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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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5일 주일예배
✦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산다 7 ✦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기”
(요한복음 10장 1~5절)
[들어가는 말]
우리가 요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는 음성을 귀에 들려 주신다기보다는, 마음에 들려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에 생각을 심어주신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실제로 들었습니다. 교회 역사의 많은 인물들도 역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육성을 평생 한 번 들을까 말까 거의 없는데,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굳이 목소리로 들려주셔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급한 경우가 아니면 소리로 들려주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귀에 들려주셔서 여러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하실 필요가 없이, 그 모든 중간 과정을 다 없애시고 직접 뇌에 주님의 생각을 심어줄 수가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살려면, 우리에게 머리에 심어주신 생각에 집중하면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면 뭐든지 다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머리에 떠오른다고 해서 전부 다 하나님의 음성은 아니라는 것을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우리에게 떠오르는 생각은 세 가지 원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이거나, 사탄이거나, 정말 하나님이시거나, 셋 중 하나입니다.
어떤 생각이 머리에 탁 떠오를 때,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생각인지, 마귀가 속삭이는 유혹인지, 아니면 그냥 나 자신의 생각인지 그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오늘은 하나님의 음성을 마귀의 음성과 분별하는 법을 조금 더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예언과 점의 차이
그 전에 중요한 질문을 하나 드려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이전에 점을 쳐본 적이 있으십니까? 믿지 않을 때 점쟁이에게 가서 점을 치거나, 사주팔자, 궁합 등을 본 분이 계실 겁니다. 어떤 분이 그럽니다. “내가 예수 믿기 전에는 그랬지만, 예수 믿고 나서는 점이 없는 줄 알았는데 있더라. 그게 바로 예언 기도다. 점쟁이에게 가서 점을 치는 것이나 예언하는 사람에게 가서 예언기도를 받는 것이 비슷하더라.” 진짜입니까?
예언기도를 받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점과 예언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똑같다고 하면 문제입니다. 똑같지 않습니다. 또 어떤 분은 이럽니다. “복채를 내고 안 내고의 차이다.” 그러자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아니야, 예언기도도 헌금을 드려야 돼.”
그렇다면 차이가 없습니까? 분명히 차이가 있고,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언자와 점쟁이의 결정적 차이가 뭔가 하면, 세계관, 인생관입니다. 점쟁이는 이미 결정된 인생관입니다. 이 세상은 다 결정되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인생이 다 결정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사주팔자(음력 생년, 월, 일, 시)에 의해 인생이 결정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몇 백 년 만에 온다는 좋은 날이 가끔 있습니다. 몇 년 전에도 흑돼지 해, 백말 해 등이 왔는데, 그럼 그 해에 태어난 아이들은 다 운명이 같습니까? 말이 안 됩니다. 또 몇 백 년 만에 한 번 온다는 좋은 날에는 산부인과들이 미어터집니다. 전부 다 기다렸다가 그 날 낳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인생이 바뀝니까? 그 날 태어난 아이들의 인생이 다 똑같아지면 말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성경에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셨다고 하면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비과학적이네.”라고 하며 안 믿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그런 것은 참 잘 믿습니다. 그럼 불공평한 게 아닙니까? 객관적으로 보십시오. 뭐가 믿기 힘듭니까?
