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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5일 주일예배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6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

(에베소서 41~6)

 

[들어가는 말]

 

지금도 그렇겠지만, 오래 전부터 한국에서는 대학 입시에서 떨어지면 입시학원을 갔습니다. 대개의 경우 나는 어느 학교 출신이라고는 말하지만, 어디 학원 출신이라는 것은 별로 말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는 출신학교를 보통은 말합니다. 또 같은 학교 출신 사람을 만나면 더 마음이 가고 동료의식도 생깁니다. 하지만 같은 학원을 나왔다고 그런 게 생긴다고 하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오래 전 한국에서 대학교에 들어가 보니까, 당시 양대 산맥을 이루던 D학원과 J학원 출신들이 학원 동문회를 한다고 모이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그런 동문회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한 번 이벤트 성으로 모이고 말지, 계속 모이지 않습니다.

 

한국 사람은 혈연, 지연, 학연을 중요시해서 탈일 때가 많은데, 학원연이 있다는 것은 못 들어보았습니다. 모 고교 출신들이 자기들끼리 해먹어서 문제라는 것은 들었지만, 모 학원 출신이 다 해먹어서 문제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교인들이 마치 교회를 학원처럼 여기고 다니는 것을 봅니다. 별 애착도 없고 별 유대감도 없습니다. 그냥 다닙니다. 학원은 자기가 대학교에 가기 위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자기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다니듯이, 교회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 (심하게 말하면) 그것만 쏙 빼먹기 위해서 다니는 것 같은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아니면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마치 독서실처럼, 다 같이 많은 사람이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있지만, 자기 혼자 앉아서 공부하는 독서실처럼, 다른 옆 사람과 아무 상관없이 자기 혼자 왔다가 자기 혼자 가는 것 같은 식으로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가 그런 교회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학교도 아니고 학원도 아니고 독서실도 아니고, 교회는 가족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줍니다. “하나님의 권속즉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가족은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모인 단체가 아닙니다. 가족의 기본은 사랑입니다.

 

사실 가족들과 더 티격태격 자주 싸웁니다. 같이 살면서 좋은 모습, 안 좋은 모습을 다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아이가 내 말을 안 듣는다고 너는 이제부터 우리 가족이 아니다.”라고 내치는 가족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부모님이 자기 기분을 나쁘게 했다고 당신은 이제 내 부모가 아니요.”라고 그냥 끊어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족의 기본은 사랑이고, 사랑은 감정만이 아니라 정말 의지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핵심은 하나 됨입니다. 바로 그것이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2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 당연하게 들리지만,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라는 것은 정말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3장에서는 자신이 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도록 부르심을 입었음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제 4장에서는 그러한 복음 안에서의 하나 됨을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1.  하나 됨 (1-3)

 

바울 서신의 특징이 있는데, 바로 이런 식으로 앞에서는 교리적인 또는 신학적인 설명을 한 다음에, 뒷부분에서는 실제적인 내용을 다룹니다. 이제 실제적인 권면을 시작하는데, 이 권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차원의 윤리와 도덕입니다. 그 기초는 어떤 세상이 말하는 윤리나 도덕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분명히 조금 착한 일을 했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차원에서 선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착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에베소서는 주후 62년경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이 감옥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해 쓴 바울의 당부의 글입니다. 바울은 3차 선교여행 때 직접 에베소에 머물며 두란노 서원이라는 곳에서 2년 반 정도 사역했는데, 그러한 에베소 성도들에게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1)

 

여기에 보면,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힌 몸으로 에베소서를 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주 안에서 갇힌 내가”, 즉 무슨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을 위해 감옥에 갇혔다고 하며 그것을 굉장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다른 성도들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갇혔다는 것은 가장 확실한 사도의 표시가 됩니다.

