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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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9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56 ✦
“희롱과 모욕을 당하신 왕”
(마가복음 15장 16~32절)
[들어가는 말]
다니엘 금식기도 잘하고 계십니까? 많은 분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등록하지 않고 함께 하는 분들도 많으신 것을 봅니다. <기도 수첩> 내용이 아주 좋기 때문에, 다음부터는 등록을 하고 책자를 가지고서 하시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며칠 안 남았으니 잘 견디시기 바랍니다. 저도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지만, 그때마다 주님을 생각하면서 더욱 기도하고 말씀에 집중하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이번에 하면서 느낀 게, 다들 뭘 먹을 수 있는지에 많은 신경을 쓰고, 간장이나 소금은 먹을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지난주 청년들과 같이 앉았는데 “나는 아보카도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인 줄 몰랐다.”라고 하는 말도 들었습니다. 다들 열심히 애쓰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느껴져 감사를 드렸습니다. 또 느낀 것은, 우리가 이 고난주간을 지내면 다음 주일이 부활주일인데, 그 어느 해보다도 감격스러운 부활주일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는 다니엘 금식이 부분금식으로서 채식 중심으로 먹으면서 하기 때문에 극심한 고통은 아니지만, 사람은 배가 고파보아야 고통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시고 채찍질 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은 너무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그 전에는 그렇게까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는데, 실제로 배가 고파보니까 ‘나는 배가 조금 고파도 이렇게 힘든데 예수님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것을 생생히 느끼게 됩니다.
1. 군인들의 조롱 (16-20절)
지난주 본문의 마지막 절인 15절을 보면, 예수님은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이 채찍질이 어떤 것입니까? “The Passion of the Christ”(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를 보면 너무나 실제적으로 채찍질이 나오는데, 너무 끔찍해서 R(Restricted) 등급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주는 채찍질입니다.
그런 엄청난 채찍질을 당하여 등이 너덜너덜할 정도로 찢어지고 피가 철철 흐르는 상태에서 예수님은 군인들에 의해 끌려가십니다. 유대인들은 벌을 줄 때 40대까지 때렸는데, 혹시 잘못 셀까봐 39대까지 때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로마 군인들이기 때문에 그런 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마음껏 마구 때리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통이 심하셨겠습니까?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6절)
여기서 ‘브라이도리온(the Praetorium)’은 총독의 관저를 묘사하는 라틴어입니다. 이렇게 생소한 단어나 지명이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보통 그냥 넘어갑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브라이도리온’을 비롯해서 성경에 나오는 이런 단어들이 성경은 진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삶> 공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성경은 66권의 다른 책들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39권이고 신약은 27권인데,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된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이 짜깁기한 게 아니냐고 합니다. 또 도마복음, 마리아복음, 유다행전 같은 것은 왜 성경에 포함되지 못하느냐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오래 전에 나온 <다빈치 코드> 같은 데서 그런 의혹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과 나머지 성경에 있는 책들뿐 아니라 그런 책들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당시 교회 권력 싸움에서 이긴 자들이 선호하는 책들이 정경(Canon)에 포함되었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제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 그건 무식한 겁니다. 알아보지를 않았고, 뭘 몰라서 그런 겁니다.
신약성경을 쓰신 분들은 자기가 성경을 쓴다고 생각하고 쓴 게 아니었고, 하나님이 주신 영감을 따라 글을 쓴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네 명이 복음서를 썼고, 다른 사람들이 편지들을 썼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에베소라는 도시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다고 할 때, 그것을 보내면서 ‘너희만 읽지 말고 주변에 있는 교회들과 다 돌려봐라.’ 하고 이야기합니다. 크리스천으로 꼭 알아야 할 내용들이 있기 때문에 돌려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본들이 구약 때부터 많았습니다. 원본은 있지만,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복사하는 게 없기 때문에 일일이 다 손으로 써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본들이 나왔습니다.
그런 식으로 편지를 보내면 인편으로 몇 달에 걸쳐 도착합니다. 그것을 받고서 주변 도시에 전갈을 보냅니다. “바울 선생님의 편지가 도착했으니 와서 베껴 가십시오.” 그러면 와 하고 몰려와서 다 베껴 갑니다. 그러면 또 다른 교회에서 그리로 와서 또 베껴 가는, 그런 식으로 성경이 퍼졌습니다. 그래서 어디서는 23권만 있었고 어디서는 8권만 있었습니다. 그러다 공의회(Council)에서 이것은 틀림없다고 확정한 것이 27권이다. 한참 돌다가 27권은 틀림없다고 확정한 것이다.
