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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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29일 주일예배
✦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5 ✦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
(에베소서 2장 11~22절)
[들어가는 말]
오래 전인 2000년부터 2002년 사이에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 제목은 ‘러브하우스’입니다.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들 중 하나였던 ‘러브하우스’는, 당시 건축업계에서 유명했던 건축가들이 참여하여, 일반인의 아주 형편없었던 집을 뜯어고쳐 개조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습니다. 서민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해주는 몇 안 되는 프로였습니다.
그 후 2002년에 일본 아사히 방송에서 이 러브하우스 프로그램을 거의 통째로 베껴서 “극적 비포 애프터”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10년이 넘게 전국에 방영을 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에도 그와 비슷한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ABC-TV의 “Extreme Makeover: Home Edition”이라는 것입니다. 2003년 12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무려 9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이것 역시 어려운 가정과 연결되어 집을 새로 지어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라크 전쟁에서 죽은 참전 용사의 자녀들과 그 할아버지 할머니 가정을 위해서 해주고, 시작장애인과 그 가족들, 전쟁에 참전했다가 한쪽 다리를 잃은 사람 등, 여러 사연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서 집을 고쳐주는 프로그램입니다.
낡고 형편없던 집이 완전히 새 집으로 화려하게 탈바꿈한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그 집 가족들은 모두 깜짝 놀라며 모두 그 자리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안 보여주다가 탁 보여주는 순간, 모두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또 그 집을 고쳐준 디자이너들도 나와서 서로 얼싸 안으며 감격하고 기뻐하는 것을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쓰러져 가는 집을 고쳐준 것도 감사하고 감격스럽지만, 사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그보다도 훨씬 더 감격스럽고 기뻐할 일입니다. 그렇게 감격의 눈물을 매일 매일 흘려야 마땅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죽음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헌 집이 새 집으로 바뀌는 것보다 훨씬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엄청난 감격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각자가 그런 사람이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전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주 쓰러져가고 형편없던 집 같이 쓸모없던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완전히 변하여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역사가 일어난 것을 오늘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건은 단순히 개인의 차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 교회적인 차원이라는 것을 설명해줍니다.
1.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의 모습 (11-12절)
에베소서는 교회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데, 2장 앞부분(1-10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가, 즉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설명하며, 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셨는지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10절)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만드셨습니까? “선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불쌍한 사람을 조금 도와주는 그런 정도의 착한 일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목적, 소명을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1-12절)
하나님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라고 만드셨기 때문에, “그러므로 생각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다시 한 번 “그때에” 즉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 안 믿었을 때, 그들이 어땠었는지를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때, 즉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을 때 에베소 교인들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11절에 나오듯이 “이방인”이었습니다. 또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였습니다. 12절에도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자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 “외인”,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자, “하나님도 없는 자”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에” 그들이 어떠했는가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에베소 사람들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던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혈통으로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북서쪽의 지금의 터키 지역에 있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고, 영적으로는 아무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부모님이 믿으셨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교회에 출석하며 자라고 믿었지만, 우리 중에는 중간에 믿은 분들도 계십니다. 어린 시절, 학창 시절, 아니면 성인이 되어서, 또 50대, 60대 이후에 믿은 분들도 계십니다. 저처럼 어릴 때부터 믿은 사람보다는, 중간에 믿은 분들은 이런 말씀이 더 실감이 날 것 같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과거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그들이 이전에 얼마나 나쁘고 악한 사람들이었는가, 형편없는 사람들이었는가를 드러내고 지적하고 조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을 알게 되어 얼마나 놀라운 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불만족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목장에서도 감사의 제목을 먼저 나누지만, 살다 보면 불평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내 인생은 이러다 끝나는 건가?’ 하며 불만족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만족할 수 있는 비결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전의 나의 삶을 생각해보는 겁니다. 