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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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0일 주일예배
✦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산다 14 ✦
“주님께서 오실 때를 준비하는 삶”
(야고보서 5장 1~11절)
[들어가는 말]
한국에서 어떤 부부가 교회에 가서 목사님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날 친구 부부를 초대해서 식사대접을 한 뒤,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교회에서 설교시간에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하더군. 곧 예수님이 오시는데 그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천국으로 가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땅에 남아서 환난을 당하고 지옥에 간대. 나는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지만, 자네는 안 믿는 사람이니까 이것을 믿지 않겠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예수님이 오시면 내 재산 자네가 다 가지게. 이 집도, 내 땅도, 저 TV도, 은행에 예금되어 있는 돈도, 내 차도 자네가 다 가지게. 혹시 못 믿어서 각서를 써달라고 하면 지금 당장 써줄게.”
친구 집에 갑자기 초대받아 갔다가 횡재를 한 친구 부부는 집으로 돌아와 너무 좋아서 밤늦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각서까지 받아놓았으니 예수님이라는 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이상하게도 그 좋던 마음은 사라지고 점점 마음이 불편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천국이란 곳이 얼마나 좋은 것이기에, 한 점의 아쉬움도 없이 선뜻 재산을 포기할까? 하늘나라라는 곳이 그토록 좋은 곳인가?’ 하는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몇 날을 고민하던 끝에 그들은 자기들을 초대했던 친구부부에게 드디어 전화를 했습니다. “여보게, 나에게 자네의 전 재산을 주지 말고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게. 우리 부부도 천국에 가고 싶네.”
물론 이것은 누군가가 꾸며낸 이야기가 확실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뭔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력(Liturgical Calendar)’은 성탄절 4주 전인 대강절/대림절에 시작됩니다. 대강절(Advent)은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동시에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할 뿐 아니라 다시 오실 것도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은 사실 대강절 때만 준비할 것이 아니라 매일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늘이라도 당장 오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할 때 재림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반응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환영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의외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 대다수가 예수님이 좀 나중에 오셨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자신 있으십니까? 예수님이 오늘 당장이라도 오신다면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아니면 조금 있다 오시라고 하겠습니까?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두 가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재림을 두려워해야 할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재림을 고대하는 사람들입니다.
1. 주님의 재림이 살육의 날이 될 사람들
1) 부자들에 대한 경고
야고보는 먼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 날을 두려워해야 할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부자들입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1절)
이 말씀은, 부자이면 다 죄인이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면, 부자가 된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돈이 많아지게 되면 아무래도 인간은 돈의 지배를 받을 가능성이 아주 커집니다. 돈이 별로 없을 때에는 부자가 되어 좋은 일에 돈을 많이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막상 부자가 되고 나면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좋은 일에 자기 돈을 별로 쓰지 못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오래 전에는 지금보다 돈을 적게 벌었을 텐데, 특히 학생 때는 그렇습니다. 그때는 ‘천 불만 벌었으면’이라고 하다가 그렇게 벌면 ‘이천 불만 더’, 이천 불을 벌면 ‘삼천 불만 더’라고 합니다. ‘이것만 벌면 좋은 일을 더 많이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하셨습니까? 대부분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겁니다. 내가 돈을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컨트롤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얼마나 그 파워가 막강한지,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마 6:24, 새번역)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섬길 수 있는 두 주인으로 하나님과 재물을 언급하십니다. 영어로 하면 God이 있고 Gold가 있습니다. ‘l’ 자 하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재물이 하나님과 비교가 될 만큼 그 파워가 막강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당연히 하나님이 훨씬 강하시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그렇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돈이 많은 부자는 아무래도 재물의 지배를 받을 위험성이 돈 없는 사람보다 훨씬 더 큽니다.
돈이 많아질 때의 위험성을 네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재물을 쌓아놓고 싶은 유혹의 위험이 있습니다.
돈이 생기게 되면 쌓아놓고 싶은 충동이 생깁니다. ‘돈이 엑스트라로 천 불만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면, 실제로 Tax return으로 $1,000이 생겼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생겨서 기쁜 마음보다도, 그것을 쓸 생각을 하니까 없어지는 것이 불안해지는 겁니다.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합니다. 뭔가가 엑스트라로 생기면 기뻐하며 좋은 일에 쓰면 되는데, 그것이 줄어드는 게 불안해집니다. 기쁨보다 불안이 더 큽니다. 액수가 커질수록 그 불안은 더 커집니다.
