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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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7일 주일예배
✦ 21세기를 위한 고대사회의 교훈 1 ✦
“살인과 폭력이 난무한 세상 속의 빛”
(창세기 4장 16~26절)
[들어가는 말]
저희 교회의 삶 공부들 중에 <말씀의 삶>이 있습니다. 1기와 2기를 진행하면서 저 자신도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다시 한 번 성경을 짧은 시간 안에 읽고 동시에 성경의 배경에 대해서 많이 공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제가 마음 깊이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인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 어떤 문화권이나 상관없이 똑같다는 점입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전통적으로 BC 1500년경에 활동했던 모세에 의해 쓰였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아브라함은 BC 2000년경 사람입니다. 창세기 11장 끝부분부터 아브라함이 ‘아브람’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1장부터는 천지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 후 11장까지는 고대사회의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을 죽 읽어보면, 그토록 오래 전인 고대사회 근동에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이나, 지금 21세기 이곳에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황당무계하고 얼토당토하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것은 무슨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당시 고대사회의 이야기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여기 있는 내용들은 오래 전에 수요예배에서 다룬 이야기들도 있는데, 모든 성도님들과 이 교훈들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에, 앞으로 몇 주 동안 짧게나마 성경에 나오는 고대사회의 이야기들이 주는 교훈들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그들은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아브라함만 해도 지금부터 4천 년 전) 그들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살았는지 완벽하게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그 세 종류의 사람들이 서로 같은 시대에 살았던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확실한 특징을 보여주는 삶을 살았고, 그들의 삶의 모습은 이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아주 중요한 교훈을 던져줍니다.
1. 가인의 삶의 방식
첫 인류인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4장 앞부분을 보면 가인이 아벨을 시기로 죽이게 되고, 그렇게 동생을 죽인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습니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2절)
여기서 ‘유리하다’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이 쓰인 히브리어로 ‘누아’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정착하지 못하고 늘 어디론가 떠나야 할 운명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가인은 앞으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항상 방랑해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다시 말해, 가인에게 내려진 징계는 ‘방황’이었습니다.
사실 방황이라는 것이 굉장히 가혹한 벌입니다. 방황이란 곧 안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저도 안식월 때 이곳저곳 좋은 곳을 많이 다녔지만, 여행 좋아하시는 분들이 한국을 가고, 크루즈를 타고, 유럽을 가고, 아시아의 여러 좋은 데를 다니고 할 때, 여행이 좋은 이유가 뭡니까? 여행이 좋은 이유는 돌아올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올 집이 없는데 그런 좋은 데를 다 다녀보십시오. 하나도 안 좋습니다.
방랑하고 방황하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벌인지 모릅니다. 아무리 좋은 데를 다녀도 돌아갈 곳이 없으면 얼마나 큰 괴로움입니까? 안식이 없고 평안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고독이 어디서 옵니까? 방황에서 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몸만 방황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가정에서 마음을 못 잡고 방황하니까 밖에 나가서 불륜의 관계에 빠집니다. 회사에서 또는 사업체에서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자꾸 다른 생각을 하니까 직장생활이 안 되고 사업이 안 됩니다. 수많은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가인은 이 처벌이 너무 괴롭고 무서워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3-14절)
너무 무섭고 괴로우니까 가인은 하나님께 호소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살인자인 가인에게조차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5절)
놀랍게도 하나님은 가인에게 어떤 표를 주셔서 사람들이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시고 가인을 죽이면 벌을 칠 배나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후 가인은 자기 나름대로 운명을 극복해보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에덴 동편에 있는 놋 땅에 거합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6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입니다. 한국 이름으로는 ‘가인’이라는 여자 이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자어이니까 발음만 같지, 전혀 다른 뜻입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 사람 중 ‘가인(Cain)’이라고 이름 지은 사람은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가인이 저주받은 이름이라고 사람들이 다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여호와 앞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하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불행해집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는 생명력 있게 헤엄치며 다닙니다. 그런데 물고기가 물을 벗어나 밖으로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더 활기차게 살 것 같지만 서서히 죽어가다가 마침내 죽어서 몸이 썩고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 없이 잘 살 것 같지만, 서서히 죽어가면서 부패하고 썩습니다. 그리고 온갖 썩은 것들이 거기서 나오게 되는데, 그 목록이 로마서 1장에 죽 나와 있습니다. 불의, 악행, 탐욕, 악의, 시기, 살의, 분쟁, 사기, 적의, 수군거림, 중상,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 불손, 오만, 자랑, 모략, 부모 거역, 우매, 무정, 무자비... 하나님을 떠난 삶은 이런 것입니다. 썩은 것들이 나옵니다.