그 후 사도들이 다 죽고 AD 200년쯤 되었을 때,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이단이 발생했습니다. 이 영지주의가 발달하니까 가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마복음, 마리아복음, 유다행전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학자들이 모여서 정리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때 기준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 기준 1: ‘누가 썼는가? 정말 사도가 썼는가?’
사도가 쓴 증거가 희박하면 제외시켰습니다.
- 기준 2: ‘이것이 정말 AD 100년 이전에 쓰였는가?’
가장 끝에 죽은 사도가 사도 요한이니까, 요한이 죽은 것을 AD 90년경으로 봅니다. 그 후 10년 정도는 숨겨져 있다가 발견될 수 있으니까 괜찮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AD 100년 전에 쓰였으면 맞는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안 나오다가 150년쯤 되니까 뭐가 하나 나오고, 200년쯤 되어 뭐가 나오고, 250년쯤 되니까 또 다른 게 나오고 그러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AD 100년 이전에 쓰여야 합니다.
- 기준 3: ‘원래부터 교회에서 인정을 받던 것인가, 아니면 갑자기 들어온 것인가?’
갑자기 유명한 사도의 이름을 빌려서 등장하면 아닌 것입니다.
이런 세 가지 기준으로 테스트를 해서 신약의 이 27권만은 틀림없다는 겁니다. 사도들이 쓴 것이고, 100년 이전에 쓰인 것이고, 원래부터 우리가 알고 있던 책들입니다. 그래서 이것들만 인정해야 한다고 해서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중에서 골라 만든 게 아니라, 권력 다툼에서 이긴 사람들이 좋아하는 책만 넣은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들에서 가짜를 빼낸 것입니다.
도마복음, 마리아복음, 유다행전 같은 것들은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표시가 납니다. 첫째, 내용이 황당무계합니다. 예수님은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어릴 때 동네 아이가 와서 예수님을 밀어서 넘어져 무릎이 까집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만든 아이가 돌아가다가 걸려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진다는 식입니다. 황당합니다.
둘째, 학자들이 문체를 보면 어느 시대인지를 압니다. 그런데 가짜들은 대부분이 AD 170년 이후에 나온 것들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말들 중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옛날에도 시대마다 문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후대의 문체를 쓰는 것을 보니 진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셋째, 가짜 책들의 특징은 사상을 말하지 사건을 이야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마복음이나 마리아복음은 예수님이 뭐라고 가르치셨다는 사상을 이야기하지 그때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때 살았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모르는 겁니다.
여기 ‘브라이도리온’ 같은 단어가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실제로 살았고 그것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이 기록한 것입니다. 본 사람이 아니라면 이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더 확실한 내용이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데리고 나와서, 리토스트론이라고 부르는 재판석에 앉았다. (리토스트론은 히브리 말로 가바다인데, '돌을 박은 자리'라는 뜻이다.)” (요 19:13, 새)
이 말이 뭔가 하면, 그 당시 이 요한복음을 읽는 사람들은 ‘리토스트론’이라는 것이 뭔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 게 있었던 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있었다고 설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 단어를 썼습니다.
AD 70년에 예루살렘이 완전히 정복당하고 멸망당했습니다. 다 파묻혀서 이런 ‘리토스트론’이라는 재판석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20세기에 들어와 고고학이 발달하면서 예루살렘이 다 발굴이 되기 시작했는데, 발굴하면서 보니까 이 리토스트론이라는 자리에 돌이 박혀 있는 것이 발견된 것입니다. 그래서 AD 90년경에 쓰였던 요한복음에 있는 리토스트론이라는 것이 정말로 있었고, 그것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이런 것은 직접 보았던 사람만이 기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짜 책에는 이런 사건에 대한 기록이 없고 그냥 사상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이렇게 가르치셨다’라고 하지만, 그것도 진짜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이 아니라 자기 사상을 거기에 예수나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집어넣은 겁니다. 그러므로 리토스트론이나 브라이도리온 같이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의 현장들을 기록한 요한복음과 마가복음 같은 책은 진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런 의문이 있으실 겁니다. ‘이건 이해가 안 된다. 성경은 말이 안 된다.’라고 하실지 모릅니다. 여러분, 말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내가 모르는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모르는데 자꾸 성경이 말이 안 된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분들 중에서 성경을 정말 연구하는 분은 별로 없습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 성경을 연구하는 데 도전해 보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말이 안 되는 게 아니라 성경이 진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 브라이도리온 뜰 안으로 들어간 군인들은 이제 예수님을 희롱합니다.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17-19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군병들의 손에 넘겨져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까지 말할 수 없는 모욕과 육체적 고통을 당하십니다. 