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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924일 주일예배

21세기를 위한 고대사회의 교훈 2

낳고 죽는 중에 데려감을 입은 사람

(창세기 51~32)

 

[들어가는 말]

 

오래 전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한 집사님이 있었는데, 그분은 교회를 안 다니고 믿지 않는 비신자인 자신의 친구를 전도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애를 쓰며 교회에 초청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계속 교회에 한 번 오라고 권했는데, 그러던 중 어느 날 드디어 그 친구가 교회에 오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며 이 친구가 마음을 열고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날 예배를 통해 친구가 마음을 열고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그날이 되어서 친구와 만난 집사님은 함께 예배당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주보를 딱 펴 보는데, 그날 설교 본문이 창세기 5장이었습니다. “낳았고 낳았으며 죽었더라. 낳았고 낳았으며 죽었더라. 낳았고 낳았으며 죽었더라...” 이것이 계속 반복되는 겁니다.

 

아니, 성경에 은혜로운 말씀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오늘 본문 말씀이 이런 건가?’ 목사님이 야속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이런 걸로 비신자인 친구의 마음이 어떻게 열리겠는가 생각하며 안타까웠습니다. 게다가 사람의 수명이 900세나 되는 황당한 이야기를 비신자인 친구가 믿겠는가 답답했습니다. 그래도 기도하면서 설교를 들으며 친구의 눈치를 살피는데, 의외로 이 친구는 , 하면서 상당히 심각하게 듣는 것이었습니다.

 

예배가 다 끝나고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오늘 어땠어? 오늘 말씀이 좀 그랬지? 매주 이런 건 아니고 어쩌다 그런 거니까 네가 이해하고, 다음 주에도 또 오면 어때?” 그러자 친구가 말합니다. “, 그래, 올게. 다음 주만 아니라 이제는 교회에 다녀야겠다고 결심했어.” “? 정말이야? 어떻게?” “오늘 사실은 말씀 때문에 결심했어.” 그 집사님은 너무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말합니다. “내가 오늘 보니까, 몇 백 년을 사는 것은 모르겠지만, 사람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결국은 죽더라. 결국은 죽는 존재라는 것이 오늘 내 마음을 강하게 찔렀거든.”

 

그렇습니다. 인간은 언젠가 다 죽을 존재입니다. 인간의 사망률은 100%입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보면, 죽지 않고 이 땅에서 천국으로 직행한 사람이 두 명 있습니다. 바로 에녹과 엘리야입니다. 인간으로서 이 땅에 살던 육신 그대로 영적 세계인 천국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경건하게 살았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에녹에 대해 집중해서 생각해보는 가운데, 그가 얼마나 경건하게 살았는지, 그의 경건한 생활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아담의 후손들

 

먼저, 오늘 본문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1-3)

 

창세기의 앞부분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자신의 형상대로 아들을 낳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과 사람의 형상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원래 형상이라는 말은 누군가를 원본으로 삼아 찍어냈다는 뜻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보여주는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타락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나타낼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인간 그 자체일 뿐,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부분이 다 죽어버린 채,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물론 지금도 조금 남아 있지만 온전히 나타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보다는 사람의 형상을 보여주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담이 아들을 낳았을 때 이 아들은 타락하기 전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었습니다. 범죄하고 난 다음에 그 아담의 기질과 성품을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아담의 후손들도 아담 안에서 함께 그 범죄에 동참한 것이 되고, 후손들이 태어날 때 더 이상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범죄한 아담과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이론적으로 설명을 할 수도 있지만, 실제 모습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얼마나 예쁘고 순결한 모습입니까? 우리는 아이에게 떼를 쓰는 법, 거짓말하는 법, 화를 내는 법을 전혀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전혀 그런 것이 없는데 어디서 그런 것이 나왔는가? 이런 것이 인간의 형상입니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존재라면, 아무리 외모가 초라하고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모두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나 아담 이후에 태어난 아들들은 모두 기질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가인 같은 아들이 태어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다 그랬습니다. 아벨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닌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반항하고 불순종하는 것이 아담의 후손, 즉 인간의 형상으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는 10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아담이 나오고, 그 다음에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입니다. 10명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 특별히 기억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자기 속에 있는 무서운 죄성을 누르고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0명은 1,500년 정도에 걸쳐 서로 연결이 됩니다. 아담의 나이를 계산해보면, 자신의 9대손인 라멕이 태어날 때까지 살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가 태어나기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오랜 시간을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몇 백 년을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은 미스테리입니다. 하지만 홍수 이전과 이후가 분명히 달랐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아담 이후의 인간들은 모두 다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반항적이었고, 죄를 짓는 데에는 모두 프로페셔널이었습니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죄를 짓게 되는 것이 인간의 형상으로 태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죄성을 가진 인간들의 삶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똑같습니다. 그런 것들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는 상황인데, 그렇게 죄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그래도 드물게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찾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10명의 사람들입니다.