가진 것이 없을 때는 매일 근근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재물을 쌓아놓을 생각 자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진 것이 많아지기 시작하면 쌓아놓아야겠다는 욕구가 생깁니다. 그래서 Savings에도 넣어놓고 투자도 합니다. 재물이 없어질까 봐 불안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쌓아 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불안이 없어지고 행복해집니까?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2-3절)
쌓아놓은 것이 너무 많아서 썩고 좀이 먹을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 크리스천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관리하도록 부름 받은 ‘청지기(steward)’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재물이 썩고 금과 은이 녹이 슬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들을 잘못 관리했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재물을 쌓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잘 사용하라고 주셨습니다. 특히 주님이 오실 때가 얼마 안 남았는데, 이 말세에는 재물을 쌓아 놓으면 안 되고 잘 사용해야 합니다(3).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목적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지 않고 자기 욕심으로 쌓아놓기만 하니까 그것이 썩고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아무 쓸 데가 없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둘째, 돈이 많아지면 남을 착취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돈에 눈이 어두워지게 되면 모든 가치의 기준이 돈입니다. 이전에 다른 교회에서 아직 VIP였던 치과의사가 있었는데,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나서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모를 때는 치과에 들어오는 사람마다 하나당 ‘이건 얼마짜리, 저건 얼마짜리’ 하고 돈으로 보였다는 겁니다. 사람의 가치가 돈으로 환산이 되었습니다.
사회에서의 성공과 실패도 돈을 많이 벌었는가, 못 벌었는가로 판단을 합니다. 돈이 많으면 성공했다고 하고, 돈이 없거나 사업이 잘 안 되면 실패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인격과 성품을 가진 사람을 보더라도, 돈이 별로 없고 가난하면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존경도 하지 않습니다. 가치 기준이 돈이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청렴하고 훌륭하다 하지만, 속으로는 내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렇게 돈이 쌓이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은 결국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4절)
본문에서 야고보가 경고하는 대상은 모든 부자라기보다는 그 당시 부유층이며 땅을 가지고 있던 지주 계층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땅 주인이 자기 밭에서 일한 품꾼들의 하루 품삯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온갖 이유를 대며 나중에 주겠다고 하면서 안 준 겁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유대인이니까 그 말씀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품삯을 안 줬습니다.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 (신 24:15)
구약의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이라고 자꾸 오해하시는데, 성경을 잘 안 읽고 다른 사람의 말만 들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구약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배려하시는 하나님이신지, 얼마나 자상한 하나님이신지, 얼마나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하나님이신지를 발견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그날 품삯을 받아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돈이 많은 주인이 그것을 안 줍니다. 그래서 그게 죄라고 하십니다.
유대인이라면 이런 말씀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품삯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못 준 게 아닙니다. 있는데 욕심 때문에 안 준 겁니다. 그렇게 남을 착취하는 사람은 주님의 재림이 심판의 날이며 두려운 날이 됩니다.
셋째, 돈이 많아지면 사치를 할 위험이 있습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5절)
여기서 “살육의 날”이 나오는데, 그 당시 귀한 손님이 올 것을 대비하여 짐승에게 먹이를 많이 주어서 살이 찌게 했습니다. 그리고 손님이 오는 날 짐승을 잡는데, 그 날이 바로 ‘살육의 날’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것을 부자에게 적용합니다.
여기서 ‘사치(luxury)’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비싼 것을 사는 것이 사치가 아닙니다. 어떤 것은 비싸도 품질이 좋은데, 물건의 질이 싼 것들보다 훨씬 나으면 사실은 돈을 더 줘도 비싼 것을 사는 것이 싼 것이고, 질이 떨어지는 것을 사는 것보다 더 경제적입니다. 싸구려를 사서 자꾸 고장 나는 것보다, 비싸도 좋은 것을 사서 오래 가게 하는 게 더 좋습니다. 그런데 물건의 질이 좋아지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야고보서가 쓰인 1세기 당시의 기술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물건을 한없이 좋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짝퉁’ 물건이라고 하는 것들(가짜)이 있습니다. 저도 오래 전 이민 와서 대학생일 때 근처의 한인 도매상점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들여와서 파는 물건들 중 가짜들이 많았습니다. 진짜 이름을 도용해서 만든 가짜였습니다.
오래 전에 한국에서 제가 옷이나 신발을 살 때, 큰 것을 구하기 위해 이태원에 가면 이름을 살짝 바꾼 것들이 많았습니다. NIKE가 아니라 나이스, Louis Vuitton이 아니라 Louis Veeton, Lee가 아니라 Ree, Calvin Klein이 아니라 Kevin Klein, Levi’s가 아니라 Lewi’s 등등 너무 많습니다.
