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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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15일 주일예배
✦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3 ✦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
(마태복음 16장 13~20절)
[들어가는 말]
지난 주일부터 스티브 홍 전도사님이 청소년 사역과 영어 사역을 위한 전임교역자로 부임하여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저희 교회에 부임한지 거의 12년 만에 제가 영어 사역에서 은퇴(?)했습니다.
작년에 우리 교회의 청빙위원회에서 어떤 목회자를 찾을 것인지 그 자격조건과 사역 내용을 의논해서 결정을 한 다음, 광고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영어권 교역자를 찾는 교회는 많은 반면 영어권 교역자의 수는 많지 않기 때문에 구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나게 하시고 이렇게 오시게 되었습니다.
영어권 교역자는 누구든지 있으면 교회마다 서로 모셔가려는 경쟁이 치열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찾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한국어권 교역자들은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교회를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갈수록 그런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데, 지금도 한국에서는 많은 신학교들을 통해 매년 신학생들은 많이 배출되는 반면에 한국 교회의 숫자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한 경우에는 교회들이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목회자의 조건들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몇 년 전 한국의 어느 기독교 신문에서 그런 세태를 비꼬며, 어느 교회에서 새로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광고를 이렇게 냈다고 글을 올렸습니다. 물론 실제로 낸 게 아니라 이런 식이라는 것입니다.
“40대의 나이로 30년 이상의 설교 경험을 가지신 분, 청년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장년의 능숙함으로 목회할 수 있는 분, 건물 수리와 자동차 정비 자격증이 있는 분, 1종 대형 운전면허증 소지자, 매일 오전 7시에서 오후 11시까지 근무가 가능한 분(2교대 아님), 교인들에게 매일 30통 이상의 전화를 할 수 있고 항상 사무실에 대기하고 있다가 어느 때이고 심방을 갈 수 있는 분, 심방 시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먹을 수 있는 위대한 분.”
물론 이것은 세태를 비꼬아서 만들어낸 내용이지만, 실제로 요즘 목회자를 청빙할 때 많은 교회들이 내거는 조건을 보면 예수님도 청빙이 안 되겠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조건들이 많이 붙는 것을 보게 됩니다. 특히 큰 교회일수록 조건이 많고 까다롭습니다. 미국에서 목회자를 구할 때는 ‘한국어와 영어에 능통한 분’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아)시라고, 즉 구세주이시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한참 모자란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의 조건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오해한 것이고 그들의 착각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살펴보면서, 지난주에 이어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나를 누구라 하느냐? (13-16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3년 동안의 사역을 마무리하시는 시점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갈릴리에서 주로 사역하시던 예수님은, 오늘 사건 이후에 변화산 사건(17:1-13)을 정점으로 하여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게 됩니다.
누구든지 인생의 마지막 시점은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이 땅에서의 삶을 아시고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으로 가십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3절)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에 대해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 예수님이 일부러 예루살렘의 반대 방향인 북쪽의 이곳으로 오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남쪽에는 사해가 있고 유대 지방이 있습니다. 북쪽에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갈릴리 지방이 있는데, 갈릴리에서 남쪽 유대로 가지 않으시고 북쪽으로 가신 뜻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가이사랴’라는 곳이 있고 ‘빌립보’도 있습니다. 가이사랴라는 곳은 중부 해변가에 위치한 도시로서, 로마의 유대 총독 관저가 있던 도시였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다 사라졌다 한 도시입니다. 빌립보서와 관련된 빌립보는 마게도니아(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유럽의 첫 도시입니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가서 첫 번으로 만나는 주요 도시인데, 바울이 가서 교회를 세운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빌립보 가이사랴는 그곳들과 전혀 상관이 없는 지역입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인 헐몬산 기슭에 위치한 곳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의 왕이었던 헤롯 대왕에게 아들이 여럿이었는데, 그 중 하나인 헤롯 빌립입니다. 그가 그곳에 도시를 만들고 로마 황제의 칭호인 ‘가이사’를 따서 가이사랴라고 하고, 자기 이름도 집어넣어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빌립이라는 이름은 그 위대한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당시 로마 제국 내에는 시저의 이름을 붙인 도시가 많이 있었지만, 황제의 이름을 아무 데나 또 아무렇게나 붙일 수는 없었습니다. 시저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로마 황제의 영광에 어울리는 화려한 모습과 웅장한 규모를 갖춘 도시여야 했습니다. 아주 시골의 형편없는 데에다가 시저 이름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 도시의 가장 높은 곳이나 가장 중심에 시저를 위한 신전을 세워야 했습니다. 