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2017년 5월 14일 주일예배
✦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산다 2 ✦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맺으신 백성”
(예레미야 31장 31~34절)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드라마를 좋아하십니까? 그런 분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시는 것은 좋지만, 건전한 드라마를 보셔야 하고, 또 유명한 드라마라도 잘 생각하면서 보셔야 합니다. 특히 요즘 많은 드라마나 영화의 인기 주제가 ‘불륜’이나 ‘환생’입니다.
특히 ‘불륜’의 관계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륜의 관계에 있는 커플이 식사를 하면, 드라마 장면도 아름답고 노래도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실제 부부가 만나는 장면은 분위기도 어둡고 노래도 칙칙하고 그렇습니다. 실제로 교외의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남녀 커플 중 대다수가 불륜 커플이라는 말도 있듯, 그런 것들이 요즘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드라마의 무서운 점이 무엇입니까? 나는 괜찮다고 하며 볼 때 거기에 빠져든다는 것입니다. 불륜 커플이 나오면 ‘저런 못된 것들’이라고 저주를 퍼붓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도 저렇게 하면 얼마나 인생이 멋질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내 배우자를 보면 내 옛날 첫사랑을 방해한 방해꾼으로 여겨집니다.
여러분, 그런 게 다 뭔지 아십니까? 롬 1장의 말씀과 같이, 자기만 그렇게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남들도 그렇게 하라고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회개하며 나와야 하는데 다수를 찾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하니까 괜찮나 보다.’라고 합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그저 좋다고 따라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세상의 잘못된 풍조에 휩쓸려 살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12:2에서는 ‘이 세상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 것들을 따라가게 될 때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그것들의 종이 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열매가 아니라 추하고 썩은 열매만 내게 됩니다. 그래서 불행해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런 현상이 누구에게도 일어났었는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던 이스라엘에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의 우상들을 따라가고 섬기며 하나님의 법을 버렸기 때문에 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게 아니라, 하나님도 섬기면서 우상들을 많이 섬겼기 때문입니다.
1. 새 언약을 세우시는 이유 (31-32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1절)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바로 다음 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2절)
여기서 하나님은 이렇게 한탄을 하십니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을 남편으로, 이스라엘을 아내로 표현하는 구절들이 종종 나옵니다. 호세아가 대표적입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소개하십니다.
그런데 부부사이의 관계를 이스라엘이 깨뜨렸다고 하십니다. 불륜을 저질렀다는 말입니다. 남편을 두고 나가서 바람을 피운 여인처럼, 이스라엘은 남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나가서 온갖 우상 숭배를 저질렀습니다. 분명히 남편으로 두고 있으면서도 나가서 불륜을 저질렀다는 겁니다. 끊고 나간 게 아닙니다. 결혼관계에 있으면서 그랬습니다. 그래서 더 악합니다. 호세아에게 하나님이 음란한 여인과 결혼해서 자녀를 낳으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음란한 여인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맺었던 첫 언약이 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 깼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많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왜 나를 버리셨는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버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등진 것입니다.
부부 중에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울 때, 배우자는 물론이고 자녀들도 엄청난 고통을 겪습니다. 관계가 깨어집니다. 나중에 관계가 다시 회복되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갑니다. 그래도 회복이 잘 안 됩니다. 아무리 드라마에서 불륜의 관계를 아름답고 멋지게 미화하더라도 그렇지 않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저들은 어쩔 수 없는 관계다. 이쪽도 자기 가정에서 너무 불행하고 저쪽도 자기 가정에서 너무 불행하니까, 불행한 사람들끼리 사랑하는 것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지 않느냐?’라고 동조합니다. 바로 그런 게 무서운 겁니다. 하나님이 언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그것은 드라마일 뿐입니다. 현실은 언제나 고통스럽고 추잡합니다. 드라마처럼 아름답게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이야기입니까?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가 깨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냥 쫓아내거나 관계를 정리하지 않으셨습니다. 놀랍게도,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그것이 새 언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깨어진 언약 대신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31). 여기에 보면 두 가지 언약이 등장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언약을 두 번 맺으셨습니다. 옛 언약이 구약이고, 새 언약이 신약입니다.
오래 전 1970년대에 한국 교회가 엄청난 부흥을 할 때 부흥사들 중에서 굉장히 웃기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유명한 분들 중 구봉서 장로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처음 예수 믿고 부흥회에 갔다가 부흥사가 너무 웃기니까 “아니, 저런 건 우리 전공인데 왜 저 양반이 저걸 하고 있나?”라고 했을 정도로 웃겼다는 것입니다.
