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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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6일 주일예배
✦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11 ✦
“교회를 교회 되게”
(마태복음 28장 18~20절)
[들어가는 말]
오늘 본문은 교회에 조금 다닌 분이라면 많이 들었고 또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한 복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난주일 이라합 선교사님이 오셔서 “이 말씀을 다 외우시죠?” 하셨는데 실제로 외우는 분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약간 열을 받으면서(?) 진리는 진리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진리는 ‘역시 우리에게는 대단한 망각의 은사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우리가 최소한 1년에 한 번은 반복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왜 중요하냐 하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기 얼마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유언과 같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참 교회가 많습니다. 이 콜럼버스 지역에도 교회가 많고 한인 교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이든 성장하기를 원치 않는 교회는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요즘 대형교회는 비정상이라고 해서 작은 교회를 추구하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교회라도 그 안에서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모두가 다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도 우리 교회가 100명, 200명, 300명, 400명, 500명, 계속해서 성장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까?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성장합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건강하면 자라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빨리 성장하라고 명령하지 않아도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라갑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 자녀들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 성장은 교회적으로 볼 때 숫자적인 성장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도 사람마다 키가 모두 다릅니다. 키도, 몸무게도, 모습도 다 다릅니다. 어른이 되었다고 키가 전부 똑같아지는 게 아닙니다. 어른인데 단순히 키가 작다고 문제가 있다고 하면 틀린 말입니다. 교회에서 교인의 숫자가 사람의 키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이 아기의 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면, 그것은 뭔가 병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어른이 되었는데 아기 짓을 하는 것입니다.
수만 명이 모이는 초대형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 중에 실제로 그런 병에 걸린 신자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엄청나게 크지만 그 안에서 신앙이 자라지 못한 것입니다. 엄청난 곳에 있다고 내가 엄청난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시고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교회가 어떤 조직이나 건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유기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건강하기만 하다면 교회가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장이라는 것은 성숙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기만 하다면, 겉으로 보이는 키나 몸무게와 상관없이 몸이 단단하고 좋습니다.
생명체인 교회, 주님의 몸인 교회는 곧 믿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체인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라면 자연적으로 성장하게 되어 있고, 그러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 역시 건강한 신앙을 가진 주님의 제자로 자랄 수 있습니다. 또 건강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많을수록 그 교회는 더욱 건강하게 세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입니다. 교회가 건강하면 성도들이 건강해지고, 성도들이 건강하면 교회도 건강해집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곧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사람들, 즉 우리가 곧 교회입니다. 교회도 건강하고 각자도 건강하다면, 참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외적으로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내적으로 건강해지는 것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1. 교회의 존재 목적: 제자를 만드는 것
그런데 많은 분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교회가 뭔지, 교회가 왜 이 땅에 존재하는지, 또 어떤 사명을 받았는지에 대해 정확한 지식이 없는 것을 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분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체로 교회에 다닌 지 얼마 안 되는 분들은 교회의 존재 목적이 친교나 정보 교환이나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을 도와주는 곳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큰 교회에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이유가, 신앙적인 이유도 있지만 사실은 사업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가 물론 그러한 것들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이 교회의 진짜 존재 목적은 아닙니다.
목사님들의 모임에서 교회의 존재 목적이 뭐냐고 물으면, 많은 목사님들이 ‘예배’라고 대답합니다. 또 다른 분들은 성경공부, 봉사, 선교 등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교회는 그런 것들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교회를 다니시면서 교회의 존재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안 믿는 분이 와서 “교회는 왜 존재하는 겁니까?” 하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많은 교회들이 교인들 간에 여기에서 마음이 모아지지 않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한 사람은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저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갈등이 심해지면 충돌이 일어나고, 더 심해지면 분쟁과 분열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내 생각에’ 가장 중요한 것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는 성경의 책이 바로 구약의 사사기입니다. 사사기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모습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 첫 번째 이야기는, 사사기 17-18장에 나오는 미가와 레위인 제사장 이야기입니다.
