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2017년 11월 5일 주일예배
✦ 21세기를 위한 고대사회의 교훈 8 ✦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던 날”
(창세기 8장 13~22절)
[들어가는 말]
의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환자가 누구인가 하면, 병이 아주 심한 환자가 아니라 ‘내 병은 내가 안다’고 하는 환자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어느 교회에 다니던 교우가 간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이분은 병세가 심해지는 경우가 자주 발생해서 그때마다 응급실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우의 병은 완전히 나을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조금 나아진 듯 하다가도 병세가 악화되면 다시 입원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한 번은 그분이 병원에 입원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건강이 상당히 좋아졌으니까 퇴원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환자와 가족들은 퇴원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퇴원해도 언제 또 건강이 나빠져서 병원으로 다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장기적으로 계속 입원해 있기를 원했습니다. 일단 병원 안에 있으면 갑자기 몸에 이상이 생겨도 금방 응급 처치를 받을 수 있고, 약도 있고,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도움도 즉시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 퇴원하고 나면 다시 입원하려고 할 때 병실을 잡기가 아주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건강이 좋아졌는데도 퇴원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더 이상 치료를 할 게 없으니 퇴원하라고 하는 병원 측과 실랑이를 벌였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홍수가 다 끝났는데도 노아가 배에서 나오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말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그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음을 봅니다. 홍수가 끝나고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 가장 먼저 한 일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던 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방주에서 나오라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둘째 달 스무 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13-14절)
노아 나이를 기준으로 601년 1월 1일에 땅에서 물이 다 빠졌습니다. 노아는 그때 방주 뚜껑을 열고 바깥의 상황을 살펴보니까 물이 다 빠진 것을 보았지만 놀랍게도 방주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는 또 기다립니다. 그리고 601년 2월 27일, 즉 57일이 더 지나서 보니까 이제는 땅이 다 말랐습니다.
히브리어 원어로 13절의 ‘물이 걷혔다’는 단어와 14절의 ‘말랐다’는 단어는 다른 단어입니다. ‘물이 걷혔다’는 것은 아직 물기로 적셔 있는 땅이었다는 것이고, ‘말랐다’는 것은 물기가 없이 땅이 정말 말랐다는 뜻입니다. 이제 물이 정말 다 말랐을 때 노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런 엄청난 홍수의 재앙에서 방주로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과 아주 비슷합니다. 방주에 들어가야 사는 겁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방주 밖에 있으면 죽는 것이고 방주에 들어가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120년 전에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노아는 그것이 정확이 어떤 의미인지, 방주가 왜 지어져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120년 동안 비도 안 오고 해가 쨍쨍한데 무슨 배를 짓느냐는 온갖 조롱과 수모를 견디면서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방주가 다 지어진 후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그 방주 안으로 들어라가고 하셨습니다. 그때도 노아는 순종합니다. 노아는 순종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말씀하시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내가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노아를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생각해봅니다. 노아의 가족들과 짐승들도 들어갔습니다. 다 들어가고 방주의 문을 하나님이 탁 닫으신 순간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와 비슷해 보입니다. 구원을 받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하는 순간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고,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성경의 약속에 의해서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내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구원받기 전과는 다른 삶입니다. 구원받은 그 순간에는 놀라운 감격과 감사와 기쁨이 따르지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다음에는 고통스러운 삶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방주 안의 삶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지만 아직도 옛 사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노아와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 자체가 변한 것이 아닙니다. 죄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구원받고 방주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지만, 우리 안에는 옛 속성과 새 속성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 옛 속성, 즉 옛 사람의 문화와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나쁜 습관과 나쁜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서 살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계속 그렇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데, 구원받기 전과 후가 무엇이 다릅니까?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을 받으며, 단번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그 예수님을 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구주로 믿을 뿐 아니라,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며 산다고 하면서도, 구주로 믿고 천국에 갈 확신과 약속은 받았지만, 계속 내가 내 삶의 주인 노릇을 하다 보니까 옛 속성이 나오면서 삶이 복잡해지는 겁니다. 바로 이런 것이 방주 안에서의 삶입니다. 