 

그러한 권위를 가진 위치에 있는 바울은 간절한 마음으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무엇을 권면합니까?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까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합당하게 살라.’ 하고 권면합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교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부르심에 걸맞은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이전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그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어떤 삶이겠습니까? 그것은 2장에서 설명하는 대로, ‘선한 일을 하는 삶입니다(2:10). 그 선한 일은 단순히 세상의 윤리 도덕을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고 앴습니다. 그 선한 일이 무엇인지를 여기서 몇 가지를 들어 설명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2)

 

몇 가지를 이야기하면서 그 중에서도 겸손’(humble)을 가장 먼저 언급하는데, 그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겸손이란, 스스로 낮추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태도와 자기를 과시하지 않는 덕성을 가리킵니다.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2:3). 교만은 공동체를 분열시킵니다. 거만을 떠는 사람을 좋아해서 하나가 될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겸손은 공동체를 일치시킵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다가가고 싶고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교만한 사람은 그 반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교만했기 때문에 남들과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바리새인들이 종교적으로 뛰어나다고 인정해주었지만, 그들은 남을 무시하고 정죄하며, 남들보다 더 잘나 보이고 남들과 분리되고 특별 취급 받기를 원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온유’(gentle)입니다.


이것 역시 일치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덕목입니다. 온유란, 내적으로 자기 힘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온유는 힘이 없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과 능력이 많지만 그것을 자기 유익을 위해, 남을 해치기 위해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것, 절제하며 조절할 줄 아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가장 온유한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얼마든지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때려눕힐 수 있는 힘이 있으셨지만, 참으시고 절제하시며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온유의 반대말은 강함이 아니라, 자기주장을 내세워서 반드시 관철시키려는 태도, 함부로 말하는 건방진 태도, 무정하고 가혹한 태도라고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서로를 향해 이런 온유의 자세로 대한다면 그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세 번째는 오래 참음’(patient), 즉 인내입니다(2).


인내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며, 타협하지 않고 오직 기다려줄 줄 아는 마음니다. 몇몇 특이한 장들이 있는데,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장이라고 하고,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이라고 불립니다. 사랑에 대해 가장 처음 나오는 말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서로를 향해 오래 참아주는 태도입니다. 실수했을 때 확 지적하고 화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실수를 해도 참아주고, 또 실수해도 또 참아주는 것이 성도가 할 일입니다. 다른 데 가서 실수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실수를 했는데도 오래 참아주는 것을 말합니다.

 

오래 참을 때 나오는 결과가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2). 참고 기다려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오래 참음과 사랑과 용납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래 참음, 사랑, 서로 용납함과 같은 덕목들이 언제 나타납니까? 자기 혼자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납니다. 이것들은 모두 믿는 자로서 교회 공동체를 이룰 때 필요한 덕목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덕목들이 삶속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선한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목적이며 부르심에 합당한 삶입니다. 그렇게 살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남편에 대해서, 아내에 대해서, 자녀에 대해서, 부모님에 대해서, 특히 시부모님에 대해서, 이런 오래 참음을 실천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관계가 정말 아름다운 관계가 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좀 서운한 일이나 심지어 마음 상하는 일을 들었을 때, 그 사람을 향해 오래 참아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참으로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물론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해서 개인이 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도 중요하고 공동체도 중요합니다. 둘 중 한 쪽이 더 강조되면 다른 쪽은 약화가 됩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의 조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3)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다 각자 개성이 다르고 배경도 다르고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지만, 그들 모두 동일한 성령님을 체험한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고백하시지요?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고백하는 크리스천이라면, 다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 고백을 한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들어와서 함께 해주십니다. 그게 크리스천입니다.

 

우리가 다 배경도 다르고, 출신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르고, 개성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같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님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모든 다른 점들을 다 뛰어넘고도 남는 겁니다. 같은 성령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여기에서 믿는 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근본 목적 중 하나입니다. 특히 교회를 세우신 목적 중 하나가 바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인 동시에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힘써서 지키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하나 됨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연합이 되는 게 아니라, 힘을 써야 가능합니다.

 

하나가 되는 것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고, 또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어서 되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 힘써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영어로 표현이 아주 잘되어 있습니다. “Make every effort to keep the unity of the Spirit”, 성령의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자세히 보면, 서로 하나가 되지 않았으니까 이제부터 하나가 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 주님을 고백하고 한 성령님을 모시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조금 노력하면 하나로 묶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께서 우리를 평안의 매는 줄로 묶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해주신 것이 사실인데 그것을 거부하지 말고, 이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하나 됨이라는 것은 새로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라면 이미 성령께서 이루어주신 일이며, 그것이 깨어지지 않게 힘써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어떻습니까? 이 말씀은 너무 좋은데, 내가 겸손하면 저쪽에서는 내가 겸손한 걸 모르고 자기가 잘난 줄 알며 더 기고만장하고 나오면 당연히 기분이 안 좋습니다. 나는 말씀대로 살겠다고 온유하게 해주는데 저쪽에서는 나를 무시하고, 오래 참았더니 바보인 줄 알며 더 못되게 굴면, 그런 사람을 용납해주는 것이 엄청난 손해를 본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사실 예수님은 그보다 더 손해 보는 삶을 살다가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내가 손해 보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안 하면 나에게 엄청난 손해입니다. 특히 용납하고 용서할 때 내가 삽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죽습니다. 내가 용서하지 못하면 그 사람이 손해 보는 게 아니고, 내가 손해 보고 내가 죽는 겁니다.

