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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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1일 주일예배
✦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1 ✦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
(요한일서 4장 16~21절)
[들어가는 말]
믿는 사람들은 남녀가 결혼할 때 보통 교회에서 결혼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 가족들 중 안 믿는 분들이 많거나 다른 사정이 있을 경우 교회당이 아니라 예식장을 빌려서 결혼식을 하기도 합니다. 아마 그런 경우였던 것 같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커플이 예식장에서 결혼을 하는데, 그래도 목사님을 초청해서 주례로 모시고 결혼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신랑의 친한 친구가 사회를 맡게 되었고 아주 물 흐르듯이 진행을 아주 잘했습니다. 예식장도 멋지게 세팅이 되어 있고 장식도 멋지고 꽃도 멋지고 신랑신부도 멋졌습니다. 다 기쁘고 즐거운 가운데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는 사회자가 많은 역할을 했는데 말씀을 전할 시간에 말했습니다. “오늘 아버님 같으신 목사님께서 사랑하는 신랑신부에게, 특히 아름다운 신부에게 너무나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시겠습니다.” 그날 본문이 바로 오늘 본문과 같은 요한일서 4:16-18이었습니다.
다들 기대하면서 무슨 말씀인지 귀를 기울였습니다. 사회자가 교회를 잘 안 다니는 사람이었는지 바빴는지 당황했는지, ‘요한’자만 보고 요한복음을 우렁차게 읽었습니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한복음 4:16-18)
그 자리 모든 사람들이 다 경악하며 얼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차이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가장 큰 계명이 뭐냐는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마 22:37-39, 새번역)
다시 말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최우선순위에 두셨습니다. 십계명도 똑같습니다. 십계명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1-4계명)과 이웃 사랑(5-10계명)입니다.
우리 삶에 정말 중요한 일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가치를 두기보다는 세상에서의 성공과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에 시간과 돈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이나 돈이나 명예나 업적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것을 놓치면서 아무리 다른 좋은 일을 한들, 결국 우리 인생은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1월 1일이 주일이라 힘들고 바쁩니다. 어젯밤 새해맞이연합예배를 드리던 그 시간은 토요일 밤이라 주일을 준비하기에 힘들었지만, 바쁘고 힘든 그 시간 많은 분들이 오셔서 2016년을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마치고 또 2017년을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시작하는, 아름다운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에 가치를 두고 오셨습니다. 심지어 Football을 좋아하는 분들은 Ohio State 팀의 게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도 오셔서 예배를 드리며 참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또 오늘 아침도 1월 1일 주일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쉽지 않은데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에 가치를 두고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가 됩니다. 그것도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서로를 사랑한다는 표시가 됩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 (16-19절)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그분의 임재를 체험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간단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분명하게 말씀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인데, 죽어서만 가는 천국이나 멀리 있는 곳만 말하는 게 아니고, 지금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장소와 시간이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내가 받고 살고 있다면 나의 삶이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을 따라 살고 있다면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따라 살고 있다면 우리 교회가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삶은 얼마든지 이 땅에서도 천국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크리스천들을 포함해서) 천국의 삶이 아니라 지옥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는 다니지만, 항상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는 않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그저 죽어서 천국에 가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 땅에 살면서도 매순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살면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하면서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면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고, 불안과 염려가 평안으로 바뀝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대화를 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과 예배가 믿는 사람들의 우선순위 아니겠습니까?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기도와 말씀과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17세기 프랑스 수도사였던 로렌스 형제가 수도원 부엌에서 일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는데 그러한 내용이 <하나님 임재 연습>라는 책으로도 나왔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임재를 실제로 체험하는 일 없이 신자가 만족한 생활을 한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6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19절)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돈이나 어떤 일이나 가족이나 성공이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시고 삶을 주관하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서 내 주인이 되신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주일설교 중에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다음 주일 설교를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주 설교 제목은 ‘거짓말’입니다. 여러분께 숙제를 하나 내 드리겠는데, 다음 주 예배 때까지 꼭 예레미야 53장을 읽어 오십시오. 거짓말에 대해 우리가 예습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꼭 읽어오시기 바랍니다.”
