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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18일 주일예배
✦ 성탄절 메시지 ✦
“임마누엘의 징조”
(이사야 7장 1~14절)
[들어가는 말]
오늘 살펴볼 말씀은 이사야를 통해 주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 성탄의 계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무려 700여 년 전에 메시아에 대해 정확히 주신 이 말씀을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저는 목회자가 된 후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제가 교회 사역을 주로 하는 것도 있고, 밖에서 안 믿는 분과 약속해서 만날 일도 없는데다가, 교회에 안 다니고 예수님을 안 믿는 분들이 가장 가기 부담스러운 곳이 교회이고 가장 만나기 싫은 사람이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을 만나기가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새가족반>을 하다 보면,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그 중에 많은 분들이 사도신경의 내용이나 성경에 나오는 기적 사건들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동정녀 탄생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정말 믿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성적으로 또 과학적으로 볼 때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당장 막막해 보이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면 해결된다고 성경에서 분명히 약속하며 말씀을 주시는데, 현실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비현실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신앙이라는 것이 그토록 비현실적이고 무모하고 비과학적이고 맹목적인 것입니까? 그럼 그러한 상황에서 어느 편을 택하시겠습니까? 안 믿어져도 신앙을 선택하겠는가, 아니면 현실을 선택하겠는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내가 보기에 이것이 현실적인 판단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입니까?
이처럼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현실적 판단을 의지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 왕 아하스입니다. 열왕기하 16장과 역대하 28장에 보면 오늘 이사야서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 나옵니다.
1. 위기 상황을 맞이한 아하스 (1-9절)
BC 8세기 중반 당시 앗수르(역사의 앗시리아)는 고대 근동에서 가장 강하고 큰 제국이었고, 그때 앗수르 왕의 이름은 디글랏빌레셀 3세였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팽창정책을 써서, 목재와 광물질이 풍부한 서쪽의 페니키아, 그러니까 두로와 시돈 지역(지금의 레바논)으로 진출하려고 시도합니다.
역사에 보면 페니키아 사람들은 해상무역에 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곳을 장악하게 되면 지중해의 해상무역도 손에 들어오게 되고, 뿐만 아니라 강대국인 남쪽의 이집트까지 내려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초강대국인 이집트가 있었는데 이집트를 능가하는 새로운 초강대국이 바로 앗수르였습니다.
앗수르의 서쪽 진출을 막기 위해 아람(시리아)과 그 밑에 있는 북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습니다. 당시에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이미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남 유다도 자신들의 반 앗수르 동맹에 동참하길 원했는데, 유다는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친 앗수르 정책을 폅니다.
남 유다는 아하스 왕의 아버지인 요담 왕 때 독자노선을 취했기 때문에, 아람과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대항하려면 먼저 그 밑에 있는 친 앗수르 세력 유다부터 꺾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람과 이스라엘이 동맹해서 유다를 침공하고, 그때 요담이 죽게 되어 그의 아들인 아하스가 그의 뒤를 이어서 남 유다의 왕이 됩니다.
아하스가 왕이 된 후에도 아람과 북 이스라엘 동맹군이 두 번에 걸쳐서 유다에 쳐들어옵니다. 1차 침공 때 아람 군대는 유다에서 많은 포로를 다메섹으로 잡아 갑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열왕기하 16장이나 역대하 28장에 죽 나와 있습니다.