 

왜 우리가 사랑 가운데 용납해야 합니까? 특히 왜 나에게 그토록 못되게 구는 사람을 용납해주어야 합니까?

 

첫째, 용납하고 용서하지 않으면 그 분노와 미움이 독이 되어서 나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한 것인데, 순수 한국말로 된 병이 미국의학백과사전에까지 실린 것이 있습니다. ‘hwa-byung’(화병)입니다. 용서의 길을 몰라서 화병이 들어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인도 모르고 약도 없습니다. 화병에 약이 어디 있습니까?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독한 미움이 암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미움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길, 즉 해독제가 바로 용서이며 용납입니다. 겸손하고 온유하고 오래 참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해독제이고 그것이 내가 사는 길입니다.

 

오래 전에 이미 결과가 나와 있고 그 후에도 계속 연구가 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 Medical School의 머리 미틀만(Murray Mittleman) 교수가 있는데, 심장 전문의입니다. 그의 그룹이 주로 심장에 대한 연구를 하는데, 그의 연구에 따르면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심장마비를 일으킬 위험이 두 배나 높다고 합니다. 벌써 십여 년 전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화를 내는 것이 생명의 단축을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여러 실험 결과로 지금도 계속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은 내가 사는 길입니다.

 

둘째, 용납하고 용서해야 나를 구속하는 속박(chain)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자주 사용된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라는 헬라어 단어를 문자 그대로 풀어보면 자신을 풀어주다, 멀리 놓아주다, 자유하게 해주다라는 뜻입니다상처가 영원히 아물지 못하도록 과거에 매달려 수없이 되뇌며 딱지가 앉기 무섭게 뜯어내는 것이 미움이고 원한입니다. 딱지가 졌는데 자동적으로 떨어져야지, 바로 뜯어내면 또 상처가 납니다. 그게 미움이라는 것입니다.

 

오래 전 히틀러의 나치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온 한 독일 출신 유대인 랍비가 이런 고백을 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미국에 오기 전에 아돌프 히틀러를 용서해야 했습니다. 새로운 나라에 오면서까지 히틀러와 함께 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 내가 어디를 가든지, 세계에서 가장 좋은 휴양지에 휴가를 가고 가장 좋은 데에 아무리 여행을 다녀도,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품고 있으면 내가 간 휴양지에 그 사람이 따라와 있습니다. 그게 무슨 휴양이고 휴가이겠습니까? Release해야 합니다. 풀어줘야 합니다. 그게 내가 사는 길입니다.

 

용서를 통해서 치유 받는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사람은 바로 그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진실한 용서는 포로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 포로는 다름 아닌 라는 겁니다. 그 동안 미움이라는 감옥 안에 나 자신을 가둬놨는데, 그 포로가 바로 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셋째, 용납하고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죄의 악순환을 끊는 길이며 서로가 사는 상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5:15, )

 

이것은 갈라디아 지역(지금의 터키 중부)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쓴 편지인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교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일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멸망하니까 조심하라고 합니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15:14, )

 