 

 

2.   에녹의 삶에 전환점이 된 사건

 

이 아담의 후손들 중에도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이 바로 에녹입니다. 그런데 에녹이 처음부터 경건하고 신실한 사람이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에녹의 신앙생활에는 특이한 전환점이 있었다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1-22)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뒤에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아들딸을 낳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에녹의 아들인 므두셀라는 성경퀴즈를 할 때마다 단골로 나오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으로서, 969세까지 살았기 때문입니다(27).

 

에녹은 첫아들 므두셀라를 낳았을 때, 그러니까 정확히 그가 65세 때부터 갑자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이 없는데,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특히 구약성경에서는 이런 표현을 잘 눈여겨봐야 합니다.

 

이 말은 에녹이 65세 이전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별로 살지 않았음을 암시해줍니다. 그런데 또한 에녹이 첫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다음부터 삶이 변화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에녹은 왜 첫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다음부터 인생의 방향이 바뀌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을까요? 정확한 이유는 사실 알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므두셀라라는 그의 아들의 이름을 통해 이것을 짐작해볼 수가 있습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은 창던지는 자라는 뜻입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사회에서는 어떤 마을에 적이 침입했을 때 마을 밖으로 군대를 내보내어 적을 막게 하고는, 튼튼한 사람 한 명에게 창을 주어 마을 입구에 마지막 방어병으로 세워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창 던지는 자가 쓰러지면 그 마을은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왜 하필 자기 아들에게 므두셀라(창 던지는 자)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성경을 정경’(Canon)이라고 합니다. 구약 39, 신약 27, 도합 66권을 개신교에서는 정경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 외경’(Apocrypha)이 있는데, 이 단어는 '감추어진'이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외경은 개별적으로는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훌륭한 교훈적인 내용들도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경에 포함된 책들과 같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공 예배에서 사용되지 못하는 문서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러한 외경들 중 12권을 선택하여 이것을 '정경'으로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2의 정경'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약간 혼란이 있습니다. 가톨릭에서 쓰는 외경 중에 구약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토비트, 유딧, 지혜서, 집회서, 바룩, 마카베오상, 마카베오하.

 

외경 외에 또 위경’(Pseudepigrapha)이란 것도 있습니다. 위경이라는 것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저자가 마치 그 책을 유명한 고대의 인물이 기록한 것처럼 거짓으로 꾸미고 있는 데서 생겨난 이름입니다. 위경은 구약이나 외경에서 제외된 제 3의 책들을 가리키며, 이들은 당연히 정경으로 채택되지 않았지만, 구약과 신약의 중간 시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특히 신약성경의 유대교 배경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경 중에 에녹서가 있습니다. 이것은 외경도 아니고 위경이므로 신뢰할 만하지 못하지만, 놀랍게도 정경인 신약성경에 에녹서를 인용한 구절이 한 군데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아담의 칠대손 에녹은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보아라, 주님께서 수만 명이나 되는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셨으니, 이것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지른 온갖 불경건한 행실과, 또 불경건한 죄인들이 주님을 거슬러서 말한 모든 거친 말을 들추어내서, 그들을 단죄하시려는 것이다.’” (1:14-15, )

 

유다서에서 아담의 칠대손 에녹이 이렇게 예언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에녹서를 우리 개신교는 위경이라고 하고 가톨릭에서는 외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부분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 이 부분만큼은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들을 심판하시려고 언젠가 이 땅에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불경건한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것으로 볼 때, 에녹은 그 당시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어떤 심판의 메시지, 종말의 계시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으로 볼 때, 그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은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아들을 낳으면서 하나님께 종말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네가 지금 낳은 아들은 이 세상에게 최후의 희망이다. 이 아들이 죽는 날 세상은 멸망당한다.’

 

그래서 에녹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최후의 방어병, 창던지는 자라는 뜻의 므두셀라로 짓고, 그때부터 자신의 인생의 방향도 바꾸어서 종말의 심판을 준비하는 경건한 삶을 살기로 작정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므두셀라를 낳고 에녹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 바쳤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쁘게 보셔서 그를 죽음 없이 곧장 천국에 직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3-24)

 

여기 5장에 나오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패턴이 똑같습니다. “AB를 낳고 B를 낳은 후 OOO년 동안 자녀를 낳았으며, OOO세를 살고 죽었더라라고 나옵니다. 그런 것에 비해 에녹은 “365세를 살았더라하고만 나옵니다. 죽었다는 말이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죽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한 분명한 증거는 성경 그 다음 부분에 나옵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21).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습니다(25).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28). 그러니까 므두셀라의 손자인 노아가 태어났을 때 므두셀라의 나이는 369(187+182)였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가 시작된 때는 언제입니까?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7:11)