누가 지어낸 이야기 같은데, 어느 나라에 용한 점쟁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백발백중으로 운세를 맞추는 사람이었는데, 하루는 심심해서 자기 운세를 보다가 자기가 열흘 후에 죽는 운세가 나왔습니다. 깜짝 놀라서 자기가 안 죽도록 왕을 찾아가 자기를 보호해달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왕은 의심도 생기고 우습기도 해서, “네가 진짜인가 아닌가 테스트해보겠다.”라고 하고 상자를 가져오게 하여 그 안에 쥐가 몇 마리 들었나 맞춰보라고 했습니다. 점쟁이는 7마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에이, 엉터리야! 1마리만 들어 있는데 무슨 7마리냐? 당장 잡아 죽여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이 되어 왕이 혹시 하는 마음에 상자를 열어 보니, 정말 7마리가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밤사이 쥐가 새끼를 6마리 낳아서 정말 7마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놀라면서 저런 용한 점쟁이를 죽이면 안 되겠다고 사람을 보내어 죽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망나니는 입에서 물을 뿜으며 점쟁이를 죽이려 하는데, 왕의 종이 말을 타고 오면서 저 멀리서 “죽이지 마라!” 하고 외쳤지만, 망나니는 너무 폼 잡지 말고 빨리 죽이라고 외치는 줄 알고 그대로 목을 쳐 죽여 버렸습니다. 그래서 점쟁이는 자기가 죽는다고 운세가 나온 바로 그날 그 시에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점쟁이들의 인생관입니다. 모든 사람의 운명은 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겁니다. 왕을 안 찾아갔으면 안 죽었을 텐데 괜히 찾아가 죽었지만, 그것이 결국 그의 운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점쟁이의 인생관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은근히 그런 주제로 된 드라마나 영화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점쟁이들은 ‘결정론적 운명론’을 믿고 있습니다. 전부 다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쟁이들이 하는 말들이 뭐가 있습니까? ‘40대 후반에 부가 찾아온다’, ‘50대 중반에 귀인을 만날 것이다’라는 소리를 하는데, 다 정해진 운명을 전제로 한 말들입니다. 아직 모를 뿐이지 다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운명이 정해져 있으니까 사실은 장사가 안 됩니다. 다 체념하고 더 이상 안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하며, 부적을 쓰라고 하거나 굿을 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이라도 한국에 갔을 때 혹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이용해서 돈 벌이하려는 비즈니스입니다. 부적이나 굿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동양철학에 의하면 운명은 절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데에 괜히 돈을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예언은 무엇인가? 예언자는 결코 미래를 맞추는 사람이 아닙니다. 점쟁이처럼 미래에 어떤 일이 닥칠 것이라고 해주는 게 아닙니다. 정해진 운명을 미리 말하는 것이 예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알려주신 것을 그대로 받아서 전하는 대변인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자도 예언자가 될 수 있고, 여러분도 서로에게 예언자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목장에서 나눔을 가질 때, 나는 별 큰 생각없이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라서 그것을 나누었는데, 다른 형제자매의 마음에는 그것이 확 와 닿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는 겁니다. 저도 그냥 준비해서 설교하는데, 원래 의도치 않았거나 원고에도 없는 말을 설교 중에 한 것에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적이 꽤 있습니다. 저는 몰랐지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언자의 세계관은 점쟁이처럼 닫힌 세계관과 인생관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어떤 인생도 운명이 이미 다 결정된 인생은 없습니다.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앞으로 우리의 인생이 바뀌고, 그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 예언입니다.
예언이라는 것은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네가 순종하면 이런 아름다운 길이 기다리고 있고, 네가 불순종하면 저런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이냐? 믿음으로 결정하라.’ 이것이 예언입니다. 지금의 선택에 의해서 우리의 인생이 나아가게 됩니다. 물론 한 번으로 다 끝나는 건 아닙니다. 지금 어떤 선택을 했어도 가다 보면 또 선택할 순간이 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믿음으로 잘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예언서들을 죽 읽어보면, 예언자들의 메시지의 핵심은 ‘두 갈래 길’입니다. ‘이것과 저것 중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 이쪽은 순종해서 좋은 길이고, 저쪽은 불순종해서 나쁜 길이다. 어디를 선택하겠느냐?’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꼭 순종으로 좋은 길을 택하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라도 꼭 불순종해서 나쁜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순종하여 복 받는 길을 택하라’고 계속 말씀하시는데, 그게 예언입니다. 예언자는 항상 두 가지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는 ‘만약에 순종한다면 당근을 준다’이고, 또 하나는 ‘만약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채찍 맞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계속 이리로 가면 끝난다. 망한다. 그러나 순종하면 다시 기회가 있다.’라는 것이 성경적 인생관입니다. 다 정해져 있는 게 아닙니다.
2.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법
이런 면에 있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지 조금 더 나누어보면...
1) 하나님의 음성은 그 어조(tone)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1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부드럽게 타이르듯 설득하십니다. 목자는 저녁이 되면 양들을 우리 안에 넣고 문을 잠급니다. 그때 문을 통과하지 않고 담을 넘어 들어오는 사람은 도둑입니다. 문을 통해서 들어가는 사람이 양의 목자입니다. 아침이 되어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면 목자가 들어가서 양을 부릅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양들이 다 똑같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양들의 목자는 한 마리, 한 마리를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일일이 이름을 붙여서 부른다고 합니다. 그렇게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르면 양이 뛰어나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양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목자가 양을 인도하듯이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것이지 강요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음성과 마귀의 음성은 어조로 구분이 될 수 있습니다. 마귀의 음성은 주로 협박조입니다. 긴장감을 막 심어주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야, 너 이것 안 하면 죽어. 빨리 해!’ ‘너 왜 이 말 안 해? 그럼 나중에 너에게 손해야. 빨리 가서 따져!’ 이런 겁니다.