이것은 내가 손해 보는 길이 아닙니까? 아니요, 내가 사는 길입니다. 만약 미워하는 사람 계속 미워하고, 보기 싫은 사람 계속 안 본다면 그게 무슨 교회이겠습니까? 그게 무슨 크리스천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세상과, 안 믿는 사람과 다른 점이 뭐가 있겠습니까? 다른 점은 딱 하나입니다. 예배 시간에 왔다 가는 것. 그것 외에는 똑같습니다.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면서도 같이 모여 예배드리고 섬길 때, 그것은 참된 예배나 섬김이 될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는데 아무리 남북통일을 말하고 나라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들, 어떻게 설득이 되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세상을 향해 사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래 전 유명한 베스트셀러였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What's So Amazing about Grace?)>라는 책이 있습니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라는 유명한 기독교 작가가 썼습니다. 그 책에 보면, 유명한 작가인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기독교인들은 비꼰 내용을 인용해서 거기에 적었습니다. 마크 트웨인이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나는 개와 고양이를 한 우리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들은 바로 적응하고 어울리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새와 돼지와 염소를 한 우리에 넣어 보았다. 그들도 얼마간의 적응 기간을 거치고 나서 친구가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침례교인과 장로교인과 천주교인을 한 방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들 중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안 믿는 사람이 교회를 보고 비꼰, 슬픈 이야기입니다. 너무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정말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하겠습니다. 아니 이미 하나가 되게 하셨는데, 그것을 힘써 지켜야 하겠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도록 하는 어떤 것이라도 과감히 버리고 하나가 되어 나아갈 때 뭔가가 일어날 것입니다.

 

혹시 교회 안에서 서로 못 본 체하거나 대화하기를 거부하는 상대가 있습니까?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에 순종해야겠습니다. 힘써야 합니다.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얼마나 어렵습니까? 힘써야만 합니다.

 

보기 싫은 사람을 계속 보는 것, 듣기 싫은 이야기를 계속 듣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을 하는 겁니다. 목장은 괜히 바쁜 데 쓸데없이 모이는 게 중심이 아니라, 바로 거기서 이것을 연습하는 겁니다. 계속 모이다 보면 아무리 처음엔 좋은 것 같아도 자꾸 만나다 보니까 마음에 안 드는 모습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안 들어도 계속 만나는 것, 저번에 한 이야기를 또 하는데 계속 들어주는 것이 훈련입니다. 이것이 하나 되기 위해 힘쓰는 노력입니다. 주님이 묶어주신 것을 우리가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힘써 지키는 것, 그것이 교회 아니겠습니까?

 

 

2.  한 하나님 (4-6)

 

바울은 믿는 자들이 하나라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 됨의 비밀은 우리가 두 가지, 즉 하나 됨의 근거와 하나 됨의 자세를 알고 행하는 데에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의 하나 됨의 근거로서 7가지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4-6)

 

그리스도의 몸, 성령,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 주님, 믿음, 세례, 하나님’, 이렇게 우리는 최소 일곱 가지 공통분모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7가지는 다시 3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바로 성령, 성자, 성부 하나님입니다.

 

4을 다시 보십시오. 그 초점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한 성령님의 역사로 이렇게 한 몸인 교회에 속하게 되었고, 또 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5의 초점은 성자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한 주님을 믿음으로써 같은 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같은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시로 모두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표시로 받는 것이 세례입니다.

 

이전에는 믿으면 세례를 부었는데, 요즘에는 좀 변질이 되어서 안 믿는데도 교회를 조금 다니니까 세례를 받으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는 안 믿는데 그냥 받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특히 군대에서 세례를 받은 분들이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그 믿음을 가졌다는 표시로 받는 것이 세례입니다.

 

6의 초점은 성부(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믿고 동일하신 하나님, 곧 만유(모든 것)를 지으신 그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시고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은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의 순으로 말하지만, 여기서는 그 순서가 아닙니다. 먼저 성령이 나오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가장 먼저 경험하는 것이 바로 이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비로소 만유(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교리적인 순서가 아니라 체험적인 순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같은 성령, 같은 주님, 같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결국 한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 각자는 한 사람인데 우리 인원이 많아지는 만큼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이 존재합니다. 다 생각이 다르고 원하는 게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우리 모두의 같은 아버지이심을 고백할 수 있다면, 수가 적든 많든, 서로가 얼마나 다르든 상관없이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한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3.  하나 됨을 이루는 길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 됨의 자세를 우리가 어떻게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도덕적으로 또는 의지적으로 결단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하나 되게 해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도움 없이는 하나 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하나 됨을 보여주는 경우가 꽤 있는데, 성령으로 하나 된 게 아니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또 자신의 이익을 따라 흩어지게 됩니다. 붙었다 흩어졌다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 됨을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그런 식으로 붙었다 떨어졌다 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그 하나 됨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5:15-18, )