에브라임 지역에 미가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의 어머니의 돈(은 1100)이 사라져서, 어머니는 훔쳐간 사람을 막 저주합니다. 그러니까 미가가 그 돈을 내놓습니다. 자기가 훔쳐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아들에게 축복을 하고 그것으로 우상을 만듭니다. 이것은 이방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미가는 개인 신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그러던 중 베들레헴에 살던 레위인 한 사람이 살기가 힘들어져서 그곳을 떠났는데, 지나가다 미가의 집에 들르니까 그를 자기 집의 제사장이 되어 달라고 하여 자기 집의 제사장으로 고용합니다. 그러면서 “레위인이 내 집의 제사장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런 게 성경에 어디 있습니까? 정말 자기 믿고 싶은 대로 믿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때 땅을 아직 정복하지 못하여 얻지 못한 단 지파가 와서 그 레위인에게 자기들의 앞날에 대해 점치듯이 물어보자 그가 좋은 말을 해줍니다. 얼마 후 이기고 돌아와 그를 자기들의 제사장으로 데려가고 우상들을 다 들고 갑니다. 그러자 미가가 단 지파와 레위인을 쫓아와서 자기에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하니까 단 지파가 요즘 말로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그냥 갈래, 맞고 갈래?” 그래서 더 약했던 미가는 그냥 돌아갑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미가 집의 제사장이 되었다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대대로 제사장이 된 그 사람이 누군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 위대한 모세의 손자 요나단이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손자까지도 먹을 게 없어서 거렁뱅이처럼 돌아다니다가 타락한 길로 가버리는 시대가 사사시대였습니다. 이게 다 왜 그런가? 사사기의 여러 군데에 이 말씀이 나오지만, 사사기의 마지막에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옮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25)
단순히 왕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왕이신데,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니까 이렇게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 두 번째는 레위인과 첩의 이야기(19-21장)입니다.
두 이야기(미가 이야기와 이 레위인 이야기)가 모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라고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은 시대였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라고 구별하여 세우신 레위인에게 첩이 있다는 것부터가 이상합니다. 그런데 그 첩이 도망을 갑니다. 베들레헴의 고향으로 도망가서 레위인이 찾으러 갔다 오는 길에 봉변을 당합니다. 길을 떠났는데 해가 저물게 되니까, 종은 여부스에서 머물자고 했지만, 이방인의 성인 여부스(후의 예루살렘)가 아니라 일부러 이스라엘에 속한 베냐민의 기브아에서 머물게 됩니다.
거기서 동향 출신의 한 노인의 호의로 그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몰려와 행패를 부립니다. “그 남자를 내놓아라. 우리가 그와 관계를 해야겠다.”라고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벌어졌던 것과 똑같은 동성애가 유행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레위인의 첩을 내어주어서 밤새 욕을 보이게 되고, 여자는 문 앞에 쓰러져 죽습니다.
레위인이 집에 돌아와 첩의 시체를 12조각으로 나누어 이스라엘 전체에게 보냅니다. 그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라고 분노하며 베냐민에게 그 깡패들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베냐민이 내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들과 베냐민 지파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베냐민에게 졌는데, 나중에 이기게 되니까 눈이 돌아가서 마구 살육을 합니다. 그래서 베냐민이 몰살당하고 600명만 남습니다.
그들은 이미 절대로 자기들의 딸들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않겠다고 미스바에서 맹세를 했습니다(21장). 그런데 이제 전쟁 후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그 600명에게 어떻게 아내를 구해줘서 대를 잇게 합니까? 그런데 알아보니까 그 미스바의 맹세의 자리에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안 왔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맹세를 안 했으니까 괜찮다.”라고 하면서 그들 중 아내를 주게 합니다. 정말 돌아가는 게 이상합니다.
그래도 200명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실로에서 매년 축제가 벌어지는데, 처녀들이 와서 춤을 추며 축제를 벌입니다. 그래서 베냐민 사람들에게 거기 가서 처녀들을 보쌈하여 납치해 가라고 합니다. 실로 사람들이 자기 딸들을 아내로 주는 게 아니라 납치를 해간 거니까 괜찮다고 합니다. 이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 벡성들 가운데 벌어진 일입니다. 이게 다 왜 그런가?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무엇인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옮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25)
지금 이 시대도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보십시오. 이 미국도 나라가 나뉘어서 난리입니다. 한국도 그렇습니다. 또 같은 편인 것 같으면서도 그 안에서 또 싸웁니다. 전 세계가 다 혼란스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시끄러울 때 보면 어떻습니까? 각자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할 때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분은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몸은 머리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기가 좋은 대로 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 다시 말해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뭔가?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18-20절)
18절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는 말씀을 왜 하시는가 하면, 가장 높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교회가 이 땅에 왜 존재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훈련시키셨던 열두 명의 제자를 ‘사도’라고 부르는데, 사도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무리’라는 뜻입니다. 이 말 자체로 복수, 즉 공동체입니다. 이들의 사역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목회하는 것이 아니었고,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믿는 사람들이 생기면 교회가 서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우고,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이 일들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에게 주신 이 말씀이 바로 교회를 세우신 존재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네 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1) ‘가라,’ (2) ‘제자를 삼아라.’ (3) ‘세례를 베풀어라.’ (4)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런데 헬라어 원문을 보면, 이 네 개의 동사 중에서 하나만 명령형 동사이고 나머지 세 개는 그것을 꾸며주는 분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명령형 동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제자 삼으라’는 것입니다. ‘제자를 만들라(make disciples)’는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은 제자를 길러내는 것입니다. 한국어 번역에 ‘삼는다’라고 되어 있지만, 그 말에는 원래는 아닌데 데려다 써준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제자를 만든다’는 말이 더 원래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정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제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행사가 많고, 아무리 봉사를 많이 해도, 아무리 예배가 뜨겁고 찬양을 잘해도, 아무리 성경공부를 많이 해도, 아무리 전도와 선교를 잘하고, 아무리 뜨거운 사랑의 용광로라도, 그 과정에서 제자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교회는 그 존재 목적을 수행하고 있지 못한 겁니다.
