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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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2일 주일예배
✦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10 ✦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은 하늘의 기쁨”
(누가복음 15장 1~10절)
[들어가는 말]
오래 전에 스코틀랜드에서 목회하는 두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그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역했지만 그분들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두 분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먼저 한 목사님이 이렇게 말하기를, “사실 저는 지난 3년 동안 사역을 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거듭난 성도는 아직 한 사람밖에 얻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에서 한 주간 동안 부흥회를 가졌습니다. 저는 커다란 기대를 걸고 열심히 집회를 인도했는데, 마지막에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헌신한 사람은 일어나라고 했더니 딱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두 목사님은 서로 목회 생활의 쓰라린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수년이 지난 후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 목사님이 3년 만에 딱 한 명을 얻었다고 한 그 사람이 로버트 마펫인데, 그는 아프리카 선교의 기초적인 틀을 마련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목사님이 부흥회를 통해 영접한 단 한 사람, 그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대륙에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불을 지른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딱 한 명이라 할지라도 그 한 사람의 가치가 정말 소중합니다. 성경은 결코 하나의 가치, 그리고 작은 것을 작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작은 것이며 보잘것없는 것인데 나중에는 커진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가끔은 말썽을 부려서 야단도 치고 뛰어다니니까 뛰지 말라고도 하지만, 보잘것없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나중에 놀라운 하나님의 일꾼이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한 명의 가치를 우리가 반드시 기적해야겠습니다.
1. 잃은 양을 찾는 목자 비유 (4-7절)
오늘 읽은 본문에는 두 비유가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5장은 ‘탕자의 비유’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앞에 이 두 비유가 나옵니다. 같은 내용을 두 번에 걸쳐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4-6절)
이 첫째 비유를 보면, 백 마리의 양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그 중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양들을 들에 두고 당연히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서며, 또 찾았을 때 크게 기뻐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다 알고 이해하며 종종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익숙한 삶의 이야기를 하심으로써 자신의 기쁨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4절에서 질문형식을 취하시는데, 왜 그렇습니까? 왜 이 이야기를 하시게 되었는가, 그 이유가 앞에 나와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1-2절)
예수님이 말씀을 놀랍게 가르치시고 엄청난 기적도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이분이 메시아인가 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데, 이분을 보니까 죄인과 세리 같은 이상한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 다니는 겁니다. 그런 자들이 오면 막아야 하는데 오히려 환영하면서 사랑을 베푸시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심지어 마태(레위) 같은 사람을 제자로도 부르십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같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가 안 가는 겁니다. 어떻게 저런 죄인들과 어울리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15장에서 세 가지 비유(잃어버린 한 마리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둘째 아들)를 죽 이야기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비난을 하기 때문에,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가? 특히 너희가 죄인이라고 무시하고 멸시하는 저들이 얼마나 귀한 영혼들인가를 알라.” 하시며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결론으로 청중들을 끌어 들이며,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2)라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대답을 하라고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익숙한 삶의 이야기이지만 청중들이 듣기에 어쩌면 불쾌할 수 있는 역설(paradox)을 사용합니다. 이 역설의 뜻을 잘 파악하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7절)
먼저 99마리를 들에 그냥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는 상황(4), 또 죄인 하나가 회개함으로써 그로 인한 기쁨이 의인 99명으로 기뻐하는 것보다 더 크다는 말씀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7). 과연 한 마리와 아흔 아홉 마리의 무게만 해도 너무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핵심입니다. 이제까지 사회의 그늘 속에 무기력하게 방치되었던 그 ‘하나’라는 미미한 존재가 지금 주님의 이 말씀 속에서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비록, 그 ‘죄인 하나’는 대다수의 ‘의인 아흔 아홉’에게는 아무런 상관이나 존재가치가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지만, 그 ‘죄인 하나’는 지금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찾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마치 100이라는 ‘전체’를 완성할 수 있는 존재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가 목자의 지극한 기쁨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에 대한 가치와 관심을 일깨우고 그것이 기쁨이 되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하나’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찾은 후의 폭발적인 기쁨은 보통 사람에게는 낯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서먹함과 거리감이 바로 우리들의 세계를 뒤흔드는 충격이 되고, 또 ‘아흔 아홉’으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4절에 나오는 ‘잃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폴루미’라는 동사인데, 그것은 주인이 가지고 있다가 단순히 잃어버린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잃은 양’은 곧 세리와 죄인들을 의미합니다(1).