그 1차 침공 때 이스라엘 군대는 하루에만 유다의 군인들, 그것도 “용사”라고 표현된 사람들 12만 명을 죽일 정도로 초토화시킵니다. 그리고 무려 20만 명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그때 오뎃이라고 하는 선지자와 다른 네 명의 선지자들이 나와서 그 5명의 선지자들이 포로들을 유다로 돌려보내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진노를 쏟으실 것이라고 강력히 말하여 돌려보내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1차 침공으로 인해 이미 기진맥진해 있는 남 유다를 그 후에 또 다시 침공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 2차 침공의 이야기입니다.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1-2절)
1차 침공 때 너무 심하게 당했기 때문에(하루에 12만 명의 용사가 죽고 20만 명이 포로로 끌려갔기 때문에), 아하스 왕과 온 백성은 공포에 사로잡힙니다(2). 그들의 마음이 마치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하는 수풀처럼 흔들렸다고 할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하스는 성 밖에 있는 샘의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에 있었는데,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그곳으로 가서 그를 만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3절)
여기 보면 아하스가 “‘세탁자의 밭’으로 가는 길, 윗못 물 빼는 길 끝”에 서 있었습니다. 그때 수로가 있는 곳의 끝부분에서 세탁업자들이 빨래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특히 전쟁이 일어나면 물이 생명입니다. 그래서 아하스 왕은 물이 어떻게 되나 감시하고 감독하기 위해서 세탁업자들이 살고 있는 끝부분에 나와 지켜보고 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라의 위기 상황에서 그곳으로 와 굉장히 불안하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벌벌 떨고 있는 아하스에게 이사야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4절)
지금 현실은 어떻습니까? 벌써 두 번이나 침략을 당해서 나라가 초토화된 상태입니다. 또한 아람과 북 이스라엘의 연합군은 너무나 강하고 무서운 군대입니다. 12만 명의 용사들이 하루에 죽임을 당하고 20만 명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들은 것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유다를 삼키려고 두 번째 쳐들어오면서 먼저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해 근처에 와 있는 상황입니다. 대부분 전쟁을 벌이면 고대에는 수도부터 먼저 함락을 시킵니다. 그러면 전쟁이 그냥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은 그토록 강하고 무서운 아람과 이스라엘의 연합군을 가리켜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아주 강한 것 같고 살기등등한 것 같아도 별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그저 ‘타다가 만 두 부지깽이에서 나오는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하스에게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라고 하라고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에 비추어볼 때 전혀 말도 되지 않는 무모한 말씀입니다. 받아들일 수가 없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불같이 밀고 들어오는 그 강한 자들을 가리켜 꺼져서 연기가 나는 부지깽이라고 하십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당시 상황을 정확히 지적하시며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상황을 모르시는 게 아니라 너무나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아람과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으로 삼자 하였으나,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5-7절)
4절에서는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르신은 아람의 왕이니까 아람을 두 번 이야기하고, 르말리야의 아들은 이스라엘의 왕 베가입니다. 그러니까 아람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는 아람은 한 번 나오고,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표현인데 에브라임 지파가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강력한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르말리야의 아들, 즉 이스라엘 왕을 또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두 번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이 꾀가 이스라엘 왕에게서 주로 나왔다는 뜻입니다.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의 계획은 아하스를 폐위시키고 자기들의 말을 잘 듣는 다른 사람(다브엘의 아들)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려고 예루살렘을 향해 쳐들어오지만(6), 그 계획은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임을 말씀하십니다(7). 지금과 똑같습니다. 허수아비 세워놓고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 요즘에도 있지만, 옛날부토 다 있던 겁니다. 그런데 그 계획은 다 실패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 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8절)
65년 안에 북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아람이 앞에 나오는 것을 보면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상황에서 전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인데 그렇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경고도 있습니다.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9절)
다메섹은 아람의 수도이고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그리고 그 수도 중에서도 왕들이 중심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북이스라엘이 65년 안에 망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새번역으로 보면 “너희가 믿음 안에 굳게 서지 못한다면, 너희는 절대로 굳게 서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지금 너무나 강하고 무서운 세력이 자기들을 삼키려고 코앞에까지 와 있는 상황입니다. 공포에 사로잡혀서 지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전혀 두려워하지 말고 그 대신 믿음에 굳게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현실은 아주 다급한 상황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이사야 본문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성탄절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어린 아기로 이 땅에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처녀가 아기를 낳는데 그것도 구원자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가 커서 구원자가 된다는 것인데, 아주 비현실적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오늘의 메시지입니다.
아하스는 이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상황에 닥치면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2. 믿음을 버리고 현실을 택하는 아하스 (10-14절)
열왕기하 16장이나 역대하 28장을 보면, 아하스는 엄청나게 악한 왕입니다. 최고로 악한 왕입니다. 손자 므낫세와 더불어 남 유다의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 바알 신상을 만들고 우상 숭배를 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을 불에 태워서 제물을 바치는 이방의 몰렉 신앙까지 수입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아들을 불에 태워 죽이면서 제물로 바칩니까? 너무 끔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아하스의 아버지는 요담이고 요담은 괜찮은 왕이었습니다. 요담의 아버지는 웃시야인데, 나중에는 자기가 제사장 노릇을 하려고 하다가 나병이 걸려 폐위되었지만, 원그 전에는 선한 일을 하던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왕인 할아버지와 아버지 밑에서 최고로 악한 아들이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영향은 받지만, 결국은 자기 스스로의 결정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그렇게 악한 아하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말씀을 주십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11절)
아하스가 잘 믿지를 못하니까,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기적이라도 보여줄 테니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아주 최소한의 믿음만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큰 자비와 은혜입니까? 그렇게 악한 사람인데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말씀에 대해 아하스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2절)
이 구절만 따로 보면 굉장히 경건한 신앙인의 말처럼 들립니다. 신명기 6:16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까지 인용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하스의 이 말은 믿음의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 그의 불신앙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입니다. 지금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살펴보면 이것이 불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고 해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보다는, 당장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아람과 이스라엘을 이길 수 있는 세력, 즉 강력한 나라 앗수르에게 기댈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 다급한 상황 속에서 아하스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징조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어떻게 하면 앗수르 왕에게 잘 보여서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을 물리쳐주도록 할까에 정신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 있으니까 이 엄청난 약속의 말씀을 들었어도 귀에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거룩한 척하면서 “저는 징조를 구하지 않고, 주님을 시험하지도 않겠습니다.”라고 둘러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최악입니다.