마귀가 머리에 뿔 달리고 꼬리에도 뿔 달리고 삼지창 들고 빨간 옷을 입고 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너무 아름다운 모습으로 옵니다. 빛의 모습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광명의 천사’의 모습으로 옵니다. 심지어 40일 금식기도 후에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도 성경 말씀까지 인용해가면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도 성경 말씀을 인용해가면서 유혹하고 시험할 수 있습니다. 아주 거룩한 것 같은 말을 우리에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 들으면 거룩하고 성경 말씀이니까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착각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음성에는 교묘하게 분노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음성의 어조를 잘 들어야 합니다. 분노하든지, 비꼰다든지, 비난한다든지 하는 것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뒤에서 떠밀고 강요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앞에서 인도해 가십니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4-5절)
사탄은 붙잡아서 끌어오려고 협박조로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 음성을 양들이 아니까 앞에서 가면 양이 따라가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가도록 인도해주십니다. 정말 급한 일 외에는 강압적으로 하지 않으시고 부드럽고 끈질기게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계 3:20, 새)
예수님이 문(마음 문) 밖에서 두드리고 계신다는 것인데, 솔직히 주님이 능력이 없으십니까? 마음 문을 똑똑 두드리실 때 ‘누구세요?’라고 하니까 ‘나 예수인데, 문 좀 열어.’라고 하시지만 ‘싫어요.’라고 하면 문을 확 부수면서 ‘네가 뭔데 나를 거부해?’라고 하실 수 없으십니까? 당연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그래도 좀 열어다오’라고 하시며 문을 두드리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열 때까지 기다려주고 계십니다.
지금도 기다리고 계신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신 분들은 ‘아니에요.’라고 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디 안 가십니다. 계속 문을 두드리십니다. 강압적으로 때려 부수고 들어오실 수 있는데 그렇게 안 하십니다. 부드럽게, 끈질기게 문을 두드리며 말씀하십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고 있는데 예배시간에 나누었던 광고의 내용 ‘어린이부에 교사가 필요합니다.’라고 한 것이 생각나며 ‘내가 어린이 교사를 자원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는 관리부나 사역부의 여러 사역, 청소 등에 자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니카라과나 몽골처럼 ‘내가 이번에 단기선교를 가야 하지 않나?’ ‘이번 선교캠프, 가정교회 세미나, 컨퍼런스에 가야할 것 같은데 가야 하지 않나?’ 이런 마음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 분명히 그런 마음을 주셨는데 기도가 끝나면서 ‘에이, 가긴 뭘 가?’ 하며 그냥 무시해버리고 그냥 잊어버릴 때가 꽤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번에 기도할 때 또 그 생각이 떠오르는 겁니다. 그러면 ‘아, 정말 해야겠구나.’ 하고 나아가는 겁니다. 어떤 죄책감이나 강박감이나 억압되는 감정이 아니라, 기도할 때마다 끈질기게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면, 그런 부담을 계속 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2) 하나님의 음성은 그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책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에 어긋나는 음성을 들려주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인데 어떻게 또 다른 메시지를 주시겠습니까? 그러나 마귀는 성경을 인용하기도 하고, 인용할 때는 살짝 비틀어서 다르게 하고 왜곡을 합니다.
오래 전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한 자매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확신을 했습니다. “너는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라.” 그 다음에 또 이런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담임목사와 너는 영적 파트너다. 둘이 결혼식을 올리고 선교지로 떠나라.” 당연히 담임목사님은 결혼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께서 한 가정을 깨면서까지 선교사로 보내시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마귀의 음성을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가정을 깬 사람들이나 목회자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합리화합니다. ‘다윗을 봐, 다윗. 다윗도 그랬잖아. 다윗도 밧세바와의 잘못된 관계를 통해 결혼을 했고, 나중에 솔로몬을 낳았잖아.’ 그런 식으로 죄를 지은 것을 미화하려 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마귀의 음성입니다.
