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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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3일 주일예배
✦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산다 11 ✦
“혀를 잘 다스리는 것이 영성이다”
(야고보서 3장 1~12절)
[들어가는 말]
함부로 말하거나 강한 비난을 하는 것을 가리켜 ‘막말’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을 잘못해서 엄청난 망신을 당하거나 큰 손해를 보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2년 전에는 한국에서 어느 유명 의사가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막말 파문’을 일으켜 당시 출연 중이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런 막말들을 쏟아놓았습니다. “여자는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으니 4분의 3만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무 없이 권리만 누리려 한다면 도둑 심보다.” “세계 주요국 중 병역의 의무가 있는 나라는 한국, 대만, 이스라엘이다. 이 중 여자를 빼주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단, 자식을 2명 낳은 여자는 예외로 할 수 있다.” 그는 이외에도 당시 유력한 대선후보였던 모 정치인에 대해서는, “좋게 말하면 과대망상이고, 나쁘게 말하면 거짓말쟁이다.”라고 했고, “독재가 왜 잘못된 것이냐? 그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도 독재를 주장했다.”라는 등 문제 있는 발언들을 쏟아놓았고, 결국 방송에서 하차했습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도 어느 당의 대선후보가 막말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기자들과의 대화 중 이전 정부에서 장관으로 지명하면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장관으로 불러도 안 간다. 총리를 줘도 갈지 말지인데, 장관은 개나 소나 다하지 않느냐?” 그 후보는 몇 년 전 자신의 당 대표로 선출된 직후 “아무개한테 돈 받은 게 있느냐?”는 어느 여기자의 질문을 받고 “너 진짜 맞는 수가 있다.”라고 폭언했다가 사과해야 했습니다. 또 “11월 안에 한미 FTA 비준안을 처리하지 못하면 (기자에게) 100만원을 주고, 처리하면 국회 정문 앞에서 기자의 아구창을 날리기로 했다.”라고 했고, 공천권을 쥔 당 대표로서 법조계 인사의 공천 가능성을 묻는 기자 질문에는 욕까지 하면서 “이 XX들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막말 하면 빼놓을 없는 사람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입니다. “미군이 한국을 돕는 것은 미친 짓이다.” “멕시코 이민자는 성폭행범이고 범죄자다.” 이런 폭언들을 쏟아놓았지만, 놀랍게도 그의 지지율은 더 올라갔고 사람들은 더욱 열광했으며, 결국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잘했다거나 잘못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로 실수를 하여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1. 혀의 엄청난 위력
그렇게 유명인들이 하는 막말에 상처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말로 상처를 받는 대부분의 경우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의도적으로든 그렇지 않든 툭 던진 말 때문입니다. 말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말을 했더라도, 상대방에겐 엄청난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시는 동안 깊은 상처를 입은 적이 있다면 생각해보십시오.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가슴이 뛰거나, 흥분이 되거나, 눈물이 나려고 하는 사건 말입니다. 그 상처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거의 대부분 말로 인한 상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미국에 와서 유학을 하여 공학박사 학위를 딴 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방 대학을 나왔지만 대학원은 한국에서 가장 좋다고 하는 서울대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자기가 좀 잘하니까 그 학교 학부 출신 학생들이 지나가면서 자기들끼리 하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이런 말이었습니다. "그 친구, 3류 대학 출신 주제에..."
그 말이 그분에게 오랫동안 상처가 되었습니다. ‘3류 대학 출신 주제에....’ 그 음성이 항상 자기 귀에서 떠나질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유학 와서 공부하여 박사까지 받았습니다. 그래도 그 말이 자기를 떠나지 않고, 그것이 생각날 때마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대학생이던 저에게 "미국에는 인종차별이 있지만, 한국에는 그보다 더 나쁜 인간차별이 있다." 하고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미국에 유학을 와서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아주 행복하게 사는 어떤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과거에 겪었던 한 사건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목소리가 떨리고 눈물을 글썽이게 된다는 겁니다.