 

노아의 나이가 600세 되던 해에 홍수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홍수가 시작된 순간 노아의 할아버지인 므두셀라의 나이는 969(369+600)였습니다. 그러니까 969세까지 살았던 므두셀라가 죽는 순간(27) 노아의 홍수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에녹이 받은 계시와 같이, 므두셀라는 결국 인류의 창 던지는 자의 역할, 최후의 방어병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가 죽자마자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심판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므두셀라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인내하시며 심판의 날을 연기해주고 계셨던 것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오래 참으시고 또 참으시다가 마침내 인류를 심판하시게 된 것입니다.

 

 

3.   에녹의 삶의 내용

 

그렇다면 이제 한 가지 더욱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첫아들을 낳고 자기 아들을 볼 때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을 예감하며 경건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요즘 말세의 징조가 더 많습니다. 이런 마지막 때를 앞에 두고 대비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봅니다.

 

사실 종말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상당히 네거티브한 이미지를 갖고 계실 겁니다. 지난 199210월에 종말이 온다고 한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하도 떠들어댔고 그것이 사기로 판명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말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십니까? 이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923일에 지구가 멸망한다고 그랬다가 어제 다시 발표했습니다. ‘오늘이 아니다.’ 요즘에도 여전히 사기꾼들이 많습니다. 그런 뉴스를 들으시면 가짜라고 생각하시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때문에 종말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말을 대비해야 합니다. 종말은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종말이 오지 않으면 개인의 종말이 옵니다. 내가 먼저 죽든지, 주님이 먼저 오시든지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에녹이 종말을 어떻게 대비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마지막 때를 늘 대비하며 살았던 에녹의 삶을 성경에서 살펴볼 때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에녹에 대해서 나오는 짧은 구절들(네 절) 속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내용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동행한다는 말은 배우자를 동반자라고 부르는 것처럼 결혼했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다시 말해, 종말을 의식하며 살았던 에녹은 하나님과 부부처럼 동행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마지막 때를 제대로 대비하며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하나님과 늘 부부처럼, 동반자처럼 항상 동행하는 그런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봐도 에녹이 굉장히 착하게 살았다거나, 엄청난 일을 했다거나, 공로가 있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에녹이 착한 일을 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훨씬 훌륭한 삶을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어떻게 비윤리적이고 이상한 삶을 살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그 어떤 인간도 도덕적인 기준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착하니까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착한 것보다 그렇지 못한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죽을 때까지 죄를 딱 열 번만 지은 사람이나 수백억 번을 지은 사람이나,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도토리 키 재기일 뿐입니다. 모두 죄인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할 때, 그의 경건한 삶은 선행이나 도덕적인 우월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행하다라는 말에는 결혼식에서 주례자들이 흔히 쓰는 말인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늘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하십시오.’라고 하는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녹은 자기가 깨끗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섰을 때든지, 죄에 빠져서 하나님 앞에 감히 눈을 들 수도 없었던 때든지, 그는 동일하게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보여드리고 도움을 요청하며 주님만 의지하면서 주님과 하나 되어 살았다는 뜻입니다.

 

에녹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했어도 그의 삶이 결코 도덕적으로 100점 만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분명히 죄를 지은 적이 많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에녹은 그러한 자신의 삶을 가감 없이 전부 다 하나님께 보여드리면서 늘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300년 동안 살았던 것입니다그러므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300년은 죄를 하나도 안 지은 300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가식적인 모습을 버리고 부지런히 주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더러운 죄를 씻으며 살아간 기간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아닌데 그런 척하거나 그런데 아닌 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잘했든 못했든, 무조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무조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자기가 제대로 살고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재롱을 피우며 하나님, 저 잘했죠? 저 좀 칭찬해주세요.’라고 하는 사람, 그리고 잘못을 했을 때는 숨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어떡합니까? 그래도 좀 불쌍히 여겨 주시고 용서해주십시오. 제게는 주님 밖에 없습니다. 저를 깨끗하게 해주십시오.’ 하는 사람이런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 하나님께 나가고 안 나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잘하든 못하든 그저 주님만 바라고 주님만 붙드는 사람입니다. 기분 나쁘면 안 하고 기분 좋으면 하고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내가 잘못해서 기분이 안 좋아도, 또 어떤 어려움이 생겨서 굉장히 마음이 상해도, 그래도 주님께 나아가며 주님께 의탁하는 사람이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에녹의 두 번째 특징은, 부지런히 자녀를 낳은 삶입니다.