그 웃긴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겁니다. “여러분, 이 약 한 번 잡솨 봐! 두 첩만 먹으면 만병통치, 불로장생, 영생복락! 그 두 첩은 ‘구약’과 ‘신약’!” ‘약’ 자가 다르지만 한국말 발음이 같으니까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지금은 별로 안 웃기지만, 처음 들으면 아주 웃긴 이야기입니다.
이 ‘언약’이라는 말은 영어로 covenant(=testament)란 단어인데, 이것을 한글로 ‘언약’이라고 번역했습니다. 32절에 나오는 “이 언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손을 잡고 이집트에서 모세를 통해 끌어내시던 때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세우신 언약입니다. 이 언약을 세우실 때 십계명도 주시고, 백성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들을 다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다.”라고 하셨고, 이스라엘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라고 맹세를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라는 것은, 알지 못하고 지은 죄들을 용서해주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백성들은 고의적인 죄악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게 되면 제사를 통해 사함을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에 대해 굳게 서약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자발적으로 우상 숭배를 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영적인 불륜을 저지른 이스라엘에게는, 제사를 통해 더 이상 그들의 죄를 해결할 방법이 없게 된 것입니다. 모르고 한 게 아니라 고의적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으로서는 용서받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자비입니다. 바로 이런 무조건적 용서가 새로운 언약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기초가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새가족반”에서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오늘 밤 세상을 떠나도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싫어하는 분들도 있는데,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위험하고 불확실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디서 어떻게 죽더라도 천국에 들어간다.’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 크리스천의 특권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크리스천)이십니까? 하나님의 자녀이십니까? 그렇다면 이 특권을 갖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원의 확신이 없이 교회 생활을 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처음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데서 세례를 받고 교회를 다니다가 우리 교회에 온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 중 굉장히 많은 수가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생명의 삶>과 “예수 영접 모임”을 통해 ‘아, 내가 구원을 받은 사람이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구원의 확신을 못 가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확신의 근거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혹시 지금 당장 죽으면 ‘나는 천국에 못 가지, 부족하니까.’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구원의 근거를 잘못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예수님 안 믿으세요?”라고 물으면 “믿는데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천국에 못 가느냐고 하면 구원의 확신이 없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확신하는 근거는 자기 기분과 자기 생각입니다. 그래서 기분에 따라 바뀌는 겁니다. 어떤 때는 기분이 좋아서 구원받았다고 느끼다가도, 어떤 때는 기분이 나빠져서 구원받지 못한 것처럼 느끼는 겁니다.
부흥회 참석해서 엄청난 은혜를 받으며 예수님을 영접하실 분들 일어나라고 하면 영접하고 일어납니다. 그런데 나중에 또 부흥회를 하면 또 영접한다고 일어납니다. 아니면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을 때는 너무 좋은데,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말다툼이라도 하게 되면 교회에 안 간다고 합니다. 그러다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물어보면 못 갈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우리의 느낌이나 기분이 아닙니다.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삶> 간증도 해주셨지만, 성경에 ‘대해서’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직접 자기가 성경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 즉 구원을 주겠다고 하신 약속에 근거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 내가 잘하고 못하고, 내가 교회에 열심히 하고 안 하고, 또는 내가 기분이 좋고 나쁘고에 따라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막 살아서는 안 됩니다. 정말 구원을 받은 사람은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내용이 하나님께서 주신 두 번째 계약, 새로운 언약, 즉 신약입니다.
제 부모님이 LA에 사십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LA행 비행기를 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갑자기 메시지가 와서 “지금 뉴욕에 꼭 와주셔야 합니다.”라고 연락이 옵니다. 그래서 ‘LA행 비행기를 탔는데 뉴욕으로 오라고 하니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을 하는데 비행기는 이미 떴습니다. 그래도 저는 뉴욕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복도에 나가서 뉴욕을 향해 열심히 뜁니다. 그러면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할 때 어느 공항에 도착합니까? 당연히 LA입니다. 저는 비행기 맨 뒤의 화장실에 도착할지 모르겠습니다. 요즘에는 이런 것에 대해 심해져서 테러범으로 몰릴 수도 있으니 함부로 난동을 부리고 그러면 안 되겠습니다.
아직도 이해가 안 가신다면 집을 사는 경우를 생각해보시면 되겠습니다. 처음 집을 살 때 어떻게 합니까? 몇 군데 집을 보다가 한 곳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집주인과 가계약을 하고, 융자(loan)를 신청하고, 다 되면 나중에 Closing 하는 날 사무실로 가서 계약서에 사인을 합니다. 집 주인도 사인을 하고 사는 나도 사인을 합니다. 그래서 사인을 하고 나면 그 집은 내 집이 됩니다.