이분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서 천막에 살아야 할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학교도 못 다닐 형편이었는데 워낙 머리가 좋아서 국비장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 들어가 고등학교까지 마쳤습니다. 그 후 서울대학교에 합격을 했는데,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막막하던 중에 한 분이 생각났는데, 부유한 친척 아주머니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찾아갔는데, 마침 그 아주머니가 안 계셨고, 그때 집을 지키던 가정부는 안에 들어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얼마 시간이 지난 후 누군가가 오는 소리가 났는데, 보니까 자기 또래의 그 집 딸이었습니다. 그때 그 여자 아이가 마당에서 가정부에게 던진 한 마디가 이분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혔습니다. “얘는 왜 거지처럼 맨 날 우리 집에 와?” 그 한 마디를 듣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몸이 떨려 더 이상 거기 있을 수가 없었고 그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다행히도 나중에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었고, 대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에 와서 좋은 학교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들었던 그 한 마디, “얘는 왜 거지처럼 맨 날 우리 집에 와?”라는 소리가 아직까지도 깊은 상처로 남아서, 이 이야기를 할 때면 눈물이 글썽해지고 목소리가 떨린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예수님을 안 믿는 분들이 있는데, 믿고 싶어도 믿기 힘들어하는 분들도 있고, 거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가족들 중에도 안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대개 공통되는 점이 하나 있는데,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점입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당신들이 죄인인 것은 그렇다 해도 나는 죄인이 아닌데 왜 자꾸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느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면, 그것 때문에 교회 나가는 것이 불편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당연히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죄가 없는데 무슨 구원이 필요합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분들은 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주로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합니다. ‘내가 완벽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사기를 친 적도 없고, 살인을 한 적도 없고, 남을 해친 적도 없고, 때린 적도 없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을 위해 기부도 하고, 나름대로 착하게 살려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왜 자꾸 내가 죄인이라고 하느냐?’ 그러나 그런 분들이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자기 혀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해치고, 다치게 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너무나 많은 부부가 서로에게 혀로 상처를 줍니다. 말로 상처를 주고, 기를 꺾습니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격해지면 갑자기 "거지같은 집안 출신 주제에!"라고 하거나 "나 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라고 하며 상처를 줍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혀로 직장 동료들의 명예를 깎아내립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혀로 이웃 간의 관계를 깹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혀로 서로를 공격해서 상처를 주고받으며 분노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런 혀의 위력을 잘 모른 채, 내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3절)
여기에 보면 말에게 재갈 물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힘을 놓고 보면, 말은 사람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동차의 파워도 '마력(Horse Power)'로 하지 않습니까? 야고보가 살던 1세기 당시에 말은 가장 기계와도 같은 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힘이 센 말에게 재갈 하나만 물려 놓으면 사람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갑니다. 재갈은 작은 것이지만 그렇게 큰 힘이 있습니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4절)
여기에는 배의 키 이야기가 나옵니다. 배는 야고보가 살던 1세기 당시 운송 수단 중에서 가장 큰 것입니다. 그렇게 큰 배를 봐도, 배 전체의 방향을 잡아주는 것은 의외로 아주 작은 키입니다. 사공은 그 작은 키를 조종해서 큰 배를 움직입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5절)
가끔 큰 산불이 일어날 때 보면, 누군가 무심코 버린 담배꽁초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습니다. 5절도 작은 불이 큰 숲을 다 태우는 것처럼, 혀도 작지만 그렇게 위험하다고 설명합니다. 작은 것 같아도 치명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큰 손실도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혀라는 것이 아주 작지만, 얼마나 큰 파괴력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혀의 위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오래 전 어느 이민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를 청빙하기 위해 청빙위원회가 조직이 되었습니다. 여러 후보를 검토하다가 결국 투표를 통해 한 분이 선정되었는데, 청빙위원들 중에서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분을 모시자고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교회에는 아주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는데, 이런 일을 결정할 때 의견을 달리했던 사람들도 일단 결정이 내려지면 그것을 따른다는 의미로 다시 투표를 해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다시 투표를 하여 만장일치로 청빙 결정이 되었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습니다. 반대했던 사람 중 하나가 “사실 나는 반대했었는데, 억지로 만장일치로 하자고 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은 회의석상에서는 자기 의견을 발표하지 못하고, 회의장 밖에서 다른 소리를 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들은 교인들 가운데 그 말을 무시하거나 '그러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거기에 솔깃하여 ‘교회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하며 분개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결국 목사 청빙 결정은 무효가 되었고, 청빙위원장은 책임을 지고 교회를 떠났으며, 그 후 그 교회는 목사 없이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들끼리 계속 싸우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슬프지만 실화입니다.