이 군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조롱거리 밖에 되지 않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때렸기에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의 몸인데,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리는 이 유대 청년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한 군병들은 예수님 곁으로 몰려들어 그분을 놀리고 고문을 가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단지 노리개 감에 불과합니다. 그 동안 심심하고 재미없었는데 그들의 재미를 채워주는 정도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정신병자 내지는 로마에 대한 악랄한 반역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학대의 충동을 있는 그대로 쏟아 붓습니다. 몸이 근질근질했는데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며 고문과 조롱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왕을 상징하는 자색 옷을 입힌 뒤 왕관을 상징하는 가시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웁니다. 굵은 가시로 된 면류관이기 때문에 그 큰 가시가 머리의 연약한 피부를 뚫고 피가 줄줄 흐르게 됩니다. 또 홀을 상징하는 갈대로 그 상한 이마를 때리는데, 가시가 박혀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아플 텐데 그것을 계속해서 때립니다. 머리에 작은 상처가 났을 때 종이 같은 것으로 살짝 건드려도 아픕니다. 그런데 가시가 박힌 머리를 갈대로 계속 치니까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이것은 “그의 머리를 치며”라고 되어 있지만 계속 치고 또 치는 겁니다. 얼마나 잔인합니까?
또 침을 뱉습니다. 누가 내게 와서 침을 뱉으면 얼마나 모욕적입니까? 그렇게 그들은 주님을 희롱합니다. 너무나 잔인하고 무정하고 악한 모습입니다. 희롱을 다한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나갑니다.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20절)
예수님은 이처럼 생각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고 온갖 수치를 다 당하면서도 침묵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향해 끌려 나가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정말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당신의 사랑하시는 외아들에게 이런 엄청난 고통을 허락하셨는가?’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들을 다 때려눕힐 수 있는 힘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왜 이토록 처절하게 고통을 당하셔야 합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비참한 고난과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이 주도권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사실입니다. 어쩔 수 없이 힘이 없어서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주도권을 갖고 고통을 당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로 작정하시고 잡혀서 고문을 당하신 후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곧장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이전에 이런 온갖 희롱과 모욕과 육체적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희롱을 당하고 모욕을 받고 매를 맞으시는 매 순간이 곧 예수님께 새로운 결단을 요구하는 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하는 다니엘 금식은 먹으면서 하니까 아주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금식을 하거나 절대금식을 한다면, 음식이 얼마나 크게 다가오겠습니까? 아이들은 금식을 안 하니까 아이들 음식은 해주고 또 나는 못 먹는데 아이들은 맛있게 먹으니 그것을 볼 때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금식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매 순간 속에서 싸우셨습니다. ‘이것들을 내 힘으로 다 눌러 버려, 말아?’ 매 순간이 이런 싸움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내가 이걸 먹어, 말아?’ 하면서 싸웁니다. 그냥 먹으면 되는데 참는 겁니다. 주님을 생각하면서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견딥니다. 매 순간이 결단입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그 이상이십니다. 얼마든지 힘을 사용하실 수 있었는데 그렇게 안 하시고 그냥 당하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위기가 닥치니까 베드로가 칼을 휘둘러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 버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 26:52-53)
다시 말해, 지금 당하시는 이 모든 고통의 순간들은 언제든지 예수님이 그만하겠다고 하시면 그만두실 수 있는 고통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십자가의 고난’이라고 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 6시간(오전 9시~오후 3시)이나 고난주간 일주일 정도의 고통을 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그 이전 생애 전체가 더 견디기 힘드셨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모르고 당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우리처럼 몸을 입고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러셨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그 무섭고 두려운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 어떻게 예수님은 삶의 무게를 견디셨다는 말입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예수님을 희롱하는 군인들에게 예수님이 한마디만 하시면 끝낼 수 있습니다. 자꾸 머리 때리고 침 뱉으며 희롱할 때 탁 쳐다보시면서 ‘너, OO월 OO일에 배가 칼에 푹 찔러 죽을 거다.’라고 하시면 헉 하면서 벌벌 떨고 그의 인생은 끝나는 겁니다. ‘몇 월 몇 일에 내가 칼에 푹 찔려 죽는다’라는 것을 미리 알고 그 공포에 휩싸여서 인생을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이 죽음을 미리 아는 자의 공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것을 오래 전부터 아셨습니다. 그래도 그 길을 묵묵히 가셨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시고 주님이십니다. 그 엄청난 고난을 통과하셨습니다.
