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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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5일 주일예배
✦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9 ✦
“서로를 치유하는 교회”
(에베소서 4장 25~32절)
[들어가는 말 - 교회의 현실]
우리가 살면서 답답할 때가 종종 있는데, 가장 답답할 때가 언제일까 생각해 보니, 아무리 이야기해도 말이 통하지 않을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빠와 네 살짜리 아들이 길을 가는데, 한 경찰관이 길 건너편에서 교통신호를 위반한 승용차를 세우고 운전자에게 면허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빠가 말합니다. “어, 경찰관 아저씨가 딱지를 띠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네 살짜리 아들의 눈이 번쩍 빛납니다. “아빠, 우리도 집에 가서 딱지 따먹기 하자. 와, 신난다.”
집에 돌아온 후, 이틀 전 놀이터에서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난 아들을 살피던 아빠가 말합니다. “이제 딱지가 굳어졌구나.”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네 살짜리 아들의 눈이 다시 번쩍 빛납니다. “아빠, 지금 딱지 따먹기 하자. 와, 신난다.”
같은 말인데도 전혀 다른 생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같은 말을 사용하지만 전혀 다른 생각으로 사용할 때는 참 답답하고 황당합니다. 1세기의 초대교회나 지금 21세기의 교회나, 모두 ‘예배, 생명, 구원, 자유, 복음, 율법, 교회, 사랑, 은혜’ 등의 용어를 똑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중에 전혀 다른 생각으로 변질되어 사용되는 용어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차이를 나타내는 용어가 아마도 ‘교회’일 것입니다.
교회가 이 미국에서의 삶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에서보다 큰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중에도 한국에서는 교회를 안 다니다가 미국에 와서부터 교회를 다닌 분들이 꽤 계십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외로움이 큰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한국은 나가면 다 한국 사람이지만, 여기는 미국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 보니까 같은 동포를 만나면 아무래도 마음이 더 갑니다.
한국에서와는 달리 이 미국에서는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사람이 많지가 않습니다. 대도시 같은 데는 한국 사람이면서도 서로 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자기 본명을 말하지 않으면서 미국 이름으로 말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전혀 영어권이 아닌데도 미국 이름을 씁니다. 자기를 드러내면 뭔가 손해를 볼까 봐 그렇습니다.
직장에서도 한국처럼 퇴근한 후 동료들끼리 한 잔 하는 법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교회를 안 다니던 분들도 한국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에 관심을 더 가지게 되고, 그러다가 말씀을 들으며 마음을 열고 믿게 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삶에서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교회를 향한 기대치도 높아지는데, 문제는 바로 거기서 생깁니다. 교회가 자신의 기대를 만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망을 주고 실망을 넘어 분노를 일으키는 겁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뭔가 다를 줄 기대했는데, 그들의 삶을 보면 안 믿는 사람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안 믿는 사람보다 못한 경우도 발견하고 실망합니다. 용서와 사랑이 있는 곳인 줄 알았는데, 사랑을 말씀한 예수의 가르침이 있는 곳인데, 오히려 교인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실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한지 3월 1일로 꼭 12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혹시 이 비밀을 아십니까? 제가 부임하기 전까지 우리 교회는 완벽한 교회였다는 사실을... 예, 그렇습니다. 아주 완벽했던 교회였는데, 제가 딱 온 다음부터 불완전한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족하고 불완전한 사람이 왔기 때문입니다. (진짜인 줄로 아는 분들이 계신 것 같네요. ^^)
제가 부교역자였을 때도 보았고 담임목사로 우리 교회에 온 다음에도 보았는데, 완벽한(?) 교회를 찾는 분들을 가끔 만납니다. 사실 ‘완벽한’ 교회라기보다는 자기에게 딱 맞는 교회를 찾습니다. 다른 도시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교회를 찾는데, 자기에게 딱 맞고 만족할 수 있는 교회를 찾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를 가보니까 자녀 교육은 좋은데 목회자가 별로이고, 저 교회를 가보니까 목회자는 좋은데 자녀 교육이 별로입니다. 또 다른 교회는 다 좋은데 찬양을 좋아하는 자신에게 너무 전통적이고, 다른 교회는 찬양을 많이 해서 좋은데 뭔가 비는 부분이 있습니다. 또 어떤 교회는 목회자도 좋고 교육도 좋은데 아주 냉랭해서 별로 환영을 안 합니다. 전부 다 만족스러운 교회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나 자기 입맛에 꼭 맞는 교회는 없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혹시 있더라도, 이 도시에는 없을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런 분들에게 ‘내 입맛에 맞는 교회를 찾지 말고, 내가 봉사할 수 있는 교회를 찾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다른 데로 이사 가시면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내 입맛에 꼭 맞는 교회가 아니라 내가 섬길 수 있는 교회를 찾으십시오.