그런데 혀를 잘못 놀려 결국 교회를 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그 청빙위원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무슨 말씀을 듣겠습니까? 정말 안타까운 것은, 교회를 깨고, VIP나 초신자들의 마음에 교회에 대한 환멸을 심어주고, 그 지역에서 교회를 조롱거리로 만들었으면서도, 자기는 여전히 ‘나는 정의를 위해 싸웠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전에 섬기던 교회에서도 건축 문제를 다룰 때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회에서 다 결정하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당회원 한 명이 공동의회에 나와서 딴소리를 하는 겁니다. “나는 이것과 반대 의견을 냈다. 이것은 내 의견이 아니다.” 너무 답답하고 안타까웠습니다. 비록 의견이 달랐어도 당회에서 결정이 되었으면 그대로 따르자고 서로 얘기까지 다 했으면서, 공동의회에 와서는 또 엉뚱한 소리를 한 것입니다. 그 공동의회 자리에는 금방 믿은 초신자들도 있었는데, 당회원들끼리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격론을 벌였습니다. 그때 목회자로서 너무 안타깝고 창피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6절)
"지옥 불"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혀가 하는 일이 엄청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신의 혀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혀의 엄청난 파괴력을 모르기 때문에 쉽게 말을 내뱉습니다. 혀의 엄청난 파괴력을 모르기 때문에 쉽게 말을 전합니다. 거기에 자기 의견까지 섞어서 전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지도자가 되려면 혀를 잘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1절)
여기서 “선생”이란, 어린이나 청소년 교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권위 있는 말을 해야 하는 위치를 말하는데, 그런 자리에 서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선생'은 요즘으로 말하면 목사나 장로나 안수집사나 권사 등의 교회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뜻은 정말로 선생이 되지 말거나 교회의 지도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직책 때문에 교인들은 자기의 말을 믿어주는데, 영적 지도자가 잘못 가르치면 교회 전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성가대원과 교사만큼은 반드시 등록한 교인이어야 할 수 있습니다. 성가대는 예배인도자이기 때문이고, 교사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단인 사람이 우리 아이들에게 이상한 사상을 가르친다면 그게 되겠습니까?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과정을 거치게 해서 교인으로 등록하게 하고 그런 분들이 교사로 사역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교회가 갈라질 때, 주로 그렇게 되는 원인 제공을 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너무나 잘 믿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너무 잘 믿지만 혀를 잘 간수하지 못한 분들이 그렇게 합니다. 말 하나로 인생을 망칠 수 있습니다. 가정을 깰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깰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한 나라를 파멸로 몰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혀를 잘 간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혀를 간수하는 길
그러면 어떻게 해야 혀를 잘 간수할 수 있겠습니까? 야고보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1) 혀는 길들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7-8절)
혀는 어차피 길들여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혀로 실수하는 기회를 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1절에서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권위 있는 위치에 서지 않으면 그만큼 실수를 줄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2절)
우리 주변에 혀를 다스리지 못해 실수하는 분들을 종종 보는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자기가 혀를 잘못 놀리고 있다는 것도 의식을 못하는 점입니다. 특히 말을 전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자기는 잘 전한다고 하지만, 어떤 말이든 간에, 100% 그대로 다른 사람의 말을 정확하게 전하는 경우는 불가능합니다. 실수로 잊어버리기도 하고, 고의로 자기에게 불리한 말이나 안 좋게 느껴진 내용은 빼고 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의 뇌는 자기가 듣기 싫은 말은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게다가 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나 해석을 슬쩍 집어넣어서 얘기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남의 것이든 내 것이든, 혀는 길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혀를 잘 간수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야 정말 조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내다 보면, 누군가가 와서 다른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얘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에는 그런 말을 들으면 그 사람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지혜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남의 판단에만 의존하지 않고, 비난을 받는 사람과 직접 대화를 나누어, 그쪽 얘기도 듣고 객관적인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절대 한 쪽 말만 듣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한 쪽 말만 듣고 확인도 안 된 상태에서 흥분부터 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로 그것이 사탄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 됨을 깨려는 의도입니다.