지금 군인들에게 엄청난 고문과 희롱과 모욕을 당하고 있는 이 순간, 원하시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들을 나가떨어지게 하실 수 있습니다. 속으로 생각만 해도 갈대로 때리던 사람이 자기를 때리게 하실 수 있고, 침을 뱉었더니 자기에게 붙게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채찍을 휘둘렀더니 그 쇳조각이 자기 얼굴에 박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 하시고 침묵하십니다. 그냥 당하십니다. 왜 그러십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입니다. 바로 내 죄 때문입니다. 고난당하고 죽으셔야만 내 죄 값을 치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놀랍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을 읽어보십시오. 죽 읽어보면 누가 봐도 이것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모욕과 고통을 묵묵히 참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로마 군인들이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빌라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깊이 느껴야 하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채찍으로 얻어맞고 고통을 당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죄가 그렇게 무서운 겁니다. 죄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닙니다. 죄는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그러한 주님께 대해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회개하며 나아간 적이 몇 번입니까? 이런 고통을 당하신 주님이시기에 우리의 어떤 어려움도 다 아십니다. 이 주님 앞에 우리는 감사하며 기도하며 맡기며 나아가는 삶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구레네 시몬 (21절)
로마 군인들은 희롱을 다 마친 뒤에, 예수님에게 입혔던 자색 옷을 벗기고 다시 자기 옷으로 갈아 입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끌고 나갑니다. 이때도 피가 굳어서 자색 옷이 피부에 붙어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벗기니 다시 피부가 터지고 또 피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군인들은 아무 신경도 안 씁니다. 오히려 예수에게 더 큰 인격적인 모독을 주기 위해 아예 두 강도 사이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구레네 출신의 시몬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1절)
구레네는 지금의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를 가리킵니다. 당시 로마 군인은 로마가 정복한 식민지 사람에게 강제로 노동을 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산상설교에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과 십리를 가주어라”라고 하셨습니다. 군인들은 시몬을 잡아 억지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워낙 고문을 심하게 당해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기 때문에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합니다.
사실 시몬은 그곳을 그냥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구경하다가 갑자기 군인들에게 붙들려서 억지로 끌려나와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그러니 시몬은 마음이 아주 안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놀라운 축복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시몬의 두 아들의 이름(알렉산더와 루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마가가 굳이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썼겠습니까? 그냥 ‘어떤 사람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갔다’라고 하면 되는데 굳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다’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아는 그 시몬, 자기들이 아는 그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말입니다. 처음 마가복음을 받아서 읽던 1세기 당시 성도들이 알렉산더, 루포, 또 그 아버지 시몬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도 성도였다는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루포는 사도 바울이 동역자들의 이름을 죽 기록한 로마서 16장에 나옵니다(16:13). 그 루포가 이 루포인가는 100% 정확하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이 동일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 상황에서 시몬은 무슨 생각이 났겠습니까? 아마 억울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괜히 자기를 잡아다가 십자가를 지게 한다는 생각. 재수가 없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바로 곁에서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면서 걸어가는 그 청년이 바로 메시야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그 누구보다도 메시야의 마지막 순간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시몬보다 더 가까이 있던 사람은 없습니다. 이 시몬이 아예 예수님을 끌어안고 부축하며 갔다고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가 그에게도 묻었을 겁니다.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현장을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이 시몬입니다. 그랬을 때 자기 아들들에게까지 이런 믿음을 전수했으니, 정말 축복입니다. 시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사건을 이루신 것을 도운 것입니다.