왜 그런 가짜들이 판을 칩니까? 사람에게 허영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제품들을 가지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는데, 돈이 없으니까 가짜라도 구입하는 겁니다. 돈이 있는 경우에는 실제로 비싼 진품들을 구입하겠지만, 사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것들을 삽니다. 왜 그렇습니까? 허영심 때문입니다. ‘내가 이 정도 되는 사람이다.’ 하고 과시하고 싶은 겁니다. 남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자기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사는 것을 ‘사치’라고 합니다.
사람이 사치하려는 경향은 동양이든 서양이든, 옛날이든 지금이든, 똑같은 것 같습니다. 사람 마음은 참 똑같다는 것을 봅니다. 오래 전에 영국 국민들이 사치와 허례허식에 빠져 각종 호화 장신구를 하고 다니자, 당시 왕이던 헨리 4세는 금은보석 등 호화 장신구로 몸을 장식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법령을 발표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효과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던 왕이 다음과 같은 부칙을 추가로 발표하자 모두가 이 법령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부칙: 단, 창녀와 소매치기는 이 법령에서 제외된다.”
깊이 들어가 보면, 결국 사치는 이기심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닮아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섬김이 목적입니다. 그렇게 잘할 수 있도록 건강도 주시고 시간도 주시고 재물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신 것들을 내 이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용할 때 사치가 됩니다.
넷째, 돈이 많아지면 살인할 위험이 있습니다.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6절)
충격적인 이야기를 책에서 보았습니다. 제가 어렸던 1970년대에는 제가 살던 아파트에 주차장만 있었지 차가 없었습니다. 70년대만 해도 자가용을 모는 사람이 없었고 부자들만 차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운전사를 두고 다녔습니다. 그런 부자들이 운전사에게 이렇게 지시했다고 합니다. ‘사고가 나서 사람을 치면 그냥 가지 말고, 차를 뒤로 몰아 한 번 더 깔아뭉개 아예 죽여 버려라. 죽어서 보상을 해주는 것이 다친 사람 치료해주는 것보다 싸다.’ 정말 그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돈의 지배를 받는 돈의 노예가 되니까 살인도 서슴지 않는 냉혹한 인간이 되어 버립니다. 지금도 살인이 돈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돈의 노예이기 때문에 돈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나는 부자가 아니니까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사실은 우리가 미국에 산다는 자체만으로도 부자에 속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제가 아예 그것을 기록하여 제 스마트폰에 가지고 다닙니다. 몇 년 전에 <목적이 이끄는 삶>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로 히트를 했던 새들백 교회(Saddleback Church)의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님이 말한 통계를 적어놓았습니다.
한 달에 수입이 $1,000만 되면, 세계에서 상위 13% 내에 듭니다. 한 달에 수입이 $2,000만 되면 세계에서 상위 약 10% 안에 들어갑니다. 한 달에 $3,000을 벌면 세계에서 상위 4.3%에 들어갑니다. 한 달에 $4,000을 벌면 세계에서 상위 1%에 들어갑니다.
세계에서 하루에 세 끼를 다 먹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 끼만 아니라 더 먹고 간식도 먹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면 우리는 엄청난 부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부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어떤 부자들만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돈이 적을 때는 우리가 돈을 컨트롤할 수 있지만, 돈이 많아지면 돈이 우리를 컨트롤하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2)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는 방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첫째,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나누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바른 헌금 생활이 그 방법입니다. 우리 교회도 원래는 헌금 접시를 돌렸는데, 언젠가부터 이것이 더 바람직하겠다고 하여 헌금함을 놓고 미리 집에서부터 준비하여 가지고 와서 헌금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제가 2년 전 안식월로 한국에 갔을 때, 이전에 같은 교회에 다니던 친구들과 선배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중 저와 다른 친구 하나가 목사였고, 나머지는 다 평신도였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두 분이 있지만, 부탁 좀 하자. 한국 교회는 너무 헌금하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제발 그것 좀 그만해 달라.”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의아했습니다. 제가 헌금하라고 설교를 많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한국 교회에서는 헌금을 하라는 말을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거나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고, 안 하면 저주받는다는 식의 메시지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실입니다.
그런데 헌금을 왜 합니까? 하나님이 돈이 필요하십니까? 아닙니다. 사실 십일조는 구약에 율법 조항으로 나와 있습니다. 레위인들은 땅이 없어서 일하여 돈을 못 버니까, 레위인들을 위해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구약이 끝나고 신약시대이니까 그것이 끝났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십일조는 억지로 해야 하는 의무조항이나 구약의 율법은 아닙니다. 그러나 헌금은, 특히 십일조는 하나님께 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표현입니다. 헌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돈 내놓으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막아주시는 방법입니다.
