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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9일 주일예배
✦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산다 9 ✦
“믿는 자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야고보서 2장 1~13절)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면서 차별을 당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특히 이 미국에 와서 차별을 당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세상에는 차별의 종류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인종차별, 남녀 차별, 나이 차별도 있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인간 차별이라고 생각됩니다.
차별을 당해본 적은 있지만 차별을 해본 적은 없다고 생각되십니까?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인간 차별을 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말은 잘 들어주고, 내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말은 별로 안 듣고 다른 짓을 하는 것이 다 인간 차별을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 남아프리카 행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비행기를 탄 한 백인 중년여성 하나가 소리쳤습니다. “이봐요, 승무원! 자리를 바꿔줘요.” “무슨 일이시죠?” “보면 모르겠어요? 흑인 따위 옆에는 앉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이런 사람, 불쾌해요.” 그 백인 여자 옆에 흑인 남자가 곤혹스런 얼굴로 앉아 있었습니다. 승무원이 말합니다. “손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비어 있는 자리를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승무원은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고, 주위 승객들은 수군거리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잠시 후 승무원이 돌아와서 말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First Class에 한 곳 빈자리가 있으니까 그쪽으로 가시죠. 원래는 이렇게 할 수 없는데, 이번에만 특별히 배려해 드리는 겁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주위 승객들은 모두 웃으면서 흑인 남성에게 잘 가라고 인사했습니다.
1.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차별 대우 (1-4절)
오늘 본문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을 겉으로만 보고 차별 대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세기 당시 이스라엘 지역에는 높은 세율이나 빚 때문에 집과 땅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약 80-85%). 그리스(헬라)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에는 노예 신분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예로 들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2-3절)
2-3절에서 야고보는 이런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금반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부자가 교회를 방문합니다. 그러면 안내위원들이 그 부자를 좋은 자리로 안내하여 앉도록 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옵니다. 안내위원들이 그 사람은 거기 서 있든지 땅바닥에 앉든지 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특별히 그 사람들이 나빠서라기보다는, 어쩌면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만일 재벌 총수가 오늘 우리 교회를 방문했다면, 좋은 자리로 안내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야고보는 이러한 예를 들면서 심하게 야단을 칩니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4절)
그렇게 한다면 차별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안 된다고 강력히 선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1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1절)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차별해서 대우하면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교회만 아니라 세상의 조직이나 단체에서도 차별대우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미국에는 인종, 배경, 성, 나이 등에 관계없이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있습니다.
차별의 예는 얼마든지 있는데, 스포츠에도 있습니다. 제가 축구를 아주 좋아하는데, 남자축구 세계 랭킹에서 몇 년째 가장 순위가 낮은, 그러니까 가장 축구를 못하는 나라가 부탄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축구를 잘하는 선수가 몇 명 있는데 그 중에도 요즘 가장 잘하는 호날두가 있습니다. 포르투갈 출신으로 스페인 명문 레알 마드리드 클럽 소속입니다.
그 호날두 선수가 멋지게 골을 넣으면 중계하는 아나운서가 뭐라고 합니까? “호날두 선수! 역시 이름값을 하는군요. 대단합니다!” 그런데 무명의 부탄 선수가 골을 넣으면 뭐라고 합니까? “한 골 터트리는 OO선수, 자기 능력의 200%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호날두가 골을 넣고 자신만의 독특한 ‘호우’ 세리머니를 하면, “저것은 저 선수의 전매특허예요. 얼마나 멋집니까?” 그런데 부탄 선수가 골을 넣고 독특한 전통 춤을 추며 세리머니를 하면, “저건 또 뭐죠? 기뻐하는 것은 좋은데, 별 걸 다하는 군요.”
2.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되는 이유 두 가지 (5-7절)
특히 크리스천으로서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야고보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1) 가난한 사람을 차별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5-6절)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 압제받는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특별한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 (신 24:17)
야고보서 1:27에서도 참된 경건의 표지 중 하나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아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신명기의 말씀은 객(나그네)과 고아와 과부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모두 사회에서 아주 낮은 사람들입니다.
‘객(나그네)’는 우리처럼 이민 오거나 유학을 오거나 일하러 온 사람입니다. 법적으로 기댈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요즘으로 하면 외국인이라도 영주권을 받으면 혜택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요즘으로 하면 난민 같은 사람들입니다.
‘고아’는 당연히 부모가 없는 아이들인데, 고대사회에서 부모를 잃는다는 것은 마치 들짐승처럼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돌봐주고 보호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잃는다는 것은 법적인 보호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신명기 24:19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곡식을 추수하다가 잊고 거두지 않은 곳이 있으면, 그것이 생각나도 되돌아가서 베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놓아두라는 것입니다.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신 24:20-21)
이 얼마나 자상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까! 우리가 대개 생각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시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이건 신약 시대이건 한결 같은 사랑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특히 약한 자를 이토록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가난하고 불우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은 특별한 사랑을 느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겉모습을 보고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이 아프시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기 자녀를 돌봐줄 때 그 부모의 마음이 기쁜 것처럼, 어렵고 힘든 자를 돌봐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아주 기뻐하십니다. 본문 5-6절에서 야고보는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는 이들을 심하게 꾸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는데, 당신들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라고 하며 야단을 칩니다.