처음으로 집을 산 것이기 때문에 ‘이 집이 정말 내 집인가?’ 하고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약서에 사인을 했기 때문에 그 집은 분명히 내 집입니다. 계약서에 약속된 날짜 이전에 전 주인은 집을 비워주어야 하고, 그러면 그 집은 완전히 내 집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집이 내 집이 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 전혀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내게 묻습니다. “집을 사셨어요?” “아, 예, 사긴 샀는데, 이 집이 정말 내 것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그 날이 되어 봐야 알죠.”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이 맞는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당연히 틀린 말입니다. 아직 이사를 하지 않았더라도 계약이 끝났기 때문에 내 집이 틀림없습니다. 꼭 그날, 즉 이사를 하는 날이 되어 봐야 아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천국에 들어가십니까?”라고 하면 “죽어봐야 알죠.”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죽어봐야 알죠, 내가 어떻게 알아요?”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구원을 받는다고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은 사람은 이렇게 산다고 나와 있습니다.
계약이 두 개가 있을 때에는 새로 맺은 계약, 나중에 맺은 계약이 유효하고, 옛 계약은 파기됩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새 언약, 즉 신약에 기초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아직도 구약 밑에 사시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와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미국에서는 계약을 맺을 때 사인을 하고, 한국에서는 대개 빨간색의 도장을 찍는데, 하나님과 맺은 새 계약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그 붉은 피라는 도장을 꽝 찍어주신 것과 같은 계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어주시고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을 먹은 뒤에, 잔을 그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눅 22:20, 새)
“새 언약”에 대한 이 말씀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에 하신 말씀인데, 이 사건을 염두에 두면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고전 11:25, 새)
“새 언약”을 이야기합니다. 교회에서 성찬식을 거행할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주셔서 현재 새 계약 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며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새 언약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새 계약에 근거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새 계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요 1:12, 새)
“그”가 누구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입니다. 계약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맞아들이면, 즉 영접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세주로 믿고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내 기분이 아니라 계약서에 의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계약서’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으니까 오늘밤에 죽더라도 천국에 간다.’라고 할 때, 어떻게 보면 좀 뻔뻔스러운 기분이 들 수도 있지만, 계약서에 그렇게 쓰여 있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계약서에 이 집은 내 집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내 집에 들어간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왜 이상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 약 천 년에 걸쳐 40여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 예언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성경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31절에 나오는 이 새 계약에 관한 예언입니다.
<생명의 삶> 공부에서 마지막 기말고사를 보는데, 대다수의 분들이 틀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새 언약을 말한 예언자는 이사야이다.” 이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답은 X이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예레미야입니다. 이사야는 BC 700년 정도에 활동한 사람이고, 예레미야는 BC 645년경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가 북쪽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하고(BC 722년), 남쪽 유다는 그로부터 135년 후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BC 587년). 유다의 제사장이었던 예레미야는 나라가 망해가는 모든 과정을 지켜본 ‘눈물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새 계약(새 언약=신약)을 약속하신 것입니다(31).
이스라엘이 애굽의 압제 하에 43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께서 BC 1500년경에 모세라는 지도자를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시나이 반도에서 계약을 맺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구약(옛 언약)입니다. 십계명도 구약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은 조건부 계약입니다. ‘네가 ~~하면 ~~될 것이다.’라는 조건부입니다. 신명기 28장에 그것이 잘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 땅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이 너를 위하여 불리는 것을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신 28:1-14)
이것은 계약의 의무를 다했을 때의 결과입니다. 전부 다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정반대로 된다고 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신 28:15-19)
이것은 벌칙 조항인데, 계약을 어길 경우에 벌어질 일들입니다. 지금도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계약을 깨면 패널티를 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생명이 걸린 패널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틀림없이 약속을 지키겠다고 계약을 맺어놓고는 지키지를 못했습니다. 그 결과 나라가 망하고 다른 나라로 끌려가는 비운을 겪게 되었습니다. 불행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왜 구약을 지키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 능력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계명대로 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능력도 없으니까 계약이 지켜질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새 언약을 약속하시면서, 새 계약은 옛 계약과는 다르다고 하십니다(32).
2. 새 언약을 세우신 결과 (33-34절)
그렇다면 다르다고 하신 그 새 계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절)
옛 계약과 분명히 달라진 것이 있는데, 그것은 기록 판입니다. 과거 시내산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돌판 위에 기록했고, 장로들과 제사장들은 그 언약법 조항들을 7년마다 온 백성에게 큰 소리로 낭독하여 백성들이 기억하고 준수하도록 명령했습니다(신 31:9-13). 이전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명이 좋은 줄 알면서도, 지키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지킬 수 있는 능력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너무 멀리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계약) 밑에서는 각자의 마음 판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됨으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도 주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능력도 심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께서 우리와 계약을 체결하는 궁극적인 목적인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33)이 되는 계약 관계가 완벽하게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또 동시에 이스라엘은 구별된 백성으로서 계약법에 순종하며 살아 갈 능력이 그들에게 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절)
여기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체험을 해봐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특히 구약에서 ‘안다’라는 단어는 부부가 서로를 아는 친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계약 밑에서 작은 자에서 큰 자까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이처럼 친밀하게, 가깝게, 체험적으로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이웃이나 형제에게 ‘하나님을 알라’고 요구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나아가 지식이 모자라 하나님을 떠나는 일도 없게 될 것입니다(34).
