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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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5일 주일예배
✦ 21세기를 위한 고대사회의 교훈 5 ✦
“홍수로부터 구원할 방주로 들어가라”
(창세기 7장 1~12절)
[들어가는 말]
저는 어릴 때부터 축구를 좋아했는데, 초등(국민)학교 때 언젠가 동남아에서 하는 어느 축구대회 중계를 TV로 안 해주고 라디오로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부모님 몰래 라디오를 가져다가 침대에 누워서 귀에 리시버를 꽂고 귀 기울이며 열심히 듣고 있는데 상태가 안 좋았습니다. 그래도 간신히 들리긴 했는데 조금 후에 갑자기 안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서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했습니다. 정말 필사적으로 했습니다. 축구 경기를 듣고 싶어서 그 어린 나이에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축구 경기를 너무 듣고 싶으니까 그랬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기도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가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주파수를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주파수를 맞추고 말겠다고 올렸다 내렸다 하며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 기도의 삶입니다. 그런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주파수를 맞춰주시고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잘못 맞추면 당연히 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축구경기 중계를 듣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며 애를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 좀 해보려다가 오늘은 아닌가 보다 하고 관두고, 날씨가 추워서 못하고, 눈이 와서 못하고, 감기 걸려서 못하고, 더워서 못하고, 길이 막혀서 못하고, 저녁을 못 먹어서 못하고 등등, 핑계가 너무 많습니다. 축구 중계 하나 들으려고 제가 어린 나이에 몸부림쳤던 것보다 훨씬 더 절박하게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채널을 바꿔가면서 애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노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에녹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아무도 거기에 관심이 없을 때, 에녹도 그런 사람이었고 그의 후손인 노아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든 하나님께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애쓰는 사람, 즉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자주 만났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안 좋아하실 수가 없었고, 앞으로의 홍수에 대해 알려주시고 대비하게 하시며 새롭게 인류를 시작하시게 되었습니다.
1. 방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 (1~5절)
1)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무려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누가 봐도 방주를 짓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누가 봐도 타당하고 합리적인 일을 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 일, 더 나아가 조롱하고 욕하는 일은 아무리 강한 소신을 갖고 있더라도 계속 해나가기가 힘든 게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만든 방주는 모양부터가 사람들이 만들어 타던 배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지금 봐도 그것은 배가 아니었습니다. 나침반도 없고 키도 없고 조종간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한 모양의 방주를 120년 동안 짓고 있는 노아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날씨도 전혀 비가 오지 않는데 무슨 배를 짓습니까? 그러나 그는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감당했습니다.
때로 믿음은 합리적이지 않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결정입니다. 내가 믿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볼 때 단군신화가 있는데, 신화 같지만 단군이 우리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 후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고, 왕건이 있고, 세종대왕과 이순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만나보셨습니까? 그런데도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실존인물이라고 믿고 계십니까? 내가 믿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만나보셨느냐고 하니까 어떤 분이 강한 확신으로 만나보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태왕사신기”에서 만났고, 왕건은 “태조 왕건”에서 만났고, 세종대왕은 “대왕 세종”에서 만났고, 이순신은 “불멸의 이순신”에서 만났다는 겁니다. 게다가 사인까지 받아왔다고 합니다. 배우에게 사인을 받아온 겁니다.