우리도 겉모습으로 판단하고 다른 사람을 차별해서 대우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차별해서 대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깨달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외모로 판단하지 않도록 이렇게 말합니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하였고” (신 1:17)
사도 바울도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함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롬 2:11)
베드로도 이렇게 말합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 1:17)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도 하나님처럼 겉모습으로 차별 대우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들입니다. 하나님이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면 무엇을 보십니까? 내면을 보십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이러한 성령의 열매는 모두 내면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이러한 것은 성공한 삶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돈이 많고 지위가 높아야 성공한 사람입니다. 돈이 많으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번 사람의 옹고집을 확신이나 신념이라고 말합니다. 유명한 시인이나 소설가는 불륜을 저질러도 인생을 화끈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금의 자리에 올라가 있는 정치인도, 남을 짓밟고 올라간 죄인이 아니라 정치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칭송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외모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썩고 부패해도 죄라고 여기지 않고, 성령의 열매가 맺혀도 아름답게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겉모습으로 판단하고 차별해서 대하는 세상적 기준인 것입니다.
여자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쁘고 늘씬한 여자는 아무리 사치를 해도 사치가 아니라 멋지다고 여깁니다. 이랬다, 저랬다 변덕을 부려도 변덕이 아니라 발랄하다고 좋아합니다. 그런데 못 생긴 여자가 변덕을 부리면 꼴값 떤다고 하고 주책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두 다 외모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있습니까, 내면의 열매를 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안 되지만, 특별대우를 해도 안 됩니다. 부자라고, 박사라고 해서 특별대우를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을 차별대우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어떤 직위를 가진 분들을 부를 때 ‘아무개 박사님, 아무개 교수님, 아무개 사장님, 회장님, 닥터 아무개’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특별대우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그런 분들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만일 한 사람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렇게 부른다면, 모든 사람을 다 그렇게 불러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지위를 가지고 들어오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기능상 집사, 장로, 권사, 전도사, 목사 등의 직책이 있지만, 사실은 누구나 주님 안에서 형제자매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타이틀을 부르는 것은 괜찮을지 몰라도, 교회에서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으로 부른다는 것은, 은근히 그런 자리를 높인다는 말이 됩니다. 말로는 세상에서의 지위는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말끝마다 ‘박사님’, ‘교수님, ‘닥터’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진짜 기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3. 차별대우나 특별대우를 하지 않는 길 (8-13절)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차별대우도, 특별대우도 하지 않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2절)
이 구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을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더 이상 천국에 갈 수 있냐 없냐를 가지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약속해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민할 일이 있다면, ‘천국에 가서 하나님 앞에 설 때 나의 삶을 어떻게 말씀드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상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 상의 기준이 13절에 나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13절)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긍휼입니다. 긍휼(자비)을 베풀며 산 자는 하나님 앞에 설 때 기쁠 것입니다. 반면 긍휼을 베풀지 못한 사람은 긍휼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큰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은 항상 마음이 각박하고 여유가 없습니다. 괴롭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살면서 인종 차별이란 단어를 많이 이야기합니다. 정말로 인종 차별이 심한 곳으로 생각됩니다. 오래 전 어떤 유학생의 말: ‘미국에는 인종 차별이 있지만, 한국에는 인간 차별이 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단일 민족이라 그런지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단일민족으로 된 국가로서 두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국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민족이 남들을 무시하고 깔보는 말이 너무 많습니다. 떼놈, 왜놈, 양놈, 코쟁이, 쪽발이, 오랑캐 등등 많습니다.
외국인이면 무조건 멸시하고 깔보는 습관이 우리에게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것을 봅니다. 미국에 와서도 그런 편견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정말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깜둥이’라는 말은 절대로 쓰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부릅니까?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또한 히스패닉들을 낮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긍휼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보통 ‘멕시코 애들’이라고 부르는데, 일단 ‘아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모두가 다 ‘멕시칸’이 아닙니다. 니카라과도 있고, 과테말라도 있고, 많습니다. 그냥 ‘히스패닉 분들’이라고 불러주면 좋겠습니다.
타민족만 아니라 우리 한국 사람끼리도 얼마나 무시하고 깔보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보면 한국 사람은 세계에서 가장 잘난 민족인 것 같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삽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긍휼의 눈으로 타민족을 볼 때 인종 차별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긍휼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볼 때 인간 차별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나가는 말]
우리는 서로를 향해 긍휼의 눈으로, 사랑으로 눈으로 보기를 원합니다. 죄악이 가득 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외로움도 있고, 좌절도 있고, 소망이 이뤄지지 않는 아픔도 있습니다.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감을 느끼며 살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속에 있는 그런 아픔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긍휼의 마음을 품을 때 다른 분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그런 아픔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서로를 돌봐줄 수 있는 가정교회와 같은 모임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소원과 아픔과 외로움과 두려움을 나누고 서로 사랑으로 뜨겁게 기도해줄 수 있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필요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 차별하거나 무시하는 관계가 아니라, 긍휼과 사랑으로 마음속을 들여다봄으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공동체, 서로를 섬겨주고 기도해주는 공동체,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