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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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녹음에 문제가 생겨 음성설교를 올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2017년 4월 30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59 ✦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가복음 16장 9~20절)
[들어가는 말]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세계의 유적지들을 여행하거나 책자를 살펴보면, 인간이 이루어놓은 문화유산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2년 전 안식월 때 가보았던 이스라엘과 그리스의 고대 유적들, 유럽의 중세 및 르네상스 문화유산들, 그리고 근대와 현대 미술 작품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뉴욕에만 가보면 그 엄청난 건물들 앞에서 정말 대단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게다가 요즘 과학기술의 발전을 보면 굉장하다는 느낌을 넘어 두려운 마음까지 듭니다. 특히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 지능) 기술이 정말 많이 발전했습니다. 작년 3월에 있었던 한국의 이세돌 9단과 구글의 알파고의 세기의 대결은 알파고가 4승 1패로 승리를 거둔 바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애플(Apple)의 아이폰(iPhone)에 들어 있는 시리(Siri)도 그렇고, 얼마 전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아마존(Amazon)의 알렉사(Alexa)나 구글 어시스턴트(Google Assistant)와 같은 음성 인식 비서들도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또 요즘 무인 자동차 기술이 발전하면서, 조금만 있으면 사람이 운전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달리는 자동차들이 상용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의 수명도 100세 시대가 되었고, 앞으로는 더 오래 살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나이가 더 들면 120세 시대가 된다고 하고, 우리 아이들 시대에는 150세까지도 사는 게 가능하다고 합니다. 또 이전에는 불임이었던 사람들이 의학의 도움으로 아기를 낳게 되었고, 이전에는 아기를 집에서 낳다가 죽는 경우가 많았는데 병원에서 제왕절개를 해서 산모와 아기가 얼마든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병명도 모르고 죽어야 했던 많은 병들을 지금은 치료할 수 있게 되어 수명이 더욱 연장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인간이 정복하지 못한 영역입니다. 아무리 과학기술이나 의학이 발달해도, 사람이 죽는 문제는 해결이 안 되었습니다. 현대 의학이 죽음을 연장시킬 수는 있지만, 완전히 죽지 않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사람이 죽을 확률, 즉 사망률은 100%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여전히 두 가지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죽음 이후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죽은 후의 세계를 직접 경험하고 다시 살아와서 ‘내가 죽어보니 진짜 이런 것이 있다’ 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끔 천국이나 지옥을 보고 온 사람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다 믿을 수도 없고, 또 그런 사람들은 잠깐 죽었다 깨어난 것이지 며칠, 몇 달, 몇 년씩 죽었다 살아난 건 아닙니다. 그리고 둘째로, 인간은 여전히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신 후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간으로는 유일하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구약 때 엘리야나 엘리사가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했고, 예수님도 세 번이나 죽은 사람을 살려주셨지만, 그들은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시 죽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 죽은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죽음에서 살아나 영원히 사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것에는 예수님이 유일하십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과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 하면서도 늘 마음에 의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여러 번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왕이 되어 로마제국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에게 완전한 독립을 가져다주는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히 죽으셨다가 완전히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완벽히 부활하셨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의 말씀이 전부 다 사실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 후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것도 완전히 해결해주셨습니다. 결국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인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을 원수 되게 한 죄를 해결하셨고 우리가 믿음으로 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주(note)에 “어떤 사본에는 9-20절까지 없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마가복음이 원래 16:8에서 끝난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9-20절은 후대에 첨가된 내용이고, 마가복음은 원래 16:8에서 끝났다고 볼 수 있는 몇 가지 이유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복음서들과 내용이 유사하고, 한국 교회에서는 이 부분이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므로, 굳이 뺄 이유는 없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부분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제자들의 믿음 없음과 완악함을 꾸짖으심 (9-14절)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두 가지 지위를 얻으셨습니다. 하나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이고, 또 하나는 온 세상의 통치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통치자가 되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이 세상의 왕들을 교체하거나, 새로운 공약을 내걸고 정책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을 만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가장 먼저 만나신 사람이 누구입니까? 어머니 마리아도, 제자들도 아닌, 비천한 처지였던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9절)