또 한 가지 배운 지혜가 있는데, 비판 받는 사람 대신에 비판하는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 관해 긍정적인 말과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동시에 있을 때에는, 둘 중에 누가 더 상대방과 가깝고 잘 아는지 보고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성품이 따뜻하다고 하고, 멀리서 보는 사람은 냉정하다고 하면, 가까운 사람의 평가를 받아들여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2) 혀를 잘 다루기 위해서는 인격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도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9-10절)
어떤 인격을 갖추고 있는지는 자기가 어떤 말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혀는 자신의 인격을 측정하는 온도계와도 같습니다. 여러분, 요즘에 자신이 어떤 말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입만 열면 불평만 한다면, 그것은 내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격을 가졌다는 증거가 됩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말을 하며 살고 있다면, 교만한 인격을 가졌다는 증거입니다.
좀 점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말을 들을 때, 비난하는 사람과 비난받는 사람 중에서 누가 더 믿을만한 사람인지를 봅니다. 비난하는 사람이 평소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말에 무게를 더 두지만, 비난 받는 사람이 평소에 신뢰할만한 사람이면, 그 비난을 무시합니다. 사람은 대개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평소에 별로 존경할만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면, 그 비난을 당하는 사람이 오히려 존경 받을만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말은 인격의 표현이기 때문에 인격을 바꾸지 않고 말만 바꾸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어떻게 인격을 바꿀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이미 영접한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을 구주로는 영접했지만, 여전히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자기는 그분의 종으로 살아야 제대로 될 수 있습니다.
속사람이 변하지 않고도 노력에 의해서 어느 정도 화를 자제할 수는 있습니다. 억지로 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화내는 말이나 못마땅한 표현을 하지는 않지만, 얼굴에는 화가 나 있거나 못마땅해 하는 표정이 가득한 것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말을 어느 정도 조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언젠가 그것은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런 식으로 억지로 참고 있다가 한 번 터지게 되면 아주 크게 터집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의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며 성령의 능력을 받아 우리 속사람을 바꾸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제야 우리의 말이 제어될 수 있습니다. 말을 조심하려고 노력하기 전에 주님께 순종함으로 인격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3) 혀를 긍정적으로 써야 합니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11-12절)
혀는 자신의 인격을 재는 온도계인 동시에, 온도 조절 장치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인격을 측정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인격을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말씀으로 온 우주를 만드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무슨 말을 가장 먼저 하십니까? ‘아이고, 죽겠다.’라고 하십니까? 그렇게 시작하면 하루 종일 죽을 것 같은 일만 생깁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이런 말을 하면 어떻습니까? ‘하나님, 사랑합니다. 오늘도 생명을 연장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시작해보십시오. 하루가 달라집니다. 하루 종일 밝게 살 수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하는 말이 중요합니다. 무슨 긍정적 사고방식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 사랑이 생기기도 합니다. 감사하기 때문에 감사한다고 말을 하지만, 감사한다는 말을 하면서 감사가 생기기도 합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바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말을 많이 듣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참 마음이 기쁩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힘드시죠? 참 좋네요. 머리를 그렇게 하니까 예뻐요.’ 되도록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적인 말을 하면 좋겠습니다.
어제 에어컨디션이 고장 나서 관리위원장께서 교인들에게 급히 오늘 아침 카톡을 보내셨습니다. 그랬더니 여러분들이 답글을 달았는데 그것이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왜 진작 점검도 안 하고 그랬어요?'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 "늘 수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정말 얼마나 좋습니까? 정말 감동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런 겁니다.
혹시 누가 이상한 옷차림으로 오더라도 ‘저게 뭐야?’ 하며 이상하게 쳐다보기보다는 ‘참 개성이 있고 좋네요.’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무슨 말을 하면서 살고 계십니까? 하늘의 말을 합니까, 땅의 말을 합니까? 칭찬하는 말을 합니까, 비난하는 말을 합니까? 감사하며 삽니까, 불평하며 삽니까?
자신의 혀의 파괴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동시에 그만큼 감사의 말, 기쁨의 말, 아름다운 말을 하는 것도 엄청난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너 참 말을 예쁘게 한다. 참 아름답게 한다. 내가 너무 기쁘다."라고 하시도록 정말 아름다운 말만 하며 살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