물론 사도행전의 사건들이 벌어지던 1세기 중반까지는 황제 숭배가 그렇게 많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1세기 후반에는 황제 숭배가 강해졌지만, 중반까지는 황제 숭배가 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시저의 이름이 붙는 곳에는 황제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도시에 황제의 칭호가 붙었다는 말은, 이 가이사랴 빌립보가 외형적으로 엄청나게 웅장한 모습을 갖춘 도시였으며, 황제를 위한 신전도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지난 번 안식월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을 때 이곳을 방문했는데, 지금도 남아 있는 터가 아주 넓었고, 큰 바위 산을 판 부분들이 있었고 거기에 우상들을 많이 세워놓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도 그 터가 아주 넓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로마 황제 시저의 도시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온 것입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과 또 갈릴리 촌사람이 대부분인 제자들의 모습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런 화려하고 웅장한 도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주 초라하고 형편없는 모습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마치 품위 있게 차려 입은 귀빈들이 가득한 파티에 거지들의 한 떼가 몰려든 것과도 같은 그런 장면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다 보니까 심심해서 이곳에 오신 게 아니라, 아주 의도적으로 이 황제의 도시, 화려하고 엄청난 로마의 영광을 자랑하는 이 도시에 제자들과 함께 오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수련회를 가지신 것입니다. 제자훈련의 마지막 단계로 수련회를 통해 뭔가를 가르쳐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질문을 하시는가 보면 그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13) 이 질문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4절)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선지자 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언급한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았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이 하신 일들과 가르친 말씀의 내용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틀림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선지자라고 생각했지 메시아(자기들의 구원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자기 민족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늘 가난한 자들과 함께 다니고, 죄인들과 어울려 지내던 예수가 메시아(그리스도/구원자)라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메시아라면 좀 더 뛰어나고 화려한 영광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생각하던 메시아는 아주 강력한 메시아, 로마로부터 자기들을 구원해줄 강하고 화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니까, 특히 이 가이사랴 빌립보에 도착한 그분의 모습은, 사람들이 생각하던 메시야의 모습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의도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만 듣고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이 핵심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5절)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너희는”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예, 예수님은 OOO이십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런데 지금 이 질문을 하시는 장소가 다른 곳이 아닌 황제의 도시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하필 다른 곳이 아닌 이곳에서 이 질문을 하셨습니까? 당시 로마는 ‘팍스 로마나 Pax Romana’(로마의 평화)라는 기치 아래 정복 전쟁을 펼쳤습니다. 무력으로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여 평화를 이룬다는 것이었습니다. 힘으로 눌러서 평화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가 추구하던 것은 강한 힘이었고, 그와 더불어 높은 지식과 육체적인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육체의 강함과 강한 군사력을 움직일 수 있는 높은 두뇌와 지식과 정보력과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사회가 로마 사회였습니다. 로마는 그런 것들을 통해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나타내고 과시할 수 있는 여러 웅장한 건물들과, 황제의 신전과, 대형 도서관과, 근육질 남자의 조각상들과 벌거벗은 여인의 조각상들을 세웠습니다.
바로 그런 것들로 가득한 도시가 빌립보 가이사랴였고, 그곳 한복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말씀은 “너희도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은 로마가 추구하는 힘과 지식과 육체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데, 너희도 그 길을 따르겠느냐, 아니면 다른 무엇을 따르겠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여러 화려하고 웅장한 것들로 가득한 이 황제의 도시에서, 너희는 정말로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 것이냐?”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아주 유명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절)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라고, 구원자라고 고백합니다. 지금 온 세계를 힘으로 정복하고 화려함으로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풍요로움을 준다고 약속하는 로마 황제 가이사가 구원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이 가이사의 도시 한복판에서 감히 고백한 것입니다. 또한 빌립보 가이사랴를 비롯한 로마제국 전역에서 신으로 떠받드는 황제가 신이나 신의 아들인 것이 아니라, 초라한 모습인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이 시저의 도시, 황제의 도시에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주인이 진짜 누구인가를 물으시기 위해 이곳으로 제자들을 데려오신 것입니다. 마지막 십자가를 향해 길을 떠나시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것을 확실히 알게 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함으로써, 당장 눈에 보이는 이 빌립보 가이사랴의 주인인 시저, 온 세상을 주관하며 다스린다고 하는 그 황제의 길을 추구하지 않고, 주님의 길을 따르겠다는 고백을 한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제국이 추구하며 과시하는 권력의 힘, 돈의 힘, 인간의 지식, 그리고 육체의 아름다움과 쾌락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길로 가겠다는 결단을 고백한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가 진짜로 그렇게 가겠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당시는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투던 때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니까 예루살렘에 가셔서 왕이 되실 것이라고 하던 때 이 고백을 한 것입니다. 황제의 길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따르겠다고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황제보다 더 세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황제의 길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결국 나중에는 주님의 길로 갔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삶은 정말로 주님의 길입니까, 아니면 황제의 길입니까? 좁지만 생명으로 이끄는 길입니까, 아니면 넓지만 우리를 멸망으로 이끄는 길입니까?