마귀가 우리의 귀에다 속삭일 때에는 고상하고 거룩한 척하지만, 성경에 반대되는 일을 하도록 부추깁니다. 하나님은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을 통해 말씀을 주시고서 그 내용에 반대되는 일을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또 직장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직장에서 일해야 하는 시간에 드라마를 봐서도 안 되겠지만, 일하는 시간에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지만, 근무 시간에 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 사업이라면 쉬는 시간에 할 수 있고 직장에서도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잠깐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에 그렇게 하는 것은 계약을 깨는 일입니다. 자기가 사인을 하고 들어갔는데 열심히 안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직장에서 일할 때 대충 하지 않고 무엇을 하든 주님께 하듯 최선을 다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 있다고 해서 어떤 방법을 써서든 성취하려고만 하면 안 되겠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음성이라면 그 방법도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생각처럼 복잡하거나 어려운 것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 안에 이미 하나님의 음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살 마음만 있다면 세상을 사는 문제의 대부분에 대한 해답이 이미 있는 것입니다.
3) 이 음성이 나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는지, 아니면 나를 정죄하는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뭘 원하십니까? 벌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십니다. 생각을 못하다 갑자기 깨달아지는 때가 있습니다. ‘네가 어제 그 사람과 대화할 때 그런 식으로 말을 툭 던진 것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으니 잘못이다.’라고 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러한 주님의 음성에 순종해서 죄를 고백하는 겁니다. ‘주님, 그렇군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가서 사과하겠습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좋은 관계로 이끌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죄를 고백하고 나면 마음속에 기쁨과 평안이 오고 찜찜하던 것이 사라집니다. 바로 그런 것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음성을 통해 구체적인 해결방법을 알려주기도 하십니다. 순종할 때 마음속에 평안과 기쁨을 주십니다.
그런데 마귀의 음성은 항상 우리에게 죄책감과 절망감을 줍니다. 우리가 뭔가를 잘못할 때 이럽니다. ‘너는 신앙생활을 20년씩이나 했는데 밤낮 그 모양이냐?’ ‘너는 30년이나 했는데 그래가지고 무슨 크리스천이냐? 네가 무슨 직분자냐? 창피하지도 않냐? 네가 무슨 교회 리더냐?’
얼핏 들으면 이게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추상적으로 애매하게 우리를 정죄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죄를 까발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누가 예언의 은사가 있다고 할 때 남들 앞에서 자기를 위해 기도하며 잘못을 까발릴까봐 두려워하는데, 그런 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식으로 예언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짜입니다. 죄책감이나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야’라는 생각, ‘나는 실패자야’라는 의식, ‘나는 아주 추한 크리스천이야’라는 절망감을 심어주는 것은, 마귀가 심어주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가 아주 좋은 방법이 바로 큐티(QT, 말씀묵상, 경건의 시간)입니다. 말씀을 읽으며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게 됩니다. 매번이 아니더라도 가끔 깨닫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깊이 묵상하다가 잘 모르는 내용이 나오면, 바로 그때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여쭈어보면 됩니다. ‘주님, 이것이 무슨 뜻인가요? 여기서 무슨 말씀을 주려고 하십니까?’
그러면 신기하게도 뭔가가 떠오릅니다. 어떤 교훈이 탁 발견이 됩니다. 참 신기할 때가 많습니다. 같은 말씀을 몇 번씩 읽었어도, 지금 주시는 말씀이 또 새롭습니다. 내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얼마나 많은 지혜를 얻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큐티를 하며 기록을 하다 보면 뭔가 또 다른 목소리가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 봐라. 넌 죄인이다 말씀을 가르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네가 뭔데 강대상에 서느냐?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 누구를 사랑하라든지 하는 말은 하지도 말아라. 너도 사랑하지 못하지 않느냐?’ 이런 것이 들리면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맞아, 이제는 위선자처럼 하지 말고 내가 지키는 것만 전해야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주님의 음성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지킬 수 있는 것만 말한다면 설교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겁니다. 설교는 여러분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기 떄문입니다. 제가 못 지킨다고 안 해야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다 전해야 합니다. 선지자들도 자기들이 다 지켜서 한 것이 아닙니다. 가서 전하라고 하시니까 전한 겁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면 결국 불안과 죄책감과 분노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나는 왜 이 따위인가? 나는 왜 요것 밖에 안 되는가?’