우리도 시몬처럼 때때로 주님의 일을 하다가 보면 알지만 귀찮고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데 마지못해 할 때가 있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 시키나?’라고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사역을 이룰 수 있습니다. 구원의 사건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그 사역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숨결을 체험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역을 하더라도, 특히 힘들고 하기 싫은 일이 맡겨졌을 때, 거기에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기쁨으로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생생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나를 통해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3. 조롱하며 모욕하는 사람들 (22-32절)
로마 군인들과 예수님은 이제 골고다 언덕에 도착합니다.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2-23절)
군인들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권하는데, 그 이유는 약 기운에 취하도록 하여 고통을 덜 느끼게 하려는 것입니다. 마치 자비를 베푸는 것 같지만, 그것은 당시에 사형수에게 매번 행하던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 다음을 보십시오. 자비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4절)
저는 복음서에서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놀라는 사실이 있습니다. 시인이나 에세이 작가나 소설가나 전기 작가라면, 이 장면이야말로 아주 극적으로 써야 하는 장면 아닙니까? 십자가에 달리시는 장면을 극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절정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너무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고”. 이게 끝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우상화하고 신격화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못 박은 다음 그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눕니다. 이것은 시편 22:18에서 이미 예언된 사실입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실제로 겉옷은 나누어 가졌고, 속옷은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가졌습니다. 지금 이때는 한 인간이 심한 고문을 당하여 피를 철철 흘리고, 피부는 만신창이가 된 채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려서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 군인들은 그 밑에서 시시덕거리며 그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기나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물질적 이익에만 눈이 먼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잔인하고 무정한 모습들이 바로 우리 안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혹시 남들이 고통을 당하는 순간에도 즐거워하는 모습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 시리아에서 화학무기를 써서 아이들이 숨을 못 쉬고 헐떡거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 장면을 보면 ‘참 안 됐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라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렇지만 그뿐이고,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입니다. 그런 장면들을 접할 때는 바로 기도의 순간입니다. 기도하라고 내게 그런 장면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저들은 죽어도 나는 살아야지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고통을 주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일은 없습니까? 그것은 악한 일입니다. 만약에 나에게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남에게 고통을 준다면 그것은 악한 일이며 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5-27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은 제 3시인데, 이것은 유대인의 시간입니다. 지금으로 하면 이것은 오전 9시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위에 붙인 죄패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유대인의 왕”입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구실을 붙여서 예수를 사형시키려고 한 그들의 명목이었지만, 실제로 대적들의 그런 목적을 통해서 오히려 진리가 선포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짜로 유대인의 왕이십니다. 아니, 유대인을 넘어 전 세계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때 그곳을 지나가는 자들과 십자가의 주위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향해 모욕을 퍼부어 댑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29-32절)
정말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분입니다.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인들을 모두 해치우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정죄하며 잡아 가두고, 정말로 자신이 왕이라고 선포하며 나아갈 수도 있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너무나 무기력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힘으로 물리치지 않으십니까?
이들의 조롱을 보십시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아하’라는 말은 놀리는 말입니다. 깐족거리며 그 앞에서 조롱하는 겁니다.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저가 남은 구원했는데 자기는 구원을 못 하네.”라고 놀립니다.
이것이 사탄의 마지막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마음만 바꾸시면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습니다. 타임아웃을 하고 내려오셔서 다 쓸어버리신 다음에 ‘보았냐? 나 맞지?’라고 다시 올라가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인류의 구원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특히 이 사람들은 구원을 못 받습니다. 내려오셔서 로마 군인들을 다 쓸어버리시면 로마 사람들은 구원을 못 받습니다. 자기들을 죽인 사람을 누가 믿겠습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이 사람들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이 유혹의 소리를 견뎌내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바치셨습니다(10:45). 그리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빌 2:8).
이처럼 진정한 능력은 희생에서 나옵니다. 힘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희생에서 나옵니다. 강하게 나가면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적이 생깁니다. 더욱이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도 오신 것입니다. 그들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힘이고 사랑이며 겸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이라도 내게 비판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괴로워합니다. 또 어떻게 반격을 할지 생각을 한다. 사실이 아닌데도 나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한 방 날려주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닙니다. 무력은 적을 낳고 미움을 낳습니다. 참된 승리자는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져 주는 사람입니다. 이길 수 있지만 참고 그냥 당하는 사람, 충분히 능력이 있지만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 사람,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웃음을 띠며 사랑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주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물론 이것은 너무나 힘듭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나에게 사기를 치고 도망한 사람이나, 나를 밟고 올라가는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을 가진 자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신 사람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러나 이것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주님과 동행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은 알고 계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참고 견디면 먼저는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다음으로는 사람들도 우리를 인정해 주게 됩니다. 만약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상급이 클 것입니다. 고통을 견디며 죽음을 당하면서도 인내하시고 사랑하신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주가 되셨듯이, 우리도 고통을 이긴 뒤에 큰 영광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너무 이기려고 하지 말고 져주는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몰라서 지면 안 되고, 알지만 져 주는 겁니다. 알지만 희생하고 용서해주는 겁니다. 용서와 희생과 인내에서 진짜 파워가 나옵니다. 거기에 진정한 승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고난주간을 지내면서, 혹시 그 동안 나를 괴롭힌 사람이 있습니까? 내게 잘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예수님을 생각하며 용서하고 희생하고 인내할 수는 없겠습니까?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셨듯이, 우리도 그 사랑을 품고 참으며 견딜 때 주변 사람들을 구원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역사를 이루어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