가인이 하나님 앞을 떠나서 정착한 곳은 “에덴 동쪽 놋 땅”이었습니다(16). “에덴의 동쪽”이라는 옛날 영화가 있는데 아주 멋진 영화입니다. 그러나 에덴의 동쪽은 사실 멋있는 곳이 아닙니다. 에덴의 동쪽이라는 이 말은 에덴에서 더 멀어졌다는 뜻입니다. 즉, 가인은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곳으로부터 동쪽으로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 갔다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쫓겨난 다음에도 그 근처에 살았지만, 가인은 거기서 멀리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과 더 멀리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7절)
가인은 놋 땅에서 첫 아들을 낳고 에녹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뒤에 나오는 에녹(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과 다른 사람이니까 헷갈리시면 안 됩니다. 가인은 방랑하는 삶을 마치고 이제 한 곳에 정착하여 살 목적으로 아들의 이름을 딴 에녹 성을 쌓습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도시가 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사람들이 성에 몰려듭니다. 그래서 가인의 6대손인 라멕에 이르러는 제법 도시 형태를 갖추게 살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에는 모든 이야기가 다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중요한 것만 나옵니다. 그런데 가인이 놋 땅으로 이사를 가서 성을 쌓았다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놋 땅으로 간 후 처음 한 일은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쌓은 것입니다. 가인이 쌓은 이 성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에덴을 잃어버리고 하나님 품을 떠난 인간은 에덴을 대신할 것을 찾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은 하나님을 대체할 것으로 돈이나 권력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성을 쌓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고 보고 에덴동산과 비슷한 것을 만들려고 시도했는데, 바로 그것이 에녹 성입니다. 가인은 자기가 이렇게 성을 쌓고 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왜 성을 쌓았습니까? 자기를 보호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적들로부터 보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고, 또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서 성을 쌓습니다. 금을 긋고 성을 쌓은 다음 여기는 내 거니까 넘어오지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성을 쌓는 일이 11장으로 가면 바벨탑을 쌓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바벨탑을 쌓은 인간은 국경을 만들고, 국경이 생기면 국경 분쟁이 일어납니다.
지금 미국을 보십시오.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오랫동안 국경 분쟁이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인도와 중국이 국경 때문에 갈등이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도 독도, 즉 국경 문제가 있습니다. 필리핀과 중국도 바다에서 이것이 누구 땅이냐는 갈등이 있습니다. 또 중국과 일본이 한 섬을 놓고 각각 이름을 중국어와 일본어로 붙이고 서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국경 갈등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분쟁의 상황은 끝나지가 않습니다. 인간의 탐욕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인간의 역사이며 인간의 삶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사실 별 것 없습니다. 물론 고상하고 좋은 것도 있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자기를 보호하고 남들보다 자기가 더 넓게 가지겠다고 하는 것이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스스로 성을 쌓게 되고, 성을 쌓으면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남의 것까지도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고 시도하다가 잘 안 되면 힘을 써서라도 빼앗으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싸움과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한 쪽은 빼앗으려 하고 다른 쪽은 안 빼앗기려 합니다.
가인은 자신의 행복과 안전을 위하여 성을 쌓았지만, 그 성은 결국 전쟁과 불행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 시대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성을 쌓습니다. 자기만의 성을 쌓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자기 성을 쌓는 경우들이 많은 것을 보고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성을 쌓고 그 안에 있는 것은 가인의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아닙니다.