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비난을 받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던 세리와 죄인들이 하나님께서 그토록 찾으시는 영혼들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임을 알려줍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것처럼, 죄인들과의 교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비유는 외부의 잃은 자를 찾는 열심을 보여주는 동시에, 죄인을 찾았을 때의 ‘목자의 기쁨’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 목자는 물론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죄인 하나를 찾았을 때 느끼시는 주님 자신의 기쁨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구절을 잘못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다가 어떤 분들이 소위 시험에 들었다든지, 뭔가 일이 있다든지, 바쁘다든지 하면 교회에 안 나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분들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돌아보아야 합니다. 격려하고 권면해서 다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 이 말씀을 사용합니다. 99마리를 놓아두고 잃어버린 1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안 나오는 그분이 예수님을 안 믿는 분이라면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만 자기가 기분이 나쁘거나 사정이 생겼든지 해서 잠시 안 나오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면 잘못된 사용이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 보면 분명히 ‘회개해야 하는 죄인 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믿는데 안 나오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사용할 때는 정확하게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양을 찾은 즐거움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습니까? 너무 즐거워서 양을 어깨에 메고 옵니다(5). ‘어두운’ 분위기의 ‘잃은 양’이 아니라 ‘밝고 즐거운’ 분위기의 ‘찾은 양’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 기쁨은 물론 교회 밖에 있었던 ‘잃은 자’를 찾는 기쁨을 말합니다. 믿지 않아서 그냥 두면 저 영원한 멸망으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영혼인데, 찾아서 주님 앞에 오도록,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되도록 했을 때의 기쁨을 말합니다.
우리 중에도 이런 기쁨을 맛본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라는 것이 그렇게 금방 되지 않습니다. 3년, 4년뿐 아니라, 7년, 10년이 되어도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전에는 7년 정도로 말했는데 요즘은 10년 또는 그 이상 걸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저분도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회의 숫자를 채우기 위하려는 게 아니라, 저분도 예수님을 믿고 이 기쁨을 알고 구원을 받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애를 쓰고 눈물로 기도하고 섬기는데도 문전박대를 당하는 경우, 갔는데 허탕 치는 경우, 음식을 준비해놓고 기다리는데 전화가 와서 오늘 못 온다고 해서 실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러던 분이 조금씩 변화되며 목장에 나옵니다. 교회에 나오겠느냐고 했더니 교회에 나옵니다. <생명의 삶> 공부를 들어보라고 하니까 듣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고 영접하여 세례를 받는 날, 얼마나 감격의 눈물이 납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냥 ‘어, 또 한 사람 세례 받나보다.’라고 하며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 잃어버린 영혼을 그토록 찾아 나서며 섬겼던 분은 그 감격을 압니다. 바로 그 기쁨과 감격을 누립니다. 양을 즐거이 메고 오는 그 기쁨을 누립니다. 우리가 앞으로 이런 기쁨을 정말 많이 누리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왕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이런 기쁨을 한 번도 맛보지 못했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믿도록 애를 쓰고 섬기는 것을 한 번도 못했다면, 그래도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빨리 힘을 써서 모두가 이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는 죄인을 찾는 기쁨을 강조하면서 메시아(그리스도/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특히 죄에 빠진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찾아 나서는 노력을 통해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잃어버린 양, 이탈한 양은 저절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목자가 나가서 찾아와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비유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믿는 자들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으로 가는 천국 백성들이, 이것을 아직 모르는 분들을 나가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오라는 것이 아니라, 나가서 찾아오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계에서 밀리언셀러였던 <목적이 이끄는 삶>을 많이들 읽어보셨을 줄 압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몇 년 동안 1위였습니다. 그 책을 쓴 분이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님입니다. 그 책 전에 <목적이 이끄는 교회>라는 책을 먼저 썼습니다. 그 책에 의하면, 교회에는 크게 다섯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지역사회’입니다. 이들은 교인이 아닌 사람으로, 무슨 행사가 있을 때 와주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군중’으로서 예배에만 왔다 갔다 하며 참석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등록 교인’으로서, 왔다 갔다만 하는 게 아니라 이 교회의 교인으로 책임을 다하겠다고 헌신하고 등록하는 교인입니다. 네 번째는, 그보다 더 나아가 ‘헌신된 사람’으로, 성숙한 사람이며, 열심히 성경공부도 하고 기도도 하며 성숙한 신앙의 길로 가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핵심 멤버’이며 이들을 보통 사역자라고 부릅니다.