방주 안에서 구원의 삶을 살지만 구원의 완성은 아직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방주 안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나올 때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이 땅을 떠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까지 견디면서 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방주 안의 노아와 가족들과 짐승들을 기억하시고 방주에서 나오라고 하시는 때가 분명히 옵니다. 노아가 방주 안에 1년 동안 있는데, 하나님도 때를 기다리시고 노아도 때를 기다렸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뭡니까? 신앙생활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기다림’입니다. 조급하게 하면 신앙생활에 실패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뭐든지 한꺼번에 다 이뤄져야 하고 단번에 이뤄져야 한다고 하면 힘들어집니다. 임신하는 것은 금방이지만, 아기를 가지자마자 그 다음 날로 낳는 것이 아닙니다. 9개월 이상 10개월 가까이 기다려야 하고, 때가 되면 나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란 것은 성숙을 위한 일종의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정말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입니다. 또 그때를 바라볼 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바라보면서 기다리며 따라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때를 기다리는 가운데 때로는 힘들어서 슬프기도 하고 낙심도 되지만,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약속을 붙들고 나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가 제일 적당하고 제일 좋은지 너무 잘 아십니다. 나는 내가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은 많은 경우 서두르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 문제가 빨리 해결되면 좋겠는데, 내가 원하는 이것이 빨리 되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시간을 오래 두실 때가 대부분입니다. 왜 그런가? 기다리면서 성숙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너무 서두르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기다리는 것이 뭡니까? 마냥 자거나 쉬면서 기다리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내가 원하는 것을 금방 들어주지 않으실까? 그 시간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나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늘 동행하고 하나님께 붙어 있으면서 이 기간을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때 놀랍게도 내가 성숙해집니다. 그리고 때가 차면 하나님은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15-17절)
방주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도 영원한 게 아니라 일시적입니다. 때가 되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기다림과 성숙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니까 방주는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는 과정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 노아는 절대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노아가 얼마나 밖으로 나가고 싶었겠습니까? 노아의 아내가 ‘이제 우리 나갑시다. 물도 없는데 나갑시다.’ 하고, 아들들과 며느리들도 ‘그래요, 아버님, 나갑시다.’라고 얼마나 그랬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아직 나가라고 하지 않으셨기에 그냥 기다립니다.
이것이 노아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른 신앙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하고 싶지만 하나님이 아직 하라고 안 하셨으니까 기다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행동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하라고 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노아가 이전에 물이 정말 빠졌는지 방주의 뚜껑을 열고 까마귀도 날려보고 비둘기도 날려보며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알아보려 한 것이지 자기가 뭘 결정하고 행동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며 침묵하고 기다리지만, 그 기간 중에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나아가는 것,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고 분별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나 무엇을 하고 무슨 결정을 하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움직이다가 일이 더 꼬이고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복이 우리 삶에 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노아와 가족들과 짐승들에게 때가 되었을 때 방주에서 나오라고 한 것입니까? 17절 뒷부분에 보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생물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그들에게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이 땅에 충만하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복을 노아의 홍수가 끝난 뒤에 다시 노아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드디어 움직일 때가 된 겁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있기 전까지는 노아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미리 생각해서 자기 판단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도 어떤 일이 내 뜻대로 진행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인도해주십니다.
사실 우리가 해봐야 얼마나 하겠습니까? 우리는 불과 1년, 2년 후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아니, 1-2년이 아니라 당장 내일 일도 모르고, 사실은 오늘 오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교통사고를 경험한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내가 하필 그날 그 시간에 사고가 날지 알고 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잠시 후의 일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5년, 10년, 20년 후에 내가 어떻게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복된 삶입니다. 내가 해보겠다고 발버둥 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것을 노아처럼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다가, 움직이라고 하실 때 움직이는 겁니다.