또 성만 쌓습니까? 거기다 철조망을 치고 남들이 못 넘어오게 합니다. 그렇게 하니까 안전합니까? 오히려 ‘철창 안에 갇힌 새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을 쌓은 인간은 자기가 쌓은 성 안에 갇혀서 오히려 더 외로워지고 더 고독해지고, 그 안에서 죽음만 기다리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가인의 삶, 에녹 성을 무너뜨려보자고 하는 것이 목장입니다. 자꾸 속으로만 들어가고, 혼자만 있고, 남들과 교류하지 않고, 교회만 살짝 갔다 오는 것은 가인의 삶입니다. 남들이 절대로 내 삶을 들여다볼 수 없고, 내 마음도 나누지 않고, 내 성을 쌓아 놓고는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고독함입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픈하고, 가정을 열고, 대접하고, 섬기고, 서로 방문하고, 사랑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삶을 나누고, 서로 기도해주고, 그러면서 서로 힘이 되어주고, 또 힘을 모아서 이것을 모르는 분들에게 함께 나아가서 주님께로 인도하고, 그 사이에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 점점 자라가는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꼭꼭 숨어서 성 안에만 있는 그런 생애였습니다. 지금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가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런 자기방어의 성을 쌓지 말고, 마음을 활짝 열고 서로 교류하며 함께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정말 동행하며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같이 지내기를 원합니다.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라멕의 삶의 방식
성경은 많은 인물들 중 중요한 사람들만을 보여주는데, 가인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 가인의 6대손인 라멕이라는 사람입니다. 18절에 여러 이름들이 나오는데, 가인을 1세대로 보면 라멕은 6대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내용만으로는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당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상당 부분 이름이나 쓰인 단어들을 통해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이것은 상당히 근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이 히브리어로 쓰였는데, 히브리어는 단어에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히브리 사람들은 이름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또 같은 단어가 계속 반복될 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이름은 그 사람의 삶을 보여주는 실마리가 됩니다.
1) 라멕의 자녀들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0절)
라멕의 첫째 아들은 야발입니다. 그는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라멕의 큰아들 야발은 전통적인 1차 산업에 종사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1절)
라멕의 둘째 아들의 이름이 유발입니다. 요즘 미국과 한국에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있는데,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리는 책을 쓴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은 유발 하라리(Yuval Harari)입니다. 그 유발이라는 이름은 어원이 같을 것입니다.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유발은 ‘수금을 타고 퉁소를 부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유발은 전문 음악인(professional musician)입니다. 수금과 퉁소를 들고 다니면서 분위기를 잡다가 가을바람 불어올 때 척 연주를 하면 다들 반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이미 당시에 먹고살기 위한 산업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즐기고 노는 문화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서비스 산업도 발달해 있었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에녹 성에 몰려와 상당한 문화 활동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랬기 때문에 유발 같은 사람은 음악만 하면서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음악이 어떤 음악이었겠는가? 그것은 조금 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2절)
라멕의 셋째 아들은 두발가인인데,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기구를 만드는 대장장이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 가지 기구”라는 것은 ‘날카로운 기계’를 말하는데, 그러니까 그것은 무기를 말합니다. 이미 라멕 당시에 청동과 철기를 이용한 흔적이 있습니다. 이 금속들이 주로 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된 것으로 볼 때, 라멕 시대의 도시 분위기가 아주 살벌했을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발가인은 그런 상황 속에서 좀 더 날카롭고 성능 좋은 무기들을 만들어 팔던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기구”에는 ‘농사 기구’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농사기구가 더 돈이 됩니까, 무기가 더 돈이 됩니까? 당연히 무기가 더 돈이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무기를 더 많이 만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인간은 돈이 되는 것을 더 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가인의 후손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라멕에게는 딸도 있었는데 두발가인의 누이인 나아마였습니다. 그런데 이 ‘나아마’라는 이름의 뜻 자체가 ‘재미있다, 즐겁다’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을 통해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나아마가 도시를 막 다니면서 재미를 찾아 헤매는, 쾌락을 찾아 다니는 신세대 여성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쾌락을 추구하고 재미를 추구하는 것은 요즘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고대사회 때도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렇게 라멕의 자녀들을 살펴볼 때, 가인이 세운 도시인 에녹 성은 결코 영적이고 아름답고 서로 도우며 섬기며 살던 도시였다고 상상하기가 힘듭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무기를 휘두르며 폭력을 일삼고, 한편에서는 흐느적거리는 음악 속에 쾌락과 재미를 추구하며 살던 도시 분위기였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춤추러 다니는 곳을 클럽이라고 합니다. 당시 에녹 성에 끝내주는 클럽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고, 그 클럽들을 장악하고 있던 프로페셔널 뮤지션이 바로 유발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꽉 잡고 있었습니다.