나는 이 중 어디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비교인인 지역사회인가? 아니면 예배만 왔다 갔다 하는 군중인가? 등록해서 다니는 교인인가? 더 헌신된 삶으로 나아가는 헌신된 자인가? 아니면 정말 헌신되어 사역을 감당하는 핵심 멤버인가?
혹시라도 우리 중에 ‘지역사회’에 속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교회를 안 다니는 분인데 가끔 나오는 분이 있습니다. 그 ‘지역사회’에 속한 비교인, 또는 왔다 갔다만 하는 ‘군중’에 속한 분 가운데, 교회 예배에는 참석해도 주님을 믿지는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분들이 우리의 관심의 대상입니다. 실제로 그분들이 주님의 지극한 관심의 대상이며, 그 중 하나를 찾았을 때 주님은 폭발적으로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기존에 믿는 사람의 신앙이 성장하면 주님이 당연히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신앙이 자라갈 수 있겠습니까? 신앙이 성장하는 가장 좋은 길이 바로 이겁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영혼을 찾았을 때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기쁩니다.
우리 교회의 비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성도가 행복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을 때 행복해집니다. 언제 기뻐하십니까?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았을 때 기뻐하십니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충격일 수 있습니다. 아니 충격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가정교회를 하며 매주 목장으로 모이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매주 똑같고, 할 이야기도 없고 그래도 왜 계속 모이는가?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저도 우리 교회에 오면서 저의 사명은 ‘의인 99명’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부끄러운 경험이 있습니다.
이전 교회에서 부목사일 때 “새가족반”을 만들어서 인도하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습니다. 4주 과정을 만들어서 인도했는데, 그러다 한 번은 10여 명이 들어왔습니다. 열 명 중 9명은 한국이나 타주에서 이사를 왔거나, 주변의 교회에 문제가 생겨서 교회를 찾아 온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딱 한 명이 한국에서 전혀 교회를 안 다녔는데 미국에 온지 2년 정도 되면서 교회에 처음 나온 분이었습니다.
제가 첫 시간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무엇이고,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되고, 구원에 대해 다루면서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다른 아홉 분들은 끄덕끄덕하며 아멘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전혀 안 다녔다는 그 한 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듣기만 했습니다.
강의가 다 끝나고 마지막에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 한 게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자 “아멘!”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한 분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형제님은 오늘 이해가 좀 되세요?”라고 했더니, 쭈뼛쭈뼛하더니 그분이 말했습니다. “제가 정말 죄송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제가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아십니까? 너무 부끄럽게도 ‘아, 저 사람은 왜 여기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멘 아멘을 외치며 부흥회 같았는데, 이 사람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니 ‘다른 사람들처럼 좀 잘 알아듣지, 내가 얼마나 훌륭한 강의를 했는데 왜 못 알아듣나?’ 하고 짜증이 났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알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시간이 걸립니다. 처음부터 다 되겠습니까?”라고 잘 마무리하고 사무실로 왔습니다.
그때 성령님께서 꾸짖으셨습니다.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너는 왜 목회하니? 너는 왜 목사 하니?” 이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네가 목회하는 것은 바로 아까 그런 사람 때문 아니니?”라는 꾸지람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회개했습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 그 잃어버린 한 영혼을 위해서 하는 것인데, 나가서 찾아온 것도 아니고 제 발로 와서 있는 사람인데도 그런 영혼도 돌보지 못하면서 무슨 목회를 한다고 하는가 하는 강한 자책이 들었고 회개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존에 있는 분들도 당연히 성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무슨 말인지 전혀 못 알아듣는 분, 예수님이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분, 성경이 무슨 소리인지, 설교가 뭔지 전혀 모르는 분들이 있을 때 ‘왜 저런 사람이 교회에 와 있지? 저 아홉 명처럼 아멘 아멘 하는 분들만 있으면 좋겠다.’라고 하면 마음은 편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 한 영혼,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분도 구원을 받아야 할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릭 워렌 목사님이 이야기한 것은, 교회가 성장할 때 안에서 밖으로가 아니라 밖에서 안으로 성장시킬 생각을 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핵심 멤버로부터 하지 말고 지역사회로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기존의 생각을 뒤흔드는 겁니다. 전통적인 교회 개척에 관한 책들을 보면, 먼저 헌신된 자들의 핵심 그룹을 만들고 그 후 지역사회로 접근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릭 워렌 목사님의 새들백교회를 비롯해서 수많은 미국 교회들이 성장하는 것은, 믿는 사람들이 대거 옮겨와서가 아니라, 지역사회로 나가서 안 믿는 사람을 데려와서 핵심 멤버가 되고 제자가 되도록 키워줌으로 성장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작은 교회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핵심 멤버들만 있고 다른 부류는 없다는 점입니다. 사실 목장 참석 수가 주일예배 참석 수보다 더 많아야 합니다. 전도가 제대로 되고 있으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는 안 나와도 목장에는 나오는 비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교회에는 핵심 멤버 몇 명만 있지 지역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게다가 크리스천이 된 지 너무 오래 되어 자기들이 전도해야 할 비신자 친구들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의인 99명에 집중해서 훈련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그것도 귀중하지만, 하늘에서는 잃어버린 영혼 하나가 돌아오는 것을 의인 즉 이미 믿는 사람 99명이 더 잘 믿게 되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소속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충격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저를 비롯해서 교회에 오래 다닌 분들일수록 이 충격적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위장된 ‘안전지대’, 편안한 곳에서 특권을 구가하며 ‘중심’의 자리에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던, 나가기를 꺼려했던 그 ‘아흔 아홉’이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이라는 표현은 우리를 안심하게 해주는 칭찬인 동시에 우리의 가면을 벗으라는 도전의 목소리입니다.