딱 맞는 교회를 찾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계기로 불만이 생길 수 있고 다니다 보면 이전에 못 보았던 안 좋은 모습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또 떠나야 합니까? 그러니 내가 받는 데 초점을 맞추지 말고 베풀고 섬기는 데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물론 악을 행하는데도 그냥 가라는 게 아니라, 한 가지라도 맞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받는 가운데, 다른 지체들에게 주고 섬기는 일에 집중하면 교회생활이 의미가 있고 신앙도 성장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말씀을 충실하고 곧게 전하는 교회이기만 하다면, 다른 모습은 그냥 넘길 수 있습니다.
이상적이고 완벽한 교회를 다니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이왕이면 제가 섬기는 교회가 완벽한 교회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과연 어떤 교회가 이상적인, 완벽한 교회인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 살펴보고 있는 에베소 교회야말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내용을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완벽한 교회,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새 사람의 삶에 나타나는 네 가지 변화 (25-29절)
저번 본문에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명령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그들에게 어떠한 모습이 삶 속에 나타나야 하는지, 그 구체적인 모습을 먼저 네 가지로 보여줍니다.
거짓 대신 참된 것을 말하기, 분을 내는 대신에 화해하기, 도적질하는 대신에 구제하기, 또 더러운 말 대신에 선한 말을 하기, 이것이 새 사람의 네 가지 변화된 모습입니다. 이 네 쌍의 모습의 앞부분은 옛 사람의 모습이고, 뒷부분은 새 사람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1) 새 사람은 거짓말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해야 한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5절)
그러니까 이 말은 곧 에베소 교회 성도들 가운데 거짓말쟁이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거짓말을 안 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거기에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새 사람이 아니라 옛 사람처럼 사는 것입니다. 성도는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함으로 정직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거짓말을 하면 안 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특히 본문에서 서로에게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래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우리가 서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내 몸의 손이 발에게 거짓말을 하고, 코가 눈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까? 한 몸의 지체가 각기 다른 지체에게 거짓말을 하면 그 몸이 파괴가 됩니다. 따라서 지체는 각기 다른 지체에게 참된 말을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회생활도 그렇지만, 교회에서 다른 지체들에게 혹시 거짓말을 하는 게 있다면 빨리 참된 말로 바꿔야 하겠습니다.
2) 새 사람은 분을 내는 대신에 화해를 해야 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26-27절)
이 말씀도 에베소 교인들 가운데 혈기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 가능합니까? 분노하는데 죄는 안 짓는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도 진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에 대해 진노하셨습니다. 모세에게 “내가 너만 크게 해주고 나머지 저 백성들은 다 쓸어버리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진노하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셔서 다 엎으시고,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독설을 날리시며 분노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분노라는 것은, 죄에 대한 즉각적인 혐오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에 대한 거룩한 혐오를 보이시는데, 그것을 ‘의분’이라고 합니다. 의로운 분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하나님처럼 의분을 낸다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불의에 대한 거룩한 분노를 내야 하지만, 우리 자신들이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의에 대한 분노라고 하면서 사실 죄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 있는 분들은 저를 포함해서, 자녀의 잘못에 대해 야단을 친다고 하지만, 사실은 화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예수님처럼 되어야 의분이 가능합니다. 바울 사도가 분을 품지 말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화를 잘 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의로운 분노가 아닌 감정적 분노로 나아갈 때 어떻게 되는가 하면, 마귀가 그 틈을 탄다는 겁니다. 마귀가 역사하는 장소를 마련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또 다른 죄를 짓는 데로 나아가게 만듭니다(27).