물론 그것은 우스갯소리이지만, 사실 우리가 그들을 만났기 때문에 믿는 게 아닙니다. 사료가 있고 또 전문가들의 연구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이 사람들이 옛날에 실존했던 것이 확실하다고 내가 믿기로 결정을 해서 믿는 겁니다. 모든 내가 믿고 있는 것은 내가 믿기로 결정해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결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약속을 위해서 이 성경을 계약서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라고 생각하며 믿기로 결정해서 믿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흔히 하는 말 중에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이 말은 보통 사람이 들을 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2천 년 전에 이스라엘에 살다 죽은 예수라는 청년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상식에 맞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약속해줍니다. 그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 그는 구원자였다는 것, 이미 구약에서 1500년에 걸쳐 예언이 되었고 그것을 이룬 분이 예수라고 성경이 알려줍니다. 그래서 그 성경에서 약속해주는 말씀을 믿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100% 확실해서 믿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60%, 70%, 80% 정도 믿을 만하니까 믿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구가 둥그렇다는 것을 다 믿고 있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우리가 직접 지구 밖에 나가서 본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많은 전문가들, 천문학자들이나 우주인들이 사진도 찍어오고 해서 그것을 보며 믿기로 결정해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아무리 그런 자료를 제시해주어도 조작이라고 하며 믿지 않습니다.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을 믿지 않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아무리 약속을 주어도 안 믿기로 결정하면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볼 때 타당하고 믿을 만한 근거가 60~70%는 있다.’ 하면서 믿기로 결정하면 그때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성령이 임하시고 눈이 열리면서, 그 안 보이던 30~40%가 신앙생활 가운데 체험이 되고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생활입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1절)
방주를 다 지은 노아에게 하나님은 그와 온 가족이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인류에게 심판이 임할 때 방주에 들어가야 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수영 전문가이고 수영 도사라고 해도 홍수가 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방주에 들어가야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셨고, 그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은 왜 노아에게만 이런 복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왜 노아에게만 살 길을 주셨습니까?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이 말은 “내가 보니, 이 세상에 의로운 사람이라고는 너 밖에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정말 의롭습니까? 나중에 홍수가 끝나고 그가 가장 처음 한 일을 보면, 포도 농사를 짓고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고 취해서 옷을 벗고 잠이 듭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의로운 사람입니까? 그러므로 방주를 통한 구원은 노아의 선함으로 인해 주어진 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노아만이 하나님의 은혜에 바르게 응답하는 믿음의 삶을 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구원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의로움이라는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할 줄 알며 그 은혜에 걸맞은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도 감사함이 없었습니다.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화하며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로운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은혜에 감사함으로 반응하며 나오는 사람을 지금도 의롭게 여겨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제가 받아들입니다.’라고 나올 때 의롭게 여겨주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노아를 통해 구원을 계획하시고, 방주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약속을 주시고 또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인간은 아무리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도 몇 번은 거짓말을 하고 한두 번은 배신을 합니다. 이 ‘배신’이라는 게 정말로 배신하는 것도 있지만, 기대를 했는데 기대를 저버리고 실망을 주는 것도 일종의 배신입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도 해보려고 노력했으나 실망을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안 하는 사람이 여기에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신실하십니다. 몇 천 년이 지나도 배신하지 않고, 실망시키지 않고, 반드시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바로 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에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를 택하셔서 구원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다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내용을 알려줍니다. 그때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는데, 성경을 읽어보면 후에는 불로 심판을 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예수 믿고 의로운 사람이 된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이 홍수에서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하나님의 계약서에 약속을 주셨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는데, 혹시라도 죽은 다음에 천국에 못 갈까 봐 두려우십니까? 걱정 마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영원한 멸망의 심판은 없다고 성경이 그 약속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에 우리를 천국으로 들어가게 해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며, 변함없이 신실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약속이 있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직접 본 적도 없고 만져본 적도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2) 승리의 비결인 예배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2-3절)
6:19을 보면, 암수 한 쌍씩 남겨두게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남기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제사 때문입니다. 짝을 지어 데리고 들어간 이유는 종의 보존을 위한 것이지만, 정결한 짐승 일곱 쌍을 데려오게 하신 것은 제사를 위한 것입니다.
정결한 짐승이란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한 짐승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방주 안에서 제사가 드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는 곧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관계를 계속 가지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드리고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또한 그분께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림으로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하나님과 관계없이 마음으로 다른 생각을 한다거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이 없다면 정말 예배를 드렸다고 보기가 힘듭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우리의 몸을 정결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겠다고 여기서 결단을 하고 나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도 죄성을 가진 사람들로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가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동행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예배당에 가둬놓고 나가서는 내 맘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평소에는 혼자 예배하지만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 모여 이곳에서 한마음으로 다른 지체들과 함께 주님의 날을 기억하고 주님의 백성이 모여서 예배드립니다. 또 끝나고 나가서 각자 삶 속에서는 어디나 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예배자의 삶입니다. 바로 거기에 삶의 비결이 있습니다. 거기에 하늘의 복이 임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곳은 감옥이라도 영광의 자리로 변합니다. 예배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과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예배가 있는 곳에 변화가 있습니다. 그렇게 강퍅하던 사람이 예배 가운데 변화가 됩니다. 독기가 빠지고 눈물을 흘리며 변화되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어떻든지 상관없이, 우리 삶 속에서 예배를 드리며 나아갈 때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고 행복하기만 한 곳이 아닙니다. 바로 얼마 전 라스베이거스에서 음악 콘서트 중에 총격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 고급 호텔에서 엄청나게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질 것을 기대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들 휴가로 가서 즐기던 사람들이 갑자기 쏟아진 총알 때문에 죽고 다쳤습니다.