2) 라멕의 아내들
이처럼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것이 지배하던 도시 에녹 성에서 라멕은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을 세운 가인의 직계 후손이 아닙니까? 그것이 아주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또 라멕은 상당히 교만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 증거로, 그가 하나님이 주신 중대한 원칙 하나를 가볍게 깨뜨린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19절)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창 2:24, 새)
라멕은 동시에 두 명의 아내를 두어서 뭔가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최초의 일부다처제를 시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결합,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라는 하나님이 주신 가정 개념을 바꾸어 그는 자기 좋은 대로 두 여인을 아내로 취했습니다. 그의 아내들의 이름도 재미있습니다. 아다와 씰라입니다(19). 이 이름들 속에도 당시 여인들의 미의 기준이 들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아다”라는 이름은 ‘꾸미다, 장식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면 아다는 꾸미고 장식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여인, 좀 심하게 말하면 화장발 미인이나 성형 미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다라는 이름만 보아도 당시 도시의 여인들이 치장과 화장에 상당히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데 여자들이 신경을 쓰니까 보석 사업이 또 얼마나 발달했겠습니까?
에스겔 23장에 보면, 하나님을 버리고 간음을 저질렀다고 하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오홀라와 오홀리바라는 자매가 나옵니다. 이 자매가 이방인들을 위하여 목욕하고 눈썹을 그리고 단장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크게 분노하십니다. 그런데 이때 그들이 단장하는 행위에 사용된 단어가 바로 ‘아다’입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 큰아들인 에서의 이방인 아내의 이름도 아다였습니다. 그러니까 라멕이나 에서나, 부류가 비슷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속적이던 에서 역시 라멕과 같이 꾸미고 치장하는 세속적인 여자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요즘도 아니고 벌써 몇 년 전에 나온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혼여행 가서 첫날밤에 씻고 나오면 신랑이 신부를 보고 “누구세요?”라고 묻을 정도로 화장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화장을 넘어 치장, 분장, 변장, 위장, 포장의 수준까지 발달했습니다. 한국에 가보면 아름다운 여성들이 거리에 많은 것을 보는데, 모두 비슷합니다. 개성을 중요시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획일화되어 있습니다. 이런 외모 중시 풍토가 사실은 라멕의 부인 아다의 이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여자가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지나쳐서 치장이나 변장이나 위장하는 데 너무 많은 돈을 투자하는 현실,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쁘게 보이려는 욕심으로 약을 먹거나 심한 다이어트를 하고 얼굴이나 몸에 칼을 대면서까지 살아야 하는 현실이 슬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영원한 영보다 쇠퇴할 육체를 가꾸는 데에 훨씬 더 관심을 가지는 이 시대, 또 그렇게 꾸며진 외모라도 예쁘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현실, 예쁘면 다 용서가 된다고 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몸짱이나 얼짱 등에 너무 열광을 합니다.
라멕의 둘째 부인인 “씰라”의 이름의 어원은 ‘어둡다’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에서 우리는 씰라가 바짝 마르고 뭔가 음침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여인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아다는 아주 화려하고 꾸미고 치장하는 데 신경을 쓰는 여자라면, 씰라는 뭔가 어두운 분위기 가운데 자기만의 분위기가 있는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르고, 음침하고, 눈이 움푹 들어가고 그런 모습이 되는 것이 요즘 여성들의 꿈이라고 하는데, 맞습니까? 요즘 여성 모델들은 마르다 못해 병든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마르기 위해서 너무 다이어트를 하다가 죽은 모델들도 있습니다.