반면에 또 다른 음성이 있는데, 그것은 항상 평안과 위로를 주는 음성입니다. ‘네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비하면 네가 목회자로 얼마나 많이 발전했느냐?’ 그러고 보니 진짜 그렇습니다. ‘네가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제대로 사랑하며 섬기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네가 그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 그 사람을 위해 네가 기도하는 것을 내가 다 듣고 있다. 나는 그게 기쁘다. 한 걸음씩 함께 나아가보자.’ 이런 것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막연한 죄책감과 정죄와 절망감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발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지만 오히려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 (롬 8:33-34, 새)
우리는 형편없는 죄인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벌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해주셨습니다. 의롭다는 말은, 성경 전체를 첫 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100% 다 지키는 사람으로 봐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의롭습니까? 아닙니다. 어떻게 성경을 다 지킵니까? 그런데 그렇게 봐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분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고 그렇게 의롭다고 여겨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십니다.
정죄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너는 죄인이다.’라고 계속 비난하고 깎아내리고 넘어지게 하고 무너뜨리는 것이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진정한 회개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혼자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착각하고 괴로워한 적이 있으시다면, 그 정죄와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하나님의 음성은 관계 회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정죄함을 심어주고, 하나님은 화목을 가져다주십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24)
내가 잘못하고 화목(화해)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예배드릴 생각을 하지 말고 먼저 그 사람과 화해를 한 뒤에 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실 정도로, 하나님은 화목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러니까 화목한 관계, 화해의 관계, 용서의 관계, 사랑의 관계를 가져오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언제나 정죄의식을 심어줍니다. 마귀는 성경을 인용할 줄도 알고, 교묘하게 종교적인 용어도 쓰면서 다가옵니다. 그래서 속기가 아주 쉽습니다. 잘 봐야 합니다. 그래서 평소에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라는 것이 억지로 하시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안 하면 내가 속기 때문에 우리는 조심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라는 겁니다.
‘저 사람은 교회의 리더라고 하면서도 위선자다. 저 목사는 엉터리다. 저 사람은 직분자이지만 가망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식의 부정적이고 남을 정죄하는 생각은 절대로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에게서 온 생각입니다.
‘나는 거룩한데 남들은 거룩하지 못하다.’ ‘나는 이렇게 희생하는데 저 사람은 저 모양이고 이기적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만 옳고 남들은 다 틀렸다는 생각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이 아니라 마귀가 심어주는 생각입니다. 화목을 깨는, 관계를 깨는 것이 마귀의 음성입니다. 거기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런 음성은 주변의 친한 사람을 통해서도 옵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마귀의 음성을 듣고 흔들립니까? 또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하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의 도구로 쓰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잘했다고 그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메시야가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한다고 하니까 “그럼 안 됩니다.”라고 대들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사탄이라는 말이 아니라, 베드로가 사탄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고 사탄이 원하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역사한 사탄에게 뒤로 물러가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베드로처럼 사탄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문제점을 보여주실 때에는 그 사람을 정죄하고 미워하고 무시하고 비난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목사의 결점이 많이 보이시죠? 기도해주십시오. 장로님들이 혹시 마음에 안 드십니까? 기도해주십시오. 위원장이나 집사라고 하면서 왜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분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형제자매를 정죄하고 미워하고 거부하고 저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이겠습니까? ‘저 사람은 왜 저것 밖에 안 돼.’라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마귀의 음성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순종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마귀의 음성에 순종하시겠습니까?
[나가는 말]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분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평소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친한 사람끼리는 말을 안 해도 통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운동선수들도 눈빛만 봐도 통한다고 합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별 말을 안 해도 마음이 통하게 됩니다. 평소에 같이 훈련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말씀과 기도로 함께 훈련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에 익숙해지는 겁니다.
한 번에 20분 정도는 계속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20분은 그냥 가이드라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들려오는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만이 아닙니다. 너무 이 세상에 잡소리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주님의 음성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하는 것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정리해서 반복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말로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은 앞날을 예측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요즘도 예언의 은사를 받고 예언기도를 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단, 조심해야 합니다.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는 것도 중요하고, 또 자기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라고 하는 사람의 말이 진짜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도 중요합니다. 이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압니까? 예언을 아예 안 듣는 것도 문제입니다.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너무 심취해도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 같이 잘못된 길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잘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이것은 다 결정되었다, 끝났다’라고 말하면 가짜입니다. 순종하면 아름답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 되고, 불순종하면 채찍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채찍조차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때려서 다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무너뜨리기 위한 것은 사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때려서라도 고치고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미 다 결정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예언기도를 받고 와서 근심에 빠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치 점집에 갔다 온 것처럼 그럽니다. 마음이 점집에 가듯이 가니까 그런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라고 하니까 근심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다 결정되었다고 하면 가짜입니다.