요즘 유럽의 어디를 가도 테러의 위협이 있어서 걱정이 되고, 미국에서도 언제 또 총격사건이 벌어질지, 한국도 언제 어디서 교통사고나 범죄가 일어나서 끔찍한 일이 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같은 데만 위험한 게 아닙니다. 어디나 위험합니다. 그런 위험한 곳에서도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고, 아주 안전하다고 생각하던 곳에서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게 이 세상입니다.
사랑하고 결혼할 때 불행해지려고 결혼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좋을 것 같아 보였던 결혼생활도 힘들고, 아기가 태어나는 일도 힘들고, 아이를 키우는 것도 힘들고, 돈을 버는 일도 힘들고, 정말 인생에서 죽을 때까지 고생만 하다가 갈 것 같습니다. 내 인생이니까 내가 알아서 살면 마음대로 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우리가 잘나가다가도 갑자기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멈출 수가 있습니다.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수도 있습니다. 갑자기 잘나가던 사업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또 잘나가던 직장에서 갑자기 해고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예수님을 믿고 나아가는데,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은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힘들어도 천국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승리가 가능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가 가능합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방주 안에는 노아와 가족들이 드리는 예배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밖은 무시무시합니다. 그러나 안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그것이 1년 동안의 방주 안에서의 삶에서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한 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그 안에서 노아와 가족들 8명이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창문은 저 꼭대기에 작은 것 하나만 있어서 밖이 보이지도 않고, 우르릉 쿵쾅 하면서 소리는 엄청나고, 배는 심하게 흔들리고 배 멀미를 얼마나 했겠습니까? 그 가운데 두렵고 캄캄하고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데 그 안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짐승을 잡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그럴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이 큰 위로를 주시고,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하나님이 마음을 만져주시고,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고 있다.’ 하고 확신을 주시며 사인도 주십니다.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그때 혼자 예배한 게 아닙니다. 여덟 명이 같이 예배했습니다. 얼마나 서로를 의지하고 또 세워주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공적 예배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상황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됨을 정말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그 능력과 평화를 맛볼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예배입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예배의 자리에 왔다고 해서 다 구원받은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예배를 드립니다. 안 믿어도 예배의 자리에는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3)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4-5절)
노아에게 이제 7일이 남았습니다. 이 7일 동안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생명 있는 동물들을 노아의 방주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용이 다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 많은 짐승들이 어떻게 7일 동안 다 방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자연법칙이나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식과 이성으로는 심판이 온다는 말을 믿을 수 없고, 또 일주일 안에 모든 짐승들을 다 방주 안으로 들인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 많은 짐승들이 어떻게 방주 안에서 1년 동안 살았는지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일도 아닙니다. 너무 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가족들뿐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동물들이 짝을 지어서 나타나 줄을 지어 와서 방주 안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만약 노아가 나가서 일일이 짐승들을 다 붙잡아 왔으면, 7일 안에 어떻게 그 많은 짐승들을 다 데리고 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하려고 하면 모든 게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고 섬기는 것이 내 힘으로 하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내 힘으로 되는 게 없습니다.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어야 하는데 내 힘으로 어떻게 그것을 다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다 보니까 그냥 풀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지 않으시면 우리 인생에서 될 수 있는 게 정말 없습니다.
그 많은 동물들이 때가 되니까 방주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노아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다가 오면 집어넣는 것입니다. 노아는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시면 집어넣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다 해주셨지만, 해주신 일을 우리가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려면 힘이 들지만, 하나님이 해주시니까 마음만 있으면 힘들지 않습니다.