너무 말라서 불쌍해 보이기까지 하는 앙상한 모습의 모델들이 TV에 나오는데, 눈 밑을 꺼멓게 칠하고 너무 마르고 하얗고 이리저리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 것을 요즘 ‘헤로인 룩(heroine look)’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마약을 맞아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흔히 말하는 ‘마약 맞고 흐느적거리는’ 그런 모습이 청소년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런 음침한 모습의 씰라에게 라멕이 매혹되어 아내로 삼았다는 것은, 그 당시 도시 분위기가 그런 음침한 분위기였고 그것이 유행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어떤 사람들이 도시 문명의 음침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분위기를 따지는 것, 어둡고 침침한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도시문명에서만 가능합니다. 시골에서는 해가 지면 대개 잠자리에 듭니다. 시골에는 대체로 밤의 문화라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도시에는 밤의 문화가 있습니다. 불야성입니다.
제가 오래 전 한국에 갔을 때 먼 곳을 갔다가 밤이 늦어서 택시를 타고 대학가인 신촌 근처를 밤 12시가 넘어서 지나가는데 거기가 너무 환하고 사람들이 엄청났습니다. 그래서 ‘이건 신촌이 아니라 씬(sin)촌다. 죄가 가득하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영어를 써놓은 것을 보니까 정말로 Sinchon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거기만이 아닙니다. 뉴욕 같은 데도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밝은 거리 뒤편으로 가면 뒷골목의 음침한 어두움이 있습니다. 전혀 다른 두 문화가 함께 존재하는 두 얼굴이 도시의 특징입니다.
도시 뒷골목에는 오늘도 씰라의 음침한 얼굴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밤마다 칙칙한 어둠 가운데서 폭력과 살인이 이어지고,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수많은 영화들은 어두운 씰라의 후손들이 여전히 도시 곳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다는 도시의 밝은 곳의 화려하고 가식적인 모습이라면, 씰라는 도시의 어두운 부분의 음침한 모습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3) 라멕
이 두 여인들을 동시에 데리고 살던 라멕이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라멕은 두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을 뿐 아니라, 끔찍한 폭력과 살인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던 폭력배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소위 ‘라멕의 노래’라고 하는 유명한 노래를 남겼는데, 이 노래 가사는 어쩌면 기록으로 남겨진 인류 최초의 대중가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중가요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직설적인 욕설과 나쁜 내용으로 가득한 노래들이 요즘 참 많은데, 젊은이들이 거기에 환호합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23-24절)
이 라멕의 노래 가사가 요즘의 폭력적인 노래 가사와 매우 흡사합니다. 요즘 소위 힙합(hip hop)이라고 해서, 노래 잘하는 사람을 뽑던 ‘슈퍼스타K의’ 인기가 시들해지니까 없애고 같은 방송국에서 ‘쇼미더머니’라는 힙합 경연대회를 띄우고 있습니다. 최근에 시즌6가 끝났습니다. 특히 작년 쇼미더머니에서 우승한 사람이 크리스천 청년인데, 가사에 욕이 하나도 안 들어갑니다. 하지만 대부분 힙합 곡에는 욕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방송에서 노래가 한창 나오다가 갑자기 삐 소리가 나는데, 거기에 욕이 들어가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라멕의 노래는 쇼미더머니가 아니라 ‘쇼미더머더(murd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인의 노래입니다. 무엇보다 이 가사는 실제 그의 삶에서 경험한 것임을 생각할 때 더 끔찍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의 노래 내용을 재미있게 요즘 식으로 풀어 보면 대충 이렇게 됩니다.
“내 사랑 아다와 씰라여(Come on, baby)!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주지. 내가 오늘 길을 가는데 젊은 놈 하나와 시비가 붙었어.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그 놈이 내 몸에 작은 상처를 입혔지. 그래서 난 그놈을 죽여 버렸지. 나의 조상 가인을 해친 놈은 벌이 일곱 배라고 하지만, 감히 나 라멕에게 덤비는 놈은 일흔일곱 배로 갚아 주리라. 우하하하!”