일주일이 흘러서 주일예배를 드리는데 설교 시간에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숙제를 해 왔습니까?” 많은 성도들의 고개가 일제히 땅바닥을 향하며 목사님과 눈을 안 마주치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마 숙제를 해 온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성도들이 머뭇거리자 목사님은 또 성도들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예레미야 53장을 읽은 분은 손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자 그 많은 성도 가운데 겨우 세 사람만 손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쓴 웃음을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52장까지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손을 든 사람들은 당연히 거짓말을 한 사람들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머지 사람들은 뭔가? 예레미야가 몇 장까지 있는지 모를 수도 있고, 읽지 않은 겁니다.
이것은 물론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과 전혀 대화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는 음성을 듣고 싶고 대화하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랑하지 않으면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는 늘 대화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하나님과 대화가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현재 내 삶을 다스리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의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 초점을 두고 무엇에 시간과 돈을 사용하고 있는가? 어떤 일이 중요한 것인가? 성공이 중요한 것인가? 가족과 자녀가 중요한 것인가? 물론 다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나의 최우선순위가 정말 무엇인가? 나는 언제 움직이는가? 내가 시간을 사용하고 돈을 사용하는 게 무엇 때문인가? 그것을 살펴보면 내 인생을 지금 움직이는 주인이 정말로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선순위를 바로 세워야 우리가 참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해주신 것,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안 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 정말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겁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가 따라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을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왜 성경에 그렇게 하라는 게 많고 하지 말라는 게 많은가? 그렇게 살면 우리가 정말 풍성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을 자꾸 하라고 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데도 자꾸 하지 말라고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우리가 가장 최상의 상태가 될 수 있는가를 잘 아십니다. 그래서 이것을 하라, 또 이것을 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해주셨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인생이 제대로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시는 시간을 항상 가지며 살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 읽고 예배를 드리는가? 크리스천이니까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실까, 그분의 마음을 배우고 알아가는 시간입니다. 아무리 목사나 선교사나 직분자라 할지라도, 이런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사람, 이런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는 사람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마치 모양은 있지만 속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빠도 매일 말씀 묵상과 기도를 하려고 애쓰는 이유는, 안 하면 내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안 하면 사역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통해 얼마나 큰 은혜를 경험하는지 모릅니다. 특히 지난주 시편 큐티를 죽 하면서, 정말 마음에 너무 와닿는 겁니다. 하나님이 너무 큰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매일매일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의 생각이 내 안에 가득하게 되고 천국의 평안과 기쁨이 내 마음을 지배하게 되는 비결이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되면 내 안에 있던 세상적인 생각이 점점 사라집니다.
내게 어떤 안 좋은 습관이 있을 때 ‘내가 이걸 안 해야지, 안 해야지, 안 해야지’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이 땅에 사는 한 죄성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나쁜 습관을 고칠 수 있습니까? 자꾸 없애겠다고 할 게 아니고, 좋은 것으로 자신을 채우면 됩니다. 그러니까 없애는 데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데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겁니다.
더 기도하고, 더 말씀 읽고, 더 성경공부 참여하고, 목장에서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또 이렇게 예배드리고, 그러다 보면 그런 나쁜 것이 슥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리를 잡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진정한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약해지면 또 그런 게 슥 들어오는 겁니다. 하지만 또 나를 좋은 것으로 가득 채우면 또 그런 것이 슥 물러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주님 앞에 선다는 것이 어떤 억지로 하는 것이나 의무나 옭아매는 게 아니라, 정말 즐거움이 되며 기쁨이 됩니다. 정말 자유를 주는 것이 됩니다.
2. 이웃을 사랑하는 삶 (20-21절)
예수님이 가장 큰 계명을 말씀하실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는 것이 첫째라고 하셨습니다. 동시에 둘째 계명도 말씀하시면서 “둘째도 이것과 같은데” 즉 둘째도 첫째와 똑같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순서는 있습니다(첫째, 둘째).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져야 그 다음에 이웃과의 관계가 세워집니다. 그런데 둘째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그 사랑을 입은 자는 또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20-21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 특히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데 어떻게 사랑이 안 나오겠습니까? 하나님을 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그분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사랑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표현할 때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주님’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단순히 사랑이 많으신 분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가 감히 측량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그런데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됩니다. 만일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른다면, 정말 크리스천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도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때로는 우리가 넘어질 수 있고 불편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의지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감정적으로 좋아하지는 못할지라도, 의지적으로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의지로 사랑을 하다 보면 감정도 따라옵니다.