2. 방주에서 나온 뒤 가장 먼저 한 일, 예배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 며느리들과 함께 나왔고,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18-19절)
하나님이 이제는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때 노아가 ‘아니요. 여기가 좋사오니, 방주 안이 익숙해서 여기 계속 살겠습니다.’라고 했으면 곤란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나오라고 하셨으니까 다 같이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방주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체가 다 밖으로 나왔습니다.
만약 안 나가겠다고 거부했다면 결국 하나님의 복을 받지도 못하고 새로운 땅을 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방주 안에 있는 동안 한 명도, 한 마리의 짐승도 병들거나 죽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다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제 방주에서 나올 때 노아의 심정을 헤아려보면 굉장히 염려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기대감도 있지만 두려움이 컸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멸망당했습니다. 그 끔찍한 홍수를 직접 겪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로 나와야 합니다. 그러니 두려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곳은 자기가 상상하던 무슨 환상의 도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 1년 동안 물에 잠겼던 세상이 아름다운 모습일 리도 없습니다. 폐허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두려운 순간입니까? 그래도 결국 나왔습니다. 나와서 무엇을 했습니까?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0절)
노아와 가족들과 짐승들이 나와서 보았을 때 아주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고 황폐하니까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아마도 자기들이 살던 곳을 찾아가보았을 수도 있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 얼마나 괴롭고 허무했겠습니까? 사실 다 변해서 찾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난 이제 뭘 먹고 살아야 하냐?’ 하면서 먹을 것을 찾거나, 자기 집을 찾아가거나, 같이 나온 짐승을 보며 입맛을 다셨거나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노아가 폐허가 된 이 땅에 나와서 한 첫 번째 일은 바로 제사였습니다. 즉,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당시 제사라는 것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제물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찬양과 감사와 모든 것을 드리겠다는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제사입니다. 이 제사는 홍수 이후에 노아가 행한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결국 노아가 이 홍수를 통해 깨달은 것은,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엄청난 문명을 만들고 성공하고 돈이 많고 아무리 해봐야, 이런 식으로 싹 쓸어버리시면 다 끝나고 아무것도 아니며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며,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정말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우리가 복 받는 최대의 비결은 하나님을 늘 내 삶에 모시는 것입니다. 내 삶에 모시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이 안 계신데 모셔온다는 뜻이 아니라, 항상 나와 함께 해주시지만, 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드린다는 마음의 표현이 행동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참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아주십니다. ‘하나님을 내가 주인으로 모십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 내 주인이십니다.’ 하고 표현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여기 여러분이 황금 같은 ‘일요일’ 아침에 교회에 나와 예배에 참석하고 계십니다. 참석했다고 곧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다해 지금 하나님께 예배를 합니다. 그렇다면 이게 뭡니까? ‘지금 내 시간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것을 몸으로, 행동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그저 마음으로만 ‘하나님이 내 주인이시지.’ 하고 아무것도 안 하며 다른 데 가는 게 아니라, 와서 예배하면서 ‘하나님이 정말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우리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우리 모두의 주인이십니다.’라고 인정하며 고백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복 중의 복은 바로 하나님이 이렇게 나의 삶 가운데 오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 거기에는 마귀의 역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을 때 마귀의 역사가 있습니다. 왜 자꾸 삶이 꼬이고 문제가 생깁니까? 예배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실하면 문제가 와도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약해지고 예배가 약해지니까, 조금만 뭐가 와도 흔들리고 넘어지고 무너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더러운 역사가 떠납니다. 하나님과 마귀가 같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거기 어떻게 마귀가 역사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약해지니까 사탄이 와서 톡 찔러봅니다. 