특히 중간에 예수님 믿으신 분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떤 상태였는지를 생각해보면,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이 얼마나 복되고 감사하고 아름다운 삶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별로 실감하지 못한다면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정말로 구원을 받은 경험이 없거나, 아니면 구원은 받았지만 그 구원(영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고 얼마나 감사할 만한 일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전 말씀드렸던 한국의 ‘러브하우스’나 미국의 ‘Extreme Makeover’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낡고 형편없던 집이 완전히 새 집으로 화려하게 탈바꿈한 것을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그 집 가족들은 모두 깜짝 놀라며 모두 그 자리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 순간 그 엄청난 변화를 보고도 덤덤하고 아무 반응이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감격적인 순간에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가만히 있거나 별 것 아니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 선물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하고 귀한 것인지, 이전에 그렇게 더럽고 쓰러져가던 집이 이처럼 완전히 새롭게 고쳐진 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아니면 처음에는 누구나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하고 감사하며 좋아했는데, 한 달 두 달, 1년 2년 시간이 지나면서 고장이 나는 곳도 있고, 또 그 새 집에 사는 것을 당연시하며 오히려 ‘화장실을 좀 더 크게 짓지 왜 이렇게 고쳤나?’ ‘방 페인트 색을 왜 이런 것으로 칠했나?’ 하며 점점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누가 문제인 것입니까? 고쳐주는 팀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새로 고쳐주었어도 불평하는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당연히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들이 지금 누리며 살고 있는 새 집에 대해서 진정한 감사함을 느끼려면, 이전에 그 집이 어땠는지 사진을 꺼내어 보면 됩니다. 이전에 다 쓰러져가던 집, 바퀴벌레가 들끓던 집의 사진들을 꺼내서 보면, ‘야, 이전에 이렇게 최악이었구나. 내가 불평할 게 아니구나.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최고가 되었구나.’ 하며 계속해서 감사함과 감격 속에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영성일기도 좋고 큐티도 좋고 그냥 일기도 좋습니다. 기록을 남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큐티도 눈으로만 읽지 마시고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몇 년 지난 후 그것을 보면, 하나님이 그때 그렇게 인도해주셨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며, 너무 감사하게 됩니다. 불평이 쏙 들어갑니다.
2. 그리스도가 주신 평화 (13-18절)
우리가 주님 안에서 그렇게 변화된 모습을 13절부터 확인해줍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3절)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선포합니다. “전에 멀리 있던” 에베소 성도들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13). 누가 어디에 가까워진 것을 말합니까? 다음을 보면 그것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4-16절)
여기에 보면 “둘”이라는 단어가 반복되어 등장합니다(14, 15, 16, 18). 그런데 이 둘이라는 것이 누구와 누구를 가리킵니까?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7절)
이 둘이라는 것은 “먼 데 있는 너희”와 “가까운 데 있는 자들”입니다. 즉 이들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말합니다. 사실 유대인이 아닌 사람은 다 이방인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교인들도 그렇고 또 우리들도 다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인 에베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유대인들과 가까워졌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화평”(14)이십니다. 그래서 인류를 둘로 나눠 놓았던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14)을 없애셨습니다. 율법으로 규정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 그리고 그로 인한 적대감(원수 된 것)이, 예수님께서 율법을 ‘자기의 육체로 허신’(14) 방법을 통해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누구든지 그분을 믿으면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라는 구분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그냥 넘어갈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인간 사회의 여러 구분과 차별과 적대감과 미움을 이 십자가를 통해 해결해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15). 그러니까 서로 다른 사람들, 심지어 원수로 있던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라고 부르고 ‘지옥 불에 뗄감으로나 쓸 것들’이라고 하며 무시했습니다. 또 헬라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무식하다고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둘 다를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닌 “한 새 사람”(15)을 만드셔서 더 이상의 구분과 차별과 미움이 없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갈 3:27-28, 새)
이 갈라디아서 구절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인종적, 사회적, 성적, 계급적 차별이 없어졌는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세례를 받음으로 없어졌다는 것입니다(27).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여 그분과 하나가 됨으로써 인간의 모든 차별들이 소용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사회에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예수 안에서는 그런 것들이 아무 상관이 없어졌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과 하나가 된 사람들은 유대인이냐 그리스 사람(이방인)이냐, 종이냐 자유인이냐, 남자냐 여자냐 하는 것을 놓고 다른 사람을 차별하거나 당을 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구분과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회를 보면 여전히 담이 높습니다. 물론 지금의 상황과 성경이 쓰인 1세기 상황이 달라서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지금 자꾸 담을 세우고 있습니다. 국경에도 담을 세우고, 사람과 사람을 자꾸 구분하며 나누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인데, 정말 평등합니까? 전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다 보고 있습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처럼, 돈이 없는 사람은 죄를 안 지었는데도 죄인이라고 하고, 돈이 많은 사람은 죄를 지어도 죄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지금 전 세계가 다 그렇습니다. 그런 사회 속에서 우리 크리스천들도 살면서 자꾸 사람 사이에 구분을 짓습니다. 지금 미국의 새 정부가 들어와서 국경에 담을 세우고, 어제부터 7개 이슬람 국가 사람들을 못 들어오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것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가만히 보면 자신 안에 남들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게 다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나는 인종차별을 한 적이 없다.’라고 생각하실지 몰라도, 끼리끼리 당을 짓는 것도 차별을 하는 겁니다. 출신지(혈연, 지연, 학연)에 따라 구분합니다. 출신이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까지는 자연스럽지만,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는 데로 나가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출신지에 따른 지방색이 있고, 사회적 계층의 차이를 둡니다. “우리 집안은 양반 집안이야.”라고 하면 무슨 의미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상놈 집안이라는 말 아닙니까?