동물들은 각기 방주 안으로 들어왔고, 1층, 2층, 3층으로 나누어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마도 무게에 따라 노아가 잘 인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방주 안의 동물들을 하나님이 잘 다스려주시고 1년 동안 문제가 없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해주시면 이렇게 쉽습니다. 자세히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성경에 안 나온 내용을 너무 지나치게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8장 1절에도 나오는데, 하나님이 노아와 모든 생물들을 기억해주시고 생각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해주시고 생각해주시면, 아무리 어려워도 괜찮습니다. 사실 세상에서 자녀를 키우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내가 낳은 자녀인데 내 맘대로 되지가 않습니다. 특히 사춘기가 되면 정말 힘듭니다. 또 장성해서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면 내 말을 듣지도 않습니다. 성인이라고 자기가 알아서 하고, 내가 뭐라고 하면 간섭한다고 귀찮아합니다. 결혼한 자녀들은 내 손을 떠났습니다. 문제가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돌봐주시면 알아서 잘 성장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습니까? 기도 밖에 없습니다. 여기 계신 부모님들은 부모의 기도가 자녀를 살린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고 자녀를 위해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찌 그렇게 태평한지 이해가 안 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자녀가 지금 어떻게 되고 있는데 그리도 태평하게 있는지 안타깝습니다. 자녀를 위해 다른 것은 못 해줘도 기도를 해야겠습니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대로, 장성한 자녀는 장성한 대로, 부모님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자녀들이 복 받고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방주라는 데는 은혜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기 때문에 방주 안이 복 받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방주 안에 동물들도 많고 그 8명이 얼마나 복잡하고 냄새 나고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방주만이 살 수 있는 곳입니다. 밖에서는 아무리 수영을 잘하거나 이것이 잘났거나 저것이 잘나도 홍수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죄의 바다 앞에서는 아무리 내가 잘나고 뭘 잘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방주 안에 들어가야 삽니다. 마치 이 방주가 이 시대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 얼마나 문제가 많습니까? 사람들도 얼마나 관계가 복잡하고, 서로 미워하기도 하고, 문제가 일어나기도 하고,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러나 그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교회는 건물도 조직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임입니다. 주님이 구원해주신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이기 때문에 거기에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록 그 안이 좀 답답하게 느껴지고 힘들게 느껴져도, 내가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방주 안이 그렇게 행복한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창도 없고, 동물들과 같이 살아야 하는 곳입니다. 재미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영원히 있는 게 아닙니다. 1년만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참 복잡하고 힘들고, 신앙생활도 힘들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갈 그날을 바라보며 우리는 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방주는 노도 없고, 돛도 없고, 조종간도 없고, 자기 의지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냥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는 겁니다. 어떨 때는 빠르게, 어떨 때는 느리게, 어떨 때는 그냥 멈춰 있는 겁니다. 방주는 자기가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키도 없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방주 안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안에 있으면 네가 산다.’라는 약속을 이미 주셨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겁니다. 방주 안이 답답하다고 밖으로 나가면 죽습니다. 그 안에 있어야 합니다. 방주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배하며 나아가는 삶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사람이 자기 인생을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사는 것 같지만, 대부분 노년에 돌아가시기 직전에 많은 분들이 이야기합니다. ‘사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산 것이 아니라 끌려 다닌 인생이었다.’라고 고백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인생의 여정 동안에 자기 가족에 의해서, 직장에 의해서, 사업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평생 끌려 다니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살고 남기는 마지막 한마디가 무엇입니까? ‘허무하다’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인생을 이끌어 온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의 계획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계속 속으며 살고 있습니다. 자기가 계획하면 다 될 것처럼 생각하며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하나님을 신뢰할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소명’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가만히 놔두시는 게 아닙니다. 부르신 사람에게는 ‘사명’을 주십니다. ‘소명’은 부르심(calling)이고 사명은 해야 될 일(mission)인데, 소명과 사명을 같은 의미로 쓰기도 합니다. 부르신 사람에게는 반드시 사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믿는 것은 알겠는데, 뭘 위해 부르셨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자기가 알아서 자기 인생을 살다가 나중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하라고 맡겨주신 사명은 하나도 못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지금 나를 부르셨다는 것,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을 믿으시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무엇을 위해 부르셨는지를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뭘 하라고 하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것을 하고 계십니까? 그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사역자이고 또 예배자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사는 인생이 의미가 있습니다. 내 인생의 배는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운행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2. 홍수 심판의 시작 (6~12절)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6-9절)
7일 동안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는데 비가 올 징조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명령대로 살고 부르심의 소명과 사명대로 산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데 왜 이렇게 힘든가 할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조롱을 받고 욕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신앙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지만, 순간순간 갈등도 있고 여러 가지 문제들도 있습니다. 참 힘듭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면서 여러 가지 갈등이 있고 어려움도 있는 것은 너무나 정상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많은 사람들의 기록이 있는데, 그들도 다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경우도 있지만, 순종하며 나갔을 때도 여전히 어려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나아갔을 때 결국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믿음 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이 죽 나옵니다.
