고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럴 때 넉넉함에 취하고 배부름에 취해서 오히려 감사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다면 불행한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인생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고통의 한밤중에 계십니까? 하나님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옛날에 해주신 일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를 열심히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때도 노래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는 주 안에서 즐거워하겠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겠다!”라고 외칠 수 있게 됩니다.



[나가는 말]


제가 오래 전에 부목사로 섬기던 교회에 굉장히 큰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저도 중간에 끼어서 아주 괴로운 상태였습니다. 그때 우연찮게(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새들백 교회(Saddleback Church)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직접 가서 듣는 세미나가 아니라 각자 있는 위치에서 위성중계로 해주는 세미나였습니다. 그 일일 세미나에 진작 등록은 했지만 당시 상황 때문에 참석할까 말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참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정말 저를 위해서 한 노래를 가르쳐주셨다고 간증할 수 있습니다. 새들백 교회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목사님이 한 노래를 가르쳐주고 불렀습니다. 그 제목이 “Don't Give Up”이라는 곡이었습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Don't give up (Keep the faith); someone really loves you

     Don't give up; someone really cares

     Don't give up; someone really loves you

     And that 'someone' is the Lord


     포기하지 마세요(믿음을 지키세요), 누군가가 당신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누군가가 당신을 정말로 돌보고 있습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누군가가 당신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는 주님이십니다.


그때 그 노래의 가사를 통해 성령께서 제 마음을 만지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정말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우리가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포기하지 마세요, 주님이 계십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돌봐주십니다. 내가 혼자라고 느낄 때,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느낄 때에조차 주님은 나와 함께 해주십니다. ‘나는 더 이상 할 수가 없어.’라고 할 때에도 주님은 바로 거기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지키십시오.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며 보살펴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 때문에 환난 날에도 감사의 노래를 드리고, 그 하나님을 향해 가슴 벅찬 예배를 올려드리는 예배자들이 되도록 우리를 지금 부르고 계십니다. 젊은 날에도, 노년에도, 우리는 바로 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우리는 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예배하며 이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말씀을 살펴보았지만, ‘그래도 감사할 것보다 불평할 것이 더 많다라고 느끼십니까?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19)

 

결국 하나님께 답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도 나누었던 시가 있는데, 그 시의 제목은 <항상 감사하기>입니다. 들으면서 잘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10대 자녀가 반항을 하면,

     그건 내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내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파티를 하고 나서 치울 게 너무 많다면,

     그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고,

 

     옷이 몸에 좀 낀다면,

     그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고,

 

     주차장 맨 끝 먼 데 자리가 겨우 하나 있다면,

     그건 내가 걸을 수 있고 차도 있다는 것이고,

 

     난방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면,

     그건 내가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고,

 

     교회에서 뒷자리 아줌마의 엉터리 성가가 영 거슬린다면,

     그건 내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이고,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고,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이메일이 너무 많이 쏟아진다면,

     그건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지요.

 

     마음속에 나도 모르게 일궈진 불평, 불만들,

     바꾸어 생각해보면 또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 Don't Give Up >

https://youtu.be/XH-AX944hj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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