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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8일 주일예배
✦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2 ✦
“태초부터 계획하신 하나 됨의 공동체”
(창세기 3장 1~19절)
[들어가는 말]
오래 전에 한 미국의 크리스천 매거진에 나온 이런 제목을 본 적이 있습니다. “You can't say, 'I love Jesus but hate his wife.'”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아내를 미워한다고 할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몇 가지로 표현하는데, ‘그리스도의 몸’도 있고 또 다른 것은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 즉 예수님의 아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아내 된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며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분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아내, 즉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그분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신부인 교회를, 즉 주님을 믿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데 교회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보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애를 쓴다고 하더라도, 요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미국에도 “Yes to Jesus, no to church”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는 안 좋다는 말입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잘못한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점점 더 반기독교적인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 미국도 점점 더 반기독교적인 분위기가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반기독교가 아니라 반교회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제도적인 교회를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점점 더 싫어하는 현상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미주의 한인 사회에서도 교회가 얼마나 웃음거리가 되는 적이 많습니까? 콜럼버스는 그런 경우가 많지 않지만, 몇 년 전 어떤 분이 시카고에 출장을 갔다가 한인 택시를 타고 가는데, 택시를 운전하는 분이 어느 교회 때문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다고 하며 교회를 조롱하는 말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서로 싸우고, 갈라지기도 하고, 심지어 법정에 나가서 싸움도 벌이고, 또 원수가 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술 한 잔 하고 서로 쌓인 것을 푸는데, 믿는 사람들은 말로는 ‘사랑’을 외치면서도 서로 미워하고 원수가 되어 싸우고 한 번 찍히면 절대 용서하지를 않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또 교인들을 싫어하는 것이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원래 예수님이 원하셨던 교회의 모습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교회,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교회의 원래 모습을 회복해야겠습니다. 원래 주님이 의도하셨던 교회의 모습의 핵심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것이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나와 서로 뜨겁게 사랑하며, 또 그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공동체를 주님은 원하셨습니다.
1. 하나 됨의 공동체로 창조된 인간 (창 2:18-25)
사실은 태초부터 하나님의 계획의 가장 앞자리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구약에 ‘교회’라는 말로 나오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천지창조 계획 가운데에는 교회가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실 때, 모든 것을 만드시고 가장 마지막에는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24)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하나 됨의 공동체로 만드셨고,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공동체의 본질이며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공동체가 세 개 있는데, 가정과 교회와 천국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 때부터 공동체를 보여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는 한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 됨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 수 있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하나 됨은 사람의 창조 때 시작된 게 아니라 그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실 때 자신 안에 있는 하나 됨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결국 공동체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지만 세 인격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십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 자체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성부 성자 성령’ 세 인격이 계시다는 것은 성경을 볼 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삼위일체는 신학자들도 100%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실 것은 없습니다. 간단히 생각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각각 독특하시면서도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서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세 분의 독특한 인격으로 존재하시며 독특한 사역을 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세 인격이 완벽하게 하나를 이루며 존재하는 공동체이십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진리이면서 또한 위대한 신비입니다.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실 때 공동체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공동체는 원래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다. 아담을 만드신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창 2:18)
여기서 ‘좋지 않다’는 것이 NIV 영어성경에는 ‘not good’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사실은 ‘미완성(incomplete)’이라는 뜻입니다.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해서는 혼자만 있어서는 안 되고 최소한 한 명 이상 더 있어야 합니다. 복수가 되어야 하나도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혼자 있는 남자를 돕기 위해서 돕는 배필로 여자가 창조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함께 하나 됨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왔고 남자의 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남자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도 여자들에게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그 교회들의 독특한 상황 속에서 문제가 되는 것을 지적한 것이지 여자를 비하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돕는 배필’로 지으셨는데, 그럼 도움을 받는 사람이 더 뛰어납니까, 아니면 도와주는 사람이 더 뛰어납니까? 당연히 도와주는 사람이 더 뛰어납니다. 많은 경우 여자 분들이 옳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저도 그렇고 잘 인정을 안 합니다. 속으로는 자기가 틀린 것을 알지만 겉으로는 잘 이야기를 안 합니다. 또 뼈가 더 강합니까, 흙이 더 강합니까? 당연히 뼈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연약한 것 같으면서도 강한 존재가 아닌가 합니다.