아마 다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화를 안 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그 화가 의분이 아니라 감정적인 분노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화를 냈을 때 거기에 사랑이 임하고 천국이 임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지옥이 임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마귀가 그것을 보고 ‘요거 봐라?’ 하면서 또 다른 죄로 나가게 합니다. 화를 낸 것 때문에 자기를 가리려고 또 거짓말을 한다든지 다른 죄를 짓게 합니다.
그래서 분을 품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심지어 분노는 심한 경우 살인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과 같다고 합니다. 따라서 해가 지도록(신 23:13-15) 분을 품지 말고 신속히 풀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화가 날 수는 있지만, 빨리 풀라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하면 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풀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위해서도 그래야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또 다른 죄를 짓게 됩니다. 마귀가 틈을 탑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3) 새 사람은 도둑질 대신 구제해야 한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8절)
도둑질은 옛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거꾸로 보면, 에베소 교인들 가운데 도둑질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새 사람은 도둑질을 하지 말고 제 손으로 수고하여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일 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했습니다(살후 3:10). 왜냐하면 예수님이 곧 다시 오신다고 하며 다 관두고 일을 안 하니까,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새 사람은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야 합니다(롬 12:11). 새 사람은 남의 것을 훔쳐 오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돕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남의 것을 도둑질해오는 경우는 거의 없겠지만, 진짜 남의 것을 훔치는 것만 도둑질이 아닙니다. 남을 속여서 내가 이득을 보면 그것도 도둑질입니다. 슬쩍 속여서 이익을 보면 도둑질입니다. 세금 보고도 슬쩍 바꾸어서 내가 이득을 보면 그게 도둑질입니다. 그렇게 슬쩍 해서 돈을 번 게 있습니까?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한국의 재벌들을 보면 세금을 적게 내는 것을 가리켜 도둑질한 게 아니라 ‘절세’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건 궤변입니다. 제대로 내면 많이 내게 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어느 기업이 정직하게 세금을 다 냈습니다. 10위 안에 드는 재벌 기업들은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것에 대한 세금을 안 내려고 기를 쓰는데, 어느 중견 기업은 상속받은 것에 대한 세금을 전부 다 정확히 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그 회사의 것만 먹겠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1등을 하는 기업보다 더 많이 냈는데, 그럼 뭔가 이상한 게 아닙니까?
남을 속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남을 도와야겠습니다. 그것이 새 사람입니다.
4) 새 사람은 더러운 말을 하는 대신 선한 말을 해야 한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29절)
더러운 말은 옛 사람의 모습인데,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은 에베소 교인들 가운데 음담패설이나 남에 대한 욕이나 험담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죄인의 마음은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지만(롬 3:19), 새 사람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선한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음담패설하는 것이 상상이 되십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라서 살겠다고 하는 그리스도인, 새 사람은 더러운 말을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합니다(29절; 골 4:6).
그러니까 우리가 언어를 조심해야 합니다. 방송에서도 비속어만 써도 ‘삐’ 처리가 되고, 글로 나오면 XX라고 처리가 됩니다. 인터넷에도 글을 올릴 때 안 올라가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 사회에서도 안 좋은 말은 아예 못 쓰도록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새 사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말버릇도 고쳐야 합니다. 새 사람은 가벼운 말이라 할지라도 덕을 세우고 은혜를 끼치지 못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더러운 말의 기준이 뭡니까? 남이 듣기에 불편한 말, 혐오감이나 수치심을 갖게 하는 말이 더러운 말입니다.
요즘 한국도 그것이 강화되었습니다. 옛날에는 회사에서 윗사람이 여직원들에게 성희롱하는 것이 대수롭지 않게 되었는데, 요즘에는 조금만 비슷하게 비추어도 성희롱으로 걸립니다. 사회에서도 그렇게 되고 있는데, 그 기준은 듣는 사람이 수치심을 느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기준에서 이런 말은 괜찮다고 하는 게 아니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내가 한 말이 괜찮은가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사소한 말, 부주의한 말, 무심코 한 말에 대해서도 심판 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마 12:33-37). 우리는 다 잊어버렸는지 몰라도 하나님은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녹음기를 틀어서 들려주신다고 하면, 여러분은 자신 있으십니까? 사실 사소해 보이는 말이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봅니다. 야고보서에서도 혀는 불의의 세계이고 지옥 불에까지 비유하고 있습니다(약 3:1-12).