특히 온전한 십일조를 하면 여러 유익이 있는데, 가장 큰 유익은 돈의 지배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당연히 이 돈이 필요하고 이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상황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나는 돈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며 하나님께 드릴 것을 드리면 정말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십일조라는 것은 내가 가진 재물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일조나 헌금생활을 제대로 하면, 돈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지배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이지, 하나님이 돈이 필요해서 그러시는 게 아닙니다. 내가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막아주시기 위함입니다.
둘째, 영원에 투자하면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다가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간다.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가지도 못한다.” (마 6:19-20, 새)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은 영원한 가치를 가진 것에 투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거기에 투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영원한 것, 즉 우리가 천국까지 들고 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사람입니다.
여기 있는 성도들은 같이 천국에 갑니다. 그런데 천국으로 가지 못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영원한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투자하는 겁니다. 내 시간을, 내 물질을, 내 노력을 영혼 구원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나와 함께 저 영원한 하늘나라로 가게 하는 것이 영원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놓는 일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지금이 2017년인데 미국 정부에서 미국 경제를 더 좋게 하기 위해서 이제부터 2017년 말로 더 이상 미국 달러를 사용하지 않고 새해부터 유로화를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는 가상의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12월 31일까지만 달러를 쓸 수 있고, 2018년 1월 1일부터는 미국도 다 유로를 써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달러를 더 긁어모으시겠습니까? 남들이 달러를 다 버린다고 좋아하며 긁어모으시겠습니까?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당연히 말이 안 됩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남은 기간 동안 빨리 달러를 처리하고 유로를 즉시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1월 1일이 되면 쓸 수 있습니다. 아무리 1월 1일에 달러를 몇 백만 불, 몇 천만 불, 몇 억불을 갖고 있어도 다 휴지조각입니다. 더 이상 바꿀 수도 없습니다. 12월 31일로 다 끝납니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달러를 모으겠다.’라고 하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이 땅은 반드시 끝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 땅의 것을 계속 긁어모으겠다. 하늘에 가서 쓸 것은 전혀 준비하지 않고 이 땅에서 쓸 것만 계속 모으겠다.’라고 하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너무 어리석습니다. 지금 빨리 그 다음 나라인 하늘나라에 가서 쓸 것, 영원한 가치를 가진 것을 빨리 마련해야 합니다. 지금 가진 것을 다 팔아서라도 마련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하늘에 투자하는 것,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돈을 어디에 주로 사용하고 계십니까? 주로 내 만족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까? 나를 위해서, 내 자녀를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 그저 나만 위해 사용합니까? 그런데 만약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키워주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내 돈과 내 시간을 사용한다면, 하늘에 쌓아놓는 것입니다.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에 쌓아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돈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 살게 됩니다.
왜 자꾸 섬기라, 섬기라 말합니까? 왜 자꾸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들자고 합니까?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을 하늘에 쌓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저 사람을 위해서 쌓는 게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쌓는 것입니다.
2. 주님의 재림이 복된 날이 될 사람들
이처럼 돈이 자기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부자들에게는 큰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심판의 날이 부자에게는 살육의 날이고 큰 두려움의 날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너무나 복된 날입니다. 여러분, 정말 주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늘 오시면 어떡하지?’라고 벌벌 떨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을 붙들고 인내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정말로 큰 기쁨과 위로의 날입니다. 두려움의 날이 아닙니다 기쁨과 축제의 날입니다.
“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계 21:3-4, 새)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세상의 마지막 날은 두렵고 무서운 날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위로와 기쁨과 축복의 날입니다. 우리가 받은 상처들을 치유해주시고, 주님을 위해 당한 고난을 보상해주시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오면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주님이 오셔서 눈물을 닦아주려 하시는데 눈물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 눈물이 없습니까? 남을 섬겨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냥 슬픔의 눈물이 아닙니다. 조금 고생해서 눈물을 흘리면 닦아주시겠다는 게 아닙니다. 그 당시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 다른 사람들을 그토록 섬기는 그 섬김 가운데 나오는 고난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에게 눈물을 닦아주겠다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남을 섬겨본 일이 없으니까 눈물을 흘릴 일이 없습니다.