그런데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헬라어 원문을 보아도, 제자는 배우는 사람입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배워야 합니다. 배우지 않고 어떻게 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배우지 않는 사람은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요즘 제가 더 느끼는 것이, 세월이 지날수록 성경을 읽는 것이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잘 보일 때 성경도 더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눈이 잘 안 보여서 성경을 못 읽는다고 하면 다 이해가 갈 수도 있지만, 사실은 핑계입니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앱 중에 성경을 읽어주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눈이 힘들면 귀로 들으면 됩니다.
그런데 배우기만 한다고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의 또 다른 특징은 스승에게서 배운 다음 그 배운 것을 전수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배운 것을 그대로 전수하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무엇을 배우고 전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의 삶을 배워서 그 삶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삶이 무엇입니까? 그분의 인격과 사역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인격을 배워 닮아가고, 예수님이 하신 사역을 하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간다는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현실은, 교회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시고 경계하셨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닮아간다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품으시고 심지어 자신을 죽이는 자들까지도 용서하신 예수님을 닮는 것이 아니라, 남을 정죄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기가 더 잘났다고 하던 바리새인들과 같이 되어 간다는 것이 슬픈 현실입니다. 이상하게 열심을 내면 낼수록 더 비판적이고 차가워지고 메말라 갑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으로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금식, 헌금, 기도, 율법 묵상 및 준수 등, 너무 철저히 합니다. 그런데 그런 열심을 가진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항상 질타를 받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겉으로는 온갖 신앙적인 것을 다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미 구약시대 때 이사야를 비롯해서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주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너희의 제사가 싫다.”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제사와 예배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도 없으면서 와서 형식적으로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마음은 없이 형식으로만 하니까, 예수님도 바리새들의 잘못된 모습을 미워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지적하시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도 바리새인과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나 편한 대로, 내 방식대로, 내 소견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믿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진정한 크리스천일 수 없을 것입니다.
참된 크리스천이라면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고, 예수님이 하신 사역을 감당하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예수님을 닮은 사람,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그 교회는 존재 목적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2. 제자를 만드는 세 가지 방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렇게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나머지 세 개의 동사가 제자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1) ‘가라’
제자를 만들려면 먼저는 가야 합니다. 그런데 보통은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도 인용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요 1)라고 했다는 겁니다. 제가 고등부 시절 처음으로 했던 행사의 제목이 바로 “Come & See”였습니다. ‘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와 보라고 하려면 나가서 오라고 해야 합니다. 편안히 앉아서 오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단은 나가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라고 하실 때, 누구에게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 당시 상황 속에서 이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에게”, 즉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다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제 발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찾아가서 오라고 해야 합니다.
엄격히 말해서, 이미 다른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오게 하는 것은 전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긴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르는 분들, 나아가 하나님을 싫어하는 사람, 교회에 대해 반감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찾아가는 것이 제자를 만드는 것의 첫 걸음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통계를 보면, 5년에서 7년 정도 교회를 다니면 믿지 않는 친구가 다 없어진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비극입니다. 우리는 가야 합니다. 예전에 함께 지내던 술친구들이 있으면 그들에게로 가야 합니다. 이전에 나와 같이 뒤에서 못된 짓하던 친구들이 있으면 그들에게도 가야 합니다.