또 재산의 정도에 따라 사람을 구분합니다. 요즘 많이 쓰는 금수저, 흙수저, 다이아몬드수저 등, 자꾸 사람을 나누려고 합니다. 학력이 높으냐 낮으냐, 어느 학교 나왔느냐를 따지고, 남녀 차별도 아직 있고 인종차별도 아직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거창한 것들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식사할 때도 내 마음에 별로 안 드는 사람을 싹 제쳐놓고 마음에 맞는 사람만 만나서 밥을 먹는 것도 차별하는 것입니다. 이게 당을 짓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종차별을 철폐하라고, 종교에 따라 차별하기를 철폐하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는 함께 하고 싶고 싫어하는 사람은 싹 제치고자 하는 마음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에게도 있고, 부정한 사람에게도 그런 마음은 다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구분이 없다고 성경이 계속 말씀하는데도, 자꾸 다른 점을 찾아서 차별을 두려고 하는 방향으로 세상이 자꾸 가고 있고, 우리도 그렇게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직분자를 선출할 때도, 투표를 할 때 나랑 친하니까 뽑고, 별로 안 친하거나 나에게 잘하지 않으니까 안 뽑습니다. 가족이니까 뽑고 아니니까 안 뽑고, 같은 고향 출신이니까 뽑고 아니니까 안 뽑고, 같은 학교 출신이니까 뽑고, 나 한테 밥을 사줬으니까 뽑고... 그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논리적인 것 같아도 감정에 따라 결정을 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안에 그런 차별이 존재한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미워하고 있다면, 어떻게 이것을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국경 장벽을 세운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못 들어오게 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또 그것을 항의하고 데모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결됩니까? 예수님의 길, 십자가의 길 밖에는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뭡니까?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만약 자기를 위하셨다면 당연히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게 하려고 오는 사람들을 다 때려눕히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충분히 그럴 힘이 있으셨습니다. 자기를 위했다면 그렇게 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고 돌아가셨습니다.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길이 열린 겁니다. 그래서 차별이 없고 하나 되는 길이 열린 겁니다.
여러분, 그처럼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가 죽을 때에만 차별과 미움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계속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이러면 안 된다’고 하거나 아니면 ‘그래도 해야 된다’라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장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반대로 보면, 자기희생이 없이는 차별과 미움의 문제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미움이나 갈등의 문제가 있을 때, 어느 한쪽이 죽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됩니다. 전쟁도 한쪽이 테러하면 반대쪽이 와서 다 때려 부수고, 그럼 또 복수하고 또 때려 부수고... 자기 것을 주장하면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죽어야 해결됩니다.