사랑은 소중한 것이며, 사랑이 없는 삶은 한마디로 가치가 없는 삶입니다. 내 삶에 사랑이 없다면 이건 정말 가치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행복한가 아닌가는 사랑을 하는가 아닌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신 하나님을 모신 사람으로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정말 행복합니다. 여기도 그것을 경험을 한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실천했을 때 정말 기쁜 삶이 됩니다.
인생에서 가장 이상한 일들 중의 하나는,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만 살면 살수록 오히려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고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집중할수록 이상하게 일이 더 안 됩니다. 그런데 이웃에게 눈을 돌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나의 시간을 사용하고 돈을 사용하고 다른 사람을 섬길 때, 오히려 자신의 가치를 찾게 되고 인생의 행복을 맛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학문도 이미 증명을 한 사실입니다. 행복심리학에 다 나와 있습니다. 남에게 주면 줄수록 내 것이 더 커집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 진리입니다. 다른 사람을 성공하게 만드는 것이 자기가 성공하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들자’라고 할 때 ‘그럼 나는 뭔가?’라고 할 게 아닙니다. 다른 안 믿는 분이 어떻게든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애쓰며 기도하고 섬기다가 드디어 믿었을 때 얼마나 기쁩니까? 또 믿은 사람이 주님의 제자로 자라가도록 옆에서 함께 섬기고 사랑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은 그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닮아가는 겁니다. 신앙이 자라가는 겁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35)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왜 그토록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고, 하나가 되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것도 그냥 세상의 사랑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시며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희생의 사랑입니다. 그냥 말로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가 시간이 있으면 사랑하고 시간이 없으면 안 하고 적당히 내 것을 챙기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 생명까지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희생의 사랑입니다. 바로 그런 희생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적당히 눈치 보고, 될 때 하고 안 될 때 안 하는 사랑이 아니라, 안 될 때에도 자신을 희생해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이야기하셨겠습니까? 그렇게 나를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럼 내가 망하라고 그렇게 사랑하라고 하셨는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그런 사랑을 할 때 거기에 참된 만족과 기쁨과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이 진짜 사랑이며,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알아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적당히 하는지 진짜로 하는지 다 아십니다. 그런데 그런 희생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너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정말 좋습니다. 하나가 되면 하나 됨을 이룬 사람들에게 진정한 유익이 있는 겁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죽으면서 여러 가지를 남기려고 애를 씁니다. 학교 같은 데 돈을 기부해서 자기 이름으로 된 건물을 세우기도 합니다. 병원이나 도서관, 심지어 공항도 위대한 사람의 이름을 딴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학교 건물이나 병원 건물을 세우지 않으시고, 사람을 키우셨습니다. 사람에게 투자한 결과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었고 우리를 통해서도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21세기는 바야흐로 과학기술 문명의 시대입니다. 놀라운 기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좋은 걸 사도 몇 달 후면 더 좋은 게 나옵니다. 그런데 동시에 가정이 무너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개인주의화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환경은 점점 나아지고 있고 과학기술이 발전하는지 몰라도,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 있더라도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외로움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SNS가 발달되었지만, 사실 그것 때문에 더 외로워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직접 만나서 교제해야 합니다.