여러분, 이 땅에서 우리가 살 수 있는 인생은 한 번뿐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잘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남은 기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얼마 남았을까 생각하실 것이고, 젊은 분들은 그렇게까지 생각은 안 하겠지만, 반드시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 인생이 얼마가 남았을까?’
젊었다고 많이 남은 것도 아니고, 나이가 많다고 해서 더 적게 남은 것도 아닙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이 소중합니다. 우리 인생이 얼마 남았겠습니까? 얼마가 되었든지, 남은 기간 동안 정말 중요한 것을 하며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우들 가운데에도 우리보다 먼저 우리 곁을 떠난 분들이 계십니다. 그 중 병에 걸려 돌아가신 분들도 계시지만 갑자기 돌아가신 분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때에 먼저 가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이 몇 월 며칠에 죽을 것이라고 알고 가셨겠습니까? 모르고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남은 기간 동안, 매일 중요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신앙인이라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고 주님의 제자라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삶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가신 길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삶을 사셨습니다. 그 길을 한마디로 하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명령에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또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고난의 길이고 십자가의 길이었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한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죽으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비록 고난과 죽음의 길이었지만 그 끝은 놀라운 부활과 영광이었습니다.
이것은 자기만 잘 먹고 잘 사는 길이 아닙니다. 자기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은 시저의 길, 황제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잠시 이 세상에서 쾌락과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수는 있지만, 결국은 멸망의 길입니다.
그런데 황제의 길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습니까? 사회적 성공, 좋은 학교에 가는 것, 경제적 능력, 높은 연봉, 학문적 지식, 육체의 아름다움(얼짱, 몸짱) 등, 이런 것들이 요즘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1세기부터 벌써 그것을 다 알고 ‘육체의 연습, 즉 운동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도 사람들이 운동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운동에는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경건의 연습(훈련)은 지금과 내세에 약속(영향)이 있다’고 미리 말씀을 했습니다(딤전 4:8).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끝날 것에 집중하며 살고 있습니다. 방금 말한 이런 것들은 여기서 가져갈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다 끝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만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의 끝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족이겠습니까? 아닙니다. 허무입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허무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남들이 다 인정해주고 칭송해주는 무슨 업적을 이뤘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오히려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많이 가지고 많이 먹고 잘 생기고 편안한 것만으로 행복해지지가 않습니다. 배가 부르다고 우리가 행복해지는 게 아닙니다. 잠시는 그럴지 몰라도 만족이 안 됩니다. 개는 먹고 배부르면 그냥 행복해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황제의 길을 추구하는 삶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허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최근에 많이 쓰는 단어 중의 하나가 ‘갑질’입니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권력이나 힘이나 돈을 이용해서 밑에 있는 사람들을 하인 부리듯이 막 대하고 욕하고 꾸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이 된다면, 그런 짓을 해도 한 번만 하고 끝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계속합니다.