그러므로 새 사람은 건전하지 않은 말이나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주는 따가운 말을 절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새 사람은 상대를 격려하고 기쁘게 하고 도전하는, 선한 말을 해야 합니다. 조금 강한 말을 할 때도 내가 화가 나거나 쏘아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정말 잘되게 하기 위한 진짜 사랑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하면 그것은 독이 됩니다.
교회에서 보면, 친하다고 말을 함부로 하거나 반말을 막 하는 경우가 있는데, 친한 사이일수록 더욱 예의를 갖추어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결국 대화의 핵심은 상대방입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느낄까를 생각하며 말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새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을 입었으면서도 옛 사람의 모습대로 살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0절)
강신무당을 아십니까? 신 내림을 받은 진짜 무당입니다. 그래서 칼 위를 막 뛰고 춤을 추고 하는 무시무시한 무당입니다. 그런데 그건 귀신, 잡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신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신 내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신은 ‘성신’, 즉 성령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순간 성령님이 오셔서 들어오십니다. 그러면서 “너는 내 것이다”라고 하나님이 도장을 꽝 찍으시는 것이 바로 ‘인 치심’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새 사람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거짓을 말하고, 분을 내고, 도둑질을 하고, 더러운 말을 하고 있으면, 성령님이 더럽다 하고 떠나셔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계속 계시면서 “근심”, 즉 슬퍼하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슬퍼하십니다. 그런 삶을 살지 말라고 사도 바울이 여기서 권면합니다.
2. 치유하는 교회의 모습 (31-32절)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거짓말을 하고, 분을 내고, 도둑질을 하고, 더러운 말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우리는 흔히 이상적인 교회, 좋은 교회라고 하면 성인군자들이 모여서 아무 문제가 없는, 아주 아름다운 교회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생각하시는 이상적인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왜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실망합니까? 교회에서 천국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자기 한 사람 때문에라도 천국이 안 되는데, 교회에서 천국을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교회는 천국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가 새 사람을 입은 사람답게 살 때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그러나 교회가 곧 천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교회는 병원입니다. 그것도 온갖 불치병 환자들로 가득 붐비는 병원입니다.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혈기 부리고, 술이나 담배나 도박이나 여러 가지 나쁜 습관에 중독된 사람들, 보기에도 좋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한 곳입니다. 병원에 가면 병이 더 잘 걸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또 바로 치료받을 수 있는 곳이 병원입니다.
그러나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하여 변화되고 치유를 경험하는 영적인 병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인들이 모였는데 계속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맛보고 변화가 되어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병자로 왔다가 치유받아 나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영적 병원입니다.
교회는 병원이기 때문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병을 낫게 하는 의사도 있지만 여러 장치와 사람들이 필요한 것처럼, 교회에도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나 자신이 치유가 필요한 환자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문제가 일어날 때를 보십시오. 자기도 환자면서 ‘너는 환자야’라고 비난할 때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기에게 늘 말해주어야 합니다. “나는 환자다. 나는 치유 받을 필요가 있는 환자다.” 이것을 늘 자기에게 상기시켜줘야 합니다. 자신이 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교회는 아주 실망스럽고 부담스러운 곳입니다.
또 자기가 환자임을 알아도 자기가 자기 병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치료가 힘듭니다. 의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환자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자기 몸은 자기가 잘 안다고 큰소리치며, 의사의 말을 안 듣고 자기가 알아서 합니다. 그러다 병을 키웁니다. 그러면서 난리를 피우는 환자를 요즘에는 소위 진상 환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큰 병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어서 치유를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그 길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는 그곳이 최고의 병원이 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31-32절)
이 말씀은 치유를 가져오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줍니다. 먼저는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그 다음에는 채워야 합니다.