에덴동산은 정말 완벽한 곳이었고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아마 인류역사상 가장 환경이 좋았던 곳이 에덴동산이었을 것입니다. 가난, 아픔, 고통, 싸움, 갈등, 눈물, 수치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천국에 가면 바로 천국이 그런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남자 혼자 있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Not good이나 b Bad이 아니라 ‘미완성(incomplete)’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와를 주셔서 온전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애초에 사람을 공동체로 살게 해주셨습니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의학의 통계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혼자 외롭게 사는 사람이 수명도 더 짧다고 나와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행복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이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행복합니다. 사실 아주 많을 필요도 없습니다. 몇 명만 사랑을 나눌 사람이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어도, 진심으로 내가 사랑하거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외롭고 불행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성공하고도 비뚤어진 관계로 나아가는 사람들, 일탈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뉴스에서 많이 봅니다. ‘왜 저 정도 된 사람이 왜 저럴까?’라고 이해를 잘 못하지만. 그 내면에 있는 외로움을 못 견디고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사람은 사랑을 하거나 사랑을 받을 때에만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이기적인 사랑이나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 자기를 희생하면서 섬기는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는 정말 교회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백성인 교회 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이후 시작된 초대교회는 아름다운 공동체였습니다. 물론 문제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것을 다 내어놓아도 아깝지 않은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바로 그러한 공동체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발전하고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더 고립되어 가고 더 외로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신뢰할 수 있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은 정말 가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는데, 특별히 제자들의 하나 됨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부르는데 거기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 17:21-23, 새번역)
그토록 제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교회가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래 전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목사님이 어느 날 엄청난 충격을 받고 목회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교회의 한 청년을 길에서 만나 인사를 했습니다. “형제님, 잘 지내지요?” “예, 목사님, 잘 지냅니다.” 그 날이 토요일 오후였는데 그날 밤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형제가 그날 자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날인 금요일 밤에 결혼 문제를 놓고 아주 심하게 부모님과 다투었고, 토요일에 목사님을 만났을 때 그 형제는 엄청난 고민과 갈등과 괴로움을 안고 있었지만, 그냥 형식적인 인사만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그때 그런 목회에 회의를 느끼고, 진정한 나눔을 하는 방향으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면 좋겠습니다. 어디서 지나가다 만나면 “잘 지내시죠?” “예.” 그러면 꼭 이것을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진짜요?” 이걸 물어보면 “사실은...”이라고 나올 수 있습니다. 위의 그 목사님이 청년을 만났을 때 잘 지낸다고 했지만 “진짭니까?”라고 했다면, 혹시라도 그 형제가 “목사님, 사실은 제가 고민이 있습니다.”라고 나올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 목사님이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얼마나 형식적인 인사와 이야기만 나눕니까? 예배 끝나고 나서 악수하며 나갈 때 그 짧은 시간에 몇 초 안 되는데 무슨 깊은 대화를 할 수 있겠습니까? 친교시간에 교제할 때도 무슨 깊은 인생의 고민을 나눌 수 있겠습니ᄁᆞ? 그러한 캐주얼한 만남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진정한 나눔과 만남을 통해 사랑을 나누고 상처가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3.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래 전에 ‘여호와의 증인’ 이단에 빠졌던 사람들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도 이전엔 장로교회 교인이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답답해서 왜 정통교단 교회에 다니다가 이단 종파라고 하는 그리로 갔느냐고 물었더니 그 대답이 충격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게 이 정도로 사랑을 베풀어준 교회가 없었다.”
사람들은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는데, 많은 경우 교회들이 사랑의 공동체의 모습을 이단에게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이단에 혹하는 사람들이 가르침에만 넘어가는 게 아니라, 기존 교회에서 발견하지 못한 사랑을 발견하기 때문에 넘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빼앗긴 사랑의 공동체를 교회 안에서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말로만 지체가 아니라, 실제로 서로에게 팔다리가 되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사실은 정상이고 그런 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런 경우가 참 드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해보자고 노력하는 것이 목장에서 모여서 하는 것입니다. 삶을 나누고, 감사의 제목을 나누고, 고민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격려해주고, 일주일 살다 와서 어떻게 되었는가 체크하여 잘되었으면 기뻐하고 잘 안 되었으면 또 격려하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공동체,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몇 가지가 필요합니다.
먼저는 나 자신의 가면을 벗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가면을 쓴 채로 만나면 만남의 깊이가 없고 서로에게 아무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가면을 벗을 때 자유가 있고, 아주 깊은 것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목장 모임 안에서 가면을 벗고 자신의 모든 허물과 실수를 나누고 기도를 부탁할 때, 우리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교회들을 보면, 적당히 자신을 가린 채 형식적인 만남만을 가집니다. 그렇게 하면 파워가 없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말씀대로 서로의 죄를 고백하고 사랑을 나눌 때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무조건 나 자신의 연약함을 100% 다 열어 보이라는 것이 아니라, 거짓 없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서로 끌어안고 기도하며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약 5:16)
여기서 말하는 “병”은 실제 몸이 아픈 병도 말하지만 마음의 병도 말합니다. 마음에 병이 생기면 실제로 몸에도 병이 생깁니다. 마음속에 고백되지 않은 죄가 있고 컬컬함이 있고 해결되지 않은 게 있기 때문에 병이 납니다. 고백을 할 때 치유가 됩니다.