2. 하나 됨의 상실 (1-6절)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 됨의 공동체를 만드러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공동체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공동체를 만드셨고, 지금도 공동체를 만들고 계십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사랑의 공동체는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 조건입니다. 공동체는 모든 시대의 모든 믿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의 공동체의 일원이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안 오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경우도 가끔 있는데, 교회는 원래 주님의 공동체입니다. 주님의 몸이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원래 공동체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주님의 의도입니다. 학자들이 그것을 깨닫고 한 말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어떤 교인이 마음 상하는 일이 생겨서 목사님을 찾아와 하소연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지 않습니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이렇게 함께 하면서 공동체를 이뤄야 하는데, 어떻게 그런 막말을 하며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있습니까? 자기가 그런 말을 안 했다고 해도 인간은 영적 동물이 아닙니까? 말 안 해도 다 느끼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속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 동물을 어떻게 합니까?’
그만큼 인간은 공동체를 떠나서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이고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하는 가운데 서로를 향해 어느 정도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또 인간을 만드셨는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한 그들은 서로간에 하나 됨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안에 사는 한 아담과 하와는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바로 그 하나 됨이 깨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많은 과일들을 주시고 인간에게 “무엇이든지 먹어도 좋으나,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2:16-17)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데 사탄이 뱀의 모양으로 나타나 이 먹지 말라는 명령을 통해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여기서 사탄이 어떻게 에덴동산에 있는가 하는 것은 오늘의 주제가 아닙니다.
사탄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에 의심을 품도록 만드는 전략을 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신 것을 교묘하게 왜곡시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1)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라도 “그거, 정말입니까?”라고 물어보면 ‘진짜가 아닌가?’ 하고 마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사탄이 그것을 알고 있던 겁니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2-3절)
하와의 마음에는 의심이 생기기 시작한 겁니다. ‘아, 그렇지. 설마 먹는다고 죽기야 하겠나?’ 그러니까 뱀이 그 의심이 생기는 것을 보면서 더 강하게 유혹을 합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4-5절)
정말 죽는다고 하셨는데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하니까, 그 틈이 생긴 것을 보고 뱀은 안 죽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처럼 될까 봐 못 먹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하와의 마음엔 아마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우리가 자기 라이벌이 될 까봐 그런 거야.’ 그런 마음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쳐다보니까 어땠습니까?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6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습니다. 그 열매를 따먹으면 자기가 정말 하나님처럼 될 것 같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결국 자기가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여기에도 오해가 있습니다. 아담이 어디에 출장을 갔고 하와가 혼자 집에 있는데, 뱀이 외판원처럼 와서 “이거 한 번 잡솨 봐!” 하니까 먹어 보고 “맛있네” 하면서 남편이 돌아오니까 “여보, 이거 한 번 먹어 봐.”라고 해서 남편도 먹었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둘이 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먼저 따서 먹은 것 뿐이고 둘 다 책임이 있는 것이지, 아담이 어디에 갔다 온 게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류의 조상이 저지른 첫 죄입니다. 흔히 죄라고 하면 살인, 강도, 도둑질, 사기 치는 것 등을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죄이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요즘 그런 것들을 참 많이 봅니다. 그런데 가장 근본적인 죄는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필요 없고,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알아서 한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 내 결정은 내가 알아서 한다. 하나님 필요 없고 내가 한다.’ 이게 죄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으로 행세하려는 마음,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나머지 모든 것은 다 그 죄에서 나오는 결과물입니다. 로마서 1장에 죽 죄의 목록이 나와 있는데, 다 자기가 하나님 노릇을 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들입니다. 살인, 강도, 도둑질, 사기 치는 것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이고 자기 주인으로서 자기가 결정하니까 그 결과로 그런 것들이 나오는 겁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이 왜 하필 선악과나무를 에덴동산에 두셔서 인간을 타락시켰냐고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나무만 만들지 않으셨으면, 또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지만 않으셨으면, 아무 일이 없이 인간이 잘 살지 않았겠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악과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인간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이제부터 나에게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해가 되는가, 내 인생에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가를 나 스스로 결정하겠다. 하나님은 필요 없고 내가 결정하겠다.’ 하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 됩니다. 이것이 무서운 범죄인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탄의 말을 더 신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이유는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교만이란 점입니다.