그때 ‘네가 뭐냐? 물러가라!’라고 하면 되는데 움찔하고 두려워하니까 ‘이것 봐라?’ 하면서 자꾸 찔러보는 겁니다. 그러나 아예 무너뜨리는 겁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그 시간이 가장 지겨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재미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찬송을 부를 때면 네 명이 전부 노래가 달랐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완전히 다른 음으로 노래를 부르십니다. 그러면 저는 또 다른 음으로 부르고, 제 동생도 또 다른 음으로 부릅니다. 그래서 완벽한 불협화음을 냈습니다. 그런데 더욱 재미가 있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것을 전혀 모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저와 제 동생은 킥킥거리고 웃는데, 부모님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은혜롭게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물론 어린 마음에 가정예배가 좀 지겹기도 했지만, 우리 가정은 항상 하나님 중심이며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의미가 있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가정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어린 제 마음속에 박혔습니다. 아이들은 정말 듣고 배우는 게 아니라 보고 배웁니다. 저는 솔직히 가정예배 때 뭘 했는지, 무슨 성경 말씀을 배웠는지 하나도 내용은 기억이 안 납니다. 비록 불협화음(?)으로 노래는 하셨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하나님을 향한 그 순수한 사랑의 마음이 아직도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듣고 배운 게 아니라 보고 배운 겁니다. 교육은 정말 듣고 배우는 게 아니라 보고 배웁니다. 우리가 가정교회를 하는 것도 보고 배우자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가정에서 아이들이 있을 경우, 매일은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 10분 정도 제단을 쌓아 보십시오. 물론 아이는 지겨워할 겁니다. 제 아이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보고 배우는 겁니다. ‘우리 가정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바쁜 스케줄도 아니고, 어떤 activity도 아니고, 공부도 아니고, 돈 버는 것도 아니고, 우리 가정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교육이 가정예배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일주일에 한 번 와서 예배드리고 ‘나는 주일성수 했다. 끝이다.’라고 하며 거기에 만족하지 마시고, 아이가 있는 분은 영적 책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영적 책임을 부모에게 맡겨주셨습니다. <부모의 삶> 때도 다 이야기했지만, 매주 부모님이 함께 예배하고, 매일 부모님이 항상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아이가 지겨워하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씩 주일 밤에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한 주를 승리하라고 축복기도를 해줄 때, 아이들의 마음에 신앙이 새겨집니다.
부모님이 간절히 하나님을 찾던 그 모습, ‘우리 가정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라고 하는 모습을 아이들이 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을 때 넘어가고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면 아이들이 다 보고 배웁니다. ‘아, 하나님이 제일 중요한 게 아니구나. 다른 게 더 중요한 거구나.’라고 생각합니다.
노아는 이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오자마자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있던 아내와 세 아들들과 며느리들이 보며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물론 이렇게 해도 나중에 실패했지만, 그러나 이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분이시다. 너희도 홍수를 통해 보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제일 중요한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고, 나머지 가족들도 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예배를 드린 겁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로 함께 해주십니다. 복을 주십니다. 사실 항상 복을 주시는데,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그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배를 안 드리는 사람은 그것을 못 봅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그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복을 따라갑니다. 노아가 그렇게 예배를 드렸을 때 하나님이 기뻐 받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21절)
하나님은 노아가 드린 예배를 받고 응답하셨습니다. 어떻게 받으셨는지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것을 노아와 가족들이 분명하게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배드리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무슨 목사, 장로, 집사, 권사, 목자와 같은 타이틀이 아닙니다. 닥터, 변호사, 판사, 의사 같은 것이 아니라,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를 찾으신다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요 4장). 하나님은 오늘도 참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영과 진리로(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무조건 복을 주십니다.