이 위기의 때 아하스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행하기보다, 자신의 현실적인 판단을 따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악한데도 불구하고 기회를 주시고, 심지어 이사야라고 하는 위대한 선지자를 보내시면서까지 기회의 말씀을 주시는데도, 그는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붙드는 게 아니라 자신의 현실적 판단을 따릅니다. 엄청난 죄악을 범한 아하스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떤 징조이든, 뭐든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 악한 아하스라도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악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초청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그것을 거부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안 하겠다고 합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감동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괴로우시게 만드는 일이라고 이사야가 선포합니다.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13절)
여기에 보면 이사야는 아하스를 가리키면서 “다윗의 집이여”(13)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아하스는 다윗의 후손입니다. 남 유다 왕들은 모두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전혀 다윗의 신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말입니다. 그러면서 주신 말씀이 그 유명한 14절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4절)
여기에서 “너희”라는 말은 다윗의 집을 말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700년 후에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다윗은 물론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큰 죄도 범했습니다. 간음죄를 짓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살인죄까지 저질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본적으로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죄를 짓고 그것을 지적받았을 때 바로 그것을 깨닫고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늘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자 애썼습니다.
아하스가 핏줄로는 분명히 그러한 믿음의 사람 다윗의 후손이지만, 다윗의 믿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의 믿음을 이어가는 다른 자들에게 징조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는 징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정확합니다. 아하스 왕이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3)에 있다는 것을 이사야에게 정확히 알려주셨습니다. 또 이사야에게 자기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3절에서 이사야의 아들이 스알야숩이라고 나오는데, ‘스알야숩’이라는 이름은 ‘남는 자가 돌아오리라’라는 뜻입니다. 이 ‘남은 자(remnant)’라는 것은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신학적 개념입니다.
창세기 6장의 홍수에서 남은 자가 누구입니까? 노아와 그 가족들입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에서 남은 자가 누구입니까?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연결되는 이야기를 보면 아브라함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살던 고향이 갈대아 우르인데, 바로 거기가 바벨탑이 있던 곳입니다. 바벨탑 사건이 일어나고 아브라함이 부름을 곧 받았습니다.
이집트에서 남자 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할 때 남은 자는 모세입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싸워 이긴 엘리야가 남은 자입니다. 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 다니엘이나 에스겔, 페르시아의 에스더 왕비와 유다 백성들이 다 남은 자입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스룹바벨이 남은 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대표적인 남은 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바로 남은 자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주님을 따르는 자가 남은 자입니다.
이사야가 여기서 아들을 데리고 간 것은 심심해서 손잡고 물가에서 산책이나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징조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스알야숩을 데리고 가라 하신 것입니다. ‘스알야숩’ 즉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남은 자가 분명히 있다. 지금 죄악이 판을 치고, 최고 위치에 있는 아하스가 저렇게 악한 왕이고, 다 안 되는 것 같고, 세상의 가치관이 꽉 잡고 있는 것 같고, 하나님의 뜻은 전혀 이뤄지지 않는 것 같아도, 남은 자는 돌아올 것이다. 결국 여기에는 믿음으로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말씀을 미리 징조로 주신 것입니다.
그 징조로서 스알야숩까지 데리고 가게 하시고 정확한 지점을 가리키시면서, 역사가 어떻게 될 것이며 지금 쳐들어오는 세력이 사실상 어떤 세력인지 다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국가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아가는 믿음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을 선택하고 현실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따라갔습니다. 아하스는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현실과 타협하여 앗수르 왕에게 왕궁과 성전의 보물들을 다 갖다 바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불신앙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불신앙의 사람, 현실만 따라가는 사람은 기적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지혜다. 말씀대로 살면 손해 보고 망한다.’라고 생각하면서 주님의 말씀보다 자기 판단을 의지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가 내린 결정 때문에 나중에 더 어려움을 당합니다.