그런데 누가 죽겠습니까?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는 분이 죽을 수 있겠습니까? 아는 우리가 희생하고 죽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희생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거창하게 그런 이야기를 할 것도 없고, 가정에서 부부싸움을 봐도 그렇습니다. 놀랍게도 부부싸움의 본질은 ‘권력 다툼’입니다. 집에서 누가 최고냐는 것입니다. 둘 다 계속 그러면 해결이 안 되는데, 한쪽이 미안하다고 하며 죽으면 금방 해결됩니다. 그럼 한쪽이 그럴 때 다른 쪽이 거 보라고 더 공격하면 안 되고 같이 죽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진정으로 믿고 구원받은 자라면, 그러한 교회라면, 그런 차별과 적대감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되돌아봐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루신 평화를, 오히려 ‘그때’(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모든 행위는, 사랑과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대한 정면 도전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부인하는 반역의 행위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사실이 또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가 되게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서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은 그냥 친하게 지내라고 하시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더 나아가 우리가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8절)
14-15절에서 수평적인 관계에 있어 서로 차별하며 원수 되었던 자들이 하나가 되고 화평하게 되도록 하신 것을 선포하는 반면, 16-17절에서는 수직적인 관계에서 하나님과 화목(회해)하게 하신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18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우리의 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과 유대인, 또 우리 모두가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옛날 구약시대 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이었고, 그것도 1년에 딱 하루였습니다. ‘대속죄일’(Yom Kipur)에 그 해의 대제사장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지성소에 혼자 들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1년에 딱 한 명이 딱 하루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 성령 안에서 우리가 함께 얼마든지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해주신 일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주신 평화로 인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어진 새로운 공동체, ‘둘로 하나를 만드신 것’(14), ‘한 새 사람’(15), ‘한 몸’(16)으로 표현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수평적으로 하나가 되어 수직적으로(위로) 하나님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것, 옆으로 하나가 되어 위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바로 이것이 두려운 점입니다. 수평적인 회복과 수직적인 회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매번 이것을 말하지만, 너무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혹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좀 좋지 않아도,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 읽고 혼자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만 잘 유지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해나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도 그렇고 성경 전체의 메시지가 그렇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가 회복되어야만 그 다음에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수평적인 것(다른 사람과의 관계)을 먼저 얘기하고 그 다음에 수직적인 것(하나님과의 관계)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결코 가볍게 지나칠 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연합한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떼려야 뗄 수 없는, 별개가 아닌 하나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한 성령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하나 되어 나아가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혼자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서 결코 다른 사람과의 미움의 관계를 가지고 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마 5:23-24, 새)
또 가장 큰 계명은 분명히 두 가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는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가 수요예배 때 앞으로 다루어 보려고 하는 ‘예수 신경’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사랑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요일 4:20-21, 새)
교회를 안 다니는 분들에게 죄송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가 안 좋은 모습을 보일 때가 많기 떄문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온 분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위선자라고 느낄 때가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사랑을 외치지만, 실제로 교회에서 너무 싸웁니다. 심지어 법정 싸움까지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혀 말과 다르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이 잘못 믿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모습이 아닙니다. 진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의 모습은, 물론 어렵지만,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면서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신앙인의 삶입니다.
제가 안식월 때 어릴 때 살던 동네를 방문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가 고등학교 때 다니던 독서실이 아직도 있었습니다. 그 이름이 ‘시온 독서실’인데, 우리가 지은 그곳의 별명은 ‘공포의 시온 독서실’이었습니다. 그 독서실에 가서 공부만 하면 시험을 망친다고 해서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공부한다고 가서 사실은 친구들과 놀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독서실에 가보면 칸막이로 되어 있습니다. 자기 책을 가져와서 자기가 혼자 공부하다가 집에 가는 겁니다. 거기에 수십 명, 수백 명, 도서관 같으면 수천 명이 거기에 같이 앉아 있습니다. 같이 시간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교류는 없습니다. 자기가 가져온 것을 자기가 하고, 가고 싶을 때 가고 오고 싶을 때 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 있지만 각자 자기 할 일만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마치 그런 독서실처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오고 싶을 때 오고, 가고 싶을 때 가고, 옆사람과 아무 상관없이 있다가 갑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신앙생활은 결코 그런 독서실 같은 모습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서 나 혼자 따로 할 일만 한다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우승하는 스포츠 팀들도 한 번 보십시오. 우승하기 위해 굉장히 열심히 합니다. 우승한 팀 감독과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볼 때, 모든 우승 팀 감독들이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어 서로 brother가 되어서 서로 사랑하며 열심히 훈련해서 된 것이다.’ 정말 하나가 되고 가족이 되었다는 겁니다.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지 알 수 있는 정도로 훈련했다는 겁니다. 아무리 슈퍼스타가 여러 명이라도, 서로가 마음이 안 맞는 팀은 우승을 못합니다. 하나가 되어야 우승을 합니다.