21절에서 노아가 예배할 때 하나님은 향기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받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렸을 때 하나님이 내 예배를 받으셨나, 안 받으셨나, 어떻게 압니까? 이것은 논리가 아닌데, 예배를 제대로 드린 사람은 그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내 예배를 받으셨구나.’ 하고 확실히 압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나가서 예배드린 사람답게 사는 겁니다. 예배드린 사람답게 말을 하고 행동하며 이웃을 섬깁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가장 좋은 것을 갖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남는 시간에 나오는 게 아니라 가장 소중한 시간을 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일요일’(주일) 아침의 황금 같은 시간인데 제일 좋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겁니다. ‘우리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빠서 못 한다.’라고 하면, 사실 그 말이 핑계라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연애하는 사람은 바쁘다고 안 하지 않습니다. 돈을 막 벌어야 하는데 바빠서 돈을 못 벌겠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바빠서 못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핑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께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공부도 중요하고, 학교도 중요하고, 사업도 중요하고, 또 가정에서 할 일이 있는 것도 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어느 것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하는 것도, 학교에서 하는 것도, 직장이나 사업체에서 하는 것도,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해주셔야 되는 것이지, 하나님 없이 내가 거기서 어떻게 성공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영과 진리로(신령과 진정으로) 가정이든 직장이든 사업체이든 길거리이든, 어디서나 그러한 예배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21절 중간에 보면 하나님이 약간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노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이라고는 8명 밖에 안 남았는데, ‘너희는 악하다.’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죄로 인하여 대홍수의 심판이 왔지만, 홍수의 심판도 죄를 없애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없애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안 계십니다. 죄가 있다고 혼을 내고 심판을 하고 감옥에 집어넣는다고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죄 값을 치르는 것 뿐입니다. 자녀도 혼내고 야단친다고 변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해주어야 변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사랑을 느끼며 그 사랑으로 양육할 때 아이도 변하고, 주변 사람도 변하고, 세상도 변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앨 수 있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죄를 없앨 수 없습니다.
제가 이것을 묵상하다가 요즘 하고 있는 <새로운 삶> 공부 내용과 연결이 생각났습니다. <새로운 삶> 13기생들이 숙제를 해 오신 것을 읽어보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우상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잘 깨달으며 쓰셨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전 수요예배 시리즈 “예수신경”이 끝나면서 다음 시리즈를 생각하다가 이것과 연결되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입니다.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마음이 정말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냅니다. 골로새서 3:5에 보면 여러 가지 죄를 언급합니다.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이 나오는데, 유독 탐심(탐욕, greed)을 가리키며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탐심이 뭡니까? 내 유익을 위해서 가지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상숭배라는 겁니다. 그런데 돈을 더 가지겠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돈이든, 성공이든, 명예든, 남에게 잘 보이는 것, 인정받는 것, 심지어 가족과 배우자와 특히 자녀까지도, 내 욕심으로 하는 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욕심으로 하는 것이라면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 나누게 되는 내용인데,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가 100세에 얻은 귀하고도 귀한 외아들 이삭을 잡아서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칩니다. 그때 하나님은 되었다고 하시면서 테스트에 통과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을 모르셨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너무 푹 빠져서 살다 보니까, 그것은 사실 이삭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집착이었던 겁니다. 이삭에게 집착하는 것 때문에 아브라함까지 망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정리하실 필요가 있으셨고, 충격요법을 쓰신 겁니다. ‘네 외아들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바쳐라.’ 당연히 하나님은 사람을 죽여 바치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더욱더 신뢰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그때 그렇게 개입하지 않으셨으면 아브라함은 틀림없이 세상 무엇보다 자기 아들 이삭을 최고로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사랑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가는 자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는 우상을 숭배한 자를 망하게 만들고 우상도 찍어 쪼개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충격적으로 아브라함을 다루셨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비였고 은혜였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선물이 오히려 하나님께 가는 것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그런 게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이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주신 선물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 합니다. 그것이 자녀일 수도 있고, 성공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일 중심에 모시겠다는 마음이 없이 이삭을 사랑하면 그것은 인생 망하는 길입니다. 위험한 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아들을 사랑하는 것, 이 둘 중 하나를 결정하라고 하지 않으셨으면, 자식 사랑이 변질되어 우상숭배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엄청난 방법을 쓰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해야 합니다. 막 다루면 안 됩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길,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사랑보다, 내 자녀의 성공이 더 중요해질 때 우상숭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머리로는 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마음 가장 깊은 곳의 만족은 하나님이 아니고 내 자녀가 잘되는 것에서 오는 것일 수가 있습니다. 자녀를 예로 든 것뿐입니다. 다른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성공시키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아빠, 엄마, 제가 이렇게 잘된 것은 다 아빠 엄마 덕분이에요.’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자녀를 망가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첫 번째 자리에 모시면 자녀가 그것을 보고 따라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더 중요한 것처럼 되면 자녀가 망가집니다. 부모도 당연히 망가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도 나오자마자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홍수로 한 번 다 쓸려가 보니까 아무것도 하나님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뭔가가 중요하다고 해보았자 홍수로 쓸어 버리시면 다 없어지는 것들뿐입니다. 하나님 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만을 붙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이삭이 잘 지혜롭게 자랄 수가 있었고, 진심으로 그를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사랑할 수가 있었습니다. 진짜 사랑은 그때부터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집착이었습니다. 만약 그 사건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은 둘 중 하나거나 둘 다입니다. 하나는, 너무 과도하게 훈육하며 야단치고 훈련시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 아이가 완벽해져야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예 훈육을 안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고생하니까 보기가 안타까워서 그렇습니다.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결정적으로 그 마음에 뭐가 있습니까? 아이가 완벽해져야 한다고 하며 야단치고 훈육하는 것이나, 아이가 괴로워하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놔두며 오냐오냐하는 것이나, 결국은 아이를 위한 게 아닙니다. 내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상숭배라는 겁니다.