아하스가 그랬습니다. 앗수르 왕에게 잘보여서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이러한 결정 때문에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합니다. 그래서 다 흩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난 게 아닙니다. 돈까지 다 받았으면서도 앗수르가 남 유다까지 밀고 내려옵니다. 유다까지 자기들이 다 먹겠다는 겁니다.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하스의 아들은 그 훌륭한 히스기야입니다. 그런데 아하스의 이 잘못된 결정은 자기 아들 히스기야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게 만들었습니다.
“앗수르 왕이 라기스에서부터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되 대군을 거느리고 히스기야 왕에게로 가게 하매 그가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에 서매” (사 36:2)
아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으로 다스릴 때, 북이스라엘을 무너뜨린 앗수르 왕이 산헤립인데 그가 자기 장관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보냅니다. 그때 랍사게가 어디 서 있었습니까? 그 위치를 보십시오. 그는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에 서 있습니다. 거기가 어디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아하스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 하나님이 이사야를 보내셨던 그 자리, 아하스가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곳은 아하스가 믿음의 결단을 내렸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길보다 현실을 선택해서 앗수르의 도움을 요청하여 앗수르가 밀고 들어와 그 나라를 위협하는 위기의 자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앗수르가 와서 아람 왕을 죽이고 북 이스라엘도 쳐부수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바로 그 앗수르가 유다까지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으로 진격해왔습니다. 당장 현실의 문제가 해결된 것 같았지만, 결국 더 큰 문제를 끌고 들어온 것입니다.
아하스가 윗못 수도 끝에 서 있던 바로 그 자리는 이스라엘의 2천 년 역사의 운명을 사실은 결정하는 자리였습니다. 그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판단에 따라 현실을 따라가는 결정을 내리고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에, 결국 그 앗수르에게 북이스라엘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훗날 이 사건은 2천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을 잃고 방황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자기 나라(유다)까지도 심각한 위협에 처하도록 하고 자기 아들을 위험으로 몰아넣게 된 겁니다.
우리가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 자녀들과 나아가서 우리의 후손들이 어떻게 되느냐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내가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믿음의 길을 버리고 똑똑해 보이는 현실적 판단을 내리면서 나아가면, 당장은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 때문에 나중에 더 큰 어려움을 당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내 사랑하는 자녀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니고 매순간 믿음 위에 서서 믿음의 결정을 내리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이번 <경건의 삶> 공부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고 그것을 어떻게든 삶 속에서 실천해보자는 것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며 말씀 위에 서서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3. 현실과 믿음 사이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비록 현실이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가면 어떻게 됩니까?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분의 말씀이 비록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무모하고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말씀에 근거해서 믿음으로 굳게 서는 자에게는 놀라운 징조가 보이게 됩니다. 어떤 징조입니까?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 9:6-7)
바로 이러한 징조를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보여주십니다. 물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도 처음에는 의심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놀라운 징조를 천사로부터 들었습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눅 1:31-33)
이사야에서 주신 그 내용 그대로 천사가 마리아에게 가서 전했습니다. 그것을 들은 마리아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 1:34).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 때 천사가 뭐라고 합니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눅 1:35, 37)
마리아도 이 징조가 자기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처녀가 아기를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더라도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간음을 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현실적으로 안전한 길을 택해서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다른 여자를 알아보시죠”라고 하느냐?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눅 1:38)
이때 솔직히 마리아는 많이 봐줘야 나이가 16-17세 정도입니다. 어린 소녀입니다. 그런데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현실적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말합니다. 결국 마리아는 이 결단의 순간에 주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것이 비현실적인 것 같아 보일지라도 아주 위험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엄청난 고통과 심지어 죽음의 위험을 가져올 수 있을지라도, 마리아는 주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징조가 이뤄지는 것을 체험하고 메시야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처녀로 아기를 낳는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을 붙들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받는 복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눈으로 계산되어질 수 없는 고귀한 것입니다.
지금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점에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 믿음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현실적인 타협을 하며 갈 것인가? 큰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지만, 매일 일상생활에서 사실은 그런 순간들이 많습니다. 믿음으로 할 것인지, 대충 인간적인 결정을 할 것인가?
우리 믿는 자들은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웬만한 법은 다 지키며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에이, 이런 건 안 해도 돼.’라고 내가 그냥 현실적으로 판단하며 갈 건지, 아니면 정직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갈 건지, 매순간마다 결정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이 귀한 성탄의 계절에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