혹시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데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이고 힘든가?’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까? 결코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지금 분명히 붙들고 계십니다. 나의 인생의 힘든 일조차 선으로 바꾸어주시는데, 어느 때가 가장 적당한지를 보고 계십니다. 조금만 기다려보십시오.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10절)
비 한 방울도 안 보였는데 정확히 7일이 되니까 비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홍수가 땅에 덮이는 겁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동안 의심도 있고 갈등도 있고, 사람들로부터 비판도 받고 조롱도 받고 욕도 듣고 갈등도 심하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선택한 것을 의심하지 마시고 뒤돌아서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믿음의 길이고 그것이 축복입니다. 내가 선택한 일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기뻐하시는 길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그런 고난이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길을 갈 때 비록 옆에서 박수 쳐주는 일이 없다고 할지라도 묵묵히 그 길을 가는 겁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11-12절)
여기 보면, 하늘이 창을 열어 물을 쏟아 붓고, 바다와 땅의 경계가 흐트러지고, 40일 동안 밤낮으로 계속 비가 내립니다. 120년 동안 이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고 노아 밖에 없습니다. 이 홍수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자연법칙으로는 이해가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믿느냐 안 믿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내가 그것이 사실이다, 아니다 평가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진짜로 사실이냐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비가 오기는 뭘 오냐? 노아는 헛수고 하는 것이다.’라고 조롱하고 비난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비가 오느냐, 안 오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비가 왔습니다. 그게 중요한 겁니다. 홍수가 났습니다. 그게 중요한 겁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이성이나 상식의 속삼임, 세상 사람들의 이론에 따라 오락가락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에서 뭐라고 합니까? ‘역사에는 반드시 종말이 있다. 반드시 심판이 온다.’ 그러면 그날이 오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앞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노아와 같이 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만 구원받고 다 됐다고 할 게 아니라,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주님 앞에 데려오도록 애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VIP 형제자매님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섬기며 어떻게든 예수님을 믿으라고 노력합니까? 가만두어도 우리는 다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다른 사람들도 구원을 받으라고 그렇게 애를 씁니까? 그분들도 멸망하면 안 되니까, 그분들도 우리처럼 구원받아야 하니까 그렇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왜 다른 나라에까지 가서 그렇게 합니까? 한 명이라도 더 주님께 데리고 가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의 비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민족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모여 있는 그 비전을 보았기 때문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지난주 모세목장 모임에서 선교헌금을 다들 내셨는데, 그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갔는데 하나님 보좌 앞에서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내게 옵니다. 모세목장은 E국의 선교사님과 협력하고 있는데, E국 출신 한 사람이 내게 오는 겁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당신이 누구신데요?” “나는 OOO인데, 당신이 그 선교사님에게 보내준 선교헌금을 가지고 선교사님이 차비를 내서 내게 왔습니다. 또 성경을 사서 전달해주고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믿고 이 자리에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비전을 보았기 때문에 선교사님들도 애쓰고 계시고, 저희도 함께 협력해서 같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비전을 가지고 나아갈 때, 바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임하고, 우리를 통해 놀라운 복이 이 세상에 전달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