사실 남을 섬기다 보면 눈물 흘릴 일이 너무 많습니다. 얼마나 괴로운 일이 많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섬겨보면 힘든 일도 있고, 괴로운 일도 있고, 내 마음대로 되지도 않아서, 정말 눈물 흘릴 일이 많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오면 그 섬김 때문에 내가 겪었던 모든 상처와 아픔과 눈물을 싹 닦아 주시니 얼마나 기쁜 날입니까? 얼마나 큰 위로의 날입니까? 그런데 그 눈물이 없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죽기 전까지 예수님께서 다시 오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죽는 날이 그 마지막 날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서 주님을 맞이하든, 죽어서 천국에 가든, 매일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현실도피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어둠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따라 정직하게 살다 보면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자들에게 야고보는 “길이 참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7절)
이것을 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나 마찬가지였는데, 극심한 핍박 속에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를 질투하던 유대인들이 그를 높은 곳에서 밀어 떨어뜨려서 떨어져 괴로워하던 것을 몽둥이로 때려죽임으로 순교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극심한 테러의 위협과 핍박 속에서 살던 사람인데 ‘길이 참으라’고 합니다. 그럼 길이 참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농부처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이른 비와 늦은 비, 두 번의 비가 내려야 농사가 됩니다. 농부가 아무리 걱정하고 안달을 해도 비는 자기 마음대로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비를 기다려야 합니다.
둘째로,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8-9절)
어려움의 원인을 자꾸 다른 사람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지 말고, 죄악 된 세상에서 살면 당연히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고 주님 뜻대로 살면 당연히 힘든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참으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강림이 가까웠고(8) 지금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실 정도로 가까이 오셨다는 것(9)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로, 선지자들처럼 참아야 합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0절)
선지자(예언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전달하는 하나님의 대변인들입니다. 그런데도 선지자 중에 핍박을 안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되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살게 되면, 어떻게든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각오하고 살아야 합니다.
선지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주님께 순종하면 세상에서 고난이 오게 되어 있지만,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칭찬과 상이 있다는 것, 눈물을 닦아주실 날이 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참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들처럼 우리도 참으라고 말씀합니다.
넷째로, 욥 같이 인내해야 합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11절)
구약의 욥기를 보면, 욥은 아주 부자였고 엄청난 축복을 누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잃고, 자녀들도 다 죽고 전부 다 한꺼번에 잃어버렸습니다. 욥에게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도 괴로웠겠지만, 그러한 고난의 원인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고 괴로웠습니다.
그는 의롭게 살았는데도 고난을 당하니까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와서 그에게 죄 때문에 고난이 온 것이니 회개하라고 했지만, 욥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하는 내용이 죽 이어지는 것이 욥기입니다. 결국 “주께서 주신 결말”이 무엇입니까? 마지막에 욥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욥 42:5, 새)
이것은 고난을 통해 주님을 정말 가까이서 뵙게 되었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전에는 듣기만 하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생생하게 보는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우리도 고난 가운데 주님을 만납니다. 축복 가운데 주님을 만나면 더 좋겠지만, 사람은 그렇게 되질 않고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일이 잘 풀리고 성공하고 돈을 잘 벌면, 신앙적으로 더 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버립니다. 건강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다가 건강해지니까 이상한 데에 가고 죄를 짓습니다.
잘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대부분의 인간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고난을 당할 때 주님을 찾게 되니, 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참고 견디며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다. 그분의 자비와 긍휼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나가는 말]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날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이전에 잘못된 종말론자들 때문에 ‘재림’이라고 하면 좀 안 좋게 들리지만, 재림은 확실히 있습니다. 성경이 확실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분명히 오실 텐데, 내가 과연 그날을 준비하고 있는가?
그날은 나 자신에게 어떤 날로 지금 다가옵니까? 예수님의 재림이나 마지막 날을 생각하면 막 무섭고 두렵고 떨리십니까? 아닙니다. 그날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기쁨의 날이요, 위로의 날이요, 축복의 날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잠시 머무는 곳입니다. 마치 출장을 온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출장을 가서 호텔에 들어가면, 호텔이 아무리 좋아도 영원히 머물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아도 집처럼 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집은 천국입니다.
또한 이 세상은 캠핑을 온 것과도 비슷합니다. 텐트를 치고 거기에 머물 때, 아무리 텐트가 좋아도 거기에 온갖 가구를 사다 집어넣고 호화롭게 꾸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집이 아니고 잠시 머무는 텐트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겐 돌아갈 집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마치 그런 호텔 방처럼, 마치 텐트처럼 우리가 잠시 머무는 곳이고, 우리가 진짜 돌아갈 집은 저 천국에 있습니다. 우리는 저 천국에 소망을 두고 주님을 만날 날을 기대하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날이 생각보다 일찍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 천국의 소망 가운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