이것은 엄청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대제사장이 딱 한 명이 1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셋째, 우리 죄를 용서하신 다음에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34).
이것이 새 계약 체결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중요한 특성, 즉 죄의 용서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않겠다’고 일방적인 용서를 선포하십니다. 일방적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새 계약 밑에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있는 마음과 능력을 주시고, 체험적으로 당신을 알게 하시며,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이 새 계약을 가능하게 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으신 분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해서 이 계약 관계로 들어오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교회 다니는 누가 꼴 보기 싫어서 안 믿겠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부담이 되어서 못 믿겠다고 합니다. 혹시 믿었다가 괜히 저 아프리카로 가라고 그럴까봐 걱정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때가 되면 보내시지, 무조건 보내시는 게 아닙니다.
또 어떤 분들은 좋지 못한 습관이 많다고 합니다. “내가 술도 못 끊고, 담배도 못 끊고, 가끔 마약도 하고, 도박도 하고, 뒤로 안 좋은 것들이 많아서, 내가 끊을 것을 끊고, 버릴 것을 버리고, 생활을 정리한 다음에 믿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거꾸로 말하면 뭡니까? ‘내가 그런 걸 다 안 하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아직 그런 것을 하니까 안 괜찮으니, 끊고 나서 오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삶을 정리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었다고 그런 것이 단번에 모두 끊어집니까?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끊어집니까? ‘하나님이 나를 왜 예수님을 통해 부르셨는가? 이 땅에 왜 나를 두셨는가?’ 그 사명을 깨닫고 사명을 따라 살게 될 때, 사명을 이루기 위해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끊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과 능력을 신약(새 계약) 밑에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기독교에 대해, 성경에 대해, 좀 더 알아본 다음에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정말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 계약 속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것이 다릅니다. 그리고 밖에서 안 보였던 것이 들어오면 보이게 됩니다.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34, 새).
이 계약 관계 속으로 들어올 때 성경이 이해되기 시작하고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나는 죄가 많아서 교회에 못 가겠습니다.”라고 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많기 때문에 이 계약 관계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서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나가는 말]
우리는 더 이상 구약 밑에서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신앙생활을 하기로 했는데, 억지로 마지못해 간신히 하겠는가, 아니면 정말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하겠는가? 억지로 간신히 하는 게 구약입니다. 율법에 사로잡힌 삶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모릅니다. 너무나 자유가 없고, 신앙이라는 것이 자유를 속박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일들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수없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새 계약)에서는 삶의 많은 부분에서 원칙이 제시되어 있지, 구체적으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령님을 주셔서 영원히 함께 하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상황에 따라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시기 때문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 청년 나이의 두 딸이 있었다고 합니다. 엄마가 딸들에게 집안일도 시키고 자기 방도 좀 치우라고 했지만, 딸들은 귀찮아하며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자꾸 이래라 저래라 하니까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해라, 해라 말해도 안 하던 딸들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집안 구석구석까지 다 청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에게 이런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까? 그렇습니다. 남자친구가 집에 오기로 한 것입니다. 남자친구가 와서 보기 때문에 평소에 안 하던 것을 하는 것은 물론, 엄마가 무슨 말 한마디만 하면 “Yes, ma'm”을 외치며 즉시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억지로 한 게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했습니다. 사랑에 빠지니까 자발적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왜 억지로 되는가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발적으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적인 신앙이란,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규율 차원이 아닙니다.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가지게 되면,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이 나옵니다. 삶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할지가 보이게 됩니다. 성령께서 가르쳐주십니다.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삶을 살아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새 언약을 받은 사람들이 우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지난날의 죄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죄를 고백했다면, 그 죄를 용서해주셨고 또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34).
혹시라도 어떤 불의의 사고를 당할 때 옛날에 지은 죄 때문에 벌을 받는다고 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천벌을 다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네 죄를 다 용서했고 기억하지도 않는다.’고 하시면 그런 줄 알고 담대하게 또 겸손하게 나와서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내 기분이나 감정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내 지식도 경험도 아닙니다. 오직 새 계약입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려 이뤄주신 이 새 계약의 내용을 잘 이해하여 이 계약에 근거한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참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새 계약(새 언약=신약) 안에서 그렇게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