 

하나 됨을 이루고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게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들을 잘 보면 하나 됨을 이룰 수 없는 경우들이 나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살피지 않음으로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경우, 세월을 아끼지 않을 경우,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해 어리석은 자가 될 경우, 술에 취하여 방탕하게 사는 경우가 나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고, 그렇게 되면 결국 하나 됨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고 갈등과 다툼이 생기는 경우가 언제인지 한 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교인 간에도 그렇지만, 가정에서 부부간에, 또 부모와 자녀 간에 서로 마음이 상하는 경우가 언제 생깁니까? 믿는 사람인데 그런 경우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했을 때입니다. 성령이 충만해서 부부싸움을 피 튀기게 하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저도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 그런 현상이 벌어집니다. 아이에게 꾸짖는다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가 신경질이 나서 소리를 지르는데, 제가 성령 충만하지 못한 상태라서 그런 겁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상태를 말하는데, 그러니까 성령 충만하지 못한 상태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할 때를 말합니다. 아니면 뭔가 다른 것의 지배를 받는 겁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 때는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전 말씀드린 그런 경우들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 됨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교인끼리 주중에 따로 만나서 차를 마시며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성령 충만이 없이 인간적인 교제를 한다면, 아무리 지금 당장은 좋은 것 같아도 금방 깨어지고 상처를 주고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 충만하면 성령님의 지배를 받아서 주님이 원하시는 대화를 하게 될 것입니다. 서로 덕을 세워주고 유익을 끼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각자가 자기가 자기를 지배하는 상태,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상태에서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게 되고 또 별 것도 아닌 말에 상처를 받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비록 구원은 받았지만,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육체를 입고 살기 때문에 그 안에는 계속 죄성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은 깨끗하지만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 있는 우리는 혼(지정의)과 육에 죄성이 있어서 언제라도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수가 있습니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나도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끊임없이 성령님의 충만함을 구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나 목장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수밖에 없습니다.

 

목자, 목녀, 목부님들이 열심히 기도하면서 목장을 모이지만, 특히 모임 당일에 기도해야 하는 게 이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목장 모임이 되기를 기도하는 동시에, 각자가 성령 충만하여 모일 수 있도록, 그래서 덕울 세워주고 유익을 끼치는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우리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의 분열과 다툼을 일으키는 세력이 있을 때, 그것은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에 완전히 불순종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 됨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오래 전 중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책에서 읽었습니다. 어떤 크리스천이 어느 날 자기 논에 물을 가득 채웠는데 그 물이 자꾸 줄어드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알고 보니 옆에 있는 논 주인이 자기 허락도 없이 자기 논에서 물을 자꾸 빼 가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안 하고 남의 물을 빼 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최근 들어 자기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VIP였습니다. 아직 믿지는 않는데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참고 원상태로 회복시켜 놓았는데, 다음 날 보니까 또 물을 빼 가는 겁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래도 그가 아직 안 믿는 VIP이니까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저 사람은 잘못된 짓을 하고 저는 올바른 일을 하는데, 제가 꾹 참고 이렇게 하는데도 왜 제 마음속에는 평안이 없습니까?” 그렇게 계속해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했더니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너는 올바른 일을 위해서만 살려고 하느냐? 그 이상으로 살 수는 없겠느냐?”

 

그는 그 응답을 깊이 생각하다가 깨달음을 얻고 그는 이튿날 일찍 일어나서 아예 자기가 먼저 자기 논의 수로를 그쪽으로 물이 들어가게 돌려놓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진짜 그리스도인이십니다. 저도 이제는 선생님처럼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고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큰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남에게 해를 안 끼치며 사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 이상입니다. 소극적으로 나는 나쁜 일을 안 하니까 되었지라는 정도가 아니라, 성령 충만하여 성령님의 지배를 받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 됨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최소한으로만 살려고 하면 더 힘들어집니다. ‘크리스천은 요런 것만, 최소한만 하면 돼라는 식의 신앙생활을 할수록 더 힘들고 자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최대한을 향해 힘쓰며 나아갈 때 엄청난 기쁨을 누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가 될 것이고, 그렇게 하나 된 우리를 통해 이 어두운 세상이 변화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아 하나 된 우리를 통해 그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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