예수님을 이미 믿는 사람이라면 첫 번째 부류인 ‘지역사회’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개 중 어딘가에 속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잃어버린 영혼 하나를 찾아 나서기 위해서는, 그냥 편안하게 쉬운 길로 편안하게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해서는 불가능합니다. 힘들고 피곤하지만, 기도와 말씀으로 먼저 자신을 훈련시키며 나아가야 합니다. 군중에서 등록 교인으로, 헌신된 자로, 또 핵심 멤버(사역자)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 바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핵심 멤버/사역자’만이 지역사회로 나아가 잃어버린 한 영혼을 위해 목숨을 걸고 살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매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한 영혼을 위해 목숨을 거는 제가 되고 우리 모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았을 때 주님께 큰 기쁨을 드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한 영혼을 위해 목숨을 거는 교회가 될 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우리도 행복한 사람들이 된다는 겁니다. 행복을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하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정말 만족이 됩니다.
여러분, 그런데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며 찾아나서는 사람들의 특징이 뭡니까? 보통 ‘전도’라고 하면 완장 차고 큰 소리로 외치는 전투적인 모습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것만 전도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내가 삶 공부를 하는데 막 믿어보려고 하는 VIP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람이 저번 시간이 빠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필기한 것을 복사해서 주려고 복사를 했는데, 복사되어 나온 것을 보니 상태가 흐려서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때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 정말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반응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주관식에는 약하지까, 객관식으로 보기를 드리겠습니다.
1번: “이거 카피머신이 고물인가? 누가 이거 맡았는데 이렇게 제대로 관리를 안 해?”
2번: “그래도 자세히 한 번 보세요. 그러면 보이니까 이것을 가지고 가세요.”
3번: “내가 지금 시간이 없으니까 나중에 복사해서 드리겠습니다.”
4번: “제가 쓴 글씨라 저는 알아볼 수 있어요. 제가 이걸 가질 테니까, 원래 제가 쓴 것을 가져가세요.”
당연히 4번입니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럽니다. 이분은 아직 안 믿는 분입니다. 그래서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며 소위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모두 따뜻합니다. 친절한 사람입니다. 물론 따뜻하다고 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친절할 수 있고 따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쌩쌩 찬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따뜻합니다.
차가운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차갑고 남을 공격하는 사람은 믿음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따뜻함으로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2. 잃은 동전을 찾는 여인 비유 (8-10절)
두 번째 비유도 첫 번째 비유와 같이 ‘기쁨’이라는 주제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잃은 동전을 찾는 기쁨에는 앞 비유와 달리 독특한 면도 있습니다.