성경을 보시면 항상 ‘너를 위해 만든 우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상을 위해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우상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자녀이든, 가족이든, 돈이든, 명예든, 그 무엇이든, 뭘 위해서 지금 이것을 하고 있는지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우리를 속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망치기 때문입니다. 이삭도 아브라함도, 다 망치게 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 대상과 내가 다 망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해결책은 예배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그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게 해주는 것이 예배입니다. 가장 중요한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모든 것의 답입니다.
이런 공 예배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집에서도 개인적으로 큐티하고 기도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계속 시선을 맞추는 겁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아이도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까 하나님이 다 인도해주십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예배인데, 혼자 힘이 좀 부족하니까 같이 모여서 예배드리며 이렇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22절)
노아 홍수 이전에는 이런 것들이 없었는데 홍수가 끝나고 나서 사계절이 생겼습니다. 남극과 북극도 생기고, 지각변동도 생기고, 자연 재앙이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을 때 하와에게 주신 벌은 해산하는 고통과 남자를 사모하는 고통이었는데, 남자에게는 ‘땅은 엉겅퀴를 낼 것이고, 너는 땀을 흘려야 할 것이고, 수고해서 일해야 먹을 것이 있을 것이고,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사실은 더 큰 형벌입니다. 지금 얼마나 자연 재해가 많습니까? 화산, 지진, 해일, 엘니뇨, 라니냐 같은 것들이 원래는 없었는데, 홍수 이후 생긴 겁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 환경 보호를 해야 하지만,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겁니다. 결국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가는 말]
오늘 이 말씀은 전통적으로 모세를 통해 약 BC 1500년경에 쓰였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대로 읽혀지던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오늘 말씀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있으면서 오직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 고대하며 살아가던 유다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아무 소망도 보이지 않는 것 같더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이처럼 새롭게 시작하는 분이시며 새롭게 창조하는 분이시라는 확신을 오늘 본문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이사야 말씀을 보십시오.
“너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다시 불러들이겠다. 분노가 북받쳐서 나의 얼굴을 너에게서 잠시 가렸으나 나의 영원한 사랑으로 너에게 긍휼을 베풀겠다. 너의 속량자인 나 주의 말이다. 노아 때에, 다시는 땅을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내가 약속하였다. 이제, 나는 너에게 노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너를 꾸짖거나 벌하지 않겠다. 비록 산들이 옮겨지고 언덕이 흔들린다 하여도, 나의 은총이 너에게서 떠나지 않으며, 평화의 언약을 파기하지 않겠다.’ 너를 가엾게 여기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이사야 54:6b-10, 새)
여러분, 혹시 지금 내 삶에 어려움이 있는데 하나님이 아무 일도 안 하시는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이 마치 내 어려움을 모르고 계신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으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가 못 보는 사이에,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그 자녀를 반드시 선한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노아를 기억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길을 열어주실 때 그것을 보고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예배자입니다.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만이 그 길을 보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 앞에서 참된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이 놀라운 삶, 복의 근원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