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자신을 사랑으로 길러주고 십자가 밑에서 울며 가슴 아파했던 어머니를 먼저 만나시거나, 또 사랑하시는 제자였던 요한이나 소위 수제자라고 불리는 베드로를 먼저 만나지 않으셨습니까? 왜 하필 전에 일곱 귀신이 들렸었던 막달라 마리아를 가장 먼저 만나신 것입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머니 마리아만큼 자신의 아들을 사랑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은 인간적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보고 믿음으로 따르면서 좋아하고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귀신이 일곱이나 들렸다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었겠습니까? 그런 자기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예수님께 감사했고 얼마나 정성을 다해 섬겼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에게 부활하신 자신을 가장 먼저 보여주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주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가장 많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변화된 사람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 사랑을 체험하여 변화된 사람은 너무 감사하고 감격해서 주님을 사랑하며 섬깁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7:36-50),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죄인인 한 여자가 와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바릅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초대한 시몬은 속으로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죄인인 줄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에게 이 여자가 왜 이렇게 하는지 아느냐고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에,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다. 너는 내게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들어와서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랐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용서받는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이 여자가 사랑을 많이 했기 때문에 죄 용서를 받았다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이 여자는 언젠가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의 죄 용서를 받은 체험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즉 많은 죄가 용서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 감사해서 이렇게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열정을 가지고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겠습니까? 자신의 많은 죄가 용서받은 체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변화된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사람은 삶이 변화되고 그것을 알며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또 그런 사람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아니, 그 전에,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셨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에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는데, 그렇게 나를 고쳐주시고 바꾸어주신 그 주님께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그러한 자비와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주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어떤 사람이 와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첫째는 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요즘 우리가 수요예배 때 다루고 있는 ‘예수 신경’이고 또 소위 말하는 ‘가장 큰 계명’입니다.
이것을 바로 깨달은 제자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새 계명을 말하고 또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이것이 아주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믿어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믿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느냐고 하면 대개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지금과 같은 공 예배입니다. 혼자서도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며 예배할 수 있지만, 이렇게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같이 모여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주일예배가 중요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잠깐 예배에 참석하고 간다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함께 예배하고 서로 섬기고 나아가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섬기며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예배에 오실 때 어떤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예배를 드리면서 어떤 자세로 드리고 있습니까? 졸리십니까? 따분하십니까? 물론 목사의 설교가 좀 길기 때문에 가끔 졸리거나 지루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상습적으로 매주 예배 때마다 졸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졸리거나 따분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가끔 피곤해서 졸릴 수는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깨어 있으려 노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중간 중간에도 계속해서 주님께 집중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분 앞에서 그렇게 노력을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했지만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0-11절)
여기 보면 제자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게 터프해 보이고 큰소리를 뻥뻥 치던 제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흑흑 울고 있습니다. 오히려 연약한 여인들은 그 무서운 무덤에 가서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고 오려고 갔는데, 용감한 것 같았던 제자들은 집 안에서 울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메시지를 받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12절)
이 장면은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를 말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사람들이 예수님을 금방 알아보지 못한 것을 성경에서 봅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금방 알아보지 못했습니다(요 21장).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하시면서 죽기 전의 모습과 조금 다른 모습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 이전과 똑같은 모습은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문을 잠군 곳에도 그냥 들어오셨습니다. 분명히 몸은 몸인데 부활의 몸은 뭔가 달랐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외모도 약간 바뀌셨던 것 같습니다. 아주 달라졌다기보다는, 더 환하게 빛나는 모습이 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웠다고 했는데, 예수님이신 줄 알아본 순간 예수님은 사라지셨습니다.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며 말씀하시다가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 떠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는데 왜 이 두 제자는 시골로 내려가던 것을 붙잡아 도로 예루살렘으로 가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계획이 변경되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이상하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엠마오로 가던 두 명이 내려가고 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갈릴리로 가던 것이 아니라, 아예 신앙을 포기하고 다른 일이나 해볼까 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갈릴리라는 장소 그 자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는 제자들이 모인 곳이 예루살렘이고 성전이고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흩어지지 않고 함께 모여 있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3절)