라멕이 왜 그 청년과 시비가 붙었겠습니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라멕은 어떤 이유로 그 청년과 싸움을 시작했고,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그 청년이 상처를 조금 입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라멕은, 아마도 셋째 아들 두발가인이 아버지를 위하여 특별히 만들어준 최첨단의 날카로운 무기를 꺼내어서 그를 가차 없이 찔러 죽여 버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 아내들을 불러 놓고는 자기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즉석에서 기분 좋게 이 살인의 찬가를 만들어 불렀습니다. 그러자 둘째 아들인 전문음악가 유발이 그것을 재미있게 작곡 및 편곡을 해서 마침내 에녹 성 전체에 쫙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쇼미더머더’의 우승곡이 된 겁니다. 이 노래는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내려와 지금도 도시 곳곳에서 라멕의 노래와 같은 폭력적이고 음탕한 노래들이 공공연히 울려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끔찍한 일들이 쉽게 자행되고, 그러면서도 그 리듬에 취하여 흥청거리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라멕 도시의 정체입니다. 라멕의 조상 가인은 하나님의 처벌을 거부하고 방랑자 신세를 면하려고 도시를 세웠지만, 그 흐름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나오는 뉴스들을 보십시오. 몇 달이 넘게 방치되었다가, 우윳병이 너무 많이 쌓여 있어서 이상히 여겨 문을 따고 들어갔더니 외롭게 살던 노인이 죽어 있고 이미 시체가 썩고 있었다는 소식. 교 운동장에서 유괴되어 성폭행을 당한 여자 아이들의 소식. 군중 속에서 술에 취해 외로이 비틀거리는 수많은 도시인들의 고독한 모습. 또 라멕 당시처럼 오늘도 여전히 이어지는 쾌락과 방탕과 살인과 원한과 싸움의 소식들. 요즘 나온 것처럼, 제 아들 또래의 여중생들이 다른 학생을 폭행한 사건. 그러니까 아이들이 자살을 하거나 맞아서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골을 떠나 도시에 살면서 끝없이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면서도 도시에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족쇄가 채워진 것처럼 죽을 때까지 도시를 떠나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도시라는 개념이 없었으면 사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더 불편했겠지만, 가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벌이 이만큼 심각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벌을 피해보겠다고 가인이 세운 도시 계획은 결국 더 심각한 고독과 허무와 유리와 방랑과 비극의 장으로 인간을 이끌어갔습니다. 그래서 라멕의 도시를 만들고 오늘의 도시들을 만든 것입니다.
3. 에노스의 삶의 방식
그런데 이렇게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 속에서도 한줄기 빛이 비칩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5-26절)
여러분,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무서운 세계가 옵니다. 행복해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더 무서운 세계가 옵니다. 가인 다음에 라멕이 왔고, 라멕 다음에 노아 홍수 사건이 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살인과 전쟁과 죽음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이 심판하시지 않을 수 없는 저주스러운 세계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가인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세계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아벨의 영적 후예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부터 시작하지 않으시고 아담으로부터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아담이 아내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 ‘셋(Seth)’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셋은 아벨을 대신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은 썩어 없어지지만, 영은 영원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갈립니다. 사람은 절대로 죽어서 없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천국으로 가든지 아니면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 즉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겁니다.
아벨 대신 셋을 주신 하나님은 셋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셋이 아들을 낳았는데 에노스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에노스 때 비로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과 에덴을 떠나 더 동쪽으로 멀리 가서 성을 세우고 쾌락 중심으로 살다 허무해졌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에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지금 이 시대가 얼마나 라멕의 도시와 비슷한 상황입니까?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고, 매일 들리는 소식은 정말 안 좋은 소식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노스를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에노스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나아갈 때 거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이 상황 가운데 세상을 따라가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 격려하면서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에 우리를 두신 뜻, 이 시대 바로 이곳에 우리를 두신 그 뜻을 이루어드리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