이미 잘 믿는 사람을 더 잘 믿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잘 믿는다’는 것에 함정이 있습니다. 잘 믿는다는 것은, 그저 말씀 한 번 더 듣고 성경공부 하나 더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 찾아가고 또 찾아가고, 문전박대 당해도 또 가고, 한 번 안 되면 또 하고, 실망스럽지만 포기하지 않으며 또 갈 때, 누구의 신앙이 자라겠습니까?
‘저 안 믿는 사람, 저 강퍅한 영혼, 마음을 안 여는 저 불쌍한 영혼, 그러나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얼마나 사랑하시면 외아들을 보내서 저 사람을 살리려 하셨는가? 나도 살리셨는데...’ 그런 마음을 품고 기도하고, 가서 했는데 또 안 되고, 돌아와서 또 눈물로 기도합니다. 마음이 쓰리기도 하고 분노도 일어납니다. ‘저 사람이 왜 나를 이렇게 대할까?’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 앞에 또 나아가 기도합니다. 그리고 또 찾아갑니다. 또 사랑으로 섬기고 나아갑니다.
그런 과정에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도 모르게 내가 점점 주님의 제자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 이상으로 당하셨습니다. 문전박대 정도가 아니라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도 내쳤고, 많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2) ‘세례를 주라’
가라고 했으니 가는데, 아무리 가더라도 가서 또 같이 못된 짓하거나 고스톱이나 치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가라고 했으니 가서 술 좋아하는 친구들과 같이 술 좀 먹어줘야 전도가 된다고 합니다. 담배, 마약, 도박을 같이 하면서 전도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전도가 된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아예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을 같이 하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십니까? ‘너나 나나 똑같은데 내가 뭐 하러 교회 가냐?’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모습을 보여줄 때 ‘나와 똑같았던 사람이 왜 이렇게 바뀌었지?’ 하고 놀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꾸신 분이 누군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여 영접하게 하고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세례를 주라는 것은 그저 물을 뿌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에 가서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조금만 마음을 들여다보면 외로움 속에서 공허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공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이룬 것 같지만, 자꾸 병이 생깁니다. 자꾸 일이 뜻대로 안 됩니다. 지혜도 떨어지고 불안해집니다. 이 세상이 죽으면 끝이 아니라 그 다음이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나아가서 “여기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계십니다.”라고 소개를 해드려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의 답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을 그들에게 소개해야 합니다. 왜 그것을 잘 못합니까? 예수님에게 모든 문제의 답이 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체험이 생깁니까? 기도할 때 생깁니다. 기도를 들어주실 때 점점 확신이 쌓이면서 변화가 됩니다. 그렇게 전하여 그들이 믿으면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3)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으면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대개 성경공부나 제자훈련은 너무 지식을 쌓는 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왜 가르쳐야 한다고 하십니까? “가르쳐 지키게 하라.” 즉, 주님의 말씀을 지키도록, 행하도록 하기 위해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 삶 공부를 하는 것은 행동하기 위해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답게, 제자답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웠으면 가서 행하는 겁니다. 그런데 행하지는 않으면서 성경 지식만 쌓아놓는 것은 바리새인의 길입니다. 배웠으면 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설교자로서도 고민이 있습니다. 제가 설교한 대로 그대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설교를 몇 편이나 들으셨습니까? 셀 수도 없습니다. 저도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를 정말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들은 말씀을 다 지키고 있습니까?
설교는 중요하지만 듣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만 듣고 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것은 예배를 제대로 드린 것이 아닙니다.
물론 말씀을 들은 대로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잘 안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설교라는 말의 의미가 퇴색되었습니다. 잔소리를 하면 ‘또 설교하네’라고 합니다. 아이들도 ‘설교 좀 그만하세요.’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삶 공부를 많은 분들이 하셨습니다. 일단은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말씀을 공부하지 않고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말씀대로 사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말씀을 배우는 목적은 코스 하나 끝냈다고 하거나 수료증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그대로 행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참으로 복된 삶이 됩니다. 야고보서에서도 그렇게 말씀하고, 예수님도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아서 폭풍이 오면 크게 무너진다.”고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의 4복음서에 유일하게 전부 나오는 기적 하나가 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남자만 5천 명(대략 2만 명)을 먹이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도행전 1장을 보면, 함께 모여 기도한 성도들은 120명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입니까?