이것을 보면 열두 제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는 것을 봅니다. 그들도 그렇게 믿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몇 번씩이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하셨지만 믿지 못했고, 여인들이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았다고 해도 믿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며 모든 어려움에서 건져주실 것을 머리로는 다 믿지만, 실제로 어려움이 닥치면 믿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다 일이 다 끝난 다음 생각해보면 믿음이 너무 부족했다고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소한 것들이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며 걱정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한 제자가 모였을 때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날 것이라고 하셨지만, 그들을 만나고 싶으셔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14절)
여기서 ‘열한 제자’라는 것은 가룟 유다를 뺀 나머지 제자들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그 저녁에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는 도마가 없었습니다. 그 일주일 후에 다시 모였을 때 도마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도마는 자기가 예수님의 상처에 손을 넣어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본 충격의 트라우마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십자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그만큼 무서운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장 큰 고통을 가장 오래 당하고 죽게 만드는 것이 십자가 처형 방법입니다. 그래서 너무 잔인하기 때문에 로마 시민은 십자가 처형을 법으로 금지했습니다. 식민지에서 반역을 일으킨 자들을 주로 십자가에서 처형했습니다.
게다가 신명기 말씀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신 21:23). 그러니 제자들은 충격에 빠졌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그토록 따르던 주님이 저주받은 자였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깨어나도록 야단을 치십니다. 때로 고집을 부리며 믿지 않으려 할 때는 야단을 쳐서라도 믿게 해야 합니다. 종의 마음으로 섬긴다는 것은 마냥 오냐오냐만 해주며 부드럽게만 하는 게 아닙니다. 저 영혼이 지옥으로 가려 하는데 어떻게 그냥 부드럽게만 하겠습니까? 야단쳐서라도 끌고 와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으로 가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혼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냥 가만히 두어 지옥에 가게 하면 그것이 어떻게 사랑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서 그들을 꾸짖으시면서라도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2. 복음 전파를 명하심 (15-18절)
제자들을 만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제는 내가 다시 살아났으니 안심하라. 이젠 다 됐다. 내가 뭔가를 보여주겠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제자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5절)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인기 있는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한 구석에 있는 작은 식민지이면서도 늘 반란을 일으키는 아주 골치 아픈 사람들이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대인들은 좋은 이미지를 주지 못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볼 때 유대인들은 골치 아픈 민족이었고, 헬라 사람들이 볼 때 그들은 아주 이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음식 먹는 법도 까다롭고 종교적으로 아주 이상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유대인인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나 로마 사람들에게 그런 명령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저 같으면 ‘야, 너희들은 나를 다 버리고 도망갔지? 알았어. 나도 너희를 포기한다. 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라. 나는 인기 있는 그리스 사람들과 로마 사람들을 불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온 천하에 다니며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6절)
여기 보면 ‘믿고 세례를 받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었으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믿고 나서도 세례를 안 받으려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전의 죄악 된 삶과 우상 숭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겁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요즘에는 별 의미 없이 세례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를 어느 정도 다녔으니 이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하고, 사실 마음으로 믿지는 않지만 순종하는 마음을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믿지도 않으면서 직분자가 되고 심지어 목회자가 되기까지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믿어야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그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또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는다고 하는데, 이미 정죄를 받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지옥을 향해 가기로 결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성경도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면 믿겠는가 하는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복음이 증거되면 바로 믿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전하지 않아서 못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간증을 들었는데, 주변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자기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해준 사람이 없어서 늦게 믿은 것이라고 하며 안타까워하는 경우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17-18절)
예수님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강력한 능력이 있다고 하십니다. 무엇보다 사탄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는 귀신 들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복음은 이런 귀신 들린 사람들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들이 치유된다는 것은 사탄의 왕국이 무너지는 것을 말합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을 속박하고 미신으로 괴롭히던 사탄의 왕국이 복음 때문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는 놀라운 체험들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새로운 방언과, 뱀을 집는 것과,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평생 웃지 않던 사람이 웃게 되고, 평생 울지 않던 사람이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마음이 치유됩니다.