둘째, 방향이 아니라 자세한 디테일(detail)을 이야기하면 그것도 가짜입니다. 하나님은 대체로 디렉션(direction)을 주십니다. 정말 자세한 내용이 필요할 때는 부드럽게 잘 이야기해주시지, 겁을 주면서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도 대체로 방향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서 ‘네가 믿음으로 순종하며 결정하라’ 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성품과 다르면 가짜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나 하나님의 명령과 다르다면 가짜입니다. 특히 불길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 믿음이 아주 좋은 여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3명이었는데 늦둥이로 4번째 아이를 또 가졌습니다. 믿음이 좋아서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도 기도하는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 분이 있었는데 예언의 은사를 받은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다가 자기를 보며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느냐고 했더니 아니라고 하며 말을 안 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안 좋은 거라 그래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괜찮아요, 말씀해 보세요.” 그러자 말을 했습니다. 이분이 기도를 하는 중에 핸디캡 아이들이 축구하는 환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환상을 보았는데, 무슨 행렬이 지나가는데 자세히 보니까 시커먼 옷을 입은 장례행렬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 그 집사님이 울면서 같이 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듣고 ‘난 괜찮아요’라고 하던 분이 드러누웠습니다. 그리고 너무 불안하고 너무 괴로워서 낙태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은 그런 거 아니라고 위로하며 격려했습니다. 기도해주면서 “혹시라도 이 아이가 장애인으로 태어나더라도 거기에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는 겁니다. 생명은 소중합니다.”라고 하며 특별히 고린도전서 14장 3절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게 예언이지, 그렇게 불안하게 하고 불길하게 하고 드러눕게 만드는 것이 예언이 아닙니다.
마침 그 즈음에 이 집사님의 남편이 미국에서 한국에 방문을 갔다가 이전에 다니던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거기서 오랜만에 만나는 교우들과 인사를 하다가, 마침 그날 미국에서 예언 사역을 아주 건전하게 하는 미국 목사님이 강사로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만날 수 있겠느냐고 하여 만났습니다. 그분이 기도해주더니 바로 고린도전서 14:3을 주셨다고 말씀을 전해주었다. 그래서 확신을 받고 돌아왔고, 어떻게 주셔도 믿음으로 받겠다고 하며 아기를 낳았습니다. 나중에 이사를 가서 담임목사님이 몇 년 후 안부를 물으며 아이는 잘 자라느냐고 했더니, 그 아이가 너무 창조적이고 너무 놀라운 아이가 된 것입니다.
사탄은 영적인 사람들도 속일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속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 기도해주었던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그분이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그런 내용은 받지 않아도 좋습니다. 불안하게 하고 저주하고 무너뜨리는 예언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언이 아니라 마귀의 음성입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야 합니다. 예언은 앞날을 점쳐주는 게 아닙니다. 현재 나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으로 결정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fortune teller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뜻을 보여주시는 것이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한국에 가실 때 점은 취미로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재미삼아, 취미삼아 본다는 사람이 있는데, 재미도 취미도 안 됩니다. 일단 보면 거기에 매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 보지 마십시오. 장난으로도 보지 마십시오. 보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 걸 보면 마음이 무너지고 거기에 매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믿음이 좋은 젊은 커플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집사님인 신랑의 어머님이 옆집 사람의 말을 듣고 오더니 “얘야, 너 걔와 궁합을 좀 봐야겠다. 봐서 나쁠 게 없다더라.”라고 하면서 보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안 보겠다고 버텼지만, 어머니가 살짝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보고 오더니 근심스러운 얼굴로 왔습니다. “얘, 너랑 걔랑 안 좋단다.” 그래도 그것이 아니라고 잘 설명하여 결국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될까요? 너무 행복하게 잘 살다가 어느 순간 부부싸움을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생각날까요? ‘아내와 궁합이 안 좋았다고 했는데...’라는 것이 생각나는 겁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매이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재미로도 취미로도 볼 이유도 없고, 그러니 맹세하십시오. 나는 그런 것은 절대로 안 하겠다고 맹세하십시오. 성경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다 없애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성경공부가 필요하고, 큐티(말씀 묵상)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알 때 정확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반복해서 듣다보면 이것이 귀한 영적 습관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삶이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삶, 또 그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우리보다 앞서 가시는 주님께 순종하여 잘 따라감으로, 진정한 평안과 기쁨과 위로와 승리를 체험하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