먼저 버려야 할 것으로, “악독”은 ‘쓴 마음과 쓴 말, 화해를 거절하는 마음’입니다. 또 “노함”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뜨거운 분노와 격정입니다. 또 “분냄”은 차가운 분노입니다. 속으로 두고 보자고 하며 씩씩 거리는 것을 말합니다. 또 “떠드는 것”을 버려야 하는데, 이것은 소란을 피우고 싸우면서 혈기 부리고 소리를 버럭 크게 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또 “비방”을 버려야 하는데, 남에 대해 나쁜 말 하거나 비방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악의”와 함께 버려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다 버린 다음에, 서로 친절하게 대하고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용서가 그냥 ‘내가 이번엔 한 번 봐 준다’고 하고 다음에 또 두 번째라고 지적하는 그런 게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같이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용서해주셨습니까? 예레미야 31장이나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잊어버리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귀한 외아들을 내어주면서까지 우리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치유의 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가 진정한 영적 병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려면,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는 분위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럴 때 치유가 가능합니다.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죄의 길로 갈 때 그리로 가면 안 되고 이리로 오라고 하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심장마비로 쓰러져서 병원에 들어온 것을 보고 그가 제대로 걸을 줄 모른다고 야단치는 것과도 같습니다.
쓰러져서 병원에 찾아온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뭐라 하면 어떻게 합니까? 이기적이고 날카로운 성격을 고쳐보려고 교회에 왔는데, ‘왜 당신은 성격이 그 따위냐?’라고 하며 화를 내고 지적하면 어떻게 합니까? 병원에는 아파서 온 사람이 당연한 겁니다. 아파서 왔는데 정상인처럼 행동하지 못한다고 나무라지 않습니다. 병원에서는 아픈 것을 당연하다고 이해해 줍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파서 온 사람에게 손가락질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우리는 따뜻하게 맞아주며 치유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치유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회의 분위기가 가족적이어야 합니다.
사실 가장 많이 싸우는 것이 가족입니다. 말다툼을 가장 많이 하는 곳이 가정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서로 다투었다고 “너는 이제 내 가족이 아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가정은 자기가 저지른 실수와 허물이 용납되는 곳입니다. 그런 가족 같은 분위기가 있을 때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을 통해 바로 그런 것을 매주 연습해보자는 겁니다. 처음에는 겉으로만 보니까 괜찮았는데 날이 갈수록 어려운 점이 생기고 마음에 부담도 생기며 보기 싫은 점도 생깁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든 품어주고 치유해주도록 연습하는 곳이 목장입니다.
또 교회에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분위기가 밝아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를 찾아 갔는데 완전히 장례식 분위기가 나고 칙칙한 교회를 가고 싶으시겠습니까? 그런데 따뜻하고 밝으면 또 가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본문을 잘 보면, 바울은 ‘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난 다음에 즉시 ‘하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더 하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거짓말하지 말라고 끝내는 대신에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합니다(25). 분을 내지 말라고만 하지 않고, 화해하라고 합니다(26). 도둑질하지 말라고만 하는 대신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제하라고 합니다(28). 또 더러운 말을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만 하는 대신에, 선한 말을 하라고 합니다(29).
진정한 치유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하지 말라’는 것에 머물면 안 됩니다. 술, 담배도 끊어야겠다고 계속 그러면 그것만 생각하게 됩니다. 끊는 데 초점을 맞추지 말고 건전하고 좋은 것에 맞추면 치유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 ‘하지 말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나는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하니까 괜찮다’고 하는 소극적인 데서 머물고 맙니다. 그러나 하지 말라고 한 것을 안 하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 하라는 것을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죄인이라고 하면 거부감이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죄인이지만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죄인이라고 하면 왜 거부감이 드는가 하면, 살인, 강도, 테러 같은 것을 안 했으니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사랑을 안 하면 죄가 되는 겁니다. 안 하는 쪽에만 초점을 맞추면 성장이 더딥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깨달아집니다. 부정적인 것을 하지 말아야겠지만, 거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좋은 것을 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입니다.
자녀를 가지신 분들은 자녀에게 잔소리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칭찬을 많이 해주면, 그러니까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하라는 데 초점을 맞추면 더 좋습니다. 또 별 볼 일 없는 지도자라도, 안 좋은 쪽이 아니라 잘하도록 격려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겁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라도, 많아야 서너 가지 정도의 영적 기질이 있습니다. 영적 기질이 보통 아홉 가지 정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교회에서 기껏해야 1/3 정도의 교인만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그럴 경우 만족이 안 된다고 뭐라 할 것이 아니라, 비는 부분을 내가 채우기 위해 서로 애쓸 때 정말 만족스런 교회생활이 됩니다.