<경건의 삶>에서도 배우지만, 고백하는 문화가 잘 안 되어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 뭔지 아십니까? 고발하는 문화가 생깁니다. 고백을 안 하니까 자꾸 남을 고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백하기에 힘을 써야겠습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며 기도할 때 놀라운 치유가 일어나고 자유가 있습니다.
거짓에는 마귀가 역사합니다. 자꾸 숨기면 마귀가 역사하는 놀이터가 됩니다. 그러나 정직한 곳에는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마귀가 틈을 못 탑니다. 사탄은 우리가 자신의 허물을 어두움 속에 계속 숨겨두길 원합니다. 그러나 빛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며 빛으로 이 땅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두움을 빛 가운데로 드러낼 때 어두움은 사라지고 빛이 비춥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마음을 나눌 때 우리는 서로의 비밀을 지켜줄 의무가 있습니다. 목장에서 들은 것에 대해서는 비밀을 철저히 지켜줘야 합니다. 좋은 의도로 했더라도 기도제목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잘못될 수 있습니다. 본인이 기도해달라고 허락한 것이 아니라면, 서로 지켜주는 겁니다. 이런 신뢰가 있을 때 목장식구들이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허물을 내어놓습니다.
재미있는 현상이 있는데, 이상하게 교회를 오래 다닌 분들일수록 자신의 마음을 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저희 모세 목장도 그렇고, 교회를 전혀 안 다녔거나 주님을 모르는 분들을 보면, 오히려 솔직하고 순수하게 나오는 경우를 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를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마음이 닫히는 것이 많은 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게 왜 그런가 하면, 경험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자기가 한 것이 교회에서 소문이 된 경우가 많다 보니까 나누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오래 다닐수록 교회에서 살아남는 비결만 늘어나게 됩니다. 절대 자신의 약점이나 실수를 말하지 않고 그냥 적당히 미소만 지으면서 다른 교인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신앙생활을 하는 기술만 늘어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나의 실수나 약점을 철저히 가려주고 간절히 기도해주는 지체들이 있다면, 아무리 굳게 닫힌 마음이라도 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가족입니다.
또한 목장에서 우리가 서로를 세워주어야 하겠습니다. 사탄이 역사하는 공동체는 서로 고발하고 파괴하는 공동체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는 공동체는 서로 고백하고 나누며 서로를 세워줍니다. 사탄의 특징을 한 마디로 하면 관계를 파괴하는 자입니다. 사탄은 관계를 깨는 자입니다.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관계를 세우십니다. 예수님은 늘 사람들을 세우셨습니다.
내가 하는 말로 공동체를 세워주고 있는가, 아니면 자꾸 무너뜨리고 있는가? 이것을 꼭 체크해야겠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도구로 이용되는 것은 아닌가? 사탄의 도구가 아니라, 상대방을 격려하고 사랑하고 세워주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아야겠습니다.
[나가는 말]
사람은 혼자서 신앙을 잘 지킬 수 없습니다. <새로운 삶> 공부에도 나오는 중요한 개념이지만, 전쟁은 군인 혼자서 하지 못합니다. 전쟁은 군대가 같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 가운데 있습니다. 나 혼자 개인이 싸우는 게 아닙니다. 군대가 같이 싸우는 겁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같이 싸우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의 신앙도 잘 지켜질 수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왜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가? 나 혼자 지키려고 나 혼자 애쓰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결단하고 결심해도, 서로 함께 지켜주고 붙들어주지 않으면 그 결심이 사실 오래 가지 못합니다.
1월 1일 오늘, 이 2017년 새해에 뭔가 결심을 하셨을 줄로 압니다. 그런데 혼자 하려고 애쓰다 보면 그것이 몇 주를 가지 못합니다.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해주고 기도해줄 수 있는 그러한 곳, 그러한 형제자매들, 우리 교회가 바로 그런 공동체를 이루며 나아갈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제자로 더 세워지고 우리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이 더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독일 나치 정권 아래 39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님이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였습니다. 그분이 공동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자체보다 자신의 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그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람이다. 만일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경험이나 예산의 부족, 약점, 작은 믿음 그리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매일 감사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하찮고 사소하다고 불평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의 성장을 막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좋은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주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