이 죄를 짓기 전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사랑과 신뢰와 믿음의 관계였습니다. 사탄은 이 신뢰와 사랑의 관계에 의심을 불어넣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아, 진짜 하나님을 다 믿고 따랐다가는 손해를 보겠다. 뭔가 더 좋은 게 있는데 하나님이 숨겨놓고 우리가 못하게 하나 보다.’라고 판단하게 되었고, ‘이제부터는 무엇이 우리에게 이익이고 무엇이 손해인지를 우리가 결정하겠다.’ 하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죄의 핵심입니다.
3. 범죄의 세 가지 결과 (7-19절)
사람이 이처럼 범죄한 결과 세 가지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첫째, 수치심이 나타났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7절)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2장 24절을 보면, 죄를 짓기 전에도 벗고 있었는데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벗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때는 부끄러워하지 않았지만 죄를 짓고 나니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둘째,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8절)
그들은 바람이 불고 시원할 때 하나님이 동산에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오실 때 기뻐하고 좋아하며 만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나자 두려워진 겁니다. 그 결과로 두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범죄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사랑의 관계가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9-10절)
하나님이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9)고 물으시니까 아담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 말은 자세히 보면 사실이 아니라 거짓말입니다. 그들이 숨은 이유는 두려움이었는데, 이 두려움이 생긴 원인은 벗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벗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벗었다고 두려워졌겠습니까? 사실은 따먹지 말라는 과일을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솔직하지 못하고 거짓말하기 시작한 것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깨어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그 점을 정확하게 지적해주십니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1절)
“네가 왜 지금 두려워서 숨었느냐? 그것은 벗어서 숨은 게 아니라, 내가 네게 명한 것에 불순종하고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다.”라고 정확히 지적해주신 것입니다. 이때 아담의 대답을 보십시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2절)
이 말을 보면, 먼저는 하나님 탓을 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여자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주셨고 그 여자가 과일을 먹으라고 주었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었다고 변명을 합니다. 줘도 안 먹으면 되지 않습니까? 결국 자기 책임인데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닙니까? 참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누가 뭔가를 정확하게 이야기해줘도 “저 사람 때문에 이렇게 됐다. 상황 때문에, 부모님 때문에, 조상 때문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하와를 만들어주셨을 때의 고백이 아주 유명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23). 하와를 보고 그렇게 기뻐했던 사람이, 이제 와서는 이 여자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여자 때문이라고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어지고, 부부간의 관계도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여기 여성분들이 하와였다면 어떻게 느끼셨겠습니까? 굉장히 울분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해 하와는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절)
이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뱀이 꾀었으니까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자기가 안 먹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결국 자기가 결정하고 먹은 것입니다. 물론 사탄이 뱀으로 등장한 것인데, 여기서 놀랍게도 하나님이 메시아를 예견하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4-15절)
창세기는 현대 문학 작품처럼 쓰인 게 아닙니다. 고대 상황에서 쓰인 책입니다. 그러니까 표현이 우리에게 생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말씀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내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여자의 후손’이라는 게 없습니다. 전부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대면서 ‘나는 OOO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자기 엄마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은 그냥 막연한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여자의 후손’이라는 한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그 한 사람이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여기서 벌써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의 사건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의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과의 하나 됨과 서로간의 하나 됨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로간의 아름답고 조화롭던 관계가 사라지고, 그 때부터 무서운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압제하는 주종 관계, 누르는 관계, 살인과 미움과 속임수 같은 것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전부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보겠다고 하여 실패한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말씀해주십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16-19절)
바로 이겁니다. 바로 이러한 죄의 결과는 ‘내가 하나님이 한 번 되어 보겠다’고 하는 소위 ‘원죄’ 때문에 모든 관계가 깨어지고 이렇게 힘든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4.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삶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우리는 수치를 알게 되었고, 두려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인류는 이들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수치심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것 때문에 왔는지 과학적으로 증명할 길은 없지만, 우리에게 수치심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에 대한 수치심이 있으십니까? 저도 다 그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것에 대해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면, 혹시 그것이 남들에게 드러날까 봐 걱정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수치심은 항상 두려움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진짜 내 모습이 드러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내가 겉으로는 멀쩡한데, 진짜 본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알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얼굴에 가면을 쓰고 주변에 성을 쌓습니다. 마음 문도 굳게 닫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안전함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외로움과 고독 같은 것이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외로움의 문제, 수치심의 문제,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고독이 수치심과 두려움의 결과라는 것을 잘 아시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사시면서 한 번도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는 완전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완전한 삶을 산 유일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수치 그 자체였습니다.