오케스트라도 보십시오. 악기가 얼마나 다른 것이 많습니까? 다양한 악기들이 있는데, 각자 맡은 파트를 열심히 연주하면서 전체 음악이 하나로 완성이 됩니다. 성가대도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가 있고 반주자와 지휘자가 있는데, 서로 어우러져 한 찬양을 만들어 냅니다.
바로 이겁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독서실 같은 신앙생활이 아니고 바로 이런 오케스트라와 같은, 또 우승 팀 같은 것입니다. 그런 하나 됨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혹시 지금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멀리 또는 다른 데 있을 수도 있지만 혹시 이 안에 있다면, 언제까지 그 심각한 문제를 슬쩍 덮어놓고 ‘나만 하나님을 잘 믿으면 되지’라고 하며 계속 교회생활을 하겠습니까? 언제까지 그것을 그냥 두고 문제가 없는 척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벌을 주려고 그러시는 게 아니라, 안타깝게 여기시면서 사랑의 마음으로 바뀌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마음으로 아무리 예배를 드린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겠습니까? 빨리 해결해야 되겠습니다. 다음에 하겠다고 하지 마시고 지금 당장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가 되기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의 평화의 결과인 교회 (19-22절)
교회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으로 “한 새 사람”(15)과 “한 몸”(16)이라는 말을 썼는데, 19-22절에서는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표현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19절)
여기에서 교회에 대한 중요한 표현들이 나오는데, 첫째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어 모든 특권을 다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놀라운 개념이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을 말합니다. ‘원수 된 것’으로 상징되던 적대적인 관계가, 이제 평화의 관계를 넘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일로 인해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 다음 부분인 20-22절에서는 교회의 이미지를 약간 바꾸어, 건물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0절)
지난주 베드로전서 2장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했는데, 여기서도 교회는 든든한 기초 위에서 지어져 가고 있으며 그 기초의 중심은 모퉁잇돌 되신 그리스도이시고, 여기 보면 “사도들과 선지자들”(20)이 그 기초를 세우는 역할을 했다고 말씀합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사도들 즉 선지자들’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좋은데, 그 뜻은 ‘선지자 역할을 한 사도들’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에 대한 진리를 가르치고 전파한 사도들의 권위 위에 세워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기초 위에 세워진 이 건물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21-22절)
그러니까 교회의 시작점은 모퉁잇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으로부터 건물이 ‘서로 연결’되고(21) ‘함께 지어져’ 갑니다(22). 그분이 없으면 교회가 안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목적은 ‘주 안에서 성전’이 되는 것이며(21), 또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22)가 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여기에 거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여기 교회당에서만 만나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러분이 떠나시면 하나님은 여기 남아 계시고 여러분은 알아서 가시는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늘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여기에서 교회에 대해 세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확인하게 됩니다.
1) 교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것은 그분을 중심으로 이뤄집니다.
“모퉁잇돌”(20), “그의 안에서, 주 안에서”(21), “예수 안에서”(22) 등의 표현을 보십시오.
2) 건물이 서로 연결되고 지어져 가는 것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성전이 되어가고”(21),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혹시 완벽한 교회를 찾아 오셨으면 잘못 오신 겁니다. 전혀 완벽하지 않습니다. “Under Construction”이라는 사인도 있듯이, 계속 지어져 가는 중입니다.
3)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서로 연결하여”(21),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지어져 가는 중인 교회는, 모두가 서로 하나가 되어 지어져 가야만 하며, 또한 함께 가야 합니다.
[나가는 말]
제가 여기 처음 이사 온 지가 벌써 12년이 되었습니다. 처음 올 때 교회 근처의 작은 condo를 하나 샀는데, 여러 분들이 집에 오셔서 수리를 해주셨습니다. 실비로 마루도 깔아주시고, 페인트칠도 해주셨습니다. 그 후 화장실 타일도 바꿔주시고, 데크가 상해서 몇 분이 와서 고쳐주셨습니다. 그때는 너무 감사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당연히 여기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그것들을 볼 때마다 참 감사한 마음입니다.
집을 고쳐준 것도 그렇게 감사한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전에 내가 어떤 상태였는가? 지금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그 감사와 감격,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바로 그렇게 해주신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인 이 주님의 교회 안에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던 바로 그 교회임을 깨달으며, 더욱 힘차게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교회로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