돈 많은 사람을 보십시오. 돈이 많으니까 더 안 벌어도 될 것 같은데 욕심이 끝이 없습니다. 돈이 많을수록 더 벌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많이 벌어도 만족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뻥 뚫린 공간이 세상의 억만금을 다 집어넣어도 그것이 너무 커서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황제의 길로는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큰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보다 훨씬 더 큰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구원하신 뜻이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서로를 바라볼 때 ‘저 사람은 별볼일 없는 사람이야.’라고 보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세상의 시각입니다. 서로 고귀한 존재라고 봐줘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봐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할 때 행복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길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온통 황제의 길로 가라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부추깁니다. 그 길로 가면 행복이 보장된 것처럼 광고를 합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입니다. 성경이 계속 우리에게 말씀해주는 것은 그와 반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행복하십니까? 만족하십니까? 감사하십니까? 여러분 교회에 다니고 예수 믿으며 신앙생활 하는 것이 행복하십니까? 혹시라도 짐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특히 어릴 때부터 모태신앙으로 자란 사람들은 교회에 빠지면 마음에 부담이 생깁니다. 그래서 억지로, 억지로 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만약 신앙생활이 별로 감사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고 만족도 없고, 삶 자체에도 별로 만족이 없다면, 혹시 내 삶의 목표가 황제의 길이라서 그런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합니다. 황제의 길을 추구하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시저의 형상과 신전과 웅장하고 화려한 것들로 가득했던 빌립보 가이사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런 것들로 가득합니다. 돌아보면 좋은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환경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여러분, 정말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십니까? 세상이 추구하는 황제의 길이 진짜가 아니라, 예수님의 길이 진짜라고 받아들이십니까? 그 길로 가겠다고 결단하십니까? 이 결단을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우리가 예배에 와서 그냥 음악 듣고, 노래도 같이 따라하고, 기도도 하고, 눈 감았다 떴다, 앉았다 일어났다 몇 번 하고, 설교 몇 십 분을 끙 참아주고서, 이제 주일을 지켰다고 하며 가는 그런 게 예배가 아닙니다. 결단이 있어야 예배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이 자리를 나갈 때에는 ‘내가 황제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가겠습니다.’라고 결단하며 이 문을 나가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주 예배를 드릴 때마다, 집에서 개인적으로 혼자 큐티와 기도로 개인예배를 드릴 때마다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는 황제의 길을 가겠느냐, 나의 길을 가겠느냐?”
우리는 주님의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만 합니다. 대답을 회피하며 살다 보면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때가 반드시 오고 맙니다. 그리고 그때는 엉뚱한 대답을 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대답하고 결단하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주님이 세우시는 주님의 교회 (17-20절)
황제의 것으로 가득한 곳에서 예수님을 신뢰하는 고백을 한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 예수님은 기뻐하시면서 칭찬을 해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7절)
‘바’는 아들이라는 뜻이고, ‘요나’는 이름입니다. 히브리어로 요나이고 헬라어로 요한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하시는데, 요나와 요한이 같은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생각으로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18-19절)
여기서 몇 가지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18)
교회는 주님이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여기 “이 반석”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으로 교회 역사상 많은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전통적으로 로마가톨릭에서는 베드로가 헬라어로 페트로스(petros) 즉 ‘반석’ 또는 ‘돌’이란 의미이므로, “이 반석”은 베드로 사도를 가리킨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이며, 그가 최초의 교황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을 비롯해서 복음적인 개신교 신학자들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헬라어로 ‘페트로스(petros)’이지만, “이 반석”에 쓰인 헬라어 단어는 페트로스가 아니라 ‘페트라(petra)’라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페트로스’는 분명히 남성명사이고, ‘페트라’는 여성명사이기 때문에, 이것을 일부러 다르게 쓴 것을 보면 이 반석이 곧 베드로가 아니란 결론이 됩니다.
그러나 요즘 들어 개신교이든 로마가톨릭이든, “이 반석”이 베드로는 베드로인데, 이전의 보통 베드로가 아니라,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다음의 베드로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 반석”이 단순히 인간 베드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그 믿음,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반석이고, 그 위에 주님은 당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나 제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원자로, 하나님의 아들로,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이 세상을 주도하고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 황제의 길을 따르지 않고, 오직 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곧 교회입니다. 다른 기준과 가치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기준을 따라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2)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18)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누구의 교회입니까?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사람의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목사의 교회도 장로의 교회도 그 누구의 교회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교회만이 존재합니다.
우리 교회는 장로교회인데, ‘장로교회’라는 말은 장로의 교회라는 게 아니라 장로교의 정치체제로 되어 있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장로’라는 말도 Elder가 아니라 Presbyter로서 그 말 안에는 목사와 장로가 다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누구의 교회도 아니고 주님의 교회만이 존재합니다. 만일 어떤 교회가 목사의 교회라면, 장로의 교회라면, 어느 개인의 교회라면, 그 교회는 교회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주인은 어떤 개인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십니다. “내가 세우리니.”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세우십니다. 물론 사람들이 지역교회를 개척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을 통하여 주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와 주인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그렇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자기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은 구원자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그것을 고백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으로 인해서만 되는 신령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십니다. 교회는 주님의 것입니다.