또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엄청난 은혜도 받았고, 말씀을 들으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렇게 많이 따라다니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대중을 상대로 한 설교나 성경공부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결단을 하게 만드는 동기를 줍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주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제자는 소수의 공동체가 함께 모여 주님 안에서 삶을 나누며, 내가 배운 말씀을 한 가지라도 실천하려고 애쓰며 나아갈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열두 명을 택하시고 3년 동안 같이 생활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를 만드신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정교회를 하는 것도, 예수님께서 주신 ‘지상 대명령(대 사명, The Great Commission)’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수만 명 안에 드는 사람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실 때 기도하던 120명 안에 드는 사람들을 길러내기 원하는 것입니다.
제자를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명령에 순종하여 안 믿는 분들에게 가서 그들을 교회로 데리고 온다 해도, 교회의 구조가 복음적으로 되어 있지 않으면 후속 조치가 힘듭니다. 일단 교회로 데려와서 같이 예배를 드려도, 안 믿는 분이 체면이나 친분 때문에 한두 번 나와 주다가 결국 안 나오게 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정착하는 사람은 몇 천 명에 한 명 될까 말까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에서 함께 교제를 나누고, 실질적인 필요를 서로 채워주고, 서로 격려해주고, 서로 나누면서(사실은 그것이 간증입니다), 크리스천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보여 주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사랑을 나누는 것을 보면, 세상에는 없는 사랑이 나누어지는 것을 볼 때, 안 믿는 VIP 분들이 복음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세례를 주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분들은 교회에 오는 것을 굉장히 거북해합니다. 또 목사를 만나는 것은 더욱 거북해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뭐라고 말합니까? “교회에 와서 목사님을 좀 만나 봐.”라고 합니다. 하지만 최악의 조건을 말하는데 누가 오겠습니까?
크리스천들을 보면 또 슬슬 피합니다. 보기만 하면 자기를 전도하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전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안 믿는 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문제가 있고 괴로움이 있고 외로움이 있고 고민이 있는데, 자신의 문제나 고민거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냥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처럼 보여서 불쾌하고 불편하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 할 때는 그분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자격을 먼저 얻어야 합니다. 그분들이 볼 때 ‘어떻게 저런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저 상황에서 저분은 어떻게 웃을까? 어떻게 감사를 할까?’ 하는 의문이 생기도록 해줘야 합니다.
3. 주님의 제자로 자라가는 삶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자라가며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 삶에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됩니다. 그래서 간증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면 됩니다.
우리는 대부분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멋지게 보이지만, 남들에게 보이기 힘든 상처가 있습니다. 집안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어떤 사건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상처에 집중하는 동안에는 치유되지 않습니다. 상처받은 마음을 남에게 쏟아놓거나 기도하면 조금 시원해지기는 하지만, 역시 완전한 치유가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럼 언제 치유가 됩니까? 예수님을 닮아갈 때 그 상처가 치유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볼 때 그분의 성품과 인격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과 용서입니다. 사랑 중에도 희생하는 사랑, 그리고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실 때 거기에는 자신을 배반할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그의 발도 씻어주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실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요한에게 “요한아, 너희 집에 돈 많지? 조폭들을 고용해서 내 원수를 갚아다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눅 23:34)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옆에 달려 있던 강도들 중 한 사람이 변화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둘 다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후에 한 사람은 마음을 바꾸어 예수님께 “저를 기억해주십시오.”라고 했고,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처럼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갈 때 자신의 속에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주님의 신실한 제자로 자라갑니다. 거꾸로 말하면, 왜 주님의 제자로 자라가지 못하는가?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상처가 치유되지 못하는가?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몸도 아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아픈 데가 있으십니까? 용서하지 않아서 그럴 수가 있습니다. 용서할 때 치유가 있고, 치유될 때 제자로 자라갑니다.
[나가는 말]
다시 말씀드리지만, 참된 주님의 제자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랑과 용서의 사람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주님 때문에 항상 부드럽고 편안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처럼 푸근하고 편안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제자를 만드는 일에 과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교회인가? 여전히 부끄러운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향으로 최선을 다해 나아가기 원합니다. 지난 수 년 동안 우리 교회에 많은 분들이 오셨는데, 다른 데서 이미 믿고 오신 분들도 있고, 우리 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난 분들도 계십니다. 숫자가 아주 높지는 않지만, 지금도 목장마다 기도하면서 어떻게든 그분들이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지 않는 분들이 와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지 않던 분들이 주님의 제자로 자라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영혼 구원하여 주님의 제자 삼는 일에 최선을 다해 나아간다면, 반드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 일에 최선을 다해 나아감으로, 우리 각자가 더욱 주님의 신실한 제자로 자라가며, 우리 교회가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