목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이런 쪽이고 저 사람은 저런 쪽인데, 서로 보완되는 관계로 나아가는 겁니다. ‘저 사람은 왜 저러나?’가 아니라 서로 보완해주는 관계로 나아갈 때 아름다운 공동체가 됩니다.
[나가는 말]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살지만, 신앙생활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너무 추상적으로만 생각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구체적으로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목장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기를 통해 연습하자는 것입니다. 대여섯 명, 일고여덟 명이 모여서 서로를 가족처럼 사랑하면 사랑에 대한 개념이 아주 확실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다 보면 놀라운 치유의 역사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환자들로 가득한 병원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지만, 동시에 환자들입니다. 그런데 환자를 치료하는 데가 병원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냥 병원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프니까 치료해달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런 일반 병원이 아니라 군대의 ‘야전병원’입니다. 환자들은 그냥 환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군사들입니다. 거기에는 신병도 있고, 고참도 있고, 장교도 있습니다. 영적 전투를 하다 보면 모두 다쳐서 들어오게 됩니다. 다쳤다고 뭐라 하는 것이 아니라, 다친 사람을 치유해주는 곳이 병원입니다. 그리고 치료하여 다시 전쟁터로 나가 다시 싸우는 용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 야전병원입니다.
교회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치유해주고, 다시 나가 싸울 수 있게 해줍니다. 여러분이 저보다 더 잘 아시지만, 이 사회가 결코 쉬운 데가 아닙니다. 크리스천이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기에 쉬운 데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병원도 필요하고, 사랑의 영적 공동체인 가족, 즉 교회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치유의 역사를 허락해주시고, 힘을 공급해 주시고, 다시 나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싸우게 해주십니다. 그러한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바로 옆에 있는 믿음의 형제자매가 필요합니다. 내가 저분에게 필요하고 저분이 내게 필요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필요하고, 여러분은 제가 필요합니다.
제가 오래 전에 나눈 이야기인데, 제가 참 좋아하는 이야기입니다. ‘바닷가 어린 소나무’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바닷가 모래밭, 거북바위 옆에 어린 소나무 한그루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거북바위는 자라다가 세찬 바람이 왔을 때 뿌리 채 뽑혀 날아간 다른 소나무들을 생각하며 어린 소나무에게 말도 걸지 않았습니다. 혼자 있는 외로움보다 친구를 잃어버리는 아픔이 더 크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지난날의 소나무들은 빨리 자라서 큰 나무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위로만 자라기를 힘썼습니다. 그러다가 세찬 바람과 폭풍이 불어오면 모두 뿌리 채 뽑혀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거북바위는 시간이 흐르면서 헤어질 땐 헤어질지라도, 그때까지 만이라도 친구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어린 소나무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친구들을 폭풍에 다 잃어버린 아픔도 들려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어린 소나무는 위로 자라기보다는 땅 밑으로 뿌리를 깊이 내리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그리고 짠물보다는 맑은 물을 마시기 위해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그 어린 소나무 곁에 또 다른 어린 소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 다 날아갈까 봐, 그 어린 소나무는 자기의 뿌리를 옆으로 뻗어 다른 어린 소나무들이 자기 뿌리와 얽히도록 붙들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강한 태풍이 불어왔고, 바다는 거품을 토했으며 온 천지는 깜깜해졌습니다. 거북바위는 이번에도 나무들이 다 날아가 버리고 친구들을 다 잃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거북바위가 눈을 떴을 때, 놀랍게도 거기에는 어린 소나무들이 모두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뿌리로 서로서로 붙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거북바위와 아름다운 친구가 되어 큰 숲을 이루었고, 많은 새들도, 사람들도 그곳에 와서 쉬게 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바로 이런 곳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다 부족하고 어린 소나무처럼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서로를 붙들어줄 때,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치유가 일어나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한두 사람의 리더십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교회가 아니라, 연약한 모든 지체들이 다 서로서로 붙들어 주며, 함께 말씀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서로를 보듬어주고 치유해주는 공동체... 이것이 우리가 꿈꾸며 나아갈 교회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