3)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8)
‘음부’를 ‘지옥’으로 바꿔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사망의 권세, 사탄의 권세가 결코 이길 수 없는 강력한 것입니다. 영원한 주님의 길을 가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하신 주님께서 동행하시기 때문에 죽음의 권세는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의 많은 교회들이 분쟁과 다툼에 휘말려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교회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주님의 길이 아니라 황제의 길, 세상의 길을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그리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길은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과 이득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런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게 되면 무자비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서로 대적하고 싸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음부의 권세, 사탄의 권세가 결코 이길 수 없는 게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바로 우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엄청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황제의 길이 우리 안에 스며들게 되면 그 엄청난 우리가 아주 시시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그래서 시시한 것을 가지고 다투게 되고 음부의 권세에 굴복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교회에서 서로 반목하고 대적하는 일이 생길 때 그렇게 되는 원인을 보면 대부분 중요한 일이 아니라 시시한 일입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 자존심, 감정 같은 것들입니다. 본질적인 일이 아니라 아주 비본질적인 일을 가지고 그렇게 됩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황제의 길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자기의 자존심이 중요하고 자기의 감정이 중요합니다. 남은 상관없고 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의 길로 바꿔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4)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교회의 권세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의 영원한 길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계속 “내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셨고, 요한일서에서도 “주님의 뜻대로 구하면 다 응답해주신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놀랍게도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는 역사가 우리를 통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응답이 없을 것이고, 전하지 않으면 그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서 역사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이 찬란한 로마제국의 길, 황제의 길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안식월 때 정말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 찬란함의 결과는 전부 폐허입니다. 아니면 지금까지 찬란하게 남아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 결론은 뭔가 하면 바로 관광 수입입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폐허가 되었든지 웅장하게 남아서 관광수입을 올리든지... 그래도 그것을 통해 관광객들의 돈을 벌어들이고 있으니, 황제의 길은 참 끈질깁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의 길로 곧 들어서게 될 시점에서 제자들을 데리고 많은 지역들 중 하필 이 황제의 도시인 빌립보 가이사랴에 오셔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까?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으로 보이는 황제의 길을 뛰어넘어서 영원하신 주님의 길을 추구하지 않고서는, 주님을 향한 참된 믿음이 결코 시작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길을 가지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참된 크리스천, 참된 교회가 되는 길이 따로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 황제의 길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지난 안식월 때 이곳저곳 좋은 데를 많이 가볼 수 있어 참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곳들 중에 지금까지도 제 마음에 깊이 남는 장소가 하나 있습니다. 그곳은 그리스의 고린도 근처의 바닷가였습니다. 사실 그곳을 구경한 게 아니라, 하루 고린도 투어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투어 버스 안에서 내리지도 않고 잠깐 보기만 하고 떠나온 그런 바닷가였습니다.
그 바닷가의 성경에 나오는 이름은 바로 '겐그레아'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18장에서 뜻한 바가 있어 머리를 잘랐다고 하는 그 겐그레아입니다.
그 후 로마의 찬란한 바티칸에도 가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순교했다고 하는 무덤 위에 엄청난 성당을 세운 성바울성당에도 가보았습니다. 엄청난 것들이 참 많습니다. 나쁜 게 아닙니다. 다 좋은 곳들이고 훌륭하며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런 엄청난 건물을 원했을까? 사도 베드로가 그 엄청난 성베드로 바실리카를 원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쓸쓸한 바닷가... 지금 교회 터와 항구 터로 돌무더기만 조금 남아 있는 겐그레아의 쓸쓸한 바닷가는 아무도 찾지 않습니다. 바티칸이나 성바울성당 같이 엄청난 관광객들이 가는 곳과는 달리 겐그레아의 쓸쓸한 바닷가는 아무도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바닷가에서 결심하고 배를 타고 떠났던 바울의 마음이 제 마음에 울려 오면서, 정말 주님의 길을 간 사람이 바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천하를 손아귀에 넣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없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로마 황제들이 그러했습니다. 반대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주님을 붙들고 주님과 함께 하면, 그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었습니다.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황제들은 다 사라졌지만,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또 그 주님의 복음은 지금도 계속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무엇을 얻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내가 네게 무엇을 주기를 원하느냐?”고 하실 때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를 향해 “내가 너희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하신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을 하겠습니까?
“오직 주님만을 원합니다! 주님의 길을 원합니다!”라고 대답하면서, 황제의 길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선택하고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