그리고 뱀을 집는다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너무 ‘뱀’에 집착합니다. 사실 중동 지방에는 코브라 같은 맹독을 지닌 독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일부러 그런 뱀을 집어 올려도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독사에게 물려도 지켜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로 향하다 배가 파선되어 멜리데(몰타) 섬에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뱀에게 물렸지만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부러 독사를 집어 올리고 독을 마신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 죽었습니다. 무조건 다 된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다가 그런 위험에 빠져도 주님이 지켜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표적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적을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들에게 이런 기적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복음 하나만 들고 가서 선포하면 하나님이 다른 모든 위험에서 지켜주실 테니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런 외적 증거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적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면 변하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을 받으면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점점 더 깊어지게 됩니다.
3. 하늘로 올라가심 (19-20절)
이러한 놀라운 약속을 주시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19-20절)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완성되었고, 이제는 새로운 성령의 시대, 복음의 시대가 시작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서 우리의 죄를 씻으시는 대제사장의 직무를 행하시며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죄를 이기고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며 놀라운 부흥을 일으키게 하십니다.
이것은 시편 110편 1절 말씀의 성취이며, 또 로마서 8장 34절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 오른편에서 성도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으로 죄와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복음을 전파해야 하겠습니다.
[나가는 말]
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꼭 ‘아니마밈의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노래 제목인 ‘아니마밈’은 히브리어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본래 혹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작사, 작곡된 노래였습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아가 나를 돕기 위해서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그런데 그들은 자기의 동료들이 비참하게 가스실로 불려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다음 절을 이렇게 슬프게 불렀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그 메시아는 너무 늦게 오신다.”
그러나 그 수용소 안에 있던 젊은 외과 의사 출신의 한 유대인은 이 노래 부르기를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8-10)라는 다윗의 고백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용소에 갇혀 죽을 수밖에 없고 언제 가스실로 데려갈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서도 자신의 추한 모습을 다듬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죽음을 받아들인 듯 체념하고 깊이 잠들어버린 한밤중에도 그는 홀로 일어나 우연히 줍게 된 유리 파편 조각 하나를 날카롭게 갈아서 피가 날 정도로 면도를 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또다시 죽음의 사자처럼 나치 군병들이 그들의 방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나치 군병들은 수염하나 없는 창백한 청년의 모습을 보고는 차마 그를 죽음의 가스실로 데려 가지 못하고 매번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깨끗한 청년의 모습에서 삶의 강렬한 의지가 보여, 죽이기에는 너무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끝나고 그는 적은 수의 생존자들 중에 하나가 되어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수용소의 문을 빠져 나오면서 아니마밈의 노래를 이렇게 고쳐 불렀습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아가 나를 돕기 위해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사람들은 너무 서둘러 믿음을 포기한다.”
그 후 그의 일기가 세상에 공개되었는데 그 일기 속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택하는 것은 가장 쉽고 가장 나태한 방법이다. 죽음은 이렇게 서두를 것이 못된다. 죽음 앞에서 살아 보려는 부활의 의지, 이것이 새로운 창조이다.”
전쟁이 끝나 그는 스웨덴으로 가서 병원을 개업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친척들을 불러 놓고 이 가정만은 전혀 다른 아니마밈의 영가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우리의 삶이 막혀 있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리고 의심하면서 하나님은 내 삶을 간섭하지 않으시거나 너무 더디 오신다고 결론을 내려 버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우리는 유대인 청년처럼 이렇게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닙니다. 그가 늦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서두르고 있을 따름입니다.”
지금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며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주님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여인들의 처음 반응처럼 두려워하고만 있겠습니까? 제자들처럼 듣고도 믿지 않고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냥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살아가겠습니까? 아니면 생명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믿음으로 결단하고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이제 마가복음이 끝났는데, 마가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도전은 이것입니다.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주님은 우리 각자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지금 기다리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