성화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밑에 수건 같은 것을 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다 벗기고 누구든지 볼 수 있게 하여 수치를 당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을 가장 오래 당하게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단순한 사형 방법이 아닙니다. 너무 무서워서 로마 시민은 십자가에 달면 안 되는 법이 있었습니다. 차라리 목을 잘라 죽이는 게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수치를 전혀 당할 필요가 없으신 분이 왜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셨습니까? 바로우리의 수치를 없애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완전한 삶을 사신 분이 왜 사형을 당하셨습니까? 우리가 받아야 할 천벌을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그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수치심과 두려움을 없애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요일 4:18, 새)
수치심과 두려움을 없앤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을 나타냅니다. 이제 하나님은 결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무서운 분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고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섭고 두려워할 심판자가 아니라, 나를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바로 이러한 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깨어졌던 그 관계가 예수님 때문에 회복이 된 것입니다.
그러데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만 회복시키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니까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사랑의 공동체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같은 사랑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각각 독특하신데도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독불장군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이십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소위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십자가 죽음 직전에 하신 마지막 기도이니까 굉장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요 17:11, 새)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요 17:21, 새)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 17:22, 새)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하나이신 것처럼 제자들도 하나가 되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 예수님이 구주시라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알리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시라는 것을 세상에 어떻게 알릴 수 있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로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이 뒷받침되는 사랑이 있을 때 우리의 말이 통합니다. 사랑이 없는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행동을 보면 압니다. 예수님을 믿으라고 한 사람의 삶을 보니까 신기하게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보니까 진짜인 것을 아는 겁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이신 것처럼, 주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가 된 것을 볼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제자인 것을 세상이 알게 되는 길은, 우리가 하나 되어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나가는 말]
우리가 교회에서 지금까지 해보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모르는 분들에게 주님의 이 사랑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목장들을 방문할 때 보면, 정말 이런 사랑을 나누는 것을 봅니다. 정말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걱정해주고, 간절히 기도해줍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나눔으로 목장을 또 교회를 따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정말 영적 가족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마음 놓고 웃을 수 있고, 재미있는 만남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춘다면 교회는, 목장은 실패하고 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겹겹이 둘러싸인 벽을 제거해야 합니다. 다치지 않게 안전한 이야기만 골라서 하고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모임을 가진다면, 거기에서 참된 사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냥 우리의 목장은 또 교회는 일종의 사교모임 수준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쌓아 놓은 벽을 허물어야 하고 오래 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되지 않는 한 우리가 아무리 모임에 매주 나가고 아무리 예배를 매번 드려도 고독하게 됩니다. 배우자도 모르는 고독이 계속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한 일탈행위를 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남이 하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벽을 허물면 재미있는 일들이 생기는데, 다른 사람들도 자기 벽을 허물게 됩니다. 벽을 허무는 구체적인 방법은 나의 수치심과 두려움을 노출하는 것입니다. 만일 한 사람이 어렵게 자기 마음을 열어 보였는데,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거나 비판하거나 찌르면 안 됩니다. 그러면 마음 문이 닫힙니다. 어렵게 마음을 열었는데 그렇게 되면 다시 마음을 닫고 외로운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또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조언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을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로 여긴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의 간증을 나누는 겁니다. 자신이 겪었던 같은 경험을 말해줘야 합니다. 경험이 없으면 질문을 합니다.
우리는 결코 외롭고 고독하게 두려워하며 살도록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외롭고 힘들게 이 땅에서 산다면 그 이유는 죄로 인한 수치심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지 못하고 내가 하나님으로 행세해보려고 하기 때문에 거기서 수치심과 두려움이 나오는 겁니다.
외로움을 떨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벽을 허물고, 또 다른 사람이 허물 때 그것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아무 것에나 자기를 확 열어 보이고 노출시키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담을 허물어야 한다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정말 하나가 되면서 신을 내어주며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 하나의 팀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 때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너무 기뻐하시는 그 기쁨을 누리면서 주님의 제자로 자라가게 됩니다. 세상의 학문도 성경 말씀이 맞는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다른 사람을 도우며 사는 사람이 몸도 건강하다는 연구 결과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스트레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연결이 되고 서로 교제하며 사는 사람이 스트레스도 훨씬 적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선물, 단 하나의 축복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희생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야단치고 정죄하고 비판하고 잔소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각자는 바로 그 사랑을 흘려보내주는 통로이며,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 때 우리 자신도 건강해지고 기쁨이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며 나아갈 때,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