첫째, 즐거워하는 주체가 여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8-9절)
당시 여자들은 숫자를 세는 데에도 못 들어갔고, 회당에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여기서 여인을 등장시키십니다. 이 여인은 열 개의 동전 중 하나를 잃고서 그것을 찾기 위하여 쉴 새 없이 애쓰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앞 비유에서 목자가 그랬던 것처럼 잃은 자를 찾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은전의 성격이 고대 유대 사회에서 ‘결혼 지참금’이었을 수도 있고, 남편이 사랑의 증표로 맡긴 ‘예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가정의 비상시를 위해 준비해 두었을 수도 있고, 유대 축제 시에 사용할 소중한 저축금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그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잃은 물질을 회복하려는 여인의 악착같은 모습은, 알뜰하게 가정을 꾸려가려는 가정주부에게 기대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교회의 역할, 특히 여성들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비유 속의 여인은 평범한 가정주부입니다. 이 비유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누가복음에서 계속 부각시키고 있는 여성들의 활발한 활동을 아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21세기는 여성의 세기라는 말도 있습니다. 앞으로 여성들의 활동이 더욱 기대가 됩니다. 여성들의 다양한 헌신과 뜨거운 열정으로 교회가 바로 서 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핑계를 대면 안 됩니다. 뭘 하자고 하면 ‘나는 여자니까 못한다’라고 합니다.
여자만이 아닙니다. ‘나는 초신자라 못한다’, ‘나는 나온 지가 얼마 안 되어서 못한다’, ‘나는 이런 능력이 없어서 못한다’, ‘나는 병이 있어서 못한다’, ‘나는 아파서 못한다’.... 못한다고 하기보다는, 우리가 한 번 해보는 겁니다. 또 ‘여자가 왜 나서냐?’는 말도 있는데, 그러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남자냐 여자냐, 나이가 많으냐 적으냐에 상관없이, 각각 맡겨주신 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둘째, 이 여인이 동전을 찾고 나서 기뻐하는 행동은 곧 잃은 자를 찾고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기쁨, 하늘의 기쁨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0절)
이 여인의 즐거움이 곧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앞의 비유에서 목자는 양 일백 마리를 채우기 위해 한 마리를 찾아 헤맸으며, 다음에 이어지는 탕자의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온전한 가족을 회복하기 위하여 얼마나 둘째 아들을 기다렸는지를 보여줍니다.
지금 동전비유에서는 이 여인도 목자나 아버지와 같은 열심과 애정으로 10개의 동전을 회복하기 위하여 잃은 한 개를 부지런히 찾고 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찾고 있습니까? 8절을 다시 보십시오. 잃은 동전을 찾기 위한 여인의 3중적 노력(불을 밝혀놓고, 집을 쓸며, 동전을 발견할 때까지 부지런히 찾음)을 기울입니다. 이것은 아흔 아홉을 들에 두고 떠나는 목자의 노력이나, 또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을 날마다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고 알려줍니다.
이전에 읽은 시가 있는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패륜아 아들을 어머니가 붙들고 “이 놈아, 이 놈아”라고 정신 차리라고 하니까 어머니를 밀치며 폭력적으로 나갑니다. 그러자 옆에 지나가던 사람이 그걸 보고서 아들이 어떻게 어머니를 때리느냐고 하며 아들을 밀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에게 밀려 넘어진 어머니가 빨리 가서 막는 겁니다. 가슴 찡한 어머니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귀한 사랑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깨어지고 넘어지고 말을 안 들어도 벌하시는 게 아니라 감싸주시는 사랑입니다. 배신하고 저주해도 감싸 안아주시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식이 그렇게 속을 썩이고 패륜아라도 보호해주고 안아주는 어머니 같은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아니, 사실은 나를 그렇게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셨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한 영혼을 위해 목숨을 거는 교회’가 되어야 할 이유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땅에는 있는데 천국에는 없는 것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나가자고 하면서 예배, 교제, 양육, 봉사, 전도와 선교의 다섯 가지를 강조합니다. 이 중 무엇이 천국에 없는가?
첫째로 천국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인이 없기 때문에 전도도 없습니다. 우리가 힘쓸 다섯 가지 중에 전도와 선교는 천국에 없습니다. 예배하고 교제하고 섬기는 것은 천국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는 죄가 없기 때문에 죄인이 없고, 그래서 전도나 선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완벽한 곳이기 때문에 당연히 죄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서 왔으니까 전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교사님들과 협력해서 헌금도 하고 기도도 하는 그 민족들 가운데서도 그 하나님 앞에 와서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게 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천국에는 없는 죄와 전도 중에 어느 것을 하며 사시겠습니까? 열심히 죄를 지으며 살겠습니까, 아니면 열심히 전도에 힘쓰며 살겠습니까? 죄가 무엇입니까?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필요 없습니다. 내가 알아서 합니다. 내가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믿는 사람도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안 모시고,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거부하고, 내 뜻대로, 내 편안과 내 안락을 위해 삶을 살아야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 이 한 영혼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나아가는 삶, 그러한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