 

22절에는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동행한 삶과 자녀를 낳은 삶이 똑같은 비중으로 되어 있는 겁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과 부부관계를 통해 줄줄이 자식을 낳는 것이 같은 수준으로 나와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착각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점입니다. 거룩한 삶이라는 것은 결혼도 안 하고, 현실의 삶을 떠나, 수도원에서 도를 닦는 것이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거룩한 삶은 늘 기도만 하고 말씀만 묵상하고 예배만 드리는 것이고, 나머지 삶은 세속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착각입니다.

 

우리는 영으로 살도록 지음을 받은 게 아닙니다. 우리는 몸으로 이 땅에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육신을 가진 채로 영적인 길을 가는 겁니다.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조건 육신을 버리는 것이 영적인 삶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행하도록 복종시키고 만드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자꾸 죄를 지으려는 경향을 가진 육신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육신으로 바꾸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녀를 낳은 것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낳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생활이며 참으로 경건한 삶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VIP 자매님 한 분이 드디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목사님 부부와 상담을 요청했는데 그때 말하기를, 예수님을 믿고 나서 거룩하게 살려고 결심한 다음부터 남편과의 잠자리가 왠지 거북하게 느껴지고 자꾸만 영적으로 불결하다고 느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생각이 이해는 가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거룩한 삶이란, 현실의 삶에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결혼생활 그리고 그 속에서 누리는 부부간의 성관계, 또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귀한 자녀들, 또 그들을 잘 키우기 위해 땀 흘려 일하고, 함께 기쁨도 슬픔도 나누며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가정을 이루어가는 것, 그러한 생활 자체가 바로 경건한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첫 번째로 주신 명령이 무엇입니까?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였습니다. 에녹은 누구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말의 메시지를 받고 그 비밀을 깨달았을 때, 처자식을 버리고 기도원으로 들어가거나 광야로 나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깨달을수록 더 부지런히 가정에 충실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계속 자녀들을 낳고 기르며 자기 삶의 모든 부분을 성실하게 감당하면서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애쓰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자녀를 이렇게 계속 낳으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아내와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에녹은 하나님과의 관계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과 가장 가까운 인간인 아내와의 관계가 좋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분들 중에 부부관계는 별로 좋지 않은데 교회 일은 열심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다면, 부부간에도, 다른 이웃과도,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에녹은 이렇게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 있었고, 가족을 비롯하여 이웃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경건한 사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경건의 삶> 공부 숙제 중 하나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잘해준 것을 적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기자랑 같고 낯이 간지러워서 못 쓰겠다고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는가, 내가 어떤 섬김을 하며 살고 있는가를 점검해보자는 취지로 하는 것입니다그런데 몇 주 지나면 쓸 게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게 없습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아무리 말해봐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는 숙제인 것입니다.

 

진정한 경건이라는 것은 구름 잡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경건은 여기에 와서 그냥 예배를 드리고 가는 게 아닙니다. 진짜로 예배를 잘 드린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기에 왔다 갔다고 예배를 잘 드린 게 아닙니다. 정말 예배를 제대로 드린 것, 참된 예배자가 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예배가 끝난 다음에 어떻게 사는가를 보면 압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가서 다른 사람과 싸우고 미워하고 갈등 관계 속에서 계속 살아간다면, 그것은 결코 예배를 제대로 드린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경건은 종교적인 형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예배, 성경 읽기 같은 것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고 찬양하고 예배했으면, 그렇게 한 것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경건입니다.

 

 

[나가는 말]

 

노아의 홍수 뒤에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하여 세상에 다시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다가올 최후의 종말을 앞에 둔 채 계속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도 분명히 우리에게 하루하루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때는 우리 생각보다 더 빨리 올 수 있습니다. 한참 남았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올 수도 있습니다. 젊었다고 늦게 오는 게 아닙니다.

 

이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에녹 집안사람들의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노아처럼 마지막 홍수에 대비하여 믿음의 방주를 짓는 동시에, 에녹과 같이 자기 삶의 자리에 충실하며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을 마지막 나팔소리가 날 때 공중으로 들림 받을 성도로 찾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부지런히 자식을 낳아 기르던 에녹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바른 모델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을 자기 자신에게 해보면 좋겠습니다.

 

첫째, 나는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  나는 잘할 때뿐 아니라, 잘못하고 죄를 지을 때도 언제나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  시시콜콜 모든 것을 주님께 아뢰면서 나아가고 있는가?

-  모든 면에 주님만 의지하고 붙들며 살고 있는가?

 

둘째, 나는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는가?

-  나의 부부관계, 친구관계, 자녀와의 관계, 부모님과의 관계, 시부모님과의 관계, 처갓집과의 관계, 또 다른 성도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사는가?

-  생업(직장 또는